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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베 트 남 |
캄 보 디 아 |
비고 |
위치 |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경위 |
위치 인도차이나반도 북동부(베트남, 라오스, 타이와 접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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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33만1,210㎢ (해안선 ; 3,444㎞) |
18만 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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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킨족(85.7%), 기타(14.3%) |
크메르족, 소수민족(베트남, 중국, 참족, 고산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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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베트남어 |
크메르어, 불어(50대 이상), 영어(청·장년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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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9,250만 명(2012년 기준) |
1,440만 명(2011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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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70%, 로마가톨릭10 |
불교(95%), 기타(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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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총생산(GDP) |
1354억$ (2012년 기준) |
159억 달러(2011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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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간
2013. 04. 04〜2013. 04. 09(4박 6일)
◆ 동반자
글핀샘 작가협회 회원들과
2013년 04월 04일 4박 6일의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글핀샘 작가 협회 회원(본인 외 7명)들과
목적지는 베트남 하롱베이와 캄보디아 앙코르왓
현지에서 한 팀으로 같이 관광을 할 일행의 인원은 모두 25(우리 동료 8명, 두부부와 부인들의 친구 2명 합해 6명, 오륙십 대 여자들만의 단체 5명, 한 가족 부부와 아들 2명 합해 4명, 부부 2명)명
04. 04일
아침 09시 05분(한국 시간)캄보디아 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여행사에서 잡아 논 미팅시간이 06 ; 35분 이 미팅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전날 저녁 04 ; 20분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04 ; 20분에 감기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준비를 하고 양재역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나가 05 ; 00에 공항버스에 승차 어둠에 잠긴 거리를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06 ; 00경 미팅 장소로 통보된 여행사 카운터(M 카운터 옆 창측) 9-12번에 가보니 인솔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다 구리 쪽에서 오는 회원들에게 전화를 했다.
거의 다와 곧 도착한다고 한다.
06 ; 45분 시경 인솔자가 도착하고
07 ; 00 시경 우리회원들이 모두 도착하여 인솔자와 미팅을 했다.
우리와 같이 이번 여행에 동반하는 여행 동반자가 모두 25명이란다. 미팅 후 K카운터에서 짐을 붙이고 핸드폰 로밍하는 곳에 가서 인터넷을 차단하고 131번 게이트로 갔다
2006년도에 중국을 다녀오느라 인천공항을 통과해 본 후 처음인 공항은 그 동안 많이 변하여 131번 게이트를 포함한 몇 개의 게이트는 모노레일을 타고 3-4분 가야할 정도로 공항이 변하고 커져있었다.
금년까지 연속 8년 동안 세계에서 제일 서비스가 좋은 공항으로 뽑힌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딩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캄보디아 국적의 아시아 항공 스카이윙스 ZA 0212편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고는 작은 비행기라지만 좌석이 너무 좁고 작아 놀랐다.
앞뒤에 거리는 앉은 자세의 무릎이 앞좌석에 닿을 정도이고 옆으로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면 옆 사람에게 닿을 정도 너무 좁은 좌석에 이러고 어떻게 5시간 30분을 가느냐고 불평을 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는 내 인내심과 내기를 하여야 할 판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침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며 케이트를 나와 비행기로 오는 도중에 빵집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었다. 물이 없어서 목을 메어가며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리가 안정되자 옆자리에 앉은 회원들과 이야기도 하고 아침 일찍부터 설쳐 부족한 잠도 때때로 보충하고 성층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름과 푸른 하늘을 감상하며 5시간 30분을 날아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 도착 비행기 환승을 위해 비행기를 내려 공항청사로 들어갔다.
비행기가 비행장에 내리면서 먼저 느낀 것은 국제 비행장이라는 공항이 우리나라 지방의 작은 공항보다 작고 황량한 것 같다.
그리고 비행기에 내리면서 느낀 것은 기온이 무척 높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릴 때부터 우럭우럭 하더니 비행기 문을 나서니 더위바람이 확 덮친다. 공항 씨엠립의 기온이 42도라니 그럴 만도 하다.
환승을 하려 입국 수속을 하러가면서 환승객이 3백여 명 정도로 보여 곧 끝나려니 생각을 했는데 환승을 위해 입국 수속을 하는 곳이 한 곳이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온이 42도나 되는 날씨에 에어콘 시설이 전연 되어 있지 않는 곳에 줄을 세워놓고 기다리게 하여 더위 속에서 시달리며 수속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를 타는 데 1시간여를 소요하여 쉬지도 못 하고 시달려야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캄보디아이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국가의 경제력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임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비행기를 환승(환승했다지만 다시 탄 비행기는 한국에서 타고 온 비행기 청소만 하고 승무원만 일부 바뀜)하고 다시 1시간 50분을 날아 하노이에 도착
베트남은 공항도 캄보디아 보다 훨씬 크고 잘 되어있고 기온도 높지 않아 우리나라 4월말 정도의 기온이라 캄보디아에서 상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공항에는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현지가이드는 여자이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이는 58세이란다.
