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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全科雄 (55세/정선)
정조실록 25권, 정조 12년 3월 23일 을유 1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무신년에 종정한 송창기·김차동·김진희 등 209명에게 포장과 증직을 내리다
오부(五部)와 제도에 무신년에 종정(從征)한 장사(將士)로서 생존한 사람과, 의를 지켜 순국(殉國)하였으면서도 아직까지 공적이 포양(褒揚)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아뢰게 하였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오부의 마을에는 단지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자는 금위(禁衛) 송창기(宋昌起) 등 11인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첩지(帖紙)를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다. 그중에 김차동(金次童)은 회방(回榜)하였기 때문에 이미 가자(加資)했고, 김상열(金尙說)은 호위(扈衛)에 참여했기 때문에 쌀과 고기를 더 주었다.충청도 관찰사 홍억(洪檍)이 장계하기를,
"창의(倡義)한 사람으로 포양(褒揚)되지 않은 이가 7인입니다. 청주(淸州)의 숭록(崇祿) 김진희(金晋熙)는 고 상신(相臣) 김우항(金宇杭)의 서질(庶姪)로, 적 천영(天永)이 상당성(上黨城)을 점거하자 진희가 의병 70여 명을 모아 은밀히 성을 지키는 포수들을 타이르고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천영을 생포하였으나, 공을 박민웅(朴敏雄)에게 양보했으므로 마침내 그 이름이 묻혀 없어졌습니다. 좨주(祭酒) 김원행(金元行)이 그의 전(傳)을 지었습니다.
익찬(翊贊) 변관하(卞觀夏)는 먼저 의병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지어 원근(遠近)에 고하였으나 공을 사양하고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기록에만 들었을 뿐입니다. 자헌(資憲) 김강립(金剛立)은 굴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었고, 적이 그의 좋은 말을 가져가려 하자 조총(鳥銃)을 쏘아 말을 죽였습니다. 적의 패망으로 인해 화를 면하였습니다.
진천 읍교(鎭川邑校) 김천주(金天柱)는 충신 김천장(金天章)의 형으로, 형제가 창의(倡義)해서 적을 치다가 천장은 적탄에 맞아 죽고, 천주는 적의 칼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연기(燕歧)호장(戶長) 하계명(河啓溟)은 집안의 일꾼들과 친족을 거느리고서 군기 창고(軍器倉庫)를 지켰으며, 청주에서 적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왕래하는 자를 베고, 나루에 복병(伏兵)을 두어 비상사태를 정찰하였기 때문에 적의 서신이 통할 수 없었습니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그 공을 조정에 알리고자 하는 자가 있자, 즉시 그 글을 태우면서 ‘창고를 지키는 것은 아전의 직무일 뿐이니, 공은 무슨 공이냐.’고 하였습니다. 청안(淸安)의 선비 장헌(張瀗)은 순절(殉節)한 장담(張潭)의 종제(從弟)로, 담을 따라 정벌에 나서 많은 적을 죽였으며, 청주의 선비 김세만(金世萬)은 적의 장교를 잡아 죽였습니다.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사람은 가선(嘉善) 김두삼(金斗三) 등 29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여러 대신이 모두 공가(公家)에 신빙할 만한 문적(文蹟)이 없으므로 정포(旌褒)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진희와 김강립은 증직하고,변관하·김천주는 쌀과 고기를 주고, 하계명은 병조로 하여금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장헌은 생존했으므로 특별히 가자를 명하고, 김세만은 그 자손을 찾아 식물(食物)을 주고, 종군한 사람들에게는 첩지를 주고 쌀과 고기를 차등 있게 주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음악을 베풀어 그들을 대접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홍병찬(洪秉纘)이 장계하기를,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사람이 자헌(資憲) 조중벽(趙重璧) 등 4인인데, 모두 원종훈(原從勳)에 참여되었습니다."
