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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보면 끝나리
호랭이는 가죽때문에 죽고
산꾼은 강행기 쓰다가 죽는다.
영산강 제1지류인 지석강을 찾아가기 위해 대구에서 광주 그리고 광주에서 전라남도 보성땅으로 와서 택시로 보성군 복내면 죽동마을로 찾아가야 한다.
산으로 오르는 임도길이 길게 이어지지만 묵은 임도길은 어느 순간부터 가시 잡목으로 가득하고 산비탈을 기다시피 올라
호남정맥길의 계당산 줄기인 525봉에 오른다.
호남정맥 계당산 오르기전에 본 초암산 줄기가 길게 한줄로 늘어서며 우측 멀리 보성군 조성면의 방장산이 자리한다.
사진에서 보는 물은 모두 섬진강 제1지류인 보성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이며 보성강은 호남정맥 제암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보성땅을 오롯이 살리며 전남 곡성 압록 유원지에서 섬진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호남정맥길이 물결치듯 이어지며 멀리 섬진강 제1지류인 보성 강 발원지인 제암산이 가장 높고 그옆으로 사자산과 일림산이 이어진다.
호남정맥 계당산 지석천 발원지 부분에 걸려있는 정맥 9차 시그널
지석천은 이곳 계당산 직전 570봉에서 발원해서 화순-나주로 이어져 영산강에 합류하는 56km강이다.
정상에서 동쪽땅은 보성땅이며 서쪽은 화순땅 빗물이 어느쪽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섬진강을 거처 남해로 흘러들거나,
영산강을 거처 서해로 흐르게 된다.
그리고 지석천 발원지로는 계당산 정상에서 남쪽과 북쪽 모두 발원지로 알려져 있지만 570봉이 가장 길다.
지나간 겨로
강길 87번째 누적거리 7,216km
진행경로
지석천은 실거리 56km정도 이지만 비봉산과 화순 지석묘 찾아 본다고 거리가 많이 늘어남
이제 시작해 볼까요
언제나 그렇듯 빗물꼭지점 부터 내려가면 그게 가시밭길이던 전투기 사격장이던 내려가야 한다.
한여름이라면 나무들이 유연하겠지만 계절이 계절이니 많큼 회초리처럼 딱딱하기 그지없다.
묏선생이라도 만난다면 어디 피할곳도 없어 보이고
570봉에서 참나무 낙엽과 잡목을 헤집고 내려오니 서원천(지석천) 계곡이 형성되고
계곡길로 조금 내려오니 조그만 돌 틈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호남정맥길에 식수가 부족하면 이곳까지 내려와도 되겠지만 여름이라면 차라리 오줌물이라도 마시고 가는게 편할것 같다.
지석천 발원지
물이 흐르더니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계곡으로 바뀐다.
대간길은 지맥길에 비하면 고속도로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강행길에 있어 강 상류부터 내려오는 길은 ...지맥길이 고속도로 수준이라면 될듯하다.
잡목과 잡풀 그리고 덩쿨 식물을 피해 돌아가다 보면
한여름에는 뭐라 표현이 안되니
예전에 사람이 거주했던곳인가.
뜻하지 않게 영산강 (지석천 )발원지 푯말이 외롭게 서있다.
음!~ 지도보며 내려 왔지만 이런건 절대 안 놓치는 동물적인 감각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계곡길에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고
이곳은 밭인듯한데 지금은 잡목만 무성하다.
계곡길은 그나마 덩쿨 식물 줄기가 덜하여 허리 숙이고
한여름이라면 글쎄
어떻게든 지나야 오겠지만
쪼매 골병들것 같기는 하다.
묵은 밭이 나타나고
좌측은 계당산 정상 남쪽에서 흘러온 계곡이고 우측은 제가 내려온 계곡이
서로 만나는곳 두곳간의 거리는 약 1km정도 차이가 난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마을
계곡 옆 작은 논이 나도 논이다며 나란히 이어진다.
