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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 톰 필립스
저자인 ‘톰 필립스’는 언론인이자 작가로 인터넷 뉴스 사이트 〈버즈피드〉의 영국판 편집장이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고고학과 인류학, 과학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뜻밖에 공부한 것을 실제로 써먹는 책을 쓰게 되어 흐뭇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번역자인 ‘홍한결’선생은 쉽게 읽히고 오래 두고 읽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 한 다고 하는데 한국외대 통번학과를 졸업했다.
제목으로 봐서 이 책은 어쩌면 역사책인 것 같기는 한데, 인간이 스스로 비난받아도 싼 그런 일을 소개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공부를 좀 한다는 사람이라도 결코 쉽 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 역사에 대하여 조금은 쉽게, 재미있게, 접근하게 해 주는 그런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조상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루시’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그날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기가 자신의 종에서 가장 유명한 개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유명’이라는 개념을 알려준다 해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자기가 에티오피아에서 살았다는 사실도 알 리가 없다. 누군가 선을 긋고 땅에 이름을 붙이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는 발상을 해내지만 그것은 수백만 년 후의 일이다.
몸무게 29㎏, 키 50㎝밖에 안 되는 루시가 드디어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를 곳곳하게 서서 걷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몰랐겠지만, 그것은 엄청난 역사의 태동이었다. 그로부터 320만 년 후인 1960년대 그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때는 한 무리 유인원, 그중에는 박사라는 학위를 가진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땅을 파다가 그의 뼈 화석을 발견했다. 발견자들은 영국 리버풀 출신 한 밴드가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더 다이아몬드’라는 노래를 듣고 있었기에 그의 뼈에 ‘루시’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종의 학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루시가 인간과 유인원을 어어 주는 ‘잃어버린 고리’로 각광받는다. 루시 유골은 미국 전역을 돌며 전시된 뒤에 현재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립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다. 루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우리 인류 조상이라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녀는 어이없게도 객사로 횡사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다. 그녀의 뼈는 이후에 인류가 펼칠 온갖 바보짓의 예고편을 보여준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고, 구체적으로 인간이 일을 말아먹는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이루어낸 자랑거리(과학, 예술, 펍 등)도 많지만, 어이없고 참담해서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려지는 오점(전쟁, 환경오염 등)도 많다. 여기서 저자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핵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이는 중이라고 하면서 결과가 어떨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쓰던 이때는 트럼프 1기 때다.
이 책은 모두 열 개의 장으로 인류 전반의 대실패 사례를 훑고 있는데, 여기서 잠깐, 저자는 독자라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취미가 없다면 이쯤에서 책을 덮기를 권한다’고 했다. 특히 ‘지도자를 따르라’에서는 사상 최대의 권력자들이 어떤 형태로 세상을 지배하고 대중을 억압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한다. 그중 호라즘 황제 이야기는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모르는 것에 비하면 눈곱만큼도 안 된다. 하물며 우리가 모르면서 모르는 줄도 모르는 것은 그보다 훨씬더 많겠지만, 안타깝게도 역시 모르는 애기니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도 없다. 아무튼 320만 년 전 루시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루시의 화석뼈를 CT 촬영하여 3D 모델링을 통해 골격을 재현했는데, 그 결과 골절 상태로 보아 살아 있을 때 골절을 당하고 그래서 죽었다는 결론이다. 연구에 참여한 다수의 정형외과 전문의들의 의견이 한결같이 높은 데서 떨어져 다친 환자에게 나타나는 골절 패턴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지질 연구 결과는 루시가 살던 곳은 평평한 산림지대 개울가로 절벽이나 바위 따위와 멀어 거기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맞다는 것인데, 훌륭한 추론이고 전문가들이 대부분 동의했다. 몇몇 동의하지 않는 참여자도 있었지만, 그들의 반론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리 조상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 곳곳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그 무렵 지구에는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정확히 몇 종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는 논란거리지만, 그들의 뼛조각만 갖고 동종인지, 이종인지, 변종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유명한 종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로 별명이 ‘네안데르탈인’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10만 년 더 전에 아프리카에서 옮겨와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우리 인간은 어디서 ‘짠하고’나타나기만 하면 주변 세력들은 씨를 마린다. 4만 년 호주에 인류가 상륙하자마자 유대류 4/5가 깡그리 멸종한 것과 같다. 화전을 일군다고 불을 싸지르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일부는 우리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1∼4%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그들과 왜 동화해서 살지 못했을까? 질병에 대한 내성이 없던 그들이 멸종했다. 기후가 급변해서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등 설이 있지만, 마지막 그들을 죽였다는 설은 우리의 특기임은 분명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네안데르탈인은 어거적거리고 돌대가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도 우리만큼 뇌가 컸고, 도구를 만들 줄 알았으며, 불도 사용하고 추상미술과 장신구까지도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조상인 사피엔스가 나타나 주인행세를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유리했을 수는 있다. 그것은 사고와 관련이 있는데, 적응 능력과 도구와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들고, 집단 내부에서나 집단 간 의사소통 방식에서 우리가 더 우수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독특하다. 우리 종은 이름부터 ‘호모 사피엔스’로 라틴어로 ‘현명한 사람’이다. 인간의 특징으로 ‘겸손’하라고 외치기는 하지만, 겸손을 특징으로 꼽는 경우는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뇌는 참으로 놀라운 기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 들리지 않는 부분까지도 머릿속에서 모형화한다. 상상으로 도약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농경을 시작하기 전에 인간은 무리를 지어 철 따라 먹을 것을 찾아 옮겨 다녔다. 하지만 벼와 밀을 심어 재배하면서부터는 그 옆에서 이것들을 돌 봐야 했다. 그러니 한 곳에 눌러앉게 되었고,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기고, 그로 인하여 갖가지 분쟁도 생겼다.
강에서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1968년 미국 버펄로 강에서 불이 났고, 1969년에도 미시건주 루지강이 화염에 휩싸였다. 워낙 자주 불이 나자 주민들은 불꽃놀이를 보듯이 모여 구경하곤 했다고 한다. 결국 1972년 미국 의회는 ‘청정수질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필요 없는 물건을 무조건 버리기 일쑤다. 그 결과 마을 전체가 전자폐기물로 뒤덮인 중국 광동성의 꾸이위 마을을 가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었다. 오래된 노트북, 컴퓨터, 핸드폰 등 전 세계에서 버린 전자기기가 50㎢의 넓은 땅에 산처럼 쌓였다. 꾸이위 주