가이드에 인솔되어 베트남 전통 인형극인 수상인형극을 관람했다.
수상 인형극은 베트남의 독특한 문화로, 홍 강 유역의 농민들이 수확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연못이나 호수에서 로이누억이라는 인형을 만들어 공연을 시작했다 한다. 인형을 가슴까지 찬 물에서 다채롭게 움직인다. 이 인형들은 대나무와 실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직접 조정한다. 인형극은 농민들의 일상생활, 고기잡이, 소싸움 등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한다. 주요 내용은 악귀로부터 농민과 농사일을 보호하여 풍년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총 18장으로 구성되며 남여 7인으로 구성된 악단인 떼우가 우리나라 판소리 같은 노래를 하며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운다. 우리가 본 것은 10장 정도인 것 같다.
수상인형극이 끝난 후 음식점으로
이번 여행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음식점을 가나 우리 한국 사람이 먹는데 거의 지장이 없을 정도의 음식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음식점의 주인이 우리나라 사람이고
그만큼 우리의 국력이 커졌고 관광객도 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석식 후 5성급 호텔인 CROWNE PLAZA로 이동 여장을 풀었다.
샤워 후 회원들이 함께 모여 호텔 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맥주를 먹으러 나갔다.
마침 들어간 음식점은 노천에서 맥주를 마시는 곳으로 주로 베트남에 젊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러 오는 곳이고 여행객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는지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많은 데 모두 베트남 젊은이 들이고 여행객은 우리뿐이다.
그래서인지 서빙을 하는 어린 종업원들도 자국 말 외에는 몰라 안주를 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들이 가져온 베트남어로 된 메뉴의 내용은 우리가알 수 없고 우리가 하는 말은 그들이 못 알아들어 우리가 원하는 안주와 종업원들이 권하는 안주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나마 못하는 우리의 영어를 종업원들이 알아듣지 못해 더 답답했다. 한참 손발의 바디앵그위지로 시킨 안주는 샌드위치 종류로 닭고기와 채소를 섞은 음식이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매주를 한잔 씩 마시고 호텔로 돌아와 여행첫날의 가벼운 흥분이 가시지 않아 쉽게 방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호텔 앞에서 사진도 찍고 이야기꽃도 피우다 현지 시간으로 11시가 다 되어 각자 객실로 올라갔다.
04. 05일
아침 05 ; 30(베트남 시간)분에 모닝 콜 소리에 기상
아침을 먹고 07;15분에 하롱베이를 향하여 출발, 하롱베이는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80Km 떨어져 있고 버스로 걸리는 시간은 아직까지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데다 도로가 좋지 않고 더욱이 하롱베이로 가는 길에 도로확장 공사를 하고 있어 3시간에서 3시간 반이 걸린단다.
하롱베이로 가는 동안 가이드가 차창에 보이는 여러 가지 풍경을 보며 베트남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1. 베트남의 국토
베트남의 국토는 남북으로 1,650Km 로 길게 뻗어있고 동서는 좁은 곳이 50Km 안팎인 나라고 국토의 3/4가 산지이며 북쪽에는 홍강이 남쪽에는 메콩강이 흐르고 있는고, 하노이, 호지민, 다낭, 하이퐁 등 5개의 직할시와 59개의 성으로 나누어져 있고 주요민족은 비엣 족으로 전국민의 83%를 차지하고 53개의 소수민족과 백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이 산단다.
2. 베트남의 인구의 평균
베트남의 인구의 평균 연령이 27.5세로 이란다. 베트남 전쟁 때 사람이 많이 죽고 전쟁 후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주를 이루어 국민의 평균연령이 그렇게 젊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베트남은 앞으로 많은 발전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묘지에 대하여
베트남은 산지가 많아 전국토의 3/4이 산지인 나라이나 거의가 중국과 접하고 있는 북쪽에 몰려있고 평야지대에는 산지가 별로 없어 산지가 멀기 때문에 접근하기 좋은 벌판 논 가운데 작은 누각 같은 묘지를 만들어 화장한 유골을 모신다는데 그 크기가 작은 상자만한 것에서부터 조그만 정자만한 것으로 각각이고 누각이 클수록 부자집의 묘란다.
4. 오토바이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오토바이가 제일 많은 나라로 18세 이하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18세가 넘으면 누구든지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가 없으면 직장을 얻지 못한다며 우리가 평생 볼 오토바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을 시내를 지나는 거리에서 만난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부대가 그 말을 실감케 하고도 남았다.
사거리에 버스가 서면 사거리가 오토바이로 메워지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오토바이 그 수효에 놀라고 그 많은 오토바이들이 사고를 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여 운전하고 그런 와중에도 핸드폰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운전 솜씨에 감탄하고 허리를 곳곳하게 세우고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 아가씨가의 모습은 도도하고 멋까지 있어 보였다.
