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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식인문화 독후감
1. 들어가며
얼마 전 독일에서 자신을 먹어달라고 찾아온 남자를 요리를 해서 잡아먹었던 사람이 경찰에 붙잡혀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었다. 식인. 그만큼 이 말은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상당한 불쾌감과 혐오감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식인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이전까지의 수많은 전란과 자연재해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의 풍습을 뿌리내리게 하는 주원인이 되었었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마다 전국 각처에서 식인이 행해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당시 극도의 궁지에 몰리던 일본군이 전쟁이 일어나던 태평양 곳곳에서 식량부족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식용으로 사용했다는 증거와 증언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에는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빠진 북한에서도 식인이 행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처럼 우리 인류는 마지막 삶의 보루로서 식인의 풍습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국에서의 식인은 단순한 식량부족으로 인한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문화를 관통하는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식인문화는 오늘날 중국인의 삶의 모습과 의식구조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그러면 본 보고서에서는 [중국의 식인문화]의 서평을 통해 중국 식인문화의 4천년 전통과 원인에 대해서 살펴본 연후에 다른 지역에서의 식인과는 다른 중국만의 독특한 식인의식을 알아보고, 이것이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는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2. 중국 식인문화의 전통과 그 원인
중국문명은 황하중류지역에서 위수평원에 걸친 지역으로부터 발생되었다. 예로부터 ‘중원(中原)’이라고 불렀던 중국의 중심부이다.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은(殷)은 황하 중류유역에서 꽃을 피웠다. 서주(西周)는 장안 근처에 도읍을 정했고 동주(東周)는 낙양 근처에 도읍을 두었다. 그 뒤 진(秦)의 시황제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중원을 통일하여 도읍을 둔 곳도 장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위수 근방이다. 또 진이 멸망한 뒤 항우와의 싸움에서 한(漢)을 세운 유방이 도읍을 세운 곳은 장안이었다. 중국문화의 대부분의 루트는 중원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의 역대황제는 한의 고조로부터 청의 선통황제까지, 약 2천1백 년간에 모두 2백 9명이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군주사회는 그 심층부를 이루고 있는 환관제도에 의해 지탱되었다. 환관에 대해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의 서적은 물혼 정사와 지방사, 그 밖의 수많은 기록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면 당대말기의 악덕환관의 대표로 지칭되는 구자량은 황제 조종법을 다음고 같이 가르치고 있다.
『천자에게 한가한 시간을 주어서는 안된다. 항상 사치에 빠지도록 하고 그 귀와 눈과 입과 신체를 즐겁게 하라, 그것도 매일매일 방법을 바꾸고 물건을 바꾸어 행하도록 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군중에게 독서를 시키거나 유생들을 가까이 하도록 해서도 안된다. 학문을 가까이하거나 유생과 친해지면 사물의 이치를 알고 왕조의 흥망성쇠의 연유를 생각하여, 현재의 정치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소외당하게 된다.』바로 이러한 토양이 중국의 식인문화를 개화시키게 하였다.
중국사의 제 2의 역사적 특질은 아마도 독재 군주하 지배층 내의 격렬한 전쟁일 것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는 2백9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중 63명은 자살을 하거나 암살을 당했다. 중국 황제의 무려 3분의 1이 자연사가 아닌 것이다. 1~20세로 서거한 황제가 24명(16%),21~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황제가 83명(38%),41~60세로 사망한 황제가 67명(32%)이다. 83세 이상의 천수를 누린 황제는 불과 5명뿐이다. 2백9명의 총 평균연령은 불과 38세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궁중투쟁이나 왕조의 쇄망에 의해 살해되고 멸망한 황자, 황손은 살해된 제왕의 수십 배 내지는 수백 배에 이른다. 태자로 책봉되기까지는 궁정 내데서 암투가 끝없이 펼쳐지고, 태자가 보위를 이을 때까지 파벌이 내흥을 거듭하고, 그에 말려들여 죽는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즉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황위쟁탈전으로 수천 수만 명이 살해되고 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삶을 마쳐야 하는 것이 중국의 공공연한 역사법칙이 되어 있는 셈이다.
