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5열사(反共五烈士) 약력소개서(略歷紹介書) 서천군 (근대현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천까지 들어오자 당시 장항농업중학교 5학년 최승상, 양태순, 신윤식님, 3학년 김달식님, 국민대학교 정치과 2학년 임상덕님이 ‘우도회(友道會)라는 결사동지회를 결성하여 국군을 도우기 위하여 연락과 봉화(烽火), 괴뢰기관 파괴계획수립, 괴뢰군 주둔처지도, 지방괴뢰도당 간부급 명부, 동지명부 작성, 금전출납, 기타제반기록, 정보수집 선전, 밀탐(密探), 교섭(交涉), 동지(同志) 포섭(包攝), 교섭(交涉)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색분자의 밀고로 8월 19일에 전원 괴뢰도당 치안대원에 체포되어 서류 전부를 압수당하고 혹독한 고문(拷問)을 받고 항거하다가 대전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서천군에서는 이분들의 순국(殉國)에 대한 넋을 기리기 위하여 묘소를 조성하고 위령비 및 위령탑을 건립하여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며 서천군 ‘반공오열사(反共五烈士)“로 알리고 있으나 이분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반공(反共)이라는 표현 보다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홍성, 보령, 서천, 전주, 옥구 등지까지의 범위를 넓혀 괴뢰군 주둔지를 탐지하는 등의 정보활동을 펼치다 목숨을 바쳐 희생하였던 분들로 “한국전쟁 순국오열사(韓國戰爭 殉國五烈士)”로 알리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이며 서천군에서 소개하는 이분들의 출신학교가 아래 문서의 약력소개서와 다른 부분이 보인다.
- 아 래 -
5인 순국학생의 약력을 피로(披露)하겠습니다.
조국애에 불타는 충렬(忠烈)로 일신(一身) 일가(一家)의 안위를 부고(不顧)하고 민족을 좀먹고 조국을 팔아먹으려는 북한의 괴뢰도당을 소멸키 위하여 정국결사의 규호(叫號)하에 엄연히 일어나 싸우다가 약관(若冠)의 20세 청춘을 일기로 장렬하게도 순국(殉國)한 5인 학생은 최승상(崔承相))군, 양태순(梁泰順)군, 김달식(金達植)군, 신윤식(申潤湜)군, 임상덕(任相德)군의 5인으로서 순국하게 된 경위(經緯)는 종합적으로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개별적으로 그 출생(出生) 성장을 말씀드리자면
최승상군은 단기4261년(거금 25년 전)에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 봉촌에서 다정 청렴한 독농(篤農)가 최순옥씨의 독신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군(君)은 유시(幼時)로부터 총명하고 의협심이 부(富)하였으며 부모에 효성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만이 오직 인생의 밟을 길이라는 신념이 굳었던 군(君)이었습니다.
12세 때에 서남학교에 입학하여 동교를 졸업하고 장학농업중학교에 진학하여 5학년에 재학 중에 순사(殉死)를 한 것입니다. 가족에는 양친과 미망인 김정희 여사와 매씨(妹氏) 최승월양의 4인 유가족이 있습니다.
양태순군은 최군과 동갑의 23세로 역시 단기4261년에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양대성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천성이 민첩하고 활발하였으며 춘부(春府)의 교양을 받아 유시(幼時)로부터 애국심이 강하고 우리민족이 일본에 박제(箔制)를 받음을 통분(痛憤)하여 보수(報讎)를 부르짖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장학농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 순국(殉國)을 하였습니다. 가정에는 양친과 미망인 김순덕 여사외 3세 된 후계 해인 군과 1세된 여식(女息) 김순양과 제매(弟妹) 등이 있습니다.
임상덕군은 단기 4262년에 서천군 종천면 장구리에서 자수성가하여 유족(裕足)하고 사회적으로 활약이 많으신 임석원씨의 자제 임한수씨의 삼남으로 출생하시었습니다. 젖먹이 때에 그 부친을 사별하고 자당(慈堂)과 조부님의 무애(撫愛)하에 성장하였으며 성품이 걸협(傑俠)하고 방략(方略)이 비범하여 인망이 두터웠습니다.
종천국민학교 4년을 마치고 서남학교 5년에 편입하여 6년을 졸업하고 장항농업중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서울 국민대학 정치과에 진학하여 2학년 재학 중에 순사(殉死)하였습니다. 아직 미취(未娶)의 독신자로서 가정에는 모당(母當)과 경찰관으로 활약하는 장형(長兄) 임상헌씨 차형(次兄) 임상준씨가 계십니다.
김달식군은 단기 4263년(방년21세)에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인망(人望)이 높고 사회사업, 교육 사업에 공적이 많은 김순국씨의 삼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유시(幼時)로부터 온유하고 진중과묵(鎭重寡黙)하며 부농가의 자제로 사람의 수부족(手不足)이 없으되 성품이 근면하여 학업의 여하에는 가사(家事) 조력(助力)에 부지런하였으며 춘부와 백씨 중씨들의 교양을 받아 애국애족 사상이 특이하더니 금번 5인 학생의 의거에 들게 되었습니다.
가정에는 춘부가 금반(今般) 괴뢰집단에 불법살해를 당하고 자당(慈堂)을 비롯하여 현재 국민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는 백씨와 대학에 학적을 둔 중형(仲兄)이하 제(弟), 매(弟), 질(姪) 대가족이 있으나 작년에 결혼하였을 뿐 자녀 간 후계(後繼)를 두지 못하고 미망인 윤석례 여사와 사별된 것입니다. 학업은 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장항농업중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재학 중에 순사(殉死)하였습니다.