나라면 이런 거리에서 한 발짝도 운전하지 못할 것 같다.
5. 건축 물
베트남의 건축물은 길에 접하는 면의 폭이 4-5m 에 길이는 10여 m 정도로 길게 지어져 있는데 정부에서 주택지를 공급하면서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길가를 여러 사람에게 공평히 나누어 주려고 하다 보니 자연 폭이 좁아지고 길이가 길어지는 형태가 되었단다.
6. 경제성
베트남의 GNP는 현재 1,200불 정도이지만 지하의 실물경제를 포함하면 5,000달라 정도가 되며 그래서 우리나라 유명건설 업체에서 지은 평당 1천만 원 정도의 아파트가 분양하자마자 98%의 분양률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한 것은 석유의 매장량이 많아 원유를 수출하면서도 정제기술이 부족하여 정유를 수입해 쓴다는 것이다.
12시경 하롱베이 만에 도착, 우리나라 제주도와 같이 세계 문화제 유산으로 등록된 하롱베이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하롱(Halong, 下龍)이란 말이 용이 바다로 내려앉는다는 뜻이 여서 인지 모든 선박에는 배 앞머리에 용의 머리가 있다.
배가 떠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관광선에 탄 관광객들의 탄성이 시작 된다
가이드에 말은 1,550여 평방 키로미터에 3,000개의 서로 모양이 다른 섬이 군집하여 있단다.
배가 전진함에 따라 우리 앞에 다가서는 수많은 섬들
큰놈, 작은 놈, 뒤틀리듯 엉킨놈, 으젓하고 말쑥한 놈,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는 놈, 땅을 향해 굽어지는 놈, 심장이 뻥 뚫린 놈, 가슴 가득히 알을 품고 있는 놈, 오라고 손짓하는 놈, 밉다고 가라고 앙탈하는 놈, 앞으로 달려드는 놈, 수줍어 숨으려는 놈, 네 활개를 활짝 펼치는 놈, 웅크리고 있는 놈, 별의별 모양을 한 기기묘묘한 섬들이 서로 자기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우리를 부른다.
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미, 어떤 말로도 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감탄할 수뿐이
관광객들의 카메라의 셔터가 쉬지를 못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용솟음치며 떠오른 삼천의 섬들로
베플어 놓으신 조물주의 솜씨가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네.
그 아름다움에 하롱베이로 사행시를 지어본다.
주위 경관을 구경하며 감탄을 연발하는 동안 석굴이 있는 섬에 도착하였다.
석굴의 출입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 석굴로 들어섰다.
석굴은 생각보다 넓고 여러 종류에 크고 작은 종류석이 있다.
우리나라 석굴과 다른 것은 석굴이 메마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석굴과 같이 종류석이 자라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어져 있다.
그리고 가이드의 말이 이곳도 한때는 베트공의 요새였다고 하며 여기저기 군인들이 머물렀던 자국을 소개 한다.
석굴을 나와 띠도로 향했다
띠도에는 하롱베이를 조망 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를 올라가는 계단은 430여 계단이란다.
띠도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에서 어쩌다 앞장을 서게 된 나는 누구에게 뒤 질 세라 부지런히 올랐다.
그러나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우리 팀에 같이 있는 고등학생에게 처음자리를 내주고 우리 팀에서 두 번째로 올랐다.
전망대에서 사방을 아우른다.
배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섬들이 이루는 모양의 전경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세계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배를 타고 하롱베이만으로 돌아와 호텔에 첵크 인을 하고 저녁 야시장을 보려 나갔다.
여기서 나의 큰 실수가 벌어진다.
우리 동료들과 시장을 돌며 동료들이 사는 물건 흥정하며 값을 깎아 주는데 재미를 붙어 다소 흥분하는 바람에 여행경비와 주민등록증그리고 신용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분실한 것이다.
야시장에서 마지막에 내일 캄보디아로 간다는 데 캄보디아의 기온이 높고 더워 거기서 쓸 부채를 2,000원주고 살 때 호주머니에 넣어놓은 지갑을 꺼내려다 잘 안 빠지지 않고 또 우리나라 1,000짜리 돈이 없다는 생각에 동료에게 2,000원을 꾸어서 부채를 쌌는데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버스에서 탔다 시장에서 늦어지는 동료를 부르려가려고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가다 주머니가 허전하여 보니 지갑이 없다.
가슴에 쿵하고 돌덩이가 떨어지더니 힘이 빠져나가고 당황하고 허망하고 이상야릇한 기분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망설이다 뜨거워지는 얼굴로 겨우 동료에게 가서 사실을 이야기했다.
