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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런 기동타격대원으로
증 언 자 : 김태찬 (남)
생년월일 : 1961. 2. 18(당시 나이 19세)
직 업 : 석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7
내가 총을 잡기 전에는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정말 저놈들은 밥 먹고 할 짓이 없는 놈들이다. 집에서 아버지나 형들이 뼈빠지게 일해서 공부하라니까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거리만 하고 다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9일인가, 20일에 광주극장 앞 길 양쪽에 도열해 있던 계엄군이 빈 리어커를 이끌고 시내를 벗어나려는 할아버지를 두들겨패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보자 피가 끓기 시작했다.
선배 한 분의 조카가 대학생인데 공수부대의 칼에 당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선배가 비상을 걸어서 서방 삼거리에 모이게 하더니 빰을 한 대씩 때렸다. "너희들 도대체 뭘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도 건달이냐. 저기 봐라. 저놈들이 저렇게 다니는데 그냥 두느냐"면서 칼로 손을 찍어 자해행위를 했다. 그때 황창옥이라는 친구를 포함하여 다섯이 모여 있었는데 도저히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장 서방삼거리 부근에 있는 동강다실 아래 가게에 들어가 병을 들고나와 화염병을 만들어 "저놈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니까 시민들이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
당시 동강다방 앞에는 31사단 계엄군이 있었고, 그 건너에 우리 시민들이 있어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계속했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계속 싸우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싸워서는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운전을 할 줄 알았는데 지금 중흥교회 앞 정미소 자리에 (당시에는 건물이 없었다) 차가 한 대 있어서 주인에겐 미안했지만 그 차를 끌고 나왔다. 그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계엄군과 시민군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태에서 차를 몰고 사람을 태우고 계속 돌진해 가는데, 이상하게 계엄군이 거기에서 철수를 했다.
계속 차를 몰아 시청 쪽으로 나왔다. 차는 서서히 행진을 하고 그 뒤로 사람들이 따라오는 식이었다. 시청 앞에 앉아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애국가', '군가' 등을 부르면서 시청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바로 그때 총소리가 났다. 순복음교회 앞에서 계엄군이 진압하여 시위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광주역 쪽에서 다시 모여 계엄군과 계속 투석전을 벌였다. 그날은 그런 식으로 싸움이 끝났는데, 그 무렵엔 시민은 별로 없었다. 사람도 별로 없고 싸움도 끝나서 애들과 함께 선배집에서 자려고 두암동 쪽으로 가는데 헬기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돌아다녔다. 한 20여 명이 떼지어 가다가 모두 흩어졌다. 서방 삼거리 쪽으로 가면서 31사단 병력이 교도소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선배집에서 잠을 자고 나와 보니까 시내가 떠들썩했다.
전날 타고 다녔던 복사차가 그대로 있길래 그 차를 타고 다녔다. 그때부터는 웃옷을 다 벗고 시위를 하러 다녔다. 누군가 "우리 서부서로 가자"고 하여 서부서로 갔는데 텅텅 비어 있었다. 실탄 없는 총만 몇 자루 가져왔다. 그것을 들고 나오면서 유동 삼거리에서 태극기를 든 시민을 태우고 도청으로 갔다.
도청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그때는 계엄군은 보이지 않고 전경들만 지키고 있었다. 전경들이 참 불쌍해 보였다. 그애들은 데모를 해도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도청에서도 밀고 밀리는 상태였고 그곳에서 다시 차를 몰고 나와서 전대 후문 오치로 갔다. 전대 후문 바로 앞에서 시민들이 차를 타고 차체를 때리고 난리가 났다.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복사차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아세아자동차로 갔다. 가서 지프차를 한 대 가지고 나왔다. 그 군용 지프차로 돌아다니다가 오후에 공원으로 갔다. 그 전에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것을 보고 갔는데 공원에 가니까 총 쏘는 법도 가르쳐주고 실탄도 끼워주었다. 이 사람들이 소위 기동순찰대였는데, 이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조직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는 즉시 어디로 파견하는 식이었다. 나도 계속 차를 타고 사람들을 실어날랐는데 외곽지대를 돌면서 사람들을 태워다가 도청에 다 퍼놓고 하는 것을 반복했다.