증리마을
상류에서 이렇게 불법 소각 하시면 아니되죠
조광조 선생 초장지(初裝地)
기묘사화때 능주로 귀양 왔던 정암 조광조가 유배온지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자 학포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거둬 임시 방편으로 매장했던곳
이후에 묘를 용인으로 이장 하였으며 그 이후에 이곳을 조대감골,혹은 서원골이라 부른다.
기묘사화 이야기는 그의 유배지에 가서 다시 쓰기로 하고
지석천따라 가다보면 학포당과 조광조 선생이 유배왔던곳을 지나는데 오늘은 많은 공부가 될듯한 강이되겠다.
막다른 길목에 위치하는 증리마을에 지석천이 흐르고 강옆으로 잘 정돈된 논보다 자연스런 논둑길이 더 아름다운곳이라
생각되는 풍경이 이어진다.
의병마을 무기 제작소 가는길에
커다란 가마솥이 인상적이고
쌍봉사 일주문을 지나며
쌍봉사는 앞으로는 의병들이 망을 보던 망견봉이 자리하고 뒤로는 호남정맥 계당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등용산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가 받쳐주는 아늑한곳에 자리 잡았다.
절실한 불교 신자가 아니기에 눈을 부른뜬 사천왕이 좌,우로 지키서 서 있어 감히 나같은 잡인들은 범접을 못할것 같아 몸이 움질거리기도 한다.
무슨 죄라도 지은것 처럼 사천왕께 합장하고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선다.
쌍봉사는 사자산문(獅子山門 신라말 선종의 한 계파)로써 철감대사 도윤과 징효대사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쌍봉사 대웅전
멀리 백두대간 속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비슷하게 보인다.원래는 보물 163호 였지만 1984년 어느날 스님
이 기도를 드리는 중에 대웅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보물로써 기능이 상실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 보시고
읽어 보시고
호성전
어느 뼈대높은 사대부 집같은 전각이 멋스레 지어진곳
읽어 보시고
극락전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위해서 합장하고
읽어 보시고
지장전
읽어 보시고
쌍봉사에 왔으니 부도탑을 안보고 갈 수 없죠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탑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어느 장인이 진흙을 곱게 반죽하듯 망치와 정으로 정성것 깍아서 만든 부도탑
부도는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신라의 여러 부도 작품중 가장 화려한 걸작품이라 한다.
내용은 꼭 읽어 보시고 찾아 가보십시요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보물 제 170호
금방이라도 아장거리며 움직일듯한 거북의 오른쪽 발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있다
탑비는 일제 감정기때 소실되었다.
내용은 읽어 보시고
철감 선사의 탑비와 비슷한 탑이 생각나 찾아보니
지난날 걸었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섬강길에 만난 흥법사지(興法寺址) 진공대사 탑비
영봉산 자락에 자리하는 흥법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고 신라말기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것으로 보나 임진왜란때 소실
쌍봉사의 탑비와 비슷해 보이나 등에 짊어진 비는 사뭇 다르다.
쌍봉사 경내를 두루 돌아보다가 짧은 하루해거 곧넘어 갈것 같아 일주문을 나오니
문화해설사 분들이 계시는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가 커피 한잔 얻어 마시며 "사자산(獅子山) 쌍봉사(雙峰寺)"로 되어 있던데 사자산이 어딘가 뭔지 엿쭈어 보니 사자산은 쌍봉사 절 뒷산 이름이란다.
"아닐텐데..." 하며 혹시나 "사자산문(獅子山門)신라말 선종의 한 계파가 아닌가 말씀드려 볼려다 밑천 떨어질것 같아 커피만 들고 나온다.
수량이 얼마되지 않고 주위로 특별한 풍광은 없고
쌍봉저수지를 지나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학포당
조선 중종때 학자이며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하던 서재이다.오래된 서재 많큼이나 커다란 은행나무가 외롭게 서있고...
학포선생은 조광조와 함께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봅는 과거)에 합격 하였으며 중종 11년에 갑과로 급제한후 교리(정5품)로
재직중 기묘사화때 삭탈관직 당한다.
이후 중종 32년 다시 복직되어 기묘사화때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증리마을에 매장하게 된다.