신윤식군은 단기4264년(방년20세)에 서천군 마서면 죽산리에서 온후(溫厚) 인자하신 신언상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재질(才質) 출매(出罵)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우익사상이 투철하여 과거에 있어서도 자기부락에 다수 거주하고 있는 좌익분자들과 항쟁(抗爭)하여 오던 차에 금반(今般)에 구국열사의 의거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학벌은 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장항농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이었으며 가정에는 작추(昨秋)에 결혼한 미망인 손기번 여사(단기4263년 9월 15일생)와 양친과 제매(弟妹)가 있습니다. 숙부 신언철씨 신언규군 두 분도 공산도당의 독수(毒手)에 살해당하여 일문(一門)에 3명의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이상으로 개별적 약력을 끝마치고 다음으로 순사(殉死)의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5인 학생은 천품(天品)이 탁월하고 방적(防敵)이 비범하며 언행(言行)이 특이하고 우국애족의 사상이 투철하며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애무(愛撫)가 비할데 없고 장성하여 세인(世人)의 칭송이 자자(藉藉)한 중 5인은 거주가 동린(同隣)하고 천품(天品)과 사상이 상통(相通)하여 부급(負芨) 수학(修學)이 또한 동문이었으며
연기(年紀)도 거의 동등하니 여러가지 인연(因緣)으로 의지 상합(相合)한 막역(莫逆)의 벗이 되어 놀으며 자리를 함께하며 언론(言論)하며 우국애족사상이었으며 일찍이 농업중학교 재학 중에 동급생에서 의지(意志) 상합자(相合者)로 ‘우도(友道)’라는 회(會)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의 함양, 인도(人道)의 수양, 우정의 돈목(敦睦)에 노력하던 차 지난 7월 17일에 공산괴뢰도배(共産傀儡徒輩)가 우리지방을 유린(蹂躪)하게 되자 이들의 평소의 분개(憤慨)는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7월 31일에 죽산리 동지(同志) 신윤식군 댁에서 제1차 회합(會合)을 하고 당일은 주로 괴뢰군(傀儡軍)에 대한 비판, 지방좌익분자 및 그 외 협조자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하고 구국(救國) 결사(決死)의 결심을 피로(披露)하였습니다.
그 후에 제2차 회합(會合)을 한성리 김달식군 댁에서 열고 구국(救國)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각자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1. 최승상군 : 연락과 봉화(烽火), 괴뢰기관 파괴계획수립
2. 양태순군 : 괴뢰군 주둔처지도, 지방괴뢰도당 간부급 명부, 동지명부 작성, 금전출납, 기타 제반기록
3. 김달식군 : 정보수집 선전
4. 신윤식군 : 밀탐(密探), 교섭(交涉)
5. 임상덕군 : 동지(同志) 포섭(包攝), 교섭(交涉)
이상과 같은 책임을 정하고 활동을 개시한 후 피착(被捉)될 때까지 회합하기를 5~6차 이었으며 회합장소는 이동식으로 김달식군 댁, 양태순군 댁, 와석호항(臥石芦項) 해변(海邊), 김달식군의 참외막 등을 선택하고 회합 시 또는 행동개시시의 모습은 농부 등으로 가장하였습니다.
그 동안 정보수집으로는 부산, 포항등지의 아군상륙, 대구의 전황, 괴뢰군의 패전, 괴뢰도당의 동요(動搖)등의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연락으로는 성명은 미상하나 판교거주 서울대학생의 비인에서 도선(渡船) 입함(入艦)이 연락이 있었고 반산, 호항(芦項)에서 봉화를 4회 올리고 홍성이하 보령, 서천, 전주, 옥구 등지의 괴뢰군 주둔지를 탐지하여 지형도를 작성하고
지방괴뢰도당 간부명부를 작성한 후 당초에는 비인이나 서면에서 승선하여 군함(軍艦)과 연락을 취하려다가 계획을 변경하여 각자 5,000원씩의 금품과 서류를 휴대하고 송석리 앞바다 속에 있는 아목도에 들어가 선박(船舶)을 교섭 중에 괴뢰도당의 주구(走狗) 간첩의 밀고로 8월 19일에 전원이 죽산리 괴뢰도당 치안대원에 체포되어 서류 전부를 압수당하고 혹독한 고문(拷問)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산리 치안대에서 혹독한 고문(拷問)을 당한 5인 학생은 즉일(卽日)로 서천 내무서에 일건(一件) 서류와 함께 압송되어 4일간 가진 악형(惡刑)을 당하고 8월 24일에 대전으로 이송되어 형언(形言)치 못할 혹형(酷刑)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이 서부지방에 찬란하게 피었던 무궁화 5송이는 비참하게도 20세 청춘을 일기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하여 그들의 육체는 사라졌으나 그의 성장은 기특하고 그의 의거(義擧)는 초월하여 무서운 혹형(酷刑)을 받되 최후까지 굴복하지 않고 괴뢰정책을 조매(朝罵)하며 체포한 5인 이외에 남아있는 동지의 이름을 토설(吐洩)치 않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순국한 그의 장렬(壯烈)한 절개는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불멸(不滅)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위대한 5열사를 낳아서 양육하신 부모님의 영예(榮譽)는 크고 5열사 회원을 가르쳐낸 서남국민학교와 장항농업중학교의 공덕과 명예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상으로 약력소개를 끝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