21일 저녁 계엄군이 철수하고 나자 이젠 완전히 우리 세상이었다. 그때까지도 청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외곽지대로 돌아다니다가 누문동 쪽에서 총격전이 있었다. 그날 밤(21일)부터 잠을 조금밖에 자지 못하게 되었고, 다음날도 역시 외곽지대를 돌아다녔다. 북동에서 배, 사과를 가져다 먹기도 했다. 전매지사에서는 담배를 10박스 정도 주었다. 나는 서방 부근 동신고 앞에서 '계엄군이 이쪽으로 지나갈 것이다'하고 지키고 있는데, 웬 사람들이 와서 페인트로 차에다 뭐라고 끄적거렸다. 그래 뭐하냐고 물으니까 차량을 등록한다고 했다. 내가 도청에 들어갔을 때는 도청내에 일정하게 조직이 정비될 무렵이었던 것 같았다. 그땐 함부로 도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총을 들고 있었고 또 내 친구들이 도청 안에 있었는데도 쉽게 들어갈 수 없어서 싸움도 많이 했다.
나는 순찰업무를 맡았는데, 김화성이가 나한테 순찰업무를 맡겼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순찰업무로 전대로 갔는데 전대출판사 쪽 보도블럭 깔아진 곳에 전여고 2학년 학생이 매장되어 있었다. 전여고 배지를 차고 있어서 알았다. 사람들은 몰랐는데 개들이 거기를 막 파헤치길래 보니까 여학생이 매장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허벅지에 대검으로 두 군데 맞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매장당한 것이 분명했다. 눈을 부릅뜨고 죽었는데 벌린 입 사이엔 흙이 차 있었다. 시체를 도청 시체실로 옮겼다. 또 한번은 소방차를 타고 동일실고 앞을 막 넘어 가는데 저쪽에서 "땅"하고 운전수를 쏴서 차가 그대로 떨어졌다. 그때 나와 같이 차에 탔던 사람 중에 유일한 생존자인 사람을 지금도 가끔 만나기도 한다.
전남대 정문에서 APC 장갑차를 타고 돌진하는데 운전수가 고개를 내밀자마자 그대로 쏴버렸다. 목이 꺾어지면서 핏줄기가 3, 4미터 치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저놈들은 나하고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이며 저들이 살아 있는 한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신조 같은 것을 느꼈다. 공수부대가 퇴각하고도 방송국은 어떻게 된 건지 날이면 날마다 흔들어대는 춤이나 오락만을 방송으로 보내고 있었다. 광주가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들을 보도하기는커녕 폭도라고 매도만 했다. 그런 이유로 MBC 방송국이 불탔고 국민들의 세금을 걷어서 소위 자주국방이라는 명목 아래 엄청난 돈을 지출하고 있는 세무서도 불태웠다.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수습대책위원회도 분열되는 등 상황이 어려워졌다. 그런 와중에서 5월 26일 낮 2시 기동타격대가 결성되었다. 수습위원회 산하로 유일하게 조직된 시민군이었다. 나는 이미 편성된 기동타격대에 들어갔었다. 그때 기동타격대 애들이 나에게 총을 겨누면서 총을 내놓으라고 하고 총을 다 회수해 가는데 오기가 났다. 나도 사나이인데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애들을 긁어모아 기동타격대에 들어갔었다. 우리가 기동타격대에 들어간 맨 마지막 사람들이었다. 우린 7조에 편성되었다. 기동타격대는 7개조가 있었다. 조원은 다섯 내지 여섯 명으로 구성되었고, 장비는 개인화기로서 카빈 1정, 실탄이 지급되었고, 각 조당 무전기 1대씩 6조까지 구성되었으며, 7조는 다른 임무를 맡았다. 기동타격대의 예비부대였다. 나는 7조 조장이었다. 우린 병력수송과 순찰업무를 맡았다. 조장과 조원들은 각기 별명을 사용했다. 그때 내 별명이 찐빵이었다. 우리는 화정동이나 서방 외곽지대에 실탄을 공급하고 밥, 과일 이런 것들을 도청에서 갖다주었다. 그때부턴 밥이나 과일, 담배가 부족했다. 그 외의 시간엔 시내를 순찰했다. 26일 저녁엔 시내에 개미새끼 한 마리 기어다니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도청에서 예비군들을 실어다 계림국민학교에 배치시켰다.
26일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저녁에 도청 농림국장실 회의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고 결의했다. 난 이종기 씨, 해진이 형 등과 같이 있었다. 이종기 씨와 다른 사람은 모두 도청을 빠져나갔지만 다시 들어와서 우리 사기를 북돋아주며 "자네들은 꼭 살아남아야 하네. 그래서 이 상황을 이야기해주어야 하네"하고 말을 했다. 나는 2층 복도에서 싸웠는데 같이 있던 사람은 타격대원으로 장승희, 강명국이가 있었고, 그외에는 모두 일반사람들이었다.