역대 황제는 율령에 의해서 성문법을 규정하고 있다. 격렬한 쟁투는 가혹한 형벌을 낳았고, 이 형벌은 중국의 식인문화를 정당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황제에 의한‘식육(食肉)의 형(刑)’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주나라 시대에는 중죄인에게 5형, 즉 묵죄, 비죄, 궁죄, 월죄, 살죄가 성문법으로 명기되어 있다. 묵형은 무늬를 새기고 먹을 집어넣는다. 문신형인데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대 사상가인 묵가도 이 형을 받았다고 한다. 비형은 코를 자르는 형이고, 궁형은 거세를 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 형이다. 대 병법가인 손자는 다리를 잘렸고, 대 역사가인 사마천은 궁형은 받았는데 그것을 평생의 수치로 여겨 [사기]를 저술했다고 한다. 또 살형에는 요참(몸뚱이와 허리를 자르는 형벌), 효수(목을 잘라 옥문에다 내다거는 형벌), 차열(다리를 두 대의 우차에 묶어 좌우로 찢어 죽이는 형벌)등의 형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은 공형이든 사형이든 육형을 좋아했던 것 같고, 그런 이유에서 여러 가지 사법으로서의 식인문화가 생겨나게 된 듯하다.
중국의 역사상 대규모내란의 숫자를 근대 중국 사상가의 거인인 양계초씨의 통계에 따라 고찰해 보면, 기원전 221년부터 1920년까지 2140년 동안에 모두 160차례나 있었다. 내란에 소비한 햇수는 무려 896년, 즉 3년 중 1년을 내란이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그 이전의 춘추전국시대는, 시대의 이름에 걸맞게 결코 평화스러운 시대라고는 할 수 없을 듯 하다.
40년 동안 기록에 남겨진 봉건영주간의 침략쟁탈전쟁은 모두 448차례에 이르고 있다. 전국시대가 되면 전쟁의 빈도는 춘추시대를 훨씬 웃돈다. 248년 동안에 대규모적인 전쟁만도 222차례나 일어났다. 사소한 다툼은 너무 많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근대에 이르면 전쟁의 횟수와 규모는 병기와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더욱 커진다. 황인군씨의 통계에 따르면 중화민국이 정권을 수립한 뒤 민국 22년까지 22동안에만 일어났던 내전의 횟수는 7백회 이상에 이르고, 그 중 사천성에서만 일어난 것도 5백 차례나 되었다. 중국인의 내분은 그 횟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엄청나다.
1967년 5월 1일 모택동은 알바니아 군사대표단에게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을 가리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인은 역시 투쟁을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의 내부투쟁은 거의 평균 5년에 1차례의 빈도로 반복되고 있다. 이 투쟁의 경험을 기초로 앞으로 숙명적으로 10차례 20차례 30차례 투쟁재발의 불가피성을 예상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적 특질을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계초씨는 중국인을 ‘육민’이라 칭했다. 즉 전란에 의한 살육사의 비율이 지극히 높은 국민이라는 뜻이다. 중국인은 내란과 기근이 있을 때마다 양이나 돼지처럼 죽어가는 것이 역사적 숙명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중국사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역사이고, 그것이 ‘중국적 진리’를 낳은 토양이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사의 제 3의 역사적 특질은 인류역사상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천재와 기근이 있었다는 데 있다. 등운특 씨의 [중국 구황사]의 통계에 의하면, 중국은 상탕18 년부터 1937년까지 3천7백3년 동안에 수해, 한발, 황해, (메뚜기의 창궐에 의한 피해), 박해, 태풍, 지진, 대설 등의 천재만 모두 5천2백58차례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반드시 일어난 셈이다. 한발만 해도 3천7백 3년 동안 1천74차례에 이르러 평균 3년 4개월여만에 한 번씩 일어났다. 수해도 그 사이에 1천85회에 이르러 평균3년 4개월에 1차례의 비율인 셈이다.
