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산업 사회의 남성상 출현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신분제가 붕괴되고 밖으로부터 외래 문물이 밀려 들어와 전통 의식과 새로운 근대 의식이 갈등하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에 중인으로 성장한 평민은 기술관이라 하여 역관, 의관, 관상감원, 서원 등의 직업을 가지고,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사무역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모작이 보급되어 부농이 생기고 사상의 활동이 확대되어 부유한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실학과 동학이 새로운 사상적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서구에서 흘러 들어온 자유주의적 평등 의식의 영향을 받아 신구 세력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위태로워진 국권의 회복과 개화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를 풀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과거의 군자상만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자성이 일고, 부국강병을 위해 실리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개화 의식이 싹텄다.
실용주의에 대한 주장으로 공업과 상업의 진흥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를 위한 기술 교육이 강조되었다.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집안을 보존하고 나라를 흥케 하고 외국의 업수이 여김을 안 받으려면 무엇이든지 배워 자기 손으로 벌어먹을 도리를 하고 자식들을 아무쪼록 학교에 보내어 외국 말을 배우든지 제조하는 법을 배우든지 무슨 장사를 배우게 하는 것이 곧 전장을 많이 장만하여 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
사농공상이라 하여 노동을 천시하고 기술보다는 도를 깨우치는 '앎'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아 기술을 가르치고 육체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 착실한 일꾼으로서의 근면함과 기술 소유, 강장한 체력, 합리주의 등을 남성이 갖추어야 할 덕성으로 꼽았다.
당시 신사상을 기반으로 설립된 근대식 학교의 교육 이념과 교과 과정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였다. 1907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면서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 정신이 강한 민족 운동자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강장한 체력의 훈련 등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같은 해 문을 연 오산학교의 학과목은 수신,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대수, 헌법 대의, 물리, 천문학, 생물, 광물, 창가, 체조 훈련 등으로 기술 교육과 신체 단련이 중시되었다. 애국 계몽 의식의 일환으로 근대화가 모색되면서 산업 사회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일꾼으로서의 남성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군자상의 연장인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남성상에 흡수되는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전통적 남성다움의 변화-남성의 부재
조선 말기부터 일제 시대, 6,25전쟁과 건국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온 근대에는 나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공식적, 제도적인 영역이 크게 축소되거나 붕괴된 채 생존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 와중에서도 점차 공업화, 도시화 및 일본식 근대 교육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남성은 전장에 나가거나 징용으로 일본, 만주 등지로 가거나, 노동력을 팔러 또는 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공식적, 제도적 영역을 일본이 장악한 식민지 아래서 남성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나약해지거나 항일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가 되기도 했다.
어느 경우이건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여성의 역할은 커졌고 집에 있다 해도 무능해진 남성을 대신해 여성은 강인하고 억척스럽게 변했다. 많은 여성이 남성의 부재를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고, 남성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질수록 여성들은 대를 잇고 씨를 보존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래서 실제 남성이 곁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남성이 부재한 이 시기에 남성은 더욱 존귀한 존재가 되고 정신적 기둥이라는 실제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남성의 허상을 지키기에는 가장은 무능했고, 그와 더불어 남성다움은 서서히 흔들렸다. 특히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많은 공장이 건설되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공장으로 끌어들였다. 여성이 돈을 벌게 되면서 전통적 남성상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도 공업화와 핵가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해 생계 부양자로서의 남성상이 전통적 남성상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지도자로서의 군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한 남성 아니면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시기의 남성상의 대의 명분을 추구하는 대장부가 될 것인가, 생계 부양자가 될 것인가를 갈등하는 남성상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