학포당
마루에 걸터 앉아보니 돌아가신 옛분들 생각은 둘째치고 낯선곳에서 때늦음 발걸음도 걱정이니 갈길이 멀고 배는 고프고
찬바람은 불고, 꼬장 꼬장한 선비를 걱정 할때가 아닌것 같다.
학포당 현판글
세상은 둥글 둥글 그렇게 살라며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두었고
학포당 오고 가며 만나게되는 어느 할매분이 사는 토담집
부엌으로 들어가는 나무로 만든 정지문과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꼬맹이들도 허리를 굽혀야 들락 날락 거릴듯한 작고 아담한 방
금방이라도 어느 할배가 한자나 되는 긴 곰방대를 물고 밖을내다 볼것같은 집을 만나게된다.
이런곳에서 눈이라도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라도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처마 아래 마루에 걸터 앉아 보고 싶지만 부숴질것 같은 집에 걸터 앉기가 선듯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제 쌍봉리 마을을 지나며 해는 얼마 안남은듯 하다.
쌍봉리 충신각
조선 선조 26년 임ㄴ진왜란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김인갑,그의 아우 김의갑,그리고 조선 인조14년 병자호란때 전사한 김시협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것이다.
쌍봉리 마을앞에는 육봉과 대산이 있어 쌍봉리라 한다는 이야기
쌍봉리 의병 기념탑
강길은 쌍봉사천으로 이어져 오다 쌍봉 마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지석천이란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좁게 흐르는 강물은 그렇게 깊지 않으나 송사리 여럿 헤엄치며 돌아 다니니 봄이 찾아왔다고 해야하나
상매정 마을의 고인돌
모두 6기이지만 기단은 모두 무너지고 흔적만 남아있어 그냥 바위돌인지 구분이 안된다.
지나온 강길
江心인가 水心인가
물은 그저 본연의 마음대로 세상만물에 생명을 주고 흐른다.
이세상 어느 누가 흐르는 물을 더이상 흐르지 못하게 가둘 수 있겠는가
수중보가 가로 막지만 물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듯 아래로만 흐르며 위로는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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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119 특수 구조대 앞을 지나
이양면 이양리
지나온길
화순군 이양면에 들어와
길게 이어지는 이양면은 도로 양쪽으로 거의 문을 닫았고 앞으로 몇년뒤에는 어지간한 동네로 전락할것 같다.
겨울 바람이 불어오니 더욱 을시년스럽게 보이는 이양면으로 걸어 들어가 점심겸 저녁으로 한끼 해결하고
해지는 마을을 벗어나 강길로 접어드니 바람은 왜이리 차가운지
해는 넘어가고 강 바람은 뼈속까지 파고든다.
작은 배낭에 넣어둔 옷이란 옷은 모두 꺼내입고
가운데 멀리 무등산 국립공원 정상이 보이고 우측으로 금오산성이 자리하는 용암산이 고개를 내민다.
강바람 참 모질게 가슴으로 다가오니 어디 들어갈곳도 없고
강가 모습도 횡하고
내마음도 횡하고
무등산과 용암산 그리고 호남정맥 태악산에서 말머리재까지 보이는듯 하다.
용암산과 멀리 호남정맥 성재봉과 말머리재 그리고 촛대봉,두봉산 부근까지 조망되고
바람이 차가우니 나무가지 위에 자리잡은 솟대녀석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멀리 가로등불은 하나,둘 밝게 들어오고
화순군 청풍면 풍암리 지석천 홍수조절지 앞에서
호남정맥 두봉산 인근에서 발원해서 흐르는 송석천이 지석천에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입교 합동 정류소
뭐라도 하나 사서 오물 거리며 가야하나 아니면,
켄맥주라도 하나 사서 빈속을 더욱 차갑게 해서 얼딸딸하게 가야하나 망설이는데
주인어른께서 밖으로 나오시더니 조금만 기다리면 능주면으로 가는버스가 선다고 타고 가란다.
"아니요! 그냥 걸어서 가려구요!" 하니
차비 줄테니 차타고 가라고 하신다.
어딜가나 불쌍해 보이는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듯...
오라는곳 없는 낯선곳에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바람은 차갑고
능주면이 지척이나 몸을 움추리고 종종 걸음으로 아스길로 걸어간다.