동료들이 깜짝 놀라고 버스 안이 술렁인다. 나는 더 우스운 꼴이 되는 것 같아 공연히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가 음식점과 약속한 시간 때문에 시간이 없으니 우선 일행을 저녁을 준비한 식당에 데려다 주고 난 후 야시장 부채를 산 가게를 가보자고 한다. 식당에 도착하여 가이드가 식당에 인원배치 하는 동안 잠시 시간이 있는 틈을 이용해 한국의 집으로 전화를 해 지갑을 잃어서 신용카드도 잃어 버렸다고 카드 분실신고를 하라고 했다. 지갑을 잃어 버렸다는 말에 집사람이 놀랜다. 그러나 국제전화로 길게 이야기 할 수 없어 간단히 전화를 끊었다. 인원 배치를 마친 가이드가 나와서 택시를 잡고 가게로 가잔다. 그 택시로 현지 가이드와 동료 한 사람과 같이 부채를 샀던 가게에 갔지만 역시나 지갑은 찾을 수 가없었다.
택시를 타고 가며 그곳에 빠뜨렸다고 해도 그리고 가게 주인이 주었다고 해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한 가이드 말이 현실이 된다.
가게 주인은 화를 내며 자기는 그런 지갑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돌아서 나오며 나는 알 수 없는 공황에 빠진다.
나도 그 가게에서 지갑이 호주머니에서 잘 빠지지 않고, 지갑에 1,000원 짜리 우리나라 돈이 없는 것이 생각나 지갑을 꺼낸 기억이 없는 데 지갑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 지갑을 꺼내서 1,000원짜리가 없는 것을 확인 하고 도로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이 호주머니에 잘 못 넣어 바닥에 흘린 것을 동료들과 물건 흥정하는 것에 빠져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혹 호텔에 두고 나오지 않았는지 호텔에 들러 찾아보자는 가이드의 성화에 뻔 한 결과가 나올 것을 알면서도 호텔로 가서 가방을 뒤졌지만 결과는 뻔한 것, 지갑을 가지고 나온 것이 확실한 데 호텔 가방에 지갑이 있을 턱이 없다.
혼자면 그냥 호텔에 있고 싶은데 가이드와 동료가 같이 있어 그들의 권유로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식당에서 야시장으로, 야시장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다시 식당으로 우리가 움직이는 동안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비를 모두 가이드가 내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가이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걱정과 위로를 해준다.
그러나 모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귓바퀴에서 맴돈다.
음식 맛도 없어 무엇을 먹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화가 난다.
외국에 나와 내가 무슨 바보짓을 하고 다니는 지.
대강 배를 채우고 나오는 와 버스에 오르기 전에 동료가 여행하는 동안 돈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100불을 꾸어주며 필요하면 더 말하라고 한다.
지갑을 잃어버리기 전에 가이드비와 베트남에서의 옵션과 집사람에게 줄 선물과 아이들에게 줄 선물로 간단한 것으로 대강사서 100불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전신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기왕의 옵션비를 지불했으니 따라가 보았다.
수무 살 안팎에 여자애가 들어와 팔, 다리, 그리고 등과 허리를 맛사지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풀어진 기분 대문인지 별로 피곤이 풀리는 것 같지도 않고 기분도 좋지 않다. 다음에 또 이런 경우가 있으면 나는 이 옵션은 피해야 겠다.
맛사지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누었는데 별 생각이 다 든다.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사진, 캄보디아에 들어 갈 때 출입국 증에 붙어여야 할 사진도 같이 잃어버려 내일 캄보디아 출입국장에서 나로 인해 출입국 심사가 늦어지면 어쩌나, 그로 인해 같이 출입국 하는 우리 팀 사람들에게 폐가되면 하는 생각, 왜 어제 하노이에서는 밤에 밖에 나갈 때 지갑을 안 가지고 나갔었는데 오늘은 왜 가지고 나갔는지, 야시장에서 물건을 흥정하며 그렇게 흥분했어야 하는지, 집에서 집사람은 얼마나 걱정을 할까 하는 생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지냈다.
04. 06일
어찌 어찌하다 잠이 들어 05;00분 모닝 골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7시경 하노이로 출발
출발 전 가이드에게 부탁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어제 불상사를 일으켜 여러분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인사와 어제 지갑을 잃을 때 캄보디아 출입국 심사 때 쓸 사진도 잃어버려 캄보디아 출입국시 저로 인해 출입국 심사가 다소 늦어져도 양해를 해 달라는 부탁의 말도하고 마이크를 가이드에게 넘겼다.
어제 온 길을 따라 하노이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가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가이드가 한 이야기와 인터넷에서 찾아본 베트남 전쟁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은 1,000년 중국의 통치을 받다가 다시 100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9년간의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975년 공산국가로 통일이 되었단다.