한(漢)이전의 기록은 신빙성이 비교적 낮으나, 한제국 성립 이후인 서력 기원전 206년부터 1936년까지 직접 기근에 결부되는 자연재해가 2천72차례나 발생되었으니까, 중국대륙은 거의 매년 어딘가에서 기근이 몰아닥쳤다는 결과다. 중국에서는 전란이 항상 기근을 몰아오고, 그 기근이 확대되어 인간은 전란에 의한 살육사, 기근에 의한 아사이외에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서로 살해하거나 살해당하여 식육으로서 쟁반에 올려졌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건설된 기원전 206년부터 대청제국의 멸망까지 2천1백여 년 동안, 중국사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기록이 정사에 기록 된 것만 해도 무려 2백20차례나 된다. 중국의 정사란 [사기]를 비롯한 [이십육사]이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명통감], [문헌통고], [속문헌통고] 등의 자료까지 계산에 넣으면 가히 역사학자를 경탄케 할 만큼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노신은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민중이 서로를 죽이고 그 인육을 먹었던 것은 중국사의 일대 특색이다. 카니벌리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무수한 논문이 발표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는 미개인의 식인 현상만을 대상으로 취급하고, 카니벌리즘을 특수한 풍속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문명인의 식인문화에는 시선을 외면해 왔다. 중국문명을 연구하는데 이 식인문화를 규명하지 않고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중국 식인문화의 해명없이 중국의 역사사회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중국만큼 식인문화에 관해서 여러 가지 사료를 남기고 있는 국가는 없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식인문화를 해명하지 않고 중국의 역사문명을 운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식인문화의 연구 없이 카니벌리즘을 얘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3. 중국 식인문화의 특성
지금까지 식인문화가 생겨나게 된 여러 가지 배경에 대해 서술해 보았다. 중국은 다른 나라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수성이 식인문화를 생겨나게 했고 중국4천년 역사를 관통하는 전통으로서 내려온 것이다.
중국의 식인문화에는 3대 특질이 있다. 제 1의 특질은 중국문명과 그 파급의 족적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하해 가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주재 영국영사인 알렉산더 호제의 [중국의 한발]에 따르면,620년부터 1619년까지 1천년 동안 식인현상의 다발 지역은 섬서성이 첫째고, 그 다음이 하남, 산서, 산동성 순이라고 한다. 이어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파급에 따라 남하하여, 회하 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간다. 그 파급현상은 중국인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도 일치하고 있다.
즉, 중국인이 많이 이주하면 할수록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인 균형이 깨져감에 따라 기근이 일어나고 식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면 한(漢)의 고조 2년부터 흥평원년까지 4세기 동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화의 발상지인 황하유역에서만 출현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는 장강, 황하 일대에서도 점점 보이게 되었다. 또 강남과 광동, 복건성에 식인현상이 보이는 것은 중국의 세력이 남하한 3~4세기 후의 동진시대 이후가 된다. 다음 제 2의 특질은 인구 과밀지역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 과밀지역에 출현하고 있다. 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보다도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나 인구가 과밀한 모든 군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점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제 3의 특질은 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이다. 노신은 국가의 성립 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했다. 만일 이 ‘국가’가 진, 한 이후에 성립한 중화제국에 대한 정의라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즉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서 구축된 폭력기관이 광대한 인민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 속에 가두어 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대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이 균형을 자동제어하고 자생자멸해간 결과가 된다.
진한 제국이 성립한 이래9 전제적인 지배권력은 2천년 동안에 걸쳐서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인근 제국에 대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그 때문에 농민의 반란과 빈곤현상이 끊임없이 악순환을 반복해 왔다. 중국사회의 일대 특징은 내란이 그치지 않고 도적이 횡행하는 사회라는 점인데, 빈곤한 대중은 막상 천재를 만나게 되면 강자는 도적이 되고 약자는 먹을 것을 찾아 유민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봉건국가가 이미 발달해 있었다. 그 기반 위에서 중화제국주의 국가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농업기술의 개선은 2천년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양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기술혁신이나 자본축적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의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자이며 중국 패권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제의 환공은 재상인 관중의 부국강병책을 채용하여 천하를 통일한 사람인데 굉장한 미식가로 알려져 있다. 미식가로서 환공은 상미하지 않은 산해진미가 없었다. 그러자 부하인 역아는 환공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자신의 장남을 잡아 증육을 만들어 환공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한비자의 이병편에 전해진다.
식인문화는 통상 기아, 복수, 종교적 의례, 혹은 기호로 분류되어 설명되고 있는 듯한데, 중국의 식인문화는 이른바 충성심을 위해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즉 중국에서는 종교적 의식으로서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회 윤리로서 사람을 먹고 먹혔으며, 그것은 또한 하나의 미덕이 되기도 했다.