앞으로 다가오는 범상치 않은 산이 하나 보였는데 아마도 예성산 전망바위인듯 하다.
깜깜한 밤길에 좌측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예성산 전망바위를 카메라에 담아 두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건 오로지 내생각일뿐
카메라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며 애써 외면한다.
몇번이나 예성산 전망바위로 고개를 돌여 보지만 내것이 아닌걸 알면서도, 마치 내것인양 미련을 떨치지 못하니
훤한 대낮에 이구간을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니면 야간이라 더 웅장하게 보였을지도 모를일
보이지 않은걸 찾아가는 미련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지석강에서 가장 멋진곳이라 스스로 단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석천 용두교 아래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살았을듯한 절벽도 보이나 그곳은 더이상 길이없어 아쉬운 마음만
두고 능주로 향한다.
아스길따라 돌아 나오니 예성산 가는길이라며 이정표가 나타난다.
지방하천이 국가하천으로 바뀌고
삼충각을 지나며
삼충각
조선시대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주논개 남편)과 문홍현 장군
그리고 을묘왜변 (1555년)때 해남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을 기리기 위해 능주향교 유림들이 건립
도로가에 있어 찾기좋고 접근하기에 편하다.
잠시지만 진주 의암에서 죽음을 맞이한 논개와 최경회 장군을 생각해 본다.
강길을 늦게 출발해서 예성산이나 이무기가 산다는 담(潭), 그리고 이곳 삼충각을 밤에봐서 많이 아쉽지만
지석강은 여느강과 다르게 배울것도 많고 볼것도 많은 역사가 함께하는 강이다.
능주면에 들어오니 늦은밤이라 여관이라도 있다면 다행이고
마침 길옆에 여관이 있어 꽁꽁 언몸을 좀 녹이고 쉬었다 가기로 한다.
조그만 시골 면소재지라 대부분 저녁 7시 무렵이면 문을 닫고 밤 10시면 인적이 거의 끊어지게 마련
편의점에 가서 켄맥주 하나 사들고 와서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에 일어나 짐 정리하고 강가에 자리하는 영벽정으로 가본다.
바람은 조용하나 날씨는 영하의 날씨
지석천 맑은물에 투영되어 비치는 앞산인 연주산의 경치를 운치있게 바라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영벽정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 김종직 같은 분들의 글이있는것으로 보와 조선 명종때나 선조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조용한 영벽정에 올라 천정을 올려다 보니 대들보 좌,우측에 지척천 맑은물에 노닐다 젖은 몸을 말리려 올라앉은 푸른 청룡이 금방이라도 날아갈듯 꿈틀대며 동쪽방향을 지키고 있다
아직 여의주를 입에 물거나 앞발로 잡고있지 않으니 지석천이 좋아, 하늘로 승천 할 생각이 없는듯
커다랗고 촉촉한 눈망울에 길다란 수염, 물속인듯 구름속인듯 유영하는 모습이다.
새벽시간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영벽정을 조금이나마 느끼며 발길을 조광조 유배지로 돌린다.
죽수절제아문
이 문은 능선현(화순군 능주면)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실인 동현 정문
건립 연대는 알길 없으나 정유재란 뒤 선조 32년에 고쳐 지었고 당대 문필가인 정이(鄭怡)가 현판을 섰다고 한다.
대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기둥을 보니 오래 되었음을 짐작해보며, 1894년 동학 농민혁명때 능주 관아를 점령한후
패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동학 농민군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한곳이기도 하다.
능주면 사무소
봉서루
조선 현종때 목사 이유상이 중수하고 고종때 목사 한치조가 다시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정창손외 성임 양팽손,유득일,김종직,김창흡의 시가있다.
양팽손이 봉서루에 올라서 쓴 시
김종직이 봉서루에 올라 쓴 시 한구절
연주산위에 쟁반같은 달이여
바람없는 수풀이 이슬만 차구나
하늘에 솜구름 모여 다하려 하는데
한무더기 공문서는 보지 못하였네...
...
어느 누구의 작품인지 봉서루 누각 위에 걸린 편액이 너무 멋지다.