월남전쟁은 30년 전쟁이라 부르며 1차와 2차 전쟁으로 구분되고 1차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르고 1945년-1956년 사이에 프랑스와 전쟁이며 2차 전쟁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르며 1960년-1975년까지의 미국과의 전쟁을 말한다. 인도차이나라는 말은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묶어 인도차이나 불렸단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 디엔비엔푸 요새 전투까지 프랑스와 비엣민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the Franco-Vietminh War) 등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를 상대로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제2차 인도 차이나 전쟁(The Second Indochina War)는 17도 선을 중심으로 남쪽에 세워진 미국에 지지를 받는 디엠정권과 북에 호찌민을 중심으로 세워진 공산주의 정권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남쪽 월남정권을 도와 호찌민의 공산정권과 베트공을 상대로 벌린 전쟁으로
북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베트남 전 지역의 보통선거로 단일 정부를 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세워 남베트남에 독자적인 반공 정부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북베트남이 사실상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남베트남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으로 널리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남어: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게릴라 부대였던 베트콩은 물론이고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 역시 항공기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기간 동안 남베트남군과 미군은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폭격과 공습, 포격, 육상 부대 작전을 혼용한 수색 섬멸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데, 특히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투하, 고엽제와 같은 화학 무기의 사용, 여성과 아동, 노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 등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내의 반전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상이 성사되어 미군이 철수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사이공 함락이 있었던 1975년 4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베트남 전쟁 종료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비들기 부대를 필두로 청용부대, 맹호부대 등이 파병되어 용맹을 떨쳤으나 한편으로는 지금도 월남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라이 따이한이 많이 생겼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진정한 영도자이었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으며,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친• 인척에 대하여 엄격히 통제를 해서 돌아보지를 않았고 검소하여 옷도 입고 다니는 옷뿐이 없었고, 1식 3찬을 하고, 또 호지민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출장을 가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고, 프랑스 통치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해방 후 주석궁(Yellow House)이 되었으나 주석궁에서 집무를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적은 집에서 집무를 보았단다.
사망 시에도 “웅대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화장을 하라”고 지시할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호찌민의 시체는 방부처리 되어 유리관 속에 넣어 호찌민 묘소에 안치되어 있다.
하노이에 도착하여 오토바이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수레를 단 툭툭이를 타고 하노이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재래시장이 몰려있는 육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서울에 남대문 시장 같은 곳으로 우리나라 70년대의 남대문 시장을 보는 것 같았다.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되었다.
점심 식사 후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는 호찌민 묘소 앞에 있는 바딘광장 거쳐 한기둥 사원으로 갔다. 이사원은 1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사원이라 일주사라고도 하며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하노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한 기둥 사원에서 나와 몇 군데 쇼핑센터를 거친 후 하노이 비행장으로 가서 16;10분발 캄보디아 행 비행기를 탔다.
항상 패캐지 여행 때는 이렇게 쇼핑센터를 많이 들리는 데 그 나라의 특산물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데는 좋으나 나는 별로 달가운 생각이 안 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옛날처럼 가이드들이 반 강제적으로 권하는 것 아니라는 것이다.
캄보디아 씨엠립 비행장에 내려 현지 가이드를 만나 음식점으로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현지 언어 세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는 섭섭하이, 고맙습니다. 는 옷끈 물은 떡 이라고, 저녁을 먹고 호텔로 이동해 객실에 들기 전에 여행사에서 마련한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목에 거는 스카프는 캄보디아에서 여행을 하며 흐르는 땀을 닦고 햇볕으로부터 목을 보호해주는 등 요긴하게 썼고, 우리 일행(동료8명)이 받은 2홉들이 와인 병이 들어있는 열대과일 바구니 4개는 나중에 객실 우리 방에 동료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크게 일조를 했다.
04. 07일
5시 30분 모닝콜로 아침을 시작했다.
7시쯤 버스를 타고 앙코르 톰으로 출발했다.
앙코르 톰은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곳으로 ‘거대한 도시’라는 어원을 품고 있는 크메르시대에 최고의 도읍지란다.
입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데서 증명사진을 찍어서 그것이 인쇄된 자유 이용권 비슷한 입장권을 사서 목에다 걸고 두 명씩 타도록 되어 있는 툭툭이를 탔다.
앙코르 톰 남문 및 남쪽 크레앙, 바푸욘, 코끼리 테라스, 레퍼왕 테라스를 차례로 보았다.
◆바푸욘 사원
툭툭이를 이를 내려 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 하여 사원 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저 멀리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가까워질수록 음악소리가 분명해지며 그 음악이 우리나라 아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이드의 말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크메르 루즈와의 전쟁때 부려놓은 지뢰에 손목이나 발목을 다친 사람들이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아리랑을 배워 연주를 한다고 한다.