26일 오전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중심으로 변두리에서부터 포위하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저녁 7시경부터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비상배치를 하기 이전에 담배 한 대씩을 피웠다.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해도 여유만만하게 있는 애들도 있고 장난치는 애들도 있었다. 10시가 되니까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리가 실감났다. 그 무렵 실제로 타격대 중 그날(26일) 도청에 있었던 사람은 몇 안 됐다. 다른 타격대들은 계속 시외를 돌고 도청에서는 무전기로 보고만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적들이 모두 무전내용을 도청했다고 했다. 타격대원들이 계속 돌면서 상황을 알려주면 도청에서 어떻게 어떻게 해라 지시를 했다. 놈들이 동일실고에서 톨케이트까지 물러갔었는데 다시 진격을 해오기 시작하고, 계속 그렇게 병력을 이동시켰다. 어쩌다 우리 무전기를 가동시키다 보면 계엄군의 사용 주파수가 잡히곤 했는데, 들어보면 저놈들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알 수가 있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해지자 하나둘 총을 버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우리 타격대만 한 사람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총을 버리고 나간다고 해도 누구 하나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그때 최후의 만찬으로 소주 한 모금씩 하면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서 이기자"는 이야길 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 비장한 각오로 이 길이 정말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 동참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실지로 타격대 내부에 갈등도 많았다. 나중에 총탄이 지급되면서 모두가 말없이 총탄을 지급받고 담배 한 대씩 빨고 서로 악수를 하면서 "꼭 살아야 된다. 그리고 살아도 비겁하게 살지 말자"고 했다. 솔직히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단지 우리는 계엄군의 만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총을 들었던 것이다.
밤 12시가 되어서 2층 민원실에서 저녁밥을 먹었는데, 그날 따라 벌건 돼지고기가 나왔다. 그 전에는 계속 닭고기만 나왔었다. 밥을 먹고 나니까 거기에서 일하던 고등학생이 "형! 나 갈라요"하고 말하길래 보내주고, 또 어떤 애들은 총을 달라고 해서 "너희들은 살아야 된다"고 하면서 뺨을 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따다당' 소리가 났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2층 복도에 있었는데 모두가 총을 벽에 세워 놓고 앉아 있는 상태였고, 총탄은 나의 경우 3클립을 가지고 있었다. 총소리가 나기 전까지 모두 앉아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나도 솔직히 죽는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났다.
공격개시와 함께 총을 쏘는데 너무 긴장을 해서 손이 떨리고 총탄이 안 나갔다. 옆의 애에게 말했다.
"야! 총탄이 안 나가야."
"그럼 이리 줘봐라."
그애는 내 총을 점검했다.
"야! 임마 총탄이 두 알 박혔잖아."
그러고는 내게 총을 넘겨주었다. 총을 쏘는데 그 녀석이 옆에서 '픽' 쓰러졌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야, 임마, 얼른 일어나야."
몸을 만지니까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나하고 장난치던 애가 죽으니까 정말 그때서야 죽음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옆에서 죽자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났고, 아니면 이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그때부턴 무조건 갈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종기 씨가 총을 회수하러 왔다.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2층 상황실로 올라가는데, 그때 계엄군이 도청 건물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바로 그 때부터 나에겐 고난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신었던 워커 구두끈으로 뒤로 묶여서 바닥에 2시간 동안 엎드려 있었다. 그놈들은 정글화를 신고 있었는데 엎드려 있는 위로 걸어다니니까 정말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다. 2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에도 손을 뒤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계단을 기어서 내려가게 했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곡괭이 자루로 때렸다. 버스에 탈 때에도 한 사람씩 마치 어시장에서 갈쿠리로 생선 찍듯이 찍어갔다. 도청에서 분류작업을 할 때 내 등엔 무기소지자라고 씌었고 폭발물 소지자 등등이 추가됐다.
트럭에 실려 상무대로 갔는데, 상무대 앞에 모인 것을 보니까 잡혀간 사람이 5백 명 정도 되었다. 상무대 안은 모두 아스팔트인데 상무대 정문에서 내려서 머리를 땅에 꼬나박고 순전히 머리로 밀고 들어갔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몽둥이로 때렸다. 영창 앞까지 가서 기록을 한 뒤 영창으로 넣었다. 그때가 한 3시쯤 되었을까? 그날은 하루 세 끼를 완전히 굶었다.