능주면을 돌아나와 능주면 끝부분에 자리하는 조광조 유배왔던곳을 찾아 가본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조광조(1482-1519)년 조선 중기 학자로써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가 중종 14년에
훈구파의 모함을 받는 기묘사화로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12월 20일) 당한다.
조선 현종때 능주 목사인 민여로가 우암 송시열의 글을 받아 비를 세워 조광조 선생의 넋을 위로 하고자 비를 세웠다
애우당 愛憂堂 ( 정암 조광조 의 절명시에서 다온 이름)
안쪽에 조광조 선생이 유배중에 섰다는 시와 절명시가 걸려있다.
절명시(絶命詩)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 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했도다.
맑고 밝은 해 빛이 세상을 굽어 보니
거짓없는 내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조광조는 이시를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는 얇은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길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뜨끈한 사약(死藥) 한사발 기분좋게 받았다고 한다.
선비라면 최소한 조광조 같은 선비가 되어야 하니 참 멋지게 살다가 가신분 같다.
현판은 후학 이병헌이라 쓰여있고
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조광조 선생이 유배온곳
선생께서 한양에서 전라도 땅으로 유배를 오니 반기는 사람은 없고,이제나 저제나 해배(유배 풀어주눈곳)가 될까하여 밤낮으로 방문을 열어두고 지냈다고 한다.
선생은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 헤엄은 치지않고,얼어죽을 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그런 꼬장꼬장한 선비의 표상이시니...물에서는 개헤엄 쳐야하고 공사판에 인부들이 지펴놓은 불 동냥도 해야하는 저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른분
선생은 성종때 학자인 김굉필이 무오사화때 붕당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 생활을 할때 조광조 나이 14세때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는다.
전서체로 "정암 조선생 추모비"라 쓰여있고
한문이라 뭐가 뭔지 모르시죠
아래글 읽어 보시면 도움 될듯
조선생 유허비
어느 누구의 작품인지 한문에 도통 까막눈인 저같은 사람들 쉽게 보라며 한글로 빼곡하게 써두었다.
조광조 선생께서 기묘사화때 유배를 와서 1달만에 사약을 받고 돌아 가셨으니
조선 4대사화로는 연산군때 무오,갑자사화 ,중종때 기묘사화 ,인종때 을사사화가 있다.
사화는 대부분 왕의 지지를 받으며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하고
유배를 가거나 몰락하는것을 말한다.
조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고 바람이 부는 강길로 가다가는 얼어 죽을것 같아 인근에
비봉산성이 있어 산길로 올라 비봉산성을 구경하기로 해본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봉우리 하나에 지나지 않은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공동묘지인양 무덤이 줄지어 나타난다
어느누구의 무덤인가 싶어 무덤앞 좌판을 보니 한문만 빼곡하고 하얀 소복입은 처녀귀신이 팔딱 팔딱 뛰어 내앞에 설것같은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진다.
비봉산성터
만리 장성처럼 돌로 만들어진 성(城)을 생각하고 올라 왔더니 안내 간판만 덩그러니 반기고 성터라는 생각은 전혀들지 않는다.
전남 화순 시내와 멀리 무등산 정상의 불빛이 보이고
좌측 산넘어 광주 시내인듯 불빛이 밝게 빛난다.
남쪽 하늘에는 목성이 밝게 빛나고 그옆으로 용암산이 우뚝하게 보이니
스스로 빛나는 별 없고 어느 별의 도움이 있어야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는듯
성터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 숲이 반기고
이름모를 새들이 대숲에서 잠자다가 불빛을 보고 제놈들 잡으러 온줄알고 야단법석이다.
비봉산 정상과 어느분의 묘자리가 함께 있다.