여기에도 슬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바푸욘 사원은 앙코르톰이 지어지기 이전인 11세기에 건립된 힌두교 사원이다. 바푸욘이란 '숨긴 아이'라는 뜻인데 크메르 왕과 샴 왕에 관한 전설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 옛날 두 왕은 형제 사이였는데 샴의 왕이 자신의 왕자를 크메르 왕에게 맡기자 모략으로 오해한 크메르 왕은 왕자를 죽여 버린다. 분노한 샴 왕이 크메르 왕국과 전쟁을 벌이러 나서자 이 소식을 들은 크메르 왕의 왕비가 아들을 숨겼다는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바푸욘 사원은 동서로 120m 남북으로 100m 인 직사각형으로 지어진 불교사원으로 앙코르 톰에 핵심을 이루고 모두 54개의 석탑이 있는 데 탑 네 면에는 얼굴이 새겨져있다.
◆타프롬 사원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만들기 전에 모친을 위해 건립한 불교 사원이다. 파프롬은 ‘브라만의 조상’이라는 의미다. 타프롬 사원은 일명 ‘밀림사원’이라고도 불리며 영화 <툼레이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파프롬은 동서 1km, 남북 600m의 주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나무가 사원을 감싸고 있는데, 이는 폐허가 된 사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과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풍경이다. 사원 내부로 들어갈수록 나무로 인해 붕괴된 곳이 많아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 많다.
성곽을 쌓은 돌이 홍토로 큰 벽돌 모양을 만들어 그 것을 볕에 말리면 공기가 빠져나가며 기공이 생기고 단단한 벽돌이 된단다. 이 벽돌이 홍토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나무가 성벽이나 성 지붕위에서 살 수가 있어 사원내부에는 성벽이나 지붕 위 곳곳에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나무뿌리들이 성벽을 휘감고 있다.
파르롬 사원 있는 통곡의 방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통곡하며 울었던 방이 있는데 말을 하면 울리지 않는 방이 가슴을 치면 쿵쿵 울려 사람의 마음을 야릇하게 만든다.
◆자야바르만 7세
평민에서 왕이 된 앙코르 기의 왕(재위 1181~1219경)으로 .
국내의 반란과 동방(東方)의 이웃나라 참파의 침입으로 한때 혼란하였으나, 그가 수도 앙코르를 점령하고 있던 참파를 몰아내고 즉위한 후, 참파를 공략하여 병함 함으로써, 현재의 캄보디아·라오스, 타이,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도읍인 앙코르톰을 재건하고 병원· 숙역(宿驛)·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각지에 대가람(大伽藍)을 건립하였다. 앙코르왕조 최후의 영광기를 맞아 번성하였으나 그의 사후 캄보디아는 쇠퇴하였다.
◆코키리 테라스
앙코르 제국의 왕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던 곳이다. 피미아나카스(Phimeanakas) 궁전에 이어져 있다. 바푸욘 입구에서 레퍼왕의 테라스에 이르기 전까지 350m의 길이로 길게 늘어선 벽면에 코끼리 모양의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계단의 한쪽에는 머리가 세 개인 코끼리신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테라스 부근에 '승리의 문'이 있는데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이곳을 통해 들어와 왕에게 보고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레러왕 테라스
레파왕 테라스는 앙코르톰 남문과 남쪽 크레앙 그리고 코끼리 테라스와 같이 350m 정도 길게 뻗쳐있다.
레퍼왕은 문둥병이 걸렸던 왕이라고 한다.
레파왕 테라스는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불교에 바탕을 둔 건축으로 병원 사원에는 레퍼왕이 문둥병을 시작하여 심하게 앓고 나아지는 과정을 조각한 조각상이 가득 찬 벽면이 미로처럼 된 곳에 60여m에 걸쳐있고 레퍼왕 테라스 상단에 올라가면 문둥병을 앓았던 스님의 주황색 가사을 두른 레퍼왕 석상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모조상이고 진품은 프놈펜 국립 박물관에 있단다.. 레퍼왕이 문둥병에 걸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레퍼왕은 상당히 득의양양하고 자신이 넘치는 왕이었는데 그런 왕에게 한 신하가 유독 인사를 하지 않고 거만하게 굴어 분노한 왕이 그를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신하가 죽으면서 왕을 저주하며 왕에게 침을 내 뱉았는데 그 침을 맞은 얼굴에서부터 문둥병이 시작되었다고도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그 신하의 목을 짜를 때 튄 피가 몸에 묻어 문둥병이 되었다고도 한단다.
오전 관광울 마치고 툭툭이를 타고 나와 점심을 먹으러갔가다
점심을 먹으며 캄보디아의 압살라 민속춤공연을 관람했다.
점심을 먹고 나와 버스에 오르는데 버스 문 앞에 두 살쯤 되는 어린애를 안고 다섯 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여인이 서서 구걸을 한다.
그 모양이 너무 남루하고 너무 처량해 보여 적선을 해주고 싶었으나 공항에서 처음버스를 탔을 때 가이드가 캄보디아 정책이라며 그런 것을 보면 적선을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해 외면을 했다.