[삼국지연의]는 영웅호걸들의 호방한 활약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전란의 시대는 처참한 지옥도를 그려내는 시대이기도 했다. [삼국지]‘위지’, [자치통감]‘위기’는 238년경에,『사마성왕의 병사가......양평성을 에워싸 식량이 떨어지게 되자, 성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되고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공손연의 부자 이하 1천수백명의 목숨이 달아났다』기록하고 있다, [진서]‘색정전’은 괴리의 성안에 근이 심하여 사람들이 서로 죽여 인육을 먹었으며, 도망자를 다스릴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대의 대정치이론가인 왕충은 그의 불후의 명저인 [논형]속에서 패란 때 사람들이 서로 상담식을 한다고 논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식인문화가 당시의 보편화된 사회현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전쟁시에는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나아가 전란의 격화에 의해서 농경이 피폐해져 식량이 부족해지므로 인육이 비상시의 대용식 내지는 주식이 된 경우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공식이 일어나는 상황이나 혹은 약육강식의 무질서한 상황하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는 그야말로 강자뿐이라는 사실과, 공식대 잡아먹히는 것은 어린이는 물론 가족이나 당파를 갖지 않은 사람이 단연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이 중국사회의 전근대적인 가부장제도와 대가족주의의 원점이 되었다.
4. 중국의 인육시장과 카니발리즘
당대는 중국문화의 개화기임과 동시에 중국 식인문화의 개화기이기도 하며, 약용으로서 인육이나 사람의 내장을 먹는 것이 하나의 유행현상이 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중국식인사의 관점에서 그 특징을 정리해 보면, 1.인육시장 2.인육생산공장과 식용인간의 사육 3.약용 카니벌리즘 등이라 할 수 있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 당시대는 그 쇠퇴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대의 식인문화는 그 쇠퇴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개지에서만 보았던 것도 아니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도시에서 출현하고 있는 점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치통감]당기의 기술에 따르면 당조 태종 시대에 이세책과 단웅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두 사람은 원래 문경지우였는데 이세책은 당태종 이세민을 단웅신은 수대 말기의 군웅인 왕세충을 각각 주군으로 모셨다. 그 후 이세민은 왕세충을 쳐부수고 낙양을 평정하여 당왕조를 이루었고, 단웅신은 포로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이세책은 당태종에게 과거 왕세충의 충장인 단웅신의 용맹함을 고하고, 자신의 관직과 당웅신의 목숨을 바꾸어 줄 것을 간했다. 그러나 태종은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단웅신은 이세책에게 말했다.“나는 원래부터 자제가 일의 분별이 확실치 못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네.”이에 이세책은 “나는 목숨이 아까워 자네와 죽음을 함께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라,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공사를 양전 할수 없기 때문이네.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누가 자네의 처자를 보살펴 줄 것인가”하고 말한 뒤 넓적 다리 살을 떼어내 단웅신에게 담식케 했다. 이세책은 “이 넓적 다리로 하여금 자네와 함께 용사가 되고 그로 인하여 옛 맹세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징표로 삼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자치통감]의 기술은 ‘문경지우’였던 이세책과 단웅신의 에피소드지만 중국의 카니벌리즘이 하나의 사회풍속이며 하나의 미덕으로서 정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제군주사회에서는 충의를 대단히 중시하여 주군 내지는 중요인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도덕이고, 또 사관이나 출세와 연결되는 직선코스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충의로서의 식행동, 즉 사랑하는 아내가 자식을 잡아 주군에게 대접하는 행동은 비난을 받기는커녕 찬사를 받는 아름다운 미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세책이 친구에게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먹게 한 것은 당연히 의해이었다. 화복을 함께 해온 친구에게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 먹게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고방식이다.
