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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유적 제천지역 탐방
(박달재, 배론성지, 의림지, 점말동굴, 청풍문화재단지)
박윤희
2015년 10월 18일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유적답사회에서 열리는 제천지역 탐방에 동행했다. 하늘은 바다를 펼쳐 놓은 듯 파랗고,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김재원 교수님이 오늘 탐방할 지역의 역사적 배경, 유래, 가치 등을 설명하셨다. 처음 동행한 답사가 기대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4세기경에는 백제에 속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나토군이 되었다가 신라가 차지하여 경덕왕 16연(757)에는 나제군으로 고치고, 삭주 북원경에 소속시켰다.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 23년(940)에는 제주군으로 개칭되었고, 성종 11년(992)에는 의원 또는 의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현종 9년(1018)에는 원주의 속현이 되었고, 예종 1년(1106)에는 양광도에 속하여 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제천현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충청도에 예속되어 현감이 부임했다. 19세기 말, 나라가 기울어지자 유인석이 의병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병장으로는 이강년, 이소응, 안승우 등이 유명하다. 1895년 제천군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 시군이 통합되어 지금은 1읍 7면 9동에 14만 주민이 살고 있다.
첫 답사지는 박달재였다. 우리에게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한 곳이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에게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슬픈 노랫가락을 뒤로 하고 다음 답사지인 배론성지를 향해 떠난다.
김재원 교수님께서 서양에서의 천주교 역사,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파의 역사, 천주교 박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유적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音)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한다.
주일의 봉쇄수도원 성당은 미사 시간을 앞두고 신자들로 붐볐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을 둘러보고 배론신학교와 성지 곳곳을 보았다. 아쉬운 점은 황사영 토굴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점이다.
배론은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 위해 모여든 지역이고 이때 천주교도인 황사영도 숨어들었다. 1929년 경 배론을 답사한 원주본당 정규량 신부는 ‘황사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배론 점촌 지굴(地窟)속에서 백서를 쓰다가 체포되었다’ 고 하여 그의 은신처가 땅굴이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총독부 시대에 일본인 야마구치(山口正之)씨가 1936년 8월 25일 배론을 찾아온다. 그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집의 북쪽 부엌 뒤에 있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집은 1866년 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인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교가 있었던 자리로 1976년 10월 18일자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되었다. 야마구치씨가 답사했을 때 1935년에 이사 온 집주인인 최재현이 신학교 교사(校舍)였음을 확증하였고, 이 집 뒤뜰 안에 옹기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다. 또한 배론 공소 안창현 회장의 손자인 안태화(1926년 생)는 ‘어린시절 10대 안팎일 때 신학교 건물인 최재현 집 위에 위치한 굴에 드나들며 놀았고, 그로인해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 굴은 토굴이었지 옹기 굴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1987년 8월 10일, 24일)
야마구치 등의 기록과 증언 현지의 지세를 종합하여 볼 때 1801년 김귀동의 옹기점 뒤 산비탈을 이용하여 1m 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을 것이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생각된다.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 이었고,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토굴은 1988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번 답사의 백미는 점말동굴이었다. 내 또래라면 교과서에서 이름만 달달 외웠던 구석기 유적지. 실제로 본 다는 기대에 찾은 곳은 입구도 초라했고 관심도 적은지 가는 길도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표지판만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아마 교수님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갔다가 돌아 나왔을 지도 모른다. 30분쯤 걸어 올라가니 시원한 그늘에 자리한 동굴 유적이 보였다.