오후에는 앙코르왓으로 관광을 갔다.
앙코르왓은 수리아바르만 2세가 만든 사원으로 세계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세계최대 석조 사원이다.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기(基)의 탑(塔)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 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이 4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정말인지 모르지만 가이드에 말로는 이 사원은 물위에 떠 있다고 한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해저드가 있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곳을 망각의 강
아이리스라고 한단다.
회랑 벽면에는 예술적인 벽화들로 가득 찼는데 힌두교 신화를 주제로 하여 크메르제국의 융성과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람의 생사 희락에 대한 이야기를 부조세공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위대한 유적을 남겨놓은 크메르 제국은 어디가고 지구상에서 저개발 국가로 저락을 하여 약소국이 되었는지 인간의 흥망성쇠의 덧없음을 보는 것 같다. 거대한 하고 웅장한 사원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녁에는 가이드에 안내로 캄보디아의 외국인 거리를 나가 보았다. 캄보디아 한 쪽에서는 땟국이 흐르는 얼굴에 한 끼 밥도 못 먹어 구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휘양 찬란한 조명아래서 맥주를 마시며 고고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차이가 심하다니 한긴 캄보디아가 저개발의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니 우리나라 50년대 말 같은 현상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1.8ℓ 짜리 맥주 네 병과 안주로 닭튀김을 가이드가 사주어 맛있게 먹고 조금 모자라는 부분을 우리가 더 사서 마시고 적당히 취해 호텔로 돌아와 객실에 모여 잡담도 하고 노래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04. 08일
오늘은 여행 중 가장 느긋한 날인가 보다
모닝콜이 8시에 있었다.
아침을 먹고 톤레삽 호수 밑 수상촌 관광을 나섰다.
톤레삽 호수를 가는 도중에 왓트마이 작은 킹링필드을 들렀다.
1975년 도시민들은 크메르 루즈의 폴포트 정권에 의해 추방당해 거대한 집단 농장에서 굶주려 가며 강제 노동을 해야 했고 화폐, 교육, 사유재산, 종교는 금지되었다 또한 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러 인구 2백만 명을 죽인 악랄하고 비정한 정권으로 당시의 캄보디아 인구가 팔백 만이었다는데 전 인구의 1/4을 학살한 것이다.
많은 지식인과 사유재산 보유자들이 그리고 죄 없는 어린이들이 죽어 나갔단다.
그 만행의 사진이 게시판에 붙어있고 누각의 사각 통에는 그 때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들어있어 당시의 끔찍했던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보며 3년 전인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퓨리처 상 수상작품전이 열렸을 때 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자행할 수 없는 끔직한 짓을 하는 사진을 보고 놀라고 가슴 떨렸던 생각이 났다.
가이드의 말로는 지금 45세 이상 되는 캄보디아 인들은 모두가 살인의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가 저개발국이 된는 원인 중에 하나가 폴포트의 만행이라고 한다.
국가 통치자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나라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단적인 예를 보는 것 같다.
왓트마이를 떠나 톤레삽 호수로 떠났다.
톤레삽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내륙 어장의 하나인 캄보디아의 톤레삽 호수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이 호수는 6,000년 전에 캄보디아의 지층이 가라앉는 지각작용이 발생했을 때 형성되었다. 톤레삽 호수가 있는 곳은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며 건기에는 2,600㎢, 우기에는 최대 13만 ㎢ 으로 우기 때는 건기 때 저수량의 4배 이상이 된단다.
토레삽 호수로 들어가는 길의 한쪽은 육지 쪽에 한 쪽은 호수 쪽이었는데 육지 쪽에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주택이 호수 쪽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이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어 이상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허술한 가옥의 앞쪽은 길이 지지하게 하고 가옥의 중앙부와 뒤쪽은 호수 쪽에 낮은 곳에 주로 나무기둥으로, 간혹 시멘트 말뚝으로 몇 데 지주를 세워 그 위에 가옥을 앉혀 가옥의 바닥을 지지하게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아직도 개발 되지 않는 땅이 많은 데 왜 이렇게 호숫가에 이런 허술한 집을 짓고 살까 의문이 든다.
아열대 기후로 더위를 피하고 톤레삽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 모를까?
가이드에 말은 게을러서라고 하는 데 맞는 말이 되는지, 집 주위가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면 그 말도 맞는 것인지 모른다.
톤레삽 호수에 도착하여 배를 탔다.
배를 운전하는 사람은 20대의 청년인데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애들은 열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 두 사람이다. 아직 어린나이에 생활전선에 나서서 어른들이 하여야 할 일을 어린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톤레삽 호수의 물은 메콩강이 황토를 실어 나르기 때문에 탁한 황토색이다.
