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陷穽 虐殺 함정 학살 - 1950년대 反共의 歷史 1 >
“한국전쟁 중의 대량 학살을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 세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예상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었지만, ‘동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민족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보다 더 잔인했다.
한국전쟁 중 저질러진 ‘뿌리 뽑고 씨 말리기’ 가운데 그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학살극은 이른바 ‘나주부대’의 학살 사건일 것이다. ‘뿌리’와 ‘씨’가 잘 안 보인다는 이유로 경찰이 인민군으로 위장해 벌인 ‘陷穽 虐殺’이었기 때문이다.
나주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1백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 해남, 완도, 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
이 같은 ‘함정 학살’은 해남과 완도 지역의 여러 곳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이들의 위장술은 탁월했다. 인민군 복장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을로 들어설 땐 오랏줄로 묶은 우익인사들을 앞장세우고 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들을 인민군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주부대의 일부는 마을을 돌며 좌익 색출 작업을 벌이기도했다.
인민군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공산당을 좋아하느냐’고 묻곤, 좋아한다고 그러면 그
자리에서 사살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완도군 일대의 섬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후, 이 마을의 적지 않은 집은 매년 어느 날 똑같은 제사상을 차리게 되었다. ‘뿌리 뽑고 씨 말리기’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p.49~52)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1장 ‘194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이런 식의 학살 사건이 한국전쟁 중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미군과 국방군, 그리고 서북청년단에 의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피카소의 그림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 그런 반면, 여러 가지 소문만 존재할 뿐 인민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피의 악순환’, 즉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극우테러집단들에 의해 5년 동안 이루어진 학살과 테러와 수탈로 당한 피해자들이 한국전쟁 후 미처 도망치진 못한 친일경찰과 친일파 악덕 지주, 기업주들에 대해 보복한 사례는 종종 들었지만…
○ 강준만씨가 자주 인용하는 박명림씨 역시 구체적인 사례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은 채 ‘좌우익의 씨 말리기’라는 식으로 ‘그 놈이 그 놈이다’라고 규정짓습니다. 양민학살에 나선 미군이나 친일경찰, 서북청년단 같은 자들은 ‘우익’이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익과 권력에 미친, 광기에 사로잡힌 극단적인 학살자들일 뿐입니다. 무언가 양비론을 펼치더라도 사실과 근거를 토대로 전개해야 하고, 경중과 인과를 따져가면서 역사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
< 한글의 수난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2 >
“이승만 체제하에서 반공(反共)은 공산주의에만 반대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북한 공산당이 하는 것과는 무조건 반대로 나가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정 당시 제헌의원들 사이에는 적잖은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언어 전쟁’이었다.
1946년 6월 초 국회헌법 기초위원회에 제출된 헌법 초안에는 일괄적으로 ‘인민’이란 용어가 사용됐지만, 제헌의회에서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이째서 그런 말을 쓰려 하는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의 사싱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조봉암이 “‘인민’은 미국, 프랑스, 소련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단지 공산당이 쓰니까 기피하자는 것은 고루한 편견일 뿐이다.”라고 반격하고 나섰지만,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이 극심했던 터라 제헌의원드은 결국 ‘인민’ 대신 ‘국민’을 서낵했다.
이 결정에 대해 유진오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국가우월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반면, ‘인민’은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의미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좋은 단어는 ‘인민’ 하나가 아니었다.
단독정부 수립 후, 민중들은 조선이라는 말도 빨갱이들이나 쓰는 말이니 절대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인지라 문맹이 대다수였고 대한민국이란 국호조차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은 시절인지라 조선을 나라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빨갱이들이 쓰는 말이니 절대 써서 안 된다”고 말해도 ‘무심결’”에 조선이라는 말을 이에 올려 용공으로 몰리는 일마저 발생했다.
1950년 한글전용을 반대하며 한자 사용을 건의했던 국회의원들은 “현행 국민학교에서 쓰고 있는 교과서는 이극로가 편찬한 것인데, 그러한 반역자의 손으로 된 교과서로써 제2세 국민을 교육함은 불가하다.”면서 “한글전용주의는 월북한 이극로주의”라고 야비하게 공격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한글전용 운동가는 빨갱이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중략)
결국 이극로가 지었던 <한글의 노래>는 국가정책에 의해 금지됐고 1951년 10월 9일 한글날부터는 최현배가 지은 <한글노래>가 불려지기 시작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동무나 동맹이라는 말도 친구나 연맹이라는 말로 바뀌어져갔다. 특히 동무라는 단어는 동요 속에나 간혹 남아 있었을 뿐 일상에서는 ‘친구’라는 말로 바뀌어져 갔다.
이유는 단 하나, 북한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1장 ‘1940년대의 반공’ 중에서…
○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 하나를 빼앗겼다” 이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표현도 없을 겁니다. 단지 이념이 다른 국가에서 사용한다는 이유로 단어, 언어,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나치즘이나 일제와 같은 파시스트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사람이 좋은 단어,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은 언어생활이나 문화, 사상, 연구, 학습을 위해서도 강조됩니다.
○ 남과 북이 굳이 체제간 대결을 한다손 치더라도,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이 아니라 공정하고 평등하게 경쟁을 하려면 ‘인민’이나 ‘조선’이라는 단어를 버릴 게 아니라 어느 체제가 ‘인민’과 ‘조선’의 원래 취지와 개념을 더 잘 살리는지 경쟁해야죠.
○ 어찌 보면 진실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단어를 빼앗긴” 게 아니라 당시 이승만 일당이나 친일파들, 권력자들이 ‘인민’이는 단어가 가진 진정한 의미, 즉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부정하고 싶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에게 좋은 단어”가 아니라 주권자, 인민, 민중에게 좋고 필요한 단어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념의 탈을 씌워 없애버린 것이죠. 이들은 정말이지 역사의 죄인이자 민족의 죄인입니다.
○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에서 나타난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치주의는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냐” 여부가 아니라 “헌법의 취지에 맞느냐”가 모든 법 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주장대로라면 궁극적으로 북한이 주장하는 모든 것, 즉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거나 인민의 삶을 개선시킨다거나 노동조합을 보호하고 기업의 횡포를 단죄하고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재단하려고 덤빌 것입니다.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를 기각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수 정당의 보호하거나 사상,양심의 자유를 수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처럼 헌법을 지키고 언어도단과 이념과잉을 한국사회에서 파탄사키야 하기 때문입니다.
-----------------------
< 줄서기의 고통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3 >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한 후, 여성 정치가 박순천은 “죽거든 다시 조선에 태어나지 말 것이며, 이제는 더 살고 싶지 않다는 것, 현재는 두 가지 소원 밖에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을 뿐, 우선 당장 급한 건 생존이었다. 생존은 ‘줄서기의 고통’을 요구했다.