하니, 모두에게 첩지를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다. 원춘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장계하기를,
"본도의 춘천(春川)·금화(金化)·양구(楊口) 등 고을에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사람이 통정(通政) 함만재(咸萬才) 등 19인이 있습니다마는, 당시 각 고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경기 지방으로 가서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다가 난리가 평정되자 진(陣)을 철수하고 돌아왔으니, 경기와 호서(湖西)에서 장사(將士)가 출전(出戰)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순국(殉國)이나 종정(從征)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멀리 경강(京江)으로 가서 10일 동안 힘을 다하였으니 그 공로를 기록할 만하다. 호서의 예에 따라 지방관으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주고 음악을 베풀어 술을 대접하게 하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장계하기를,
"창의한 사람으로 아직 포장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지(陽智)의 가의(嘉義) 주헌(朱櫶)은 의병을 모집하여 문성천(文星天)과 더불어 좌찬현(左贊峴)에 웅거하여 적 수백 명을 죽였습니다.도신이 포계(褒啓)하였으나 초토(草土)에 있는 신분이기 때문에 단지 원종록(原從錄)에 들었을 뿐입니다. 통덕랑(通德郞) 한홍제(韓弘濟)와 출신(出身) 유상한(劉相漢)은 언약을 맺고서 결사대를 모아 좌찬현을 지켰으므로 적이 이곳을 지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공적이 끝내 조정에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안성(安城)의 동지(同知) 윤재(尹梓)는 태주(泰柱) 등 세 적을 생포하였으나 관군(官軍)에게 빼앗겼습니다.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이로는 가선(嘉善) 박말룡(朴末龍) 등 1백 10인이 있는데, 말룡은 나이가 1백 4세입니다."
하니, 대신과 의논하여 주헌은 증직(贈職)하고, 윤재는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고, 한홍제·유상한은 자손에게 식물을 주고, 종군했던 사람들의 나이가 모두 80, 90세가 되었으므로 아울러 첩지를 주었다.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하기를,
"광주(光州)의 민제장(閔濟章)·민제만(閔濟萬) 형제는 안죽(安竹) 전투에서 가장 기공(奇功)이 드러났는데, 그 대략이 감란록(戡亂錄)에 실려 있습니다. 전주 좌수(全州座首) 오진형(吳震亨)은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고을 수령들을 힘껏 도와 적에게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적 효(孝)에게 잡혀 결박되었고, 적 현(顯)이 삼천(三川)에 당도하자 성문을 지켜 한 고을을 보존하였습니다.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이로는 첨정(僉正) 유일성(柳一星) 등 15인이 있습니다. 일성이 용맹을 떨쳐 적추(賊酋) 존서(存緖)를 함양(咸陽) 아루(衙樓)에서 잡았던 것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습니다."
하니, 대신과 의논해서 민제장·오진형은 그 자손을 녹용하고, 유일성은 충장위 장(忠壯衛將)에 차임(差任)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첩지를 주고, 타도의 예에 따라 음악을 베풀어 음식을 대접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숭호(李崇祜)가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해 있는 무산(茂山) 사노(寺奴) 정갑(丁甲)의 종정(從征)을 녹훈(錄勳)할 것으로 아뢰니, 가자(加資)해 면천(免賤)시키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김광묵(金光默)이 장계하기를,
"창의한 사람으로 아직 포장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거창(居昌)의 좌수(座首)주1) 전학령(全鶴齡)은 적이 준 첩지(帖紙)를 찢어버리고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합세해서 흉적을 섬멸하였고, 향리(鄕吏) 신석현(愼錫顯)·신덕현(愼德顯)·신광세(愼光世)·신치근(愼致謹) 형제 숙질은 합심해 창의해서 의병을 모아 적을 막았으며, 선비 이우태(李遇泰)는 이술원(李述原)의 종질(從姪)로, 그 종형(從兄) 이우방(李遇芳)과 더불어 족당(族黨)을 불러모아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 진양(晋陽)으로 달려가서 양(亮)·웅(熊)·곤(坤) 등 세 적을 생포하였으며, 업무(業武) 조한백(曺漢伯), 선비 윤상거(尹商擧)·어진룡(魚震龍), 함양(咸陽) 아전 박춘봉(朴春奉), 선비 정지교(鄭之僑)·박여방(朴汝芳), 안의(安義) 선비 이성택(李聖擇), 부호군(副護軍) 김근(金瑾), 선비 전우석(全虞錫), 향리(鄕吏) 하윤택(河潤澤)·하용서(河龍瑞)·김재경(金載鏡), 진주(晉州) 가선(嘉善) 이세한(李世翰), 학생(學生) 이상화(李尙化), 한량(閑良) 김두발(金斗潑), 상주(尙州) 절충(折衝) 정홍주(鄭弘周) 등이 혹은 창의하기도 하고 혹은 적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자로는 가선 백만재(白萬載) 등 17인이 있습니다."