당 시대는 인육시장이 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대 이후 중국은 동서무역이 성행하여 페르시아 상인 ,아라비아 상인, 그리고 이슬람교도나 기독교 선교사가 실크로드와 해로를 경유하여 중국을 찾아오고 있는데, 아라비아 상인이 쓴 [지나 - 인도이야기]에는 중국의 법률은 인육을 먹는 것을 허락하고, 인육이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책은 또, 중국에서는 기혼 남성이 기혼 여성과 간통했을 경우 그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도적이나 살인범도 마찬가지다. 사형수를 죽일 때는 죄인의 목숨이 붙어 있을 동안에 그의 고기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떼어 주는 방법을 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대는 처형된 범죄자를 그 관계자에게 인도하거나 혹은 민간에게 불하하여 식용으로 제공하는 행위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열녀전’을 보면 인육시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당시대에 주적이란 행상인이 있었다. 장사수완이 좋아 자주 광릉지바을 오갔다. 행상길에서 불행하게 필사탁의 반란을 만났다. 사람들은 서로 붙잡아 시장에 팔고 인육을 식용으로 제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주적도 이 난리에 휘말려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동행하던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된 이상 둘 다 고국에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함께 죽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십니다. 바라옵건대 저를 팔아 귀국 비용으로 쓰도록 하세요”하고 말했다. 주적은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지만, 아내는 억지로 남편을 시장으로 데려가 스스로 수천 전에 팔린 뒤 남편의 손에 여비를 쥐어 주었다. 주적이 성문을 나오려는데 수상히 여긴 수비병이 그의 여비 입수에 대해 추궁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시장에 가보았더니 아내의 목이 벌써 대들보 위에 걸려 있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분명 열녀의 이야기임이 틀림없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척 끔직하고 슬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인육시장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면 인육시장의 반입처나 반입경로는 어떠했는가 적어 보겠다. 이것은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처형된 죄인의 고기, 피, 내장이 형리로부터 일반에게 불하되는 루트이다. 다음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굶는 사람의 아내나 자식이 모두 인육상에게 팔려진다고는 할 수 없다. 운 좋은 사람은 부호의 양자나 첩이 되고, 또 노비나 농노, 기녀 등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적이나 군대가 사람을 잡아서 팔아 넘기는 루트이다. [자치통감]‘당기’에는 이에 대한 몇 가지 기술이 있다.
당대의 문덕 원년(888), 2월, 이한지의 부대는 본업을 수행치 않고 오직 약탈로 재화를 모으고 민중을 잡아 식용으로 제공했다. 당대의 대순2년(891) 7월, 손유는 양주의 인가를 모두 불태우고, 장년과 여성들을 앞세워 양자강을 건넜으며, 약자를 죽여 식용을 삼았다. 당대의 경복 2년(893) 2월, 이극용과 왕용의 군대는 질일영하에서 싸워 왕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일전으로 1만여 직병을 참수했다. 하동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그 시체를 ‘건육’으로 만들어 식용으로 했다.
천재와 전란이 비발하는 중국에서는 군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식량의 조달이었다. 특히 전란이 격화, 확대됨에 따라 상비군만으로는 전투인력이 부족하여 농민이 소집되었기 때문에 농지가 황폐화되고 식량 위기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전란이 찾아올 때마다 적병이나 전우, 나아가 운없는 민중이 최고의 동물성 단백질의 보급원이 되어 왔던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전란이 있을 때마다 중국의 군대가 포획한 불행한 민중을 군량으로서 상식했던 것은 이미 많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인류사에서 여간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 인간사의 일대 특색이기도 하다.
또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식용인육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황소군은 대군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대규모의 인육생산공장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화3년 5월 황소는 병사를 이끌고 진주를 공격하여 1백일이 경과했다. 관동지방이 농지는 완전히 황폐했고 굶주린 사람들이 벽이나 울타리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소군은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그 수가 하루에 수천 명에 이르렀다. 적은 용마채라는 거대한 맷돌 수백기를 갖추고, 사람들을 넣어 뼈와 함께 갈아 식용으로 공급했다.
[당서]‘회종본기’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중화 3년 6월 이해는 대기근이 들어 굶주린 백성에게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적들은 사람들을 포획하여 식량으로 삼았는데 그 취사장을 용마채라 했다.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또 [자치통감]당희종 중화 3년 6월항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수백 기의 거대한 맷돌을 설치하고 대규모의 식용인육을 가공, 생산했던 것은 오늘날 대도시 주변의 식품공장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또한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황소의 반란으로 인한 전사자와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자그만치 8백만 명이나 되었다. 황소의 군대는 항상 10만 명 단위였고 최성기에는 50만 명이라고 얘기 할 만큼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하루에 수천 명이 군량으로 공급되었다는 결론인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 다른기 록을 보면 황소 등의 반란군은 서로는 관문, 동으로는 청주와 제주, 남으로는 강과 회, 북으로는 위주와 활주에 이르기까지 황폐케 했다.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가시나무가 들판을 덮었다. 반란군은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용인간을 비축하고 있었다. 병사가 사방에서 나와 사람들을 포획하여 ‘염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염시’란 사람을 소금으로 절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연이라는 사람은 식용인간을 사육하고 그 담당관을 재살무라 칭하고 행군 때에는 식용인간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처럼 전란으로 인한 식인은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민중들 중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타나게 하였다.