동굴의 규모는 입구 너비 2~3m이고, 굴 안쪽이 막혀 있어 전체 길이는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확인된 길이는 12~13m이며, 동굴 입구가 동남향으로 뚫려 있어 선사인이 생활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동굴유적에서는 털코뿔이ㆍ동굴곰ㆍ짧은꼬리 원숭이 등의 동물화석 20종 굴과 석기ㆍ뼈연모ㆍ예술품 및 식물화석 등 풍부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달되어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ㆍ생활상ㆍ기술 발달 과정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점말동굴의 토양ㆍ석회암 낙반석ㆍ구른 자갈돌ㆍ석회마루 등은 퇴적층위의 구분과 기후 환경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며, 사람이 밖에서 들여 온 사냥감ㆍ뼈연모ㆍ석기 등 고고학 자료는 유적의 시대 편년과 선사시대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제천 시내에서 영월 방면 국도로 1㎞ 정도 지나면 철도와 국도가 나란히 달리는데, 거기에서 8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장락동이 있다. 이곳을 지나 태백선 철도를 넘으면 장락동 마을회관이 보이고 농로를 따라 한참을 더 가면 사과 과수원 사이에 장락사지가 있다. 탑은 사역의 남단에 위치하며, 탑의 동쪽에는 근래에 건립된 장락사가 있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초창 시기와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모전석탑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석탑의 북쪽과 서쪽 지역에서 확인된 3개 동의 건물지와 추정 담장지 유구를 통해 확보되었다. 건물지 유구 면에서는 삼국 시대의 승문평기와·선문평기와, 통일 신라 시대의 선문평기와·격자문평기와가 출토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탑의 앞쪽에 위치한 제1건물지는 남북 자오선 상에 놓이는 통일 신라 시대의 평지가람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석탑을 찾는 이들을 위한 법당으로 추정된다. 한편 담장지와 2개 동 건물지는 문지로 통일 신라 시대 사역과 석탑을 출입하기 위한 시설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석탑 주변의 담장지와 3개 동의 건물지가 형성하는 구조적 형태가 석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장 어울리는 가람 배치 구조를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석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1967년~1967년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기단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당시 백자종자편, 금동편, 금동 불상, 사리 장치 석재 등이 출토되어 석탑이 한 차례 이상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모전석탑의 중건과 관련한 자료가 제5건물지에서 확인되었다. 제5건물지에서는 모전석탑에 쓰였던 완형의 석탑 부재가 건물의 부재로 전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편이라면 석탑 부재를 만들고 남은 것을 건물 조성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지만, 애써 다듬은 완형의 부재를 건물 기단의 다른 석재와 함께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제22건물지 및 26건물 기단토에서 석탑 부재가 확인되었다.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는 고려 시대로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회흑색의 점판암을 벽돌 형태로 다듬어 쌓았다. 석탑은 높게 조성한 토단 위에 기단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지대석으로 탑신부를 바로 받치도록 하였다. 지대석은 모두 8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남쪽 면에 커다란 판석 1매를 놓고 북쪽과 동·서단부에 7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다.
1층 탑신부의 네 모퉁이에는 높이 137㎝, 폭 21㎝의 화강암으로 된 방형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러한 수법은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수법이다. 남북 양면에는 화강암으로 두 개의 문기둥을 세우고 미석(楣石)을 얹어 방광(方框)을 만들고 문비(門扉)를 달았다. 방광의 외부 크기는 137×108㎝이고 내부 감실의 크기는 남쪽이 85×60.5㎝이며, 북쪽이 85.5×63㎝이다. 문비는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앙부에 지름 1.5㎝, 깊이 6.5㎝로 2개의 홈을 내었다. 이 홈은 별도의 문고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층 탑신의 높이는 네 모퉁이의 화강암 기둥과 같고 폭은 2.8m이며, 동서 양면은 전체를 모전석탑 부재로 축조하였다. 석재의 크기는 길이 17~52㎝, 두께 4~7㎝이다.
옥개석은 상하 모두 층단(層段)을 가진 전탑 특유의 형태를 보이며, 추녀도 짧게 마무리하였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평하고 각 모퉁이 끝에는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는데 일부에는 풍령을 달았던 철제 고리가 남아 있다. 옥개 받침은 7~9단이며 층단도 이에 준한다. 옥개석은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7층 옥개석 정상에 한 변 길이가 70㎝의 낮은 노반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지름 17㎝의 두멍이 뚫려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이 구멍은 찰주공으로 해석되는데, 6층의 옥신부까지 이어진다.
1967년의 해체 복원 당시 5층 옥신부에서 길이 50~54㎝, 높이 31㎝의 부등변 사각형의 화강암 석재가 있었고, 그 중심에 네모꼴의 구멍이 있어 사리공으로 판단했으나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7층 옥개 윗면에서 꽃 모양이 투각된 청동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석탑의 정상부에는 청동제의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전면에는 회를 발랐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는 상주의 회석심회피탑(灰石心灰皮塔)과 같은 수법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
수업 시간에도 달변으로 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드시며 내용을 풀어 주시는 김재원 교수님은 이번 답사에서도 놓치기 쉬운 포인트를 상세한 설명으로 이끌어주셨다. 혼자였다면 표지판만 읽고 대충 넘겨버렸을텐데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석양을 뒤로하며 마무리했던 제천 지역답사는 다음 답사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다.
11월 청송 지역 답사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