6개 영창이 있었는데, 정확한 숫자파악은 어렵지만 한 방에 1백50명 정도씩 들어가 있었다. 처음엔 구분없이 넣었는데, 며칠 지나고 나서 학생과 일반인을 구분시켰다. 창피한 일이지만 학생들이 그걸 원했다.
상무대에 도착한 첫날 영창 앞에 모두 앉혀놓고 독침사건의 주범인 장계범이가 와서 간부급들, 열성분자들을 찍어냈다. 그 다음날부터 조서를 받았는데, 나는 하필 김재규도 자기가 수사를 했다고 하는 서울서 내려온 보안대 상사 김성식이라는 사람한테서 조사를 받았다. 화정동에서 그놈 쏴죽인다고 교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놈한테 걸린 것이다. "너희들이 나 쏴죽이려고 했지? 너, 잘 만났다"면서 조서를 받기 시작했는데, 처음 갔을 땐 담배 한 대를 주면서 먼저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처음엔 거짓말도 썼다. 시체만 운반했다고 했더니 그런 것은 다 안다고 하면서 곤봉으로 2시간 동안 때렸고, 무릎을 꿇게 하고 다리 사이로 곤봉을 넣고 위에서 누르니까 다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좀 편한 것이 '기마자세'라는 기합이었는데, 이렇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계속 조서를 받았다. 조서를 안 받는 날은 오히려 불안했다.
거기에선 일체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입고 들어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군복을 나눠주었고 속옷까지 지급이 되었다. 그런데 수도꼭지 하나를 1백 명이 사용하여야 하고 그나마 여름이면 물도 잘 안 나와서 화장실 변기통(수세식)에서 세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가장 추잡스러운 것은 우린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기 전에 헌병에게 "단결, 화장실에 용무가 있어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보고를 하고 가야 했다. 그리고 영창 안에 있을 때도 편한 자세로 앉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듯하게 앉아 있게 했다. 그 때 내가 통달한 것이 앉아서 자는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료를 받았다. 통합병원에 입원하면 진짜 편하니까 병원에 가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처음엔 진료받으면서 받아둔 배 아플 때 먹는 약,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등을 모아서 한 20알을 한꺼번에 먹어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나중엔 치약 껍질을 벗겨서 그걸 먹었다. 그러자 정말로 배가 아팠다. 병원에 한 3일 있다 오면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고 조금은 나아졌다.
헌병대 박춘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쪽에서 한 사람이 떠들었다고 비위가 상했는지 떠드는 사람을 불러내어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살벌하게 두들겨패서 생똥을 두 번이나 싸게 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으로 국군의 날 우리도 군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무등산빵이라는 것을 주었다. 1백 원짜리 빵이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밖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소식은 없고 전두환이가 헌법 개정한 소식을 안에서 전해 주었다. 헌법내용을 들어보니까 정말 좋았다. 그런데 그 멋들어진 헌법 귀절 끝에 가면, 단 이것만은 안 된다는 식으로 적혀 있었다. 잡혀간 우리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거기 안에서 A, B, C급으로 나뉘었는데 C급 사람들이 훈방되어 나가는 것을 보자 정말 착찹했다. 기동타격대 애들은 A급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까마득했다. 영창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위로 겸 우리들을 찾아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불러주었다. 솔직히 영창 안에서 그렇게 고생을 시키면서 그런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었지만 그곳을 나가면 떡을 주었다. 대부분 떡을 먹으려고 나갔다. 나는 7개월이 되도록 제대로 목욕 한번 못해 보았다.
7개월 동안 재판을 두 번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재판정에 들어가면 네 사람당 한 명씩 헌병이 끼어 앉았다.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주로 신부님이나 교수님에게만 물어보는데, 그때 김성용 신부님께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다. 영창 안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는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개 돼지가 어떻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항변하듯 말씀하셨다.
1심 형량이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2심에서 그냥 나가라고 하니까 나왔다. 10월에 교도소로 옮겨서 거기에서 상무대로 재판을 받으러 다녔다.
교도소에서 나오고부터 세상이 달라 보였다. 우리는 죄지은 것이 없고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1980년 5월 내 옆에서 무수히 죽어갔던 사람들,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그것만이 분명한 것이다. (조사.정리 조은경)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