사랑으로 버무려져 가난한 이웃 밥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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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
"넌 왜 거기 그렇게 힘없이 엎드려 있니?"
전북 무안에서 온 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배추에게 물었다. 충북 보은에서 자란 배추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의 한 김치 제조공장에 올라왔다.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온 배추는 큰 통에 들어가 소금 세례를 받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따가웠다. 배춧잎 사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난 천혜의 자연을 뽐내는 무안에서 시원한 바람과 뜨거운 태양, 비를 맞으며 자랐어. 하지만 이렇게 온몸이 세로로 잘려나가는 '무채'가 되는 게 내 꿈은 아니었는데…."
낙심한 채 큰 통에 엎드린 무채 위로 송송 썰린 대파와 미나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파는 폭신폭신한 흙 속에 얼굴을 파묻고 40일 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했는데, 결국 주인 손에 뽑혀 배추와 함께 이곳에 왔다. 부산에서 온 미나리는 말이 없었다.
마늘과 생강도 들어왔다. 경북 안동에서 온 생강과 경남 창녕에서 온 마늘은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이 몸이 으깨져 있었다. 이어 소금과 멸치젓, 통깨, 새우젓이 뒤섞여 들어왔다. 성격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경북 청송의 고춧가루가 들어오자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복통을 호소했다. 무와 미나리 등 온갖 채소들은 범벅이 돼 서로 뒤엉켰다. 누가 매운맛을 내는 지 짠맛을 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됐다. 소금물에 잠수했던 배추는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렸고, 서서히 몸에서 짠맛을 냈다.
4일 새벽, 밤새 온갖 고초를 겪은 배추와 양념은 다시 트럭에 실렸다. 각 산지 특산물로 이름난 영양가 높은 채소들은 투명 비닐에 담겨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웅크려 있었다. 트럭 문이 열리자, 청명한 가을 하늘과 붉은 단풍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들이 내린 곳은 서울 서초구 한우리정보문화센터 마당. 마당 한쪽에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제8회 김장나눔 행사'라고 적힌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봉사자 360여 명이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짠맛이 밴 배추와 양념은 봉사자들 손으로 넘겨졌다.
"춥고 힘들지만,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열심히 비비고 싸맵시다!" 개그우먼 김미화(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홍보대사)씨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뭐, 열심히 비비고 싸맨다고?"
배추와 무가 놀라 서로 바라봤다. 봉사자들은 배춧잎 사이를 쫙 벌리고 양념을 한 움큼씩 채워넣기 시작했다.
배추가 무에게 말했다.
"난 강남에 있는 유명백화점 채소코너 진열대에서 조명을 받는 게 꿈이었어. 부잣집 가스레인지 위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고 싶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으로 가나봐. 소년소녀가장,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이 우리를 기다린다잖아."
무가 말을 받았다.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이 봉사자들은 다 어디서 온 거야? 다들 행복해보여. 다리와 허리가 아픈데도 우리를 이웃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면 힘이 솟는대. 저 빨간 망토를 입은 분은 조규만 주교님이시라는데, 쉬지도 않고 우리를 주무르시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서 고생을 할까. 저기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탤런트 최재원(요셉,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홍보대사)씨 보여? 이 추운 날 여섯 살짜리 딸을 데리고 김치를 담그러 왔어."
짭조름한 새우젓이 말했다.
"김치가 왜 아삭아삭하고 맛있는지 알아? 우리가 가진 고유의 맛을 다 섞어서 그런 거야. 우린 모두 각자의 맛을 내놔서 그래. 김치를 버무리는 봉사자들도 우리처럼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봉헌한 사람들이야. 요즘 양념값이 폭등해서 김장하기도 어렵다던데…. 이렇게 양념값이 비쌀 때 소외된 가정에 우리가 보내진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야. 김수환 추기경님의 나눔정신을 잇는 바보의 나눔 재단 후원으로 김치를 담그는 것도 아름답지 않니?"
"김장 김치를 받으시는 분들은 여러분의 손맛과 사랑의 마음, 하느님 은총까지 함께 받으시고 추운 겨울을 잘 나실 겁니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정성환 신부)
봉사자들은 3~4시간 동안 버무린 김치를 잘 포장해서 종이상자와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차량에 옮겨 실었다. 한 몸이 돼 서로를 포근히 감싸 안은 절임 배추와 양념은 김장김치가 되어 서울지역 홀몸 어르신과 결손가정 2000여 곳에 배달됐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배추가 김장김치가 되기까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제8회 김장나눔 행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회장 정성환 신부)는 4일 서울 서초구 한우리정보문화센터 마당에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재)바보의 나눔, 농협중앙회 후원으로 '제8회 김장나눔 행사'를 열고 25톤 분량 김치 7000여 포기를 담가 어려운 이웃에 전달했다. 봉사자 360여 명은 이른 새벽부터 김장 담그기에 동참했다. 서서울지역 교구장대리 조규만 주교도 앞치마를 두르고 봉사자들과 함께 김치를 담갔다. 가톨릭사회복지회 홍보대사인 최재원씨, 개그우먼 김미화씨를 비롯해 진익철 서초구청장과 고승덕 국회의원도 함께해 분위기를 돋웠다. 1회부터 꾸준히 행사에 참여한 서울 월곡동본당 신자들은 "지난해엔 이보다 더 추운 날씨에 김장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날씨는 아무 것도 아니다"며 웃음 지었다. 조 주교는 "우리 이웃이 더욱 힘을 내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배추 한 포기 한 포기에 정성을 담자"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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