비봉산에서 본 능주면과 용암산
비봉산에서 산길을 걸어가면 조아밸리 골프장이 나오고
이른 새벽인데 골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있어 조심스럽게 갓길로 빠져나와 화순 고인돌 유적지가 자리하는
도곡면 효산리로 진행
효산리로 가는 도중에 본 무등산과 안양산 방향
고인돌 마을 효산리로 가는길에
고인돌 마을인 효산리
기원전 5-6세기경 청동기 시대때 만들어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곳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고개넘어 춘양면 대신리에 약 600여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인근 핑매바위산이나 만지산에서 지석묘 덮개돌을 운반하여 묘 덮개로 사용했다
지석묘 덮개로 사용한 만지산 자락의 바위군락
청동기시대때 저곳 돌을 굴려서 묘 덮개로 사용 했으니
후손들 꿈자리가 사나울듯
만지산 마당바위 채석장
만지산 자락에서 본 고인돌 군락지와 화순 골프장이 보이고
마당바위 채석장으로 오르고 내리는 잘 만들어진 지석묘 둘레길따라 내려와
시간이 부족해서 대신리 지석묘 군락지대는 생략하고
조상님들을 저곳 아래 묻어 둔다면 꿈에 나타나 " 야!~ 이놈아 가슴 답답해 미칠것 같다"고 할것 같고
지석묘
호남정맥 계당산에서 발원하는 지석천의 이름이 이곳에서 유래가 된듯하다.
크고 작은 고인돌은 수백기가 되며 큰돌은 어떻게 옮겨 왔는지
설마 몇명이 번쩍 들고 옮겨 오지는 않았을것 같다.
각각의 돌들은 모두 지석묘라고 보시면 될듯하고
잔디를 제외한 모든 돌들은 지석묘
예나 지금이나 조상님들에 대한 효는 언제나 무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화순 지석묘 군락지 안가보신분들은 꼭 가보시기 바라구요
선사시대 체험장
고인돌(지석묘) 구경한다며 돌아다녔더니 시간과 거리가 많이 늘어나
정작 지석천은 늦어 버렸고
멀리 무등과 안양산 자락이 길게 이어진다.
강길도 이제 20km정도 남았으니 걸음을 빨리 해본다.
멀리 호남 정맥길이 이어지고
해망산과 고당산이 보이고 화학산에 발원하는 대초천이 지석천으로 합류하는곳
멀리 산넘어 전남 장흥땅이니 아마도 강진으로 흐르는 탐진강이 흐르는 곳으로 보인다.
화순군 도곡면 덕곡마을에서 강가에 버린듯 보이고
마을에서 300m 정도 떨어진곳인데 왜 강둑에 버리는지 모를일이다.
조광조와 지석묘를 생각하게 하는 화순땅을 지나 전남 나주땅에 들어오니 드들강이란 비석이 반긴다.
예전에 지석천에 제방을 쌓으면서 자꾸만 무너져 산사람을 함께 묻어야 한다고 해서 이곳에 사는 드들이란 처녀을 제물로
묻어다고 전한다.
처녀를 제방에 묻고난 후로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니 드들이란 처녀 마음씨가 비단결인듯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이노래를 작곡한 안성현 작곡가가 나주시 남평에 사셨다고 한다.
읽어 보시고
노래는 크게 따라 불러야
드들처녀의 기막힌 삶이 느껴지는 드들강변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 만든다고 어린 아이을 쇳물에 넣거나, 강둑이 무너진다고 산사람을 묻으니...
내려가야할 지석천
무등산이 다시 보이고
남평교와 남평대교
멀리 영산강 건너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이 지척에 다가와있고
지석천 건너 무등산에서 이어져 온 송학산과 봉황산,등용산이 이어지고
학,봉,용이 이어지는 산길은 전국에서 저곳뿐인듯
잘있거라 무등산아
이른 아침에 계당산 발원지에서 내려왔다면 해지기전에 끝났을텐데 어찌하다 보니 이틀간 돌아다닌 강길이다.
역사가 흐르는 강으로는 낙동강 제1지류인 남강이 있고 이곳 영산강 지류인 지석천에서도 많은 역사 공부가 되었으니
기회가 된다면 훗날 다시한번 더 찾아오고 싶은 강으로 기억해두어야 할것 같다.
1번 국도인 지석대교가 보이고
나주시를 바람으로 부터 막아주는 금성산을 지척에 두고
호남정맥길 계당산에서 발원해서 내려온 지석천이 영산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도착하고 보니 길이가 많이 늘어나
집에 갈시간이 늦은것 같다.