당대는 인육시장이 출현하였다고 앞에서 언급했는데 인육시장에서 인육은 어느 정도의 가격에 거래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육의 가격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 수급상황에 따라 시세변동이 상당히 심하다. 물론 공정가격은 없다. [자치통감]은 882년 장안 성내에서 인육의 거래가격을 한 사람에 수백 관이나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상품 선택에 신축성을 갖게 하는 유동적 숫자이다. 정확한 숫자는 물론 체격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일반 시장가격은 그 단위로 시판되었기 때문에 살집이 좋은 경우 비싸게 팔리고 마른 사람은 뼈만 앙상하여 내장외에는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쌀 1말에 30관이었을 때 육용인간 한 사람 당 수백 관이었다면 인육이 쌀값의 수배 내지 수십 배 비싸게 팔렸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근 단위의 소 수매시장 가격이 되면 쌀 1말보다도 싼값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정부군으로부터 황소군에게 팔아넘겨진 육용 인간은 한 사람 단위의 도매가격에 해당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자치통감]은 봉상시장에서 팔렸던 인육이 1근에 1백여 전이었음에 반해 개고기는 5백전이나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육의 가격은 개고기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은 셈이 된다. 전란 때의 가격의 폭락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사람고기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고기나 돼지고기보다도 싸게 팔리고 있는 것은 역사가 이미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당대의 식인문화에서 큰 특징의 하나인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는 중국 특유의 것으로서 당대 이후 수백 년 동안 황실 관리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했다. 중국의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는 사람의 넓적다리나 옆구리살 그리고 사람의 피나 간장 뇌가 약이 된다 하여 난치병을 앓는 친족이나 윗사람에게 바쳤다. 이는 단지 순약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효(孝)나 의(義)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부모나 친족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바치는 것은 최상의 효행이라고 하는 윤리적 측면도 있다는 것이 큰 특색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환영받게 되었다. 송, 원대에는 나라에서 일인당 명주 5필, 양 3두, 밭 1경을 하사하여 표창하였고, 지방군정장관을 접견하고 천자를 알현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가 당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이유는 [신당서]‘호우전’서문에 『당의 현종시대 진장기가 그의 ‘본초습유’에 인육은 병치료를 위해 효과가 있다고 기록한 이후 민간에서는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 넓적다리 살을 떼어 바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당대 이전에는 의료목적에 의한 식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수당연의’에는 궁녀 주귀아가 팔꿈치살을 잘라 수의 양제와 숙후의 병 치료에 제공했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역사통속소설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흥미본위의 작품도 많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낮다. 적어도 ‘사기’에서 ‘수서’까지의 정사, 나아가 ‘좌전’이나 ‘자치통감’등의 제반사서 속에는 당대 이전의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대 이후에 발달한 한방의 학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진장기가 ‘본초습유’에 약재로서의 인육의 효과를 기술한 이래 인육은 약재로서 취급되게 되었다. ‘본초습유’의 원본은 오늘날엔 없어졌지만, 본초를 집대성한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은 ‘본초습유’를 인용하고 그 일부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단편적 자료를 엿볼 수 있다. ‘본초강목’제52권 ‘인부’의 목차에는 사람의 머리카락, 손톱, 이, 오줌, 월경, 정액으로부터 피뼈, 고기 그리고 미라에 이르기까지 대충 53항목이 가입되어 있어서 인체의 대부분이 한방약이 될 수 있는 듯한 느낌마저 있다. 그러나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는 폐해를 낳아 자주 정치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것 같다.