서슬이 시퍼렇던 군인과 경찰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반동분자로 몰려 추궁을 받던 공산주의자와 동조자들이 문자 그대로 자기들 세상을 만났으니,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민중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삶의 철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념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할 당시 서울에 남아 있었던 최명연이 “나는 어디에 줄을 서야 될지 모르겠는 거야”라고 말했듯이, 이들에겐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바르냐”는 등의 명분 혹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었다.
이들의 촉수는 온통 “당장 어느 쪽인 척해두는 것이 우선 위험”을 “모면하고 나중에 가서도 말썽이 없을 것이냐”에 가 닿아 있었다.
자신들만 살겠다고 꼬리에 불붙는 여우새끼처럼 정부마저 내빼버린 상황이었으니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으랴. 김원일은 소설 <불의 제전>과 김용성의 소설 <도둑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사학자 김성칠은 1950년 7월 2일자 일기에서 대한청년단의 간부로서 부지런히 일하고 또 언젠가는 자신에게 청년단의 교양강좌를 맡아달라고 조르던 청년이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자, 그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참 좋은 세월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제까지 반공청년단 생활을 하다 ‘참 좋은 세월이 왔다’며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어디 그 청년 하나뿐이었으며, 방공 단체의 열성분자로 눈망울을 굴리다가 옷을 갈아입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것이 그 시대의 생존방식이자 처세술이었다.
서울에 잔류했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공산주의 만세’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때 증오와 박멸의 대상이었던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서울에 잔류한 모든 사람들의 집에 내걸린 것은 물론이고, 집마다 대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우리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세계 약소민족의 벗 스딸린 대원수 만세” 등의 표어가 붙었다.
지방에서는 어떠했던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의 한 대목이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난 아주 나쁜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우리 고향에는 한동안 경찰대와 지방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드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또 마을을 찾아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우리 집까지 찾아와 들어와서 어머니하고 내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깃불을 얼굴에다 내리 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전깃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무서운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채 대답을 해야 할 사정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깃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p.63~67)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증오는 증오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증오가 아닌 대화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마음 속에 담아둔 증오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60대 이상의 노인세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20대~40대 사이에서 나타나는 북에 대한 증오,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증오, 범죄자라는 이유로 퍼붓는 날 선 증오 역시 문제입니다. 법과 상식과 이성을 통해 법치주의와 법에 의한 공정한 처리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진 증오의 모습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재현되는 느낌이 듭니다. 극우들과 생계형 어버이연합이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다 하여 야권에서, 진보진영에서 똑같이 그들에게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것은 악순환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성과 상식과 대화와 법치가 실종됩니다.
아무리 범법자라고 해도, 친일파 독재자 살인자라도 해도 죄를 미워하고 죄를 잉태한 구조와 문화를 고민하고 법치를 통해 단죄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
< ‘도강파’의 ‘잔류파’ 처단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4 >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자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인공기 대신 태극기를 내다 걸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수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했지만, 수복 당일부터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잔류한 사람들을 배제한 도강파의 울타리 치기는 빨갱이 사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떤 사람은 “피란 갈 기회를 놓쳐 서울에 남은 사람은 몽땅 빨갱이란 말인가?”라고 항변했지만, 인민군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는 사실은 자신이 빨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쓰였다.
박완서는 반공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 가운데서도 ‘도강파’라는 특권 계급이 생겨났으며, 적 치하에서 부역한 빨갱이들을 유치장이 메어지게 잡아들이고 즉결처분도 성행했다고 말한다.
“저기 빨갱이가 간다는 뒷손가락질 한 번으로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 사례도 있었다. 워낙 저지르고 간 일이 엄청났으므로 뒷손가락질해 주고 싶은 사람도 많았으리라. 고발과 밀고가 창궐했다. 따지고 들어가면 공산 치하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다. … 정산은 참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라는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애국과 반공을 명분으로 한 우익청년단체들이 수없이 결성됐고 공산당의 악행을 규탄하는 구호와 성명이 거리의 벽마다 도배를 하다시피 넘쳐났다.
박완서에 따르면, 도배된 내용은 “하나같이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고 적색분자를 남김없이 색출해 이 참에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격렬하고도 호전적인 것들이었다.”
공산군의 만행을 알리는 보도사진전도 곳곳에서 열렸다.
대학에서도 빨갱이 사냥이 시작되었다. 박완서의 기록이다.
“공산 치하에서 학교에 나간 것은 명백한 부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벌이 무서워 학교 앞엔 얼씬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마다 학도호국단 감찰부에서 학생을 심사하는데 학교에 따라서는 가혹행위도 한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민군을 치료해주었다는 이유로 한 의사는 계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재판관의 판결 내용은 이랬다.
“훌륭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 법정은 훌륭한 일을 캐는 곳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피고가 적군 장교를 살렸다는 사실과 그것은 그만큼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아군에게 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피고가 성실을 다해 일했다는 만큼, 그 죄과는 큰 것이다. 성실을 다했다는 사실은 피고가 자백했고, 본 법정에서도 인증했으니까 증거는 필요치 않다고 본다. 민족 기풍을 바로하기 위해서…””(p.68~71)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시민들은 서울에 남겨놓고 새벽 어스름을 틈타 도망친 자들… 이들의 적반하장은 끝이 없죠.
이승만과 국방부 관료, 정치인과 자본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해방 후 미-소간 냉전논리에 편승해 일찍부터 통일정부보다 단독정부를 추구하며 전쟁을 선동했고, 친일파의 척결에 반대했으며 대다수가 친일파 출신 군대의 장교들, 정치인들과 친일지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후예들이 현재의 극우보수세력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죠.
○ 군사주권을 외국군대에게 넘겨준 자들이 ‘자주국방’을 외치고, 요리조리 국방의 의무를 방기한 자들이 모여 ‘애국’을 부르짖으며 군대에 복무한 이들을 종북으로 규정하며, 국가비밀기록인 정상회담록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국내의 고급기밀을 해외에 넘겨주는 자들이 ‘국가안보’를 외치는 작금의 사태는 ‘도강파’가 ‘잔류파’를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는 세태의 데쟈뷰라 할 수 있습니다.
-----------
<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빨갱이"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5 >
"이승만 정부가 나서서 빨갱이 사냥을 하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의 탈을 쓰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대명천지에 반공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아니, 반공은 사실 포장지에 불과했고, 빨갱이들에 대한 응징의 연료는 복수심이었다. 말끝마다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치안대원들은 수복이 된 후, 도망가지 못하고 남은 부역자의 부인들을 한 곳에 못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들. 때려죽여도 죄는 따로 남을 빨갱이 새끼들. "기다려, 이 개년들. 빨갱이들은 모조리 씨를 말릴 테다. 네년들에게는 총알도 아까워. 내 마누라 내 새끼들처럼 대창에 한 줄로 꿰어 산 채로 묻을 테다."