배가 호수 가운데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가 탄 배를 지나가는 여러 종류의 배를 보았다. 대개가 유람선이지만 개중에는 보트 같은 작은 배에 짐을 싣고 가는 배도 있고, 우리 배에 있는 어린이와 같은 어린애들이 보트를 운전하며 지나간다.
지나가는 캄보디아 사람들은 애든 어른이든 호기심 또는 선망 아니면 저항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가끔 강변에서 투망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도 보인다. 어로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란다.
월남 전 당시에 전쟁을 피해 보트를 타고 캄보디아로 들어와 톤레삽 호수에서 수상생활을 하는 보토피풀들이 사는 호수 가운데가 가까워지자 대여섯 살쯤 되는 아이가 목에 구렁이를 걸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두세 살 쯤 되는 애가 손을 벌리고 있는 작은 보트를 엄마가 운전하며 우리의 배로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와서 애들은 원달라 원달라하며 손을 벌리고 엄마는 우리 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 광경에 관광객들이 천 원씩 꺼내준다.
그렇게 까지 하며 살아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불쌍하지만 끔찍하고 가련한 광경에 나는 눈을 돌렸다.
드디어 보트 피풀들이 사는 수상촌
물위에 가옥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들의 생활은 얼마나 곤고할까?
그들은 무엇을 하며 살까?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까?
둘러보니 그 곳에도 가게가 있고 휴게소가 있고 집하장이 있다.
그래도 거기에는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 곳에 있는 한
한국에 태어나 이 시대를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느꼈다.
그래서 외국을 나가보아야 애국심이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수상촌을 돌아보고 내려와 선착장에 내려 언덕을 올라가는데 땅에 묻혀있던 파이프라인이 노출된 것이 보여 가이드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톤레삽 호수의 물을 끌어올려 식수로 쓰는 급수관이란다.
이 황토 물을 먹느냐고 물으니 호수 물을 끌어올려 황토를 가라앉히고 그물을 먹는단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톤레삽 호수를 떠나며 사람의 생이 모질 때는 한없이 모질다는 생각을 했다.
톤레삽 호수를 나와 두 군데 정도 쇼핑센터를 들렸다.
한군데 쇼핑센터의 인도산 카시미론 스카프를 파는데서 지갑을 잃었을 때 돈을 꾸어준 동료가 집사람 스카프라도 하나 선물로 사다주라며 다시 또 돈을 꾸어줘 50달러짜리 스카프를 샀다. 참으로 고마운 동료이다.
쇼핑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니 19;30분 정도
여행의 모든 일정은 끝났는데 씨엠립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의 보딩 시간은 23 ; 30분
3시간이라는 공백을 위해 우리는 1시간 20분 정도 하는 쇼를 보기로 했다.
그 쇼의 출연자들이 모두 게이라고 해서 게이 쑈라고 한단다.
이름이 그래서 처음에 우리도 망설였으나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또 몇몇 동료가 적극적으로 제안을 해서 쇼를 보기로 하고 옵션을 지불했었다.
쇼는 화려하고 볼만했다.
게이 쇼라고 해서 불건전한 쇼가 아니라 노래와 춤으로 연출되는 쇼였다.
우리나라의 아리랑도 나오고 특히 강남스타일이 공연될 때는 많이 즐거웠다.
쇼 구경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했다.
하나투어에서 인솔자로 나온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다 우리 팀의 짐 붙이는 일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빨리 짐을 붙이란다.
짐을 붙이고 출국심사를 받고 게이트 대기실에 들어가니 22 ; 30분경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풀어진다.
핸드폰에 따운 받아온 음악을 들으며 흐트려진 마음을 정리해본다.
드디어 23;30분에 보딩을 하고 귀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같은 기종의 ZA211 편
자리는 역시 좁고 불편하나 며칠간의 지친 몸이 수마에 빠지게 한다.
내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7;00(한국시간)쯤 되리라.
그리고 추억을 만든 여행은 끝나리라.
첫댓글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 용솟음치며 떠오른 삼천의 섬들로 / 베플어 놓으신 조물주의 솜씨가 /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네. 선생님 여행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다녀온 기분입니다. 위에 복사해논 사행시 엄청 나게 좋은 시인데요. 시상니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읽어보시고 잠시나마 동행했던 것같은 기분이 드셨으면 합니다.
열심히 귀를 기우리고 집중하시더니 멋진 기행문을 올리셨군요~~!
그 때의 일상이 너무도 선연한 추억으로 떠 오릅니다. 선생님은 그 날 지갑을 분실하셔서 속은 상하셨지만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추억담을 장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쓰라린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ㅎ
여행 때 베풀어 주신 배려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금길 선생님 ! 시력. 주의력. 관찰력. 집중력 . 사고력. 기타 ....력 대단하세요. 저도 선생님 글 보고 자세히 보니 그렇네요. 짝 !짝 !짝!
미안합니다
회원님들께 명칭을 잘못 올려서
그리고 금길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