하니, 대신과 의논하여 전학령은 장령(掌令)을 추증하고, 신석현 네 숙질은 낭서(郞署)를 추증하고, 이우태는 증질(贈秩)하고, 조한백·박춘봉은 포증(褒贈)하고, 윤상거는 자손을 녹용하고, 어진룡 등 여러 사람은 자손에게 음식물을 주고, 종군한 사람들은 첩지를 주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김이소(金履素)가 장계하기를,
"김진옥(金振玉)은 영비(嶺裨)로 합천(陜川)·거창(居昌)을 옮겨다니며 전투하여 적의 괴수(魁首)를 생포하고 흉적을 섬멸한 실적이 있습니다."
하니,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경외(京外)에 종정(從征)했던 장사로서 생존한 자가 1백 세에서 90세까지가 22인이고, 80세 이하가 1백 87인이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99면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주1) 좌수[ 座首 ]
요약
조선시대 지방 군 ·현의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鄕所)의 벼슬.
향소는 유향소(留鄕所)라고도 하며, 여기에 좌수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좌수는 향사(鄕士)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들이 선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2년이었으나 수령이 바뀌면 개선할 수도 있었다. 유향소는 원래 지방풍속의 단속과 향리의 규찰 등을 그 임무로 했는데, 성종 때 확정된 주(州) ·부(府) 4,5명, 군(郡) 3명, 현(縣) 2명의 정원이 대체로 지켜지다가 후대에는 창감(倉監) ·고감(庫監) 등의 직책이 생겨 때로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으며,좌수라는 칭호도 향임(鄕任) 흑은 감관(監官) ·향정(鄕正) 등의 호칭이 더 많이 쓰였다. 직임(職任)을 6방(房)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吏) ·병(兵)방, 좌별감이 호 ·예(禮)방, 우별감이 형(刑) ·공(工)방을 맡는 것이 통상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좌수 [座首] (두산백과)
창충사사적비
아! 상제께서 본성을 내려줌에 있어서 현우와 귀천에 따라 차이를 두어 부여하지 않았으니, 충의는 사람의 본성을 부여받을 때 똑같이 얻은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에 죽음과 삶이 눈앞에서 판가름 나고
이익과 손해가 마음속에서 교차할 때를 당하면, 스스로 글을 읽고 의리를 안다고 하는 사대부라고 할지라도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라 지조를 잃고 나라를 배신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
그러나 향리로서 일이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서 거스름과 순함을 분별하여 난리를 방어하는 데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백성이 지닌 떳떳한 인륜으로 하여금 실추되지 않게 하고 국가로 하여금 덕을 보게 하였으니, 뛰어나게 우뚝하여 가상하지 않겠는가?
영종 무신년에 영남의 역적 정희량과 이웅보 등이 안의에서 거병하여 흉악한 역적의 병화가 먼저 거창에 미쳤는데, 당시에는 화평한 시기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역적의 기세가 등등한 것을 보고서 숨지 않는 새와 짐승도 없었으며 현감이란 자도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거창현의 아전 중에 신석현 · 신극종 · 신덕현 · 신치근 · 신광세 다섯 사람이 있어 서로 이어서 관아의 뜰로 들어와 눈물을 뿌리며 군신의 대의를 진술하였다.
그러나 현감이 끝내 듣지를 않고 밤을 틈타 달아나니 공조는 충의를 위하여 항거하다가 죽고 고을의 일은 더 이상 할 자가 없었다.
다섯 사람이 마침내 물러나서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강개하여 군대를 규합해서 의병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맨 먼저 자제와 조카에게 명하여 옷을 찢어 공조의 시신을 거두도록 명하고 혈서를 써서 깃발을 게시하고 통곡하며 죽음을 맹세하였다.