당대 말기에 이르자 식인습속이 지나치게 유행했는데, [오대사]의 ‘양태초본기’에 따르면 개평원년에 양태조가 각 군현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살을 자르는 일이 일어나도 상주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원대의 지원 3년에는 [원전장]효행의 부가 ‘할간완안(간을 가르고 눈알을 도려내는 것)’금지령이 발표되어 지원7년에 ‘할고장려 금지조령’이 명문화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의 유행은 명대 3백년 동안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착을 계속해 나갔다. [명률]과 [청률]의 인명부에는『산 사람의 장부를 떼어내고 인체에 훼손을 가하는 것은 능지처사의 형에 처한다. 재산은 죽은 자의 가족에게 부여라고, 처자 및 동거하는 가족은 사정을 몰랐을지라도 모두 2천 리의 유배형에 처한다. 종범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의 식인문화의 정착을 반영하는 율령이고, 약용으로서의 식인문화에 대한 엄벌주의 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식인풍습의 뿌리깊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송, 원대로부터 인육요리를 자세히 소개한 책이 출현하거나 인육애호가 언급되었다. 송대 말기의 도종의가 쓴 [칠경록]에는 인육요리에 대해 자세하게 씌어 있다. 여기에 보면 어린이의 고기가 특선요리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기가 젖먹이 어린양처럼 부드러워서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주찬의 군대나 장헌충의 병사는 주로 어린이를 기식했던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인육을 좋아했던 사람 중에는 어린이를 기식했던 사람이 많다. 오대의 좌금오위장군인 장종간, 송의 농지고의 어머니인 아농은 모두 어린이 고기를 좋아한 미식주의자이다.
그리고 어린이를 천구가 잡아먹었는다는 소문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내려온 것만 보아도 어린이 고기가 얼마나 미식주의자들에게 애식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청대의 고산정이 쓴 [객전술]에는 1647년의 사천대기근 때 남자고기 한 근에 7전, 여자고기 한근에 8전이라 하여 여자고기를 다소 비싸게 팔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어린이고기 다음으로 여자고기를 선호했고 남자고기는 그 아래였음을 알 수 있다.
5. 식인문화가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
지금까지 중국 식인사의 여러 가지 부분을 다루어보았다. 중국의 식인문화는 옛날의 전통문화로만로서 남지 않고 근대에까지 이르러 중국의 문화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었고 모든 사회체제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함 점을 꽤뚫어 보고 그것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광인일기’를 쓴 노신이다. 그는 원래 의학을 공부했으나 중국의 전통의학이 미신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중국사회전체가 미신에 휩싸여 있음을 깨닫고 중국사회를 전통적으로 꿰뚫어 온 유교를 비판하면서 유교로 유지되어 온 사회체제를 공격했다.
이렇게 하여 노신은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중국혁명문학의 선구자로 추앙 받게 되었다. ‘광인일기’는 한 미치광이의 일기, 즉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가 일기의 형식을 빌려, 신해혁명에 의해 공화국이 됐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전통적 도덕에 지배되고 있는 중국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암흑사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전통적 도덕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서석림이라는 인물은 노신과 같은 고향 사람인 서석린을 지칭하는 것이데 그가 잡아먹힌 것은 1907년의 일이다. 서석린은 반만주혁명군 부대를 이끌고 은명을 습격 안휘성 장관의 암살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은명의 근위대에게 살해되어 먹히게 된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이 추우추풍수살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여성혁명가 추근이다. 그녀가 참수당할 때 흘린 피는 옥리가 만두에 묻혀 결핵약으로 팔았다고 한다. 노신은 광인일기를 발표한 이듬해 ‘약’이란 작품을 썼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 말기까지 북경이나 상해 등지의 형장에서는 실제로 피만두가 팔리고 있었다. 식인은 아직 터부시 된 것이 아니었다. 노신 자신도 “중국인은 지금도 식인민족이다.”라고 허수상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다.
1911년 청조가 멸망한 뒤에도 식인풍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1928년의 [신문보.쾌할림]에는 남경경비 사령부에서 처형한 죄인의 피로 피만두가 만들어진 사실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노신이 ‘광인일기’나 ‘약’에서 비판한 것은 4천년 전통을 가진 식인문화이고 식인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중국의 전통문화 그 자체였던 것이다.
노신은 ‘사람을 먹어 보지 못한 어린이가 아직도 있을까?’라고 쓰면서 광인일기의 끝을 맺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바로 최근까지 중국에서는 어린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웅담을 먹이듯이 사람의 내장으로 만든 한방을 먹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중국인은 어린이라 할지라도 아주 드물었을 게 틀림없다. 노신은 아직 식인이라는 원죄를 범하지 않은 어린이들을 구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자 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전래민요에 ‘만강홍’이라는 것이 있는데 금에 대항하여 싸운 남송의 영웅 악비가 지은 것으로,‘오랑캐 포로의 고기를 먹고 흉노의 피를 마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노래는 항일 전쟁 때에도 전의고양가로 자주 불리어 졌다.