가족이 몰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홍세화의 증언이다.
"인민군이 밀려 올라갔다. 즉시 보복이 시작되었다. 우선 일곱 명이 몽둥이로 타살되었다. 그 외에도 이른바 반공 청년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중에는 우리 일가족 종손인 나의 오촌당숙이 있었다. 그는 마을의 인민위원장이었다. 피를 본 마을사람들은 더욱더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 그리고 복수의 피였기에 또다른 복수의 씨앗을 아예 없애버려야 했다. 오촌당숙의 가족은 물론 먼저 처치한 일곱 사람의 가족도 하나하나 없앴다. 어린애도 예외가 없었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도 죽였다. 그리하여 그 크지 않은 마을에서 80명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갔다."[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비, 1995]
(중략)
면에서 '빨갱이 색출'에 대한 할당량이 내려온 곳도 있었다. 황해도에 살았던 김일만은 면에서 좌익 색출 성적이 나쁘다는 지시가 내려와 할 수 없이 좌익과 그 가족들 50여 명을 생매장했다고 증언했다.[김귀옥,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 서울대출판부 1999]
빨갱이 목숨이 벌레만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여자의 몸 하나 건드리는 것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한 마을의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오빠를 두었던 예쁘장한 한 여대생은,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수복 후 치안대 수색반장에게, 경찰에게, 그리고 치안대원들에게 강간당한 뒤 '생매장' 당했다.
어떤 여인은 반공 청년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하고 남편이 매 맞아 죽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후 자신도 매를 맞아 죽었는데, 그녀가 죽자 반공 완장을 두른 청년들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이 쌍년아 빨갱이년아 지옥에나 가거라"[고은, <만인보> 창비 2004]
수복 후, 서울에는 "심지어는 골육지친(骨肉之親)간이라고 해도 총 검거하여 토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다보니 피난을 가지 못했거나 부역 혐의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었떤 사람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불쑥불쑥 나타나 가족과 친지들을 모아놓고 "빨갱이를 숨겨두면 무슨 죄에 해당하는 줄 아느냐"고 닦달을 하였다. 이럴 경우에도 역시 닭을 잡고 술을 내와 경찰들을 대접해야 했으며, 심지어 돌아갈 때는 돈까지 주머니에 찌러줘야 했다.
부역자 처벌이 극에 달하자 '부역자'로 몰릴까 두려워 입산하는 일도 발생했다. 예컨대 인민군 치하에서 면 서기장을 했던 김종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그는 산 속에서 2년 넘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자수하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주어 읽고도 자수하러 내려갈 수가 없었다. 자수하면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실제 자수한 사람들 가운데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산 생활에 지쳐 그는 결국에는 자수를 하게 되는데, 이후 경찰들이 예고 없이 수시로 찾아와서 일상적 삶을 감시했다고 증언했다.[표민주 외, <전쟁과 사람들> 한울아카데미 2003]
반공의 이름으로 갖은 약탈도 자행되었다.
군인과 경찰마저도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부역 혐의자의 재산을 임으로 몰수하여 가로채거나 무단 점유했다. 이 와중에 '양민'의 재산까지 강제로 차압하는 일마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빨갱이를 도와주려고 마음먹는 일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빨갱이에 대한 투철한 신고 정신의 이면에는 바로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자리잡고 있었다."(p.7~76)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50년대 이승만 정권이 '반공'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빨갱이 사냥'은 2014년 박근혜 정권이 '종북'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부정선거, NLL 대화록 유출, 내란음모 사건 조작, 진보당 해산청구, 황선-신은미씨 강연에 대한 테러, 탈북자단체의 삐라 살포, 천안함 사건 조작, 세월호 사건 조작 등이 연상됩니다.
○ 전쟁과 '반공학살'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여성과 노약자, 가족, 친지들입니다. 걸핏하면 전쟁과 종북타도를 외치는 이들은 전쟁이 평범한 사람들과 약자들에게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참하고 공포스러운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종북공세와 반공이데올로기,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차별, 무한정, 극도의 증오와 공격을 내버려두면 차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 한반도의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장 내 일이,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고,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방치했을 때 과연 당사자와 그 가족들, 지인들는 그 폭력과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50년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지금의 70대 이상 노인분들 대부분이 언론이나 극우세력의 종북공세에 보이는 알레르기 반응은 세뇌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과거의 경험과 관찰에 의한 무의식적 생존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에 그분들과의 대화도 공감도 가능할 겁니다.
----------------
< “그 사람 빨갱이에요!"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6 >
“9.28 수복 당시 미군에게 “웰컴?”을 외치며 환영했던 방송작가 한운사는 미군과 악수하는 자신을 보고 한 여자가 “그 사람 빨갱이에요!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도 환영했어요!”라고 증언하는 바람에 큰 홍역을 치렀다고 했다.
다행히도 그는 소년 형무소에서 국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서울대 동문을 만나 무사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런 고발과 밀고는 남한 전역에서 창궐했다.
소설가 박완서의 집안은 의용군에 끌려간 오빠 때문에 수복 후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박완서는 “빨갱이 집이라고 고발을 해서 청년단원들이 몽둥이와 총을 들고 달려와서는 집안을 들들 뒤지고 쓸 만한 기물을 파괴하고 만삭의 올케의 배를 몽둥이 끝으로 쿡쿡 찔러보는 행패를 동네 사람들은 굿 구경하듯 신명까지 내며 즐겼다”고 말했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은 것이 죄가 되느냐고 동네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으나, 그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독종이니, 빨갱이 족속치고 말 못하는 빨갱이 없더라느니 하는 욕이나 먹는 게 고작이었다.”
박완서의 말대로 그 시절은 “빨갱이라면 젖먹이 어린 것까지도 덮어놓고 징그러워하고 꺼리던 때였다.” 그래서 이 시절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사람이었다.
구혜영의 소설 <청계천 맑을 무렵>의 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시민이 후퇴한 후라 인기척이 그리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저 치는 빨갱이에요. 의용군으로 자진 지원해 나갔던 빨갱이새끼란 말이에요’하고 당장 손가락질 한 번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 지금은 내가 북송되는 의용군 대열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왔다는 따위에 아무런 관용을 부여할 틈도 없었으며 오로지 저놈은 한때 의용군이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총살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는 그런 판국이었던 것이다.”
고발과 밀고가 창궐하는 가운데 무고한 사람들도 도매금으로 매도되어 학살을 당했다.
자신들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일도 적지 않게 발생했고, 개인적 원한관계에 의해 부역자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은의 시 ‘수복 이후’다.