이에 발이 빠른 사람을 중한 값으로 사서 제영과 제읍에 비밀리에 통지하고
자제를 보내 의병을 일으킨 장수들의 휘하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적도들이 약탈해 간 세목을 탈환하고 임시 수령에게 책략을 도와주었다. 이간질을 행하여 적장으로 하여금 의심하여 망설이게 하고 꼴과 쌀을 모아서 관군을 응접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어 포로가 된 군교 여해달 등에게 회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리고 나라를 위해서 기회를 따라 몰래 도모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적의 우두머리로 하여금 거창에서 한 걸음도 넘어가지 못하고 머리를 나란히 한 채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록 왕조의 위덕에 힘입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취를 공평하게 상고해보면 오직 다섯 사람의 힘이다.난리가 평정되고 공로를 평가하여 신석현은 녹권을 받았으나 신극종 등 네 사람은 사양하고 차지하지 않았다.
뒤에 도신의 계사와 암행어사의 포상을 청하는 계사로 인하여 차례대로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정종 12년은 바로 무신년의 갑자가 다시 돌아온 해로써
성상께서 옛 자취를 생각하시어 특별히 신극종에게 공조좌랑을 추증하였다.
이어서 도신과 대신에게 명하여 포상에서 누락된 사람을 널리 탐문하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하교하기를, “한 집안의 충성이 아울러 여기에서 드러났으니,
신석현 · 신덕현 · 신치근 · 신광세도 신극종의 예에 따라 모두 공조 좌랑에 추증하라.”고 하니,융숭하게 보답한 은전은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무술년에 고을 사람들이 관아의 옆에 다섯 충신의 사당을 세우고 편액을 ‘창충사’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의 헌의로 인하여 성상께 진달이 되고 춘조의 관문으로 인하여 고을에서 제사지내는 비용을 지급하였다.순조 신미년에 부에서 동쪽으로 5리가 떨어진 개봉리의 용함산 아래에 옮겨 세웠는데 사림이 일을 주관하였으니,
어찌 『예기』에 이른바 ‘큰 환난을 물리치면 제사지낸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무신년의 역당들은 관리와 세족으로서 화란을 빚어내고 난리를 선동하였으니 이는 하루아침과 하루저녁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추풍령 이남 중에서 난리 때 잘못되지 않은 곳이 거의 드물었으나 유독 거창에서만 충의가 배출되었으니 공조로서 맨 먼저 죽은 자들은 도헌에 추증된 이공술원과 승지에 추증된 신공명익이고, 또 따라서 의리를 위해서 죽은 자들은 자정에 추증된 조한백과 장령에 추증된 전학령, 고 현감 이우방과 참의에 추증된 이우태, 사인 윤상거 · 어진룡 · 이휘세이니 의사이다.
이 다섯 충신의 경우에는 더욱 위대한 점이 있으니 그 지위는 가장 미천하면서도 그 공렬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제가 본성을 부여함에 있어서 귀천의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어찌 영남의 산악이 맑은 기운을 뒤섞어서 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모아주어 한 때의 화란을 막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피로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이르기를, “지금의 정희량과 이웅보는 옛날의 왕망과 동탁이다.”라고 하였다.
말의 기세가 맑고 늠렬하여 참으로 한 조각 종이로 대군을 물리치는 풍도가 있다고 하겠다. 아!하찮은 여우와 쥐 같은 무리들은 그들의 말한 마디에 가루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의 충성은 귀신에게 질정할 만하며 그들의 공적은 태상시에 기록할 만하니, 이것이 그들이 성상의 표창을 영광스럽게 받들고 사당에서 영원히 흠향하게 된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가문이 미천한 것을 따져서 무시하려고 하니 그것 또한 식견이 천박한 것이다. 그 당시에 명문대가로써 유언비어에 휩쓸려서 스스로 역적의 난리에 연루된 자가 몇 사람이었던가?
그리고 수령으로서 성을 버리고 살아남기를 도모하여 성패를 좌시한 자가 또한 무수하였다. 그런데 저들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다는 말인가?고을의 인사들이 그 일을 비석에 쓰려고 할 때에 신극종의 증손인 신치능이 재유의 신분을 겸해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회암부자께서 항상 절의에 대해서 마음을 두어 산승과 위사와 같은 천한 사람도
반드시 수록을 하여 표창하였으니, 이제 다섯 충신의 비석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내가 어떻게 늙어 병들고 문장을 짓는 능력이 없다고 하여 끝내 사양을 하여 그들의 자취가 매몰되도록 방임해 두겠는가?
마침내 억지로 일어나서 이 비문을 써주어 신치능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비석에 새기게 하였다.이는 장차 천하 후세의 사대부를 부끄럽게 하고 또한 고을의 향리인 자가 혹시라도 향리라고 해서 스스로 하찮게 여기지 말고
임금과 어른을 위해서 죽는 본분을 다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정유년 3월 일.
