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侍墓)살이 후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어느 날 동문 카페에 들렸다가 깜짝 놀랐다. 동문들이 <화합의 잔치>를 치르고 나서 올린 사진 가운데에 웬 괴기스러운 모습을 한 낯선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그는 새마을 로고가 박힌 챙이 긴 모자에다 허름한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우선 입성보다는 모자 속에 감춰진 봉두난발한 머리와 수염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설명을 보니 아무개란 후배인데 이태 전 모친상을 당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중에, 잠시 수질(首絰)과 상복(喪服)을 벗고 동문모임에 나왔다는 것이다. 옛날 풍속대로 전통을 지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런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것도 여간 신기해 보이지 않았다.
고향 모교는 오래전에 폐교가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건물은 옛 그대로인데 운동장은 학생이 없으니 묵정밭이 되었다. 그 쓸쓸함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어느 날 마음을 나누는 장이 마련되었다. 후배들이 나서서 동문 카페를 개설한 것이다. 그것이 폐교를 상쇄하는 무슨 처방이 될까마는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모임은 차츰 활기를 띄어갔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다보니 지금은 초창기에 비해 많이 시들해진 양상이다. 막내들이 장년이 되고 후배가 끊기니 단절의 골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가끔 동문카페를 들른다.
시묘살이 후배는 입성과 행색으로 보아 처음 시작한 이내로 줄곧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그리고 자랄 데로 자란 턱수염이 그야말로 영락없는 춘향가에 나오는 ‘쑥대머리’와 ‘귀신형용’에 진배가 없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예전의 고향에서 치러지던 장례풍속을 떠올렸다. 물론 내가 보고 자란 5,60년대에도 무덤 옆에 움막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건 못 보았지만, 고유한 장례풍속은 그런대로 지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에 또렷한 그 풍습 속에는 사람이 죽으면 문밖에 내놓던 사자밥(使者)을 잊을 수 없다. 짚으로 삼은 세 켤레의 신발과 함께 메를 지어 놓는데 이는 망자를 인도할 세 명의 사자 몫이었다. 그 사자들이 명부시왕인 심판관에게 데려간다고 믿어서 배불리 먹고 잘 보살펴 달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의식을 치렀다. 먼저 숨을 거두면 가족과 친족들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망자가 입던 옷을 마당에 가지고 나온다. 그런 후에 북쪽을 향해 그것을 들어올려서 세 번 외친다.
"죽림마을 아무개 복이요!"
이렇게 고복(皐復)을 한 후에 옷가지를 지붕 위로 던져 놓는다. 이는 죽음을 하늘에 고하는 동시에 동네사람들에게 알리는 의식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상이 났음을 알아차린다. 이후로는 망자의 시신이 경직되기 전에 씻기고 나서 코와 귀를 틀어막고는 입에다 쌀을 한 수저 떠 넣는다. 그러고 나서 수의를 입히고 염습(殮襲)을 마친다.
장례는 통상 3일장을 치렀다. 이보다 길게 하는 때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3일안에 상여 제작과 목관(木棺)을 짜는 일을 마쳤다. 관은 못질을 하지 않으며 장식은 되도록 화려하게 꾸몄다. 구름장식과 불사조 장식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하늘로 인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발인(發靷)시 새끼줄에 거는 노잣돈은 상두꾼의 몫이다. 이를 받아내려고 상두는 구슬프게 격정의 사설을 토해냈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북망산천이구나.’ 그러면 뒤따르는 상주와 상제의 곡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상여 맨 앞에는 명정(銘旌)이 나서고 다음으로는 만장(輓章)과 고인의 위패가 모셔진 의자가 뒤따른다. 이는 망자의 저승길을 상징하고 모신 위패를 다시 돌아와서 영우(靈宇)에 모셔진다.
점혈(點穴)은 패철을 든 지관에 의해 잡히고, 묘를 성분한 후에는 산신제를 지낸다. 무덤에서 몇 발짝 위에서 행해지는데 이는 묻힌 망자를 잘 보살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향에서는 이웃집에 상(喪)이 나면 일손을 멈추고 슬픔을 같이 했다. 출상할 때까지 음주가무를 삼가고 바느질조차도 멈추었다. 그 금기 속에는 유족과 함께 슬픔을 같이한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담겼다.
한데 지금은 그런 장례풍속은 많이 사라졌다. 바쁜 세상살이를 하다 어쩔 수 없이 편의를 좆는 결과이다. 그런데도 후배는 아직도 옛 법도대로 삼년 시묘살이를 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 시대에 그런 옛 풍속의 실천은 사람이 있다니. 아마도 이 후배가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제는 제대로 소리하는 상두꾼도 만나기 어려운 데다 상여 매는 인력도 구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진즉부터 운구는 차량이, 비탈길은 포클레인이 동원되고 있는지 오래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후배의 모습을 대하니 새삼 옛날의 장례풍속이 아련하게 떠오르며 강렬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그걸 그려보면서 생각했다. 선인들이 대부분이 선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정성이 깃든 장례의식으로 하여 업경대가 놓인 명부시왕으로부터 작은 허물은 용서를 받지 않았을까 하고. 그 절차가 자못 진지하면서도 정성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예전대로 예법을 갖추어 치상을 하던 풍습도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채록으로나 남겨놓으면 어떨까. 후배가 보기 드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2017)
첫댓글 ‘예불여보성(禮不如寶城)’ 예법은 보성을 따르지 못한다고 하더니 보성에는 전통 장례가 지금까지 고수 되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지금은 TV에서나 볼 수 있는 시묘살이 풍습을 작금에 후배가 했더니 귀한 일입니다. 잊어가는 전통의 제례에 대하여 귀한 자료로 남겼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5,60년대의 고향풍속을 집중 조명하면서 행해오던 장례법을 빠트릴 수가 없어 작품을 싸봤습니다. 읽어주서서 고맙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즈음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이가 있다니 참 희한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절차 중에서 특히 출상 장면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주셨군요 어린시절에 기 하나 차지하려고 안달복달하던 기억이 스칩니다 조기를 들고 장지까지 따라가면 돈 한 닢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저는 장례준비를 하는 모습에 대한 글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사료로 남긴다는 생각으로 써봤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8년 에세이21 봄호 발표. 에세이 21 여름호에 월평.
시묘살이, 사자밥 등 용어가 생소한데 우리나라 전통 장례식이 간소화된 요즘과는 달리 인간의 삶과 죽음을 좀더 진지하게 다루는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장례풍속이 간소한 한것은 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견건하게 치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시묘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