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 키 작은 나뭇가지 끝에 삭풍이 불고/전 성훈
아파트단지를 벗어나면 바로 중랑천이 흐른다. 계절에 관계없이 중랑천에 자주 나간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둑길에 나가 주위를 돌아보며 천천히 걷기도 하고 빠르게 걷기도 한다. 서울동북부의 중랑천은 도봉구에서 분리된 노원구와 도봉구의 경계이다. 여름철 중랑천 수위 점검 장소인 남쪽 월계교에서 월계1교, 녹천교, 창동교, 상계교 그리고 노원교를 지나 도봉산역 창포원까지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도봉구와 노원구가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중랑천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파리 세느강 강폭 정도와 비슷한 느낌이다. 세느강은 유람선이 다녀 수심은 깊지만 강폭은 좁다. 북한산 물줄기가 만든 우이천보다 넓지만 한강보다는 강폭이 좁다. 문학작품이나 그림 또는 노래와 영화를 통해 상상한 세느강과 실제 모습은 다르다. 어쩌면 조금은 실망하고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이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니 중랑천 둑길의 나무들도 거의 옷을 벗어던지고 앙상한 가지만 외롭게 펄럭이고 있다. 간혹 높은 가지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가 덩그렁 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가녀란 나뭇가지 사이로 저 북쪽의 삭풍이 불어온다. 삭풍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자연의 생명은 계절의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속수무책인 채로 온몸으로 받아드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처럼 삭풍을 그렇게 맞이하지 않는다. 중랑천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난여름과는 너무나 다르다.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으로 살랑살랑 걷던 중년 여성도, 팔 없는 민소매에 짧은 핫팬티를 입고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채 빨강색 운동화를 신고 신나게 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긴 다리로 사뿐사뿐 달리던 젊은 여성의 모습도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모두가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중무장을 하고 걷는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두툼한 잠바나 혹은 패딩을 걸치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걷는다. 게다가 마스크 위에 선글라스를 끼고 챙 달린 모자까지 쓰고 걸으면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걷는 사람의 뒷모습이나 앞모습을 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있을 뿐 나이는 도저히 가름 할 수 없다.
삭풍이 부는 동장군의 계절에도 묵묵히 중랑천을 지키는 자연의 친구들이 있다. 철새가 아니라 이제는 텃새가 된 듯한, 청둥오리식구들, 그리고 하얀 백로 떼다. 이들은 매섭고 추운 이 계절에도 때로는 고고한 자태로 때로는 서러운 듯 한 모습으로 말없이 중랑천을 지키고 있다. 중랑천의 나무와 꽃들은 새봄이 오면 다시 푸르게 푸르게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중랑천에 지천으로 깔린 샛노란 개나리를 앞세우고 꽃과 나뭇잎들이 서로 경쟁하듯 다가올 것이다. 자연의 생명은 이렇듯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만 그 원형은 변함없다. 욕심을 내지 않고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순응하기에 그렇게 변화하고 순환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다. 끝없는 욕망의 화신인 인간이 소멸하고 다시 소생한다면 이 세상은 더 없는 혼돈의 세계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나뭇가지 끝에 불어오는 삭풍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걸으며 내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지나온 세월의 모습에 연연하지 말자, 묵묵히 앞으로 가야할 알 수 없는 길을 터벅터벅 혼자 가야한다. 덧없는 삶일지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한 번이라도 더 보여주고 떠나도록 마음을 조금 더 여는 노력을 해야겠다. (2017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