가의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좨주 시강원찬선
은진 송치규는 비문을 짓고,
숭록대부 전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규장각원임직제학 윤용출은 글씨를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조병호는 전액을 하다.
[原文]
彰忠祠
彰忠祠事蹟碑
嗚呼上帝降裏不以賢愚貴賤而有所豊嗇則忠義之於人性之所同也然猝當板蕩之際死生判於前利害交於中則雖士大夫之自謂讀書知義理者鮮不恇㥘㒺措失身負國而有以鄕吏乃能辨◎順於向背竭誠力於捍禦使民彝不墜 國有頼焉則豈不卓卓然可尙也㢤奧在 英宗戊身嶺南賊希亮態輔䓁稱兵於安義凶鋒先及於居昌時昇平日乆民不知兵猝見賊勢鴟張莫不鳥獸竄爲知縣者亦惧不所出縣吏有慎錫顯 克終 德顯 致謹 光世五人相繼入縣庭雪涕陳君臣大義而知縣竟不廳乘夜而走功曺則抗儀而死邑事更無可爲者五人遂退而同心合力慷慨紏旅結爲義隊乃首命子侄裂衣收㓛曺屍乃血書揭旗痛哭誓死事蹟碑乃重購急足密通于諸營諸邑乃送子弟徃屬于倡義諸將乃奪還賊徒之掠去稅木乃䝺畫方畧於假守乃設行間使賊将疑沮乃鳩芻米以接應官軍且密遣腹心曉諭被擄軍校呂海達䓁使之曰心而向國随機潛圖竟使賊酋不能踰
居昌一步地而騈首就戮焉此雖王靈攸曁而夷考其蹟則繄惟五人之力也亂㝎查㓛錫顯錄券克終䓁四人讓而不居後因道啓繡褒次劑登聞 正宗十二年卽戊身周申也 上感念舊蹟特贈克終工曺左郞仍 冒臣與大臣博採褒賞之見漏者上教若曰一門之忠拜著於是錫顕 德顕 致謹 光世亦依克終例拜 贈工曺左郞 崇報之典可謂無憾矣始在戊戌鄕人建五忠祠于縣司之傍扁以彰忠沚是因政府獻議達于 天聽因春曺門關官給享翼 純祖辛未移逮雰五里開封里龍涵山下士林主管焉豈禮所謂捍大患則祠之者非耶噫戊申◎黨係是縉紳世族而醖釀煽亂非一朝一夕之故也嶺以南不被其詿誤者㡬希而獨於居昌忠義軰出以工曺而首死者即 贈都憲李公述原也 贈承㫖慎公溟翊又従而取義者 贈資正曺漢伯 贈掌令全䳽齡故縣監李遇芳 贈參議李遇泰士人尹商擧魚震龍李暉世義士也至於此五忠者則尤有所偉然者以其地最㣲而其烈最多也始不但帝卑之衷無◎乎貴賤亦豈非南嶠磅礴淸淑之氣鍾此一䓁人物以弭一時禍亂者耶觀其血書之辭曰今之亮熊古之莾卓辭氣凈烈真有尺紙却萬師之風矣唉厼么麽狐䑕宜其言下虀粉也忠誠可質于歸神勞績可紀于太常此其所以光承 睿奬 廟食百世也或者乃欲論以門地而藐之焉則其亦淺之爲知也當是時以巨室而胥動䚹言自比◎亂者㡬人以命吏而棄城圖存坐㸔成敗者亦無數也彼其之子抑獨何心㢤邑之人士将書其事于石克終之曾孫致能以齋儒兼來謁余竊念晦菴夫子每眷眷於節義若山僧衛士之賤亦必收錄而表章之今於五忠之役余何以老病無文終辭而任其埋沒耶遂強起書此俾歸刻焉盖将以愧死天下後世士大夫負義偸生者而亦人州縣之爲鄉胥者㒺或以鄕吏自少而盡分於親君死長也
崇禎紀元後四丁酉三月 日
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舘祭酒侍講院賛善 㤙津宋穉圭 撰
崇祿大夫前吏曹判書兼知春秋舘事奎章閣原任直提學 尹用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