중국인은 많은 문화를 창출해 냈으나 종교라고 할 만한 종교는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유교는 옛것만 귀히 여기는 체제유지에 편리한 논리학이며 도교는 현세의 이익을 갈망하는 민중의 원시종교에 맥을 이었을 따름이다. 중국에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합리주의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은 죽은 사람을 땅에 묻어 벌레의 밥이 되게 하느니 차라리 식량으로 삼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그 많은 자손이며 후예라는 의식이 있다. 설사 신분상의 상하구별이 있다 해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의식이다. 그렇지만 중국인에게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라는 의식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먹는 데에 저항감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식인문화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보편적인 양식이었으므로 당연히 다른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황제전제제도, 황제의 후궁을 모시기 위해 거세한 환관제도, 여성의 전족 제도가 그렇고, 과거제도를 보더라도 오직 황제에게 봉사하는 관료를 선발하는 것만이 목적이었지 학문적이 의미는 없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단지 음식의 한 종류로 먹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점차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식인문화도 발전했다. 형벌로서의 식인, 복수의식으로서의 식인, 충성의 표현으로서의 식인 등등... 그리하여 중국의 식인문화는 시가나 문학 나아가 천문기상의 관측으로부터 민중의 공식을 점치는 식인천문학으로 까지 결부시켜 나가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식인문화가 발전했던 것이지 결코 그 역은 아니다.
6. 나오며
중국의 식인문화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일 것이다. 그러나 식인문화는 중국의 문화에서 4천년을 내려온 전통이고 그것이 나타나게 된 중국만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식인문화만으로서 중국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므로 식인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중국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끔 과제를 내어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글을 끝마칠까 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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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 정신적인 진화가 짐승 미만으로 머물러 있나봅니다. 소도 소고기 먹고 광우병에 걸리듯이 중국은 어쩌면 알 수 없는 병으로 인구조절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
중국의 식인문화가 4000년을 내려온 전통이고 문화의 근저라해서 우리가 그짓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육을 즐겨먹은 공자를 어찌 성인이라 칭할수 있겠습니까? 인간말종일 뿐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는 것은 문화도 아니고 전통도 아닙니다.
배고프고 살기위해서 먹었다는것도 인정될수가 없고 이해하려 애쓸 필요성도 없습니다.
이러한 행태의 해결은 올바른 정신문명의 깨우침이 있어야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조상님들의 '天地人' 철학사상의 복원을 노력해야하는 사명감이 또한번 절실하게 느낍니다.
이해라...ㅋ.....13억 ...소수민족 빼놓고 한족 10억 돼지들 이라고 불러도 다른 나라들이 공감하면 다 전통이군...저건 이해를 할 성질이 아닌데 이해를 해야 한다니?.....어제는 다른 식구의 고기를 먹고...오늘은 내 식구의 고기를 먹구 내일은 내 고기를 다른 식구가 먹는거...것도 전통이라면 이해 해야 할 성질인가?....의문 입니다.
세계대공황님 덕분에 좋은 글 한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처음 시작된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특유의 극심한 천재와 자연재해군요.
중국영화 중에 신용문객잔(1992년작)에 나오는 객잔에서 일하는 만두요리사가 얼마나 칼질을 잘하던지 영화 후반부에 싸우면서 살아있는 견자단의 다리를 뼈와 살을 막 발라내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당시에는 흥미있게 봤었는데, 영화 내용에도 인간이든 돼지든 뭐든지 간에 이 요리사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바로 요리가 되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참 끔찍하네요 저도 중국의 수십만 대군이 움직일대 역시 수만명의 포로를 같이 데리고 가면서 잡아먹었다는 걸 예전에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자세히 보기는 첨이네요
인육도 인육이지만 장기매매를 돈벌이 수단으로 중국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있다는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그여파로 많은 다문화 조선족 유입으로 한국젋으신분들의 실종 미제 사건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고 실종 되도 시체가 증발되는 사건이 다반수로 일어나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