지난날 영산강길에 이곳은 모두 야간에 걸었는데 기억이 새록 새록
추운날 돌아 다녔더니 10년은 늙은듯
영산강과 승촌보
택시 기사분께 부탁해서 인증담고 집으로
광주에 오면 친구 지음님께 연락을 하고 왔는데
이번 강행길에는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고 조용히 왔다가 대구로 향한다.
다음 강행은 한남정맥에서 발원하는 조선 12대 강인 진위천으로 갑니다.
첫댓글 첩첩산중 가시넝쿨 헤치며 내려오다가
영산강 발원지 푯말을 찾아내는 놀라운 촉에 박수를 치다가
스스로 뻑이 가는(자뻑) 방장님의 모습에 잠시 웃어 봄니다..ㅎ~
저도 일년에 너댓번 차로 지나는 길이라 대충 윤곽은 그려지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원일기 쌍봉댁이 그동네 출인가 싶네요~~ㅋ
^____^
전원일기 쌍봉댁이 이동네 출신인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많은 도움 감사드려요 자칫 했으면 날머리에서 영산강 오리알될뻔 했습니다.
ㅋㅋ
호랭이는 가죽때문에 죽고
산꾼은 강행기 쓰다가 죽는다.
멋진 위트입니다 ㅎ
사람은 격어봐야알고
물은건너봐야알고
산은 걸어봐야알고
폭포는 내려가봐야알고
요즘대구 코로나로 아작났는데
마스크꼭하고 다니십시요
밀린강행기가 4편입니다.
독수리 타자라서 몇날 몇일써야 한편 올릴 수 있으니
대구 너무 시끄럽죠 오늘은 방콕하는 중
지석천 라인은 한편의 역사적인 서사시가 두루두루 흐르는 얼의 동네인듯 합니다.
볼것 많쿠 배울거 많쿠^^
얼매나 꼬장했어면 차비를 준다 켓을꼬..... 라멘 한그럭 준다켓어믄 얼렁 "땡큐" 캐슬낀데 ㅎㅎㅎ
끝이 보이는 강길 안강즐강하시길요~~~^^
기다리보셔요 안동 투어하고 그 다음에 시간되면 지석묘 투어 한번 할테니
강길도 이제 9개 남겨 두고 있으니
사진과 자세한 설명글 잘 보고갑니다
많은 관심 감사합니다.
9개 남은 강행길도 안전하게 잘 다녀 오겠습니다.
방장님 고생하네요.
발원지 찿자 이어지는 강줄기 보니 새록새록 귀에 잘들어 옵니다.
약초산행 하는거 같으시네요
방장님 노고만큼 나중 크게 쓰일거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9개 남겨 두고있는데 3월말이면 끝날것 같네요
산수님도 보고 싶고 시간되면 천안쪽으로 놀러 한번 가도록 하겠습니다.
드들처녀 덕분에 지석천이
지금까지 잘 이어졌네요 ~
그래도 출땐 겻불이라도 쬐야죠 ~
😊🎶
강행기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장님 ~ 🤗
저도 양반 출신이라 물에 빠져도 개 헤엄은 안칩니다.
조만간에 얼굴 한번 봐야 할텐데...
글 감사드립니다.
방장님 강행기 보고 있노라면 역사공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산을 좋아해서 그런지 산과 연결해서 들으니 쏙쏙 들어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잘 계시죠
강길은 인문과 역사가 함께하니 시간날때마다 역사책 보며 많은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강행길도 어느덧 막바지 길이라 생각이 많아 지게되네요
글 감사 드리고 많은관심 부탁드립니다.
ㅎㅎㅎㅎㅎㅎ 대단합니다,
포스가 작렬하는군요.
감사합니다.
5월에 내성천으로 놀러 한번 오십시요
지석천은 참 볼거리가 많은 강이네요. 방장님이 힘들게 걸으신 길을 저는 편안하게 구경 잘 했습니다.
고인돌 공원은 예전에 남도 여행으로 집사람과 한번 다녀언것 깉으네요
방장님 강행기로 전국 여행 앉아서 잘하고 있다고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