"인공 3개월/ 수도 서울은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 / 인공 부역자 40만 명/ 사형/ 무기/ 징역 30년/ 15년/ 5ㄴ녀/ 밀고로 검거되었다/ 무고로 색출되었다/ 오랜 적대자를/ 빨갱이로 조작 고발했다/ 서대문형무소/ 무기수 김청랑/ 눈썹과 눈썹 사이/ 검은 사마귀 늘 경건했다/ 인공시절 서울시 인민위원회 궐기대회/ 단 한번 참석한 일밖에 없었는데/ 빚진 자 유민우의 모략으로/ 궐기대회 악질 선동자로 기소되었다/ 그는 고문으로/ 영양실조로/ 우울증으로 죽어갔다/ 끝의 노졸중으로 죽었다/ … / 사체 인수자도 없었다/ 경기도 감단산 기슭 형무소 무연고자 묘지 풀밭에 묻혔다”
전남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동생을 잃은 이병희는 인민군 치하에서 해남분지소에 붙잡혀 있던 동생을 죽인 경찰을 찾아가 “어디 또 죽여봐라. 나도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는데,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해남이 다시 수복되자 다시 경찰로 일하게 된 사람에게 괘씸죄에 걸려 ‘블랙리스트’에 올라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 이병희는 해남에서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이병덕과 친척이었는데, 경찰 앞에서는 대한청년단도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병덕은 자신의 종형인 이병희가 경찰에게 ‘괘씸죄’에 걸려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술회했다.[권병기, ‘우익단체 대한청년단 간부출신 노인의 고백’ 한겨레 2003]”(p.77~80)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빨갱이 사냥'은 엇그제 황산 테러를 저지른 청소년과 서북청년단을 부활시키겠다는 광신도 같은 극우집단이 연상됩니다.
1950년대 '빨갱이 사냥'이 60년이 지난 지금 '종북몰이'로 되살아 났습니다.
○ 이 글을 읽으면 노인세대가 이북이나 빨갱이, 좌파 또는 종북이라는 단어에 왜 그렇게 민감한지를 다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담보로 선택을 강요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모함하고 탄압하는 이들과 그들의 범죄를 조장히고 방조한 독재정권이 한국인들을 병들게 한 셈입니다.
○ 50년대의 빨갱이 사냥은 21세기 종북몰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정치세력은 주권자들을 협박 통치하기 위해 마녀사냥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썩은 세력에게 빌붙어 떡고물을 얻어 먹으려는 기생충 같은 이들이 잎장 서서 선동하고 백주대낮에 테러와 폭력을 일삼게 되는 겁니다.
○ 양심적인 지식인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두려워 주저하게 되면, 광기는 더욱 게승을 부리게 되어 결국 이병덕 씨처럼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되며, 두고두고 후회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
< ‘희생양 만들기’와 ‘죄의식 털어내기'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8 >
“인민군 치하에서 본의 아니게 마을의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했던 한 여인은 수복 이후 마을에서 빨갱이의 대명사가 되어야 했다.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이 여인이 한 일이라곤 “수류탄을 움켜 쥔 소년 병사가 탱크 위에서 절규하고 있는 포스터며,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이 박힌 사진, 그리고 ‘모여라 여성들아 - 붉은 깃발 아래로!” 따위가 적힌 백로지를 공회당의 담벽에 붙이고, 부녀자들에게 그들이 일러준 노래를 가르치고, 마을을 돌며 곡식이며 가축 같은 것들을 공출해 오는 일이 고작”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복 이후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확 달라졌다.
김성동의 소설 <잔월>의 한 대목이다.
“즌쟁이 끝났다. 서양 병대가 거시기 호줏기라나 뭐라나루 디립다 몰구 올라오며 폭탄을 던지는디, 아 북선 병대는 일패도지라는겨, 시방. 만서이 부른 사람은 죄 쥑인다넌디, 우리게는 워치게 되는겨. 아따 이 사람덜 보소. 우리네 무지렝이 뇡사꾼덜이야 저저금 지 목심 살자구 부른 만서인디, 무슨 조이가 있다나. 조이가 있길. 그래두 앞대가리 나섰던 사람은 온전하지 못헐 거라는디, 끙.”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 여자를 바라보았는데, 어느덧 싸늘한 눈초리로 변해 있었다. 만세를 부르지 않았거나 도라우찌를 쓴 사내들이 시키는 일을 한 가지라도 안 했던 사람은 구렛굴에서 한 명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모든 잘못을 그 여자에게로 몰아붙이려는 눈치였다. 마침내 총 멘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구렛굴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목이 찢어지라고 만세를 불렀다. 그 여자는 포스줄에 묶여서 개처럼 끌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부역자의 재산은 집어가는 사람이 임자이며, 따라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에 벌건 핏발을 세운 사람들은 느려터진 말소리와는 달리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자기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반반한 것이라면 하다못해 살강에 얹어둔 간장종지까지 죄 훑어가 바렸다.”
한국전쟁을 겪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집에서 보리감자만 쪄도 집집이 돌리며 웃음으로 나눠 먹었”을 만큼 정이 많았던 공동체 마을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불신과 미움이 지배하는 마을로 변해버렸다.
문순태의 소설 <말하는 돌>이다.
“눈에 핏발을 세운 그들이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이 어느 놈이냐면서 뿌드득 뿌드득 이를 갈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창 깍아 들고 한데 어울려 횃불 밝히며 산을 오르내리던 젊은 사람들이 동짓달 서릿발에 구절초 꽃잎 지듯 죽은 듯 숨을 죽였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날 아침 우르르 부면장 집으로 몰려오더니, 쇠죽을 끓이고 있던 아버지의 목에 삼으로 꼰 밧줄 훌라이를 걸고 개 끌 듯 끌고 나갔다. “부면장 어르신 쥑인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놈이 부면장네 살림을 차지할라고 눈이 뒤집혀서…” 아버지를 끌고 나가면서 그들은 목청껏 소리쳤다. 아버지는 “이눔들아, 네눔들 죄를 왜 나한테 뒤집어쓰우냐. 천벌을 받을 눔들아.”라고 외쳤다. …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도 마을 앞 돈들막 위에 모여 서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까치산 계곡에서 울려 오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심장에 송곳질하는 아픔을 참으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말릴 생각은 않고 무표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난리가 끝나가면서 이성을 회복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성이 회복될수록 죄의식과 함께 후회도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식을 털어내야만 했다.
전상국의 소설 <외등>의 한 대목이다.
"빨갱이긴 했어두 다른 빨갱이들하곤 좀 달랐지유.” 붉은 완장을 차긴 했어도 속은 달랐다는 애기였다. 다른 빨갱이들과는 달리 하암리 사람들 편을 드는 그런 입장을 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장 죽을 사람을 발벗고 나서서 구해 주는 등 자기깐에는 하암리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라고 했다. 실상 난리 뒤에 사람들은 표선생 부친으로부터 조금씩은 다 도음을 받은 걸 은연중 시인했다. 그러나 인심이란 묘했다. 막상 세상이 또 뒤집히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다. 빨갱이에 사과고 도마도가 어디 있느냐 애기였다. 완장을 찼으면 다 자기들에게 고통을 준 원수였다. 죄가 더 있고 없고를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표선생 부친이 북쪽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았다가 죽임을 당한 것도 그런 인심 속에서였다.
하룻밤 사이에 다 도망쳐 버린 빨갱이들에 대한 앙심까지 얹어 표선생 부친을 눈 딱 감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표선생 부친이 죽고 나니까 하암리 사람들은 마음 속에 꺼림칙한 그림자를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말 한마디만 거들어 주었어도 죽임까지 당했겠느냐 하는 표선생 부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죄의식이 문제였다. 그네들은 가슴속에 죄의식이 살아올라올수록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그 망할 놈이 글쎄 봐주는 척 해 가지고 제 욕심은 다 채웠다니까.” 이처럼 표선생 부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심지어는 표선생 부친이 생전에 했던 몇 가지 비행을 과장해서 떠들어대는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오히려 표선생 부친은 살아서보다 죽은 다음에 더 많은 죄를 짓는 꼴이 돼 버렸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하암리 사람들은 그 이름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p.84~88)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강준만 교수는 심리학적 논리로 ‘희생양과 죄의식’을 설명하지 못하는군요. 소설 몇 권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뿐…
○ 이 글의 제목인 ‘희생양 만들기’와 ‘죄의식 털어내기’는 심리학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심리학자 김태형 씨는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변방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중에 ‘폭력적인 아버지와 세 아들’의 관계를 통해 첫째, 둘째 아들이 일방적으로 매맞는 세째 아들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내기 위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셋째 아들이 마치 ‘잘못이 있어서 매를 맞는’ 것처럼 스스로의 기억과 의식을 조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 한국전쟁 등 암흑기 한국현대사를 거친 한국의 노인세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위 글과 소설에 등장하는 과정을 겪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악당들과 기회주의자들에게 희생당했던 선량한 이들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을 바꾸어 그들의 죽음을 방치, 방관했던 스스로의 죄를 털어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만큼 노인세대의 기억은 왜곡되어 있고 폭력적인 권력자들과 하수인들의 세뇌에 갇혀있는 것이죠. 노인세대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프게 다가 오는 이유입니다.
○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 뿐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이명박 정권을 거쳐 오면서도 그러한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욕망을 위해 유신독재와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이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막장에 부역했던 이들 그리고 방치, 방관했던 지식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기득권에 편입하며 저지른 잘못과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내기 위하여 오히려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향해 한 몸 던지 무수한 민주통일 인사들을 ‘종북’ ‘친북’으로 낙인찍고 고발하고 탄압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7~80년대 이후 변절하고 고발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보이는 인사들의 심리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을 아무런 과정 없이 용서하거나 묻어둘 수는 없죠...
--------------------
< 광기에 전염된 아이들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9 >
"시인 고은이 말했듯, 아버지가 빨갱이면 자식도 빨갱이고 아내도 빨갱이, 심지어는 그 집에서 기르는 개도 빨갱이네 개였다. 빨갱이를 아버지로 둔 아이들은 학교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도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피 맛에 흠뻑 절어 살자 어린아이들도 덩달아 '빨갱이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형이 부역 혐의로 참담한 죽음을 당했던 소설가 이문구가 초등학생 시절 겪었던 경험은 참혹했다.
수복이 된 후, 이문구의 짝으로 들어온 아이가 다름 아닌 전쟁중에 인민재판을 받고 죽음을 당한 전직 기관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수의 자식이 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했던 것이다. 당시 이문구를 가르쳤던 담임선생의 말이다.
"이문구 옆에 앉힌 열여덟 살짜리 아이하고 그 집안 식구들은 9.28 수복이 막 되니께 눈이 시뻘개져 가지고, 공산당한테 당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손에 몽둥이, 낫, 쇠스랑 같은 것들을 들고, 사변 당시까지 좌익의 두목이었던 집으로 처들어갔소 그랴. 헌데, 그 집에는이미 죽어야 할 사람들은 다 죽고 허연 노인이 혼자서 족보만 지키고 앉아 있었겠지요. 그들은 그 노인을 놔두고, 좌익 두목의 열 살 먹은 넷째아들을 잡아 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집 안을 발칵 뒤졌습니다. 아주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었겠지요. 다행히 열 살 먹은 그 넷째아들은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그 넷째아이가 바로 이문구였다. 이문구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고난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문구의 말이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 대신 세간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책상, 의자, 찬장, 항아리 따위, 그들은 깨뜨릴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박살을 내었다. 그리고 곡식, 간장, 고추장, 소금 같은 먹을 만한 것들은 알뜰히 챙겼다. 그들은 노획한 적산재물을 지고 이고 끌고 가는 것으로써 전과를 올렸다. 그러니까 그날 달아나지 않았으면 맞아죽었을 아이와, 잡기만 했으면 단매에 요절을 내리라고 벌렀던 아이가 한 교실 한 걸상에 앉아 한 책상을 쓰며 입시준비를 시작하게 된 거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이와 바로 옆 자리에 앉아 학교생활을 해야 했던 이문구는 훗날 "그것은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할 만큼 가장 참담한 고통이었으며 광야의 시련기였다."고 회고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아이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들도 증오와 복수의 포로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의 잔인함도 어른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현길언의 소설 <우리들의 어머님>의 한 대목이다.
"6.25 이후 그 어수선한 시기에, 공산당이나 괴로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학예회 때면, 꼭꼭 '용감한 국군의 무용담'이 극으로 꾸며졌는데, 그는 늘 배역에서 제외되었다. 3학년 가을 학예회 때였다. 어쩌다 그에게 괴로군 대장 역이 맡겨졌다. 그는 거절했다. 2학기 때에 새로 부임해 온 담임은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안 맡겠다고 그 고집이니?" 달래듯 물었으나 그는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그때였다. "개 아버지가 폭도라서 그럽니다. 폭도 아들이 괴뢰군 대장 노릇하면 두식이는 진짜 공산당이 되는 것 아닙니까?" ... 담임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그가 후딱 몸을 날리더니 그 조잘거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교실 한가운데서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폭도새씨가 진짜 폭도답게 노는구나!" 담임도 손쓸 사이가 없이 학급 애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그를 덮쳤다.
이 일 이후, 이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읍내 중학교로 전학시켜버렸다. 그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에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집에 오지 말아라. 방학이 되어도 고향 올 생각은 마라. 내가 널 찾아가마"고 신신 당부했고, 아들이 대학을 나와 서울에 직장을 마련한 후에도 고향 땅에 내려오지 못하도록 했다. 어머니의 이런 부탁 때문이었을까? 두식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년에 한두 번,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저물녘에 와서 쫒기듯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울에 직장을 얻고부터는 아예 고향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빨갱이 아버지를 둔 한 아이는 자기 자신을 비하했다."(p.89~92)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최근에 신은미, 황선 씨의 '통일콘서트'에 황산테러를 저지른 오 모군이 연상됩니다. 세월호 농성장에서 폭식테러를 자행한 젊은이들도...
○ 정권과 정치권 그리고 언론과 기성세대가 무차별적으로 반공반북 선동을 일삼으면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태경 같은 뉴라이트 극우 정치인이 사적 테러를 옹호하고 비호하면 사태는 악화될 수 있습니다.
○ 21세기 벌건 대낮에 무능하고 무책임한 언론과 정치권이 한국사회에 '광기'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이건 범죄행위이자 사회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짓입니다.
----------------
< '작은 모스크바’의 추억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10 >
“해방정국에서부터 ‘작은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 활동이 왕성한 지역들이 적잖이 존재했다. 일찍부터 이런 마을들이 우익청년단체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원규의 시 [제2의 모스크바]의 한 대목이다.
"산돼지골 아래/ 하내리/ 해방되고 당신이 인민위원장이 되었을 때/ 난리나고 당신이 의용군 사령관으로 왔을 때/ 관에서는 하내리를 제2의 모스크바라 불렀지요/ 면지서 불사르는 빨갱이 동네/ 자고 나면 지천의 삐라 동네/ 인민군 해방구, 빨치산 해방구/ 청년단장 김석주는/ 담 넘어 봉창 아래 총을 들고 숨었지요/ 뱁새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잡으려고/ 날마다 밤마다 벼르고 있었지요/ 빨갱이 새끼, 빨갱이 여편네/ 잠 못 자고 떨었지요."
월북한 남편을 둔 아내의 고초를 담은 [당신이 가신 뒤로]의 한 대목이다.
"빨갱이 동네, 제2의 모스크바/ 젊은이들을 패죽이고 짐승 취급했지요/ 지는 날마다 본부에 끌려가 개처럼 맞지만/ 손톱 밑에 대침을 꽂아도, 고춧가루 퍼부으며/ 한나절 문초당해도 지는 괜찮구만요"
경기도 이천군 오두리도 ‘작은 모스크바’의 아픔을 겪은 지역이었다. 이천군에서 좌익 세력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오두리는 일찍부터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혀 우익청년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대한독립청년단원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덮어놓고 빨갱이라고” 주민들을 폭행하고 다니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오두리의 수복 광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군경은 60여 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을 철통같이 포위한 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은 후 성인 남자 대부분을 지서로 연행해갔다. 당시 끌려갔던 86명 중 일부는 생사의 갈림길을 방불케 할 만큼 혹독한 조사를 마친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10여 명 가량은 이천경찰서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또 다른 시련이 남아 있었다. 부역자와 부역자 가족들에겐 군경과 우익 단체의 폭행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고, 이 가운데 일부는 논을 비롯한 재산을 빼앗겼으며 이를 견디다 못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상적 폭행은 부역 혐의와 관련이 없는 ‘양민’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요컨대,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히면 부역 혐의와 상관없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 후, 오두리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찰계 형사가 밤낮 없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감시한 것은 기본이었다. 공포 부누이기가 마을 전체를 짓누른 가운데 한국전댕을 겪고 난 후에 “이방인같이” “정이 없어” 졌고 “웃음도” 사라졌으며, “이웃집과 서로 말도 안”하는 “암흑 시대”가 도래했다.
그뿐 아니다. 빨갱이 마을이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그 동네”에는 “이사도 가지 마라, 그 동네랑은 혼인도 하지 마라”는 등의 소문도 들끓었다.
예산군의 ‘작은 모스크바’로 불렀던 시앙리의 상황도 오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복 후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 마을은 ‘카오스 상태’였는데, 이 기간에 우익 가족들의 잔혹한 복수극이 시작되었다.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한다.
“학살된 마을 사람들의 가족들이 나타나서 부역했던 사람들을 잡아서 때렸어. 읍과 면에서 대창을 가지고 마을사람들을 다 없애겠다고 마을로 왔어. 이 마을이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리었기 때문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심부름 좀 하고 했던 사람들이었어. 우두머리들은 이미 모두 가고 없었어. 그이들 중 많은 사람이 아직도 행방불명이지.”
수복 후, 시앙리는 빨갱이 마을로 인식되어 우익들의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시앙리 사람들은 외부인을 두려워했으며 한동안은 공포와 좌절 속에서 살아야 했다. 특히 시앙리 내 감골의 경ㅇ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에서 오는 사람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면의 이름만 들어도 숨었다고 한다.
이런 '범주의 폭력’은 비단 ‘작은 모스크바’로 규정된 마을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도 ‘범주의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p.93~96)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2014년에도 '종북몰이'란 이름의 '범주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고, 도처에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 해방 전후 시기에 동북아시아 사람들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소개된 대표적인 사회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계열이었던 일본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이 조선말부터 한반도에 대해 저지른 제국주의적 약탈행위가 광범위하게 알려졌기 때문에 조선민족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인사들의 대다수가 민족주의 좌파, 즉 좌익계열의 성향을 보였었습니다. 그러니 해방 직후 이남에서 국가체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민족주의 좌파 성향의 인민공화국이 압도적으로 지지받았죠.
또한 ‘우익’으로 대표되는 김구나 이승만 등 인사들의 국가체제나 이념 역시 사회주의에서 표방하는 토지개혁, 기간시설 국가소유, 친일재산 몰수, 공화정, 기본소득 보장, 노동권 보장 등을 지지하고 공유했습니다.
○ 문제는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우익’을 표방하면서부터죠. 일제에 빌붙어 한 자리씩 해먹고 황국신민화와 대동아전쟁에 적극적으로 부역했으며, 일제의 힘으로 공장과 토지를 수탈한 친일자본가와 친일지주들이 친일반미에서 반일친미로 돌변하고, 해방 후 친일파 숙청에서 살아남고 일제시대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반공정책에 편승하여 갑자기 반공우익으로 완장을 차면서 ‘우익투사’로 등장한 겁니다.
이 글에서 등장하는 우익, 우익청년단체 등의 ‘우익’은 대부분 친일파와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사리사욕을 위해 일제나 미제에 빌붙고, 당시의 주류 이념과 정당에 몸담는 자들이 가장 큰 악당이자 범죄자들인 것입니다.
○ 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점이 있는데, 강준만 교수의 저서를 여러 권 읽은 가운데 그 저서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현대사나 한국사회의 논쟁과 갈등에 관한 강준만 씨의 저서나 글에서 일관되게 편견 내지 편향으로 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좌-우익 갈등/분쟁/투쟁’ 개념입니다.
친일파와 그 주구들을 단죄하는 것과 직접적인 가해자나 폭행행위 가담자를 학살, 테러하는 것을 ‘좌우익 갈등’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한국현대사를 왜곡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합니다.
--------------
< “시민증이 없다는 것은 죽은 목숨"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11 >
“부역자들을 처단하고 난 후에 서울에는 이른바 ‘시민증'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시민증은 빨갱이와 평범한 보통 사람을 구별하는, 아니 인간이라는 신분을 증명해주는 증표였다.
박완서는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빨갱이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 없었다. 옥바라지고 뭐고 경황이 없이 된 시초는 시민증에서 시작된다. 보통 사람도 양민임을 입증하는 증명서가 있어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제도가 9.28 수복 후에 생겼는데 그때는 그걸 시민증이라고 했다. 나중에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받을 수가 있었지만 그 제도가 처음 생긴 때가 때이니만치 양민과 잠복해 있는 적색분자를 구별하려 한다는 목적성이 강했다. 따라서 아무에게나 발급해 주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심사를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반장은 시민증 발급 신청서류를 집집마다 나누어 주면서 우리 집만 쏙 빼 놓았다. 그건 밀고를 당할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시민증이 없으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여길 만큼 그게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기본요건이 될 때였다. 반쯤 등신이 된 것처럼 모든 환난을 말없이 견디던 엄마도 땅을 치며 탄식을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해도 너무 하는구나. 서로 고사떡 나누고 비단치마 무명치마 안 가리고 서로 손주새끼 오줌 똥 받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 부역자 숙청이 한창일 때에는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어서 사회가 온통 흉흉한 공포분위기였다.”
“시민증이 없다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박완서의 가족은 시민증을 발급받기 위한 신청서 한 장을 얻기 위해서 동회 직원한테까지 굽실대야만 했다.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온 박완서의 오빠는 육체는 물론 정신 마저 망가진 상황에서도 1.4 후퇴 당시 오직 빨갱이를 피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가족들에게 피난을 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박완서의 오빠는 시민증이 없었기 때문에 피난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서울은 젊은 남자가 시민증 없이는 잠깐 동안의 외출도 할 수 없을 만큼 시민증은 신분보장의 필수적인 증명서였다. 게다가 피난민 중에 간첩이 섞여 있을가봐 피난 길목 곳곳에서 검문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용군을 다녀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시민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경찰서에 가서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박완서의 오빠는 경찰서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완서의 오빠는 가족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난증을 구해다 주기를 바라며 “어머니 다 팔아요. 집이고 세간이고 다 팔면 그까짓 시민증 하나 못살라구요. 그까짓 거 애꼈다 뭐 하려고 안 팔아요”라고 말했으며, 박완서를 향해서도 “야아, 너 빽 있는 놈 하나 물어서 이 오빠 좀 살려주면 안 되니? 누이 좋다는 게 뭐냐?”고 말했다.
이런 오빠를 지켜보던 박완서는 “어쩜 우리 오빠가 저렇게까지 비굴해질 수 있을까. 피해망상의 결과겠지만 비굴은 피해망상보다 더 꼴보기 싫었다. 안 보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이는 당시 세상이 그만큼 살벌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민증을 구할 방도는 없었다. 수복이 된 후,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갖은 수모를 당했던 까닭에 박완서오 그의 어머니도 오빠 못지 않게 피난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완서는 만약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았다가 또 다시 수복이 된 후에 “어떤 일을 당할지는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박완서의 가족은 박완서의 오빠가 시민증이 없는 가운데서도 정부의 피난령이 내린 날, 피난을 떠났다. 피난을 떠나면서도 박완서의 가족은 그때까지 남아 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피난을 떤나는 이웃이 있어 그들에게 자신들도 피난을 떠난다는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피난을 떠난 것이었다.
이 당시 박완서 가족의 “사고나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시민증은 서울 재탈환 당시에도 ‘양민’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박완서는 서울에 태극기가 오르던 날 “몰래 숨겨 가지고 다니던 시민증을 꺼내서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했다.”면서 시민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북으로 간 사람들도 있을 만큼 이 당시 시민증은 “모셔놓고 절을 해도 시원치 않을 황공무지한” 것이었다고 말한다."(p.97~100)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박완서씨의 소설이 깊이가 있고 고뇌가 담겨 있다면 아마도 비극적인 한국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었기 때문일 겁니다. 가족이 함께 학살과 반인륜의 한국현대사를 겪었으니 그의 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1.4 후퇴를 전후로 하여 이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간 이유는 이북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한다는 미군의 삐라와 소문 때문이었을 것이나, 이남에서 사람들이 대거 남도로 피난을 간 이유는 미군의 폭격도 이유이겠지만 위 글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전쟁 초기에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들을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그리고 극우 청년단체가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잔류한 사람들에게 뒤짚어 씌우면서 학살하고 탄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 주권자, 시민, 인민, 국민…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간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제외한 한국정부의 위정자들과 기득권자들, 친일파 후예들에게 단 한 번도 존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도움받지 못한 것이 한국현대사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종북몰이와 공포정치, 언론장악, 경찰국가를 지향하는 것이겠죠.
-----------------------
< 누명을 벗기 위한 전쟁 참여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12 >
“한국전쟁은 빨갱이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대는 일종의 피난처이자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사람 축에 끼고 싶어’ 자진해서 군대에 지원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부역 혐의를 받았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결백하다는 증거를 보이는 최선의 방법은 공산군과 맞서서 싸우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박완서 <제3세대 한국문학 17> 1983]
오두리 주민 김병찬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국전쟁 때 군인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랬으니, 제대군인회다 그러면 알아줬단 말이야. 관에서도. … 지서 순경이 나와도 우리는 겁을 안 냈걸랑. 그까짓 거뭐, 나오거나 말거나. 허허. 그때 군인 갔다 오면 세력이 좀 컸잖아? 그래도 한국 전쟁도 하고. 지서에서도 맘대로 못 건드리고 그러는 거야."[김원일 <불의 제전> 1997]
빨갱이 사냥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한국전쟁에서는 제주 4.3 사건으로 빨갱이 혐의를 받고 있던 제주도 사람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초토화 작전 이후, 선무공작을 통해 한라산 밑 동굴에 숨어 있다가 귀순한 도피자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국전쟁이 이들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한 좋은 사건이 된 것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터져 해병대 모집이 있자 너도나도 입대를 자원했다. 고향에 그대로 눌러 있다가 언제 어떻게 개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입대를 한 것이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용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이렇게 제주도 출신 청년 3만 명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현기영 <해방 50년 한국의 소설> 1995]
4.3 관련 한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재검속사건’이 또 터져서 나는 맨 먼저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어. 살려고 말이지. 아는 선생님 한 분이 너는 북촌 출신이니까 빨리 자원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해. 나는 외아들이라서 아는 사람이ㅣ 빼주겠다는 걸 맨 처음 군대 가겠다고 자원해서 참전했지. 군대에 가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어. 좌우간 육지로 도망가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어. … 훈련 끝난 후에 일선에 갈 사람 나오라 할 때는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제주 4.3 연구소 <4.3 증언 자료집> 1989]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자진 입대한 제주도민들의 용맹에 대해 현기영은 소설 <순이 삼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건 따지고 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인지라 한 번 여봐라는 듯이 용맹을 떨쳐 누명을 벗어 보이고 싶었으리라.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거기엔 보복적인 감정이 짙게 깔려 있지 않았을까? 이북 사람에게 당한 것을 이북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섬 청년들이 한국전쟁 때 보인 전사에 빛나는 그 용맹은, 한때 군경측에서 섬 주민이라면 무조건 좌익시해서 때려잡던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오류를 저질렀나를 반증하는 것이 된다.”
한수영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낳게 만든 것도 ‘빨갱이 섬’ 혹은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이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사람들의 생존의지 때문이었다”고 말한다."(p.100~104)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이 책 제1장 ‘1940년대의 반공’에서 나타나듯이 1945~50년 동안 남한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그리고 기회주의자들로부터 ‘빨갱이 몰이’를 당하고 희생당했으며, 살아 남은 가족과 친지들까지 살해와 테러위협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이들 중 강제로 참여한 이들도 많았겟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제주도 사람들처럼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지금도 안타깝고 분노스럽습니다.
○ 저도 이 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만,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이렇게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잉태하며 탄생한 건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ㅠ
○ 그리고 윗 글은 마치 종북공세를 당하지 않기 위해 종북몰이에 앞장서는 사람이 많은 2012~14년 한국사회가 얀상됩니다.
--------------------
< 월남 피난민의 생존방식 - 1950년대 반공,반북의 역사 13 >
“1950년 12월 초부터 연말까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수십만 명에 이르는 이북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이승만 정부는 이에 대해 “공산당들의 전통적인 억압정책, 학살정책에 5년간 시달리던 북한 피난민들이 이번 중공군의 불법 침공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학살을 면키 위해서 이북에서 갖은 고난을 겪고 남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피난민들에 대한 대우는 그런 발표와는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이승만 정부는 북에서 남으로 밀물 들듯이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월남 피난민 소개 원칙 5가지를 제정했다. 이는 사실상 피난민 대열 속에 섞여 있을지 모르는 ‘빨갱이 색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불순분자를 적발하는 데 주의를 요하는 대국민 담화문을 자주 게시해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월남 피난민들은 남한의 어느 지역을 경유하든지 대개 정식 경찰이나 사회부 직원 또는 사설 청년단체 요원들에게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런 조사는 월남 피난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월남 피난민들을 괴롭힌 것은 이른바 ‘난민 심사’라는 것이었다.
난민수용소를 경유한 피난민의 경우에는 비교적 쉽게 난민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는데 반해, 난민수용소를 경유하지 않은 월남 피난민들의 경우는 난민 자격을 획득하는 과정부터가 혹독했다. 난민 자격 심사는 빨갱이 색출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난민 심사 과정에서 월남 피난민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했다는 확실한 증거나 증인을 제시해야 했다. 증인이 있으면 난민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혹독한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월남 피난민 남영길은 피난가다가 울산 특무대 CIC에 끌려가 6일간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다시 포항 경찰서로 넘겨져 김0화라고 하는 일제 순사 출신의 고등순사에게 혹독한 고문 취조를 29일간 당했다. 당시 경찰서에는 벌써 120명이 빨갱이로 수감되어 있었다. 치질에 걸려 인민군에 불합격하였으나 믿지 않았다. 끝까지 가지 않았다고 하자 고등순사는 반대로 빨갱이 앞잡이 노릇을 하라고 종용했다. 그는 고문을 흠씬 당한 후에야 경찰서장의 도장이 찍힌 ‘포항 거주증’을 발급받고 풀려났다.[김귀옥 <월남민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 1999]
김귀옥은 당시 월남민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빨갱이’였다면서, 그런 이유로 월남인들은 그런 이미지 딱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으며, 특히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심문 과정에서도 곤욕을 겪어야 했다고 말한다.
“빨갱이 혐의와 편견에서 벗어나려면 이북에서 반공 활동을 했다는 확실한 증명서를 갖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 경우에는… 반공 전선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강력한 배경이 되어 주던가, … 정규군에서 복무했던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 ‘이남에 빨갱이가 더 많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다른 빨갱이를 욕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빨갱이의 혐의를 벗길 수 있어야 했다. 그 결과 월남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과거의 자시으로부터 현재의 자신을 분리시키고 과거의 자신을 타자화시킴으로써 이북 주민들을 ‘그들’로, 이남 주민들을 ‘우리’로 바꾸어 나가게 되었다.”(p.105~108)
: 강준만, 김환표 저 <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 제2장 ‘1950년대의 반공’ 중에서…
○ 60년도 더 지난 때에 벌어진 한국전쟁이라는 공포 이외에 한국인들이 유독 북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에 휩싸여 있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기 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강요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세뇌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 무장되어 있는 월남인들의 정서는 한국전쟁 전후 정권과 극우집단에 의해 강요된 폭력에 의한 공포에서 기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월남 피난민들에 대한 ‘난민 심사’와 탈북자들에 대한 국정원의 ‘합동심문센타 심사’와 비슷해 보입니다. 전쟁 시기에 월남인들에 대한 정권의 물리적, 심리적 폭력은 국정원이 탈북자를 고문, 강압하여 간첩을 조작하고 이를 근거로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행위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체제나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상상하기 불가능한 행태들인 것이죠.
남한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탈북자를 남한에서 받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감이 있다면 합동신문이든, 정신교육이든 최대한 간소하게 끝낸 후 남북 민족의 동질성과 체제의 이질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민간에게, 시민사회단체 일임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면에서 북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으로 단체를 영위하는 탈북자 단체나 자유총연맹 같은 관변단체가 아니라 양심과 인권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단체가 적합해 보입니다.
○ 1987년 민주화 체제가 도입된 이후 지난 민주정부 시기까지 20년간 이어져 오던 남북화해와 민주주의의 진전이 2007년 이명박 정권 탄생 이후 중단되었고 이후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습니다. 부정한 정권과 극우상업언론이 주도하는 ‘종북공세’는 여러 가지 면에서 50년대 ‘빨갱이 사냥’과 수법이 비슷합니다. “나는 종북이 아니다”라고 피하고 말기에는 그 폐해와 인권피해가 엄청난 상황입니다. 양심적인 이들과 87년 헌법이라도 지키고 싶은 이들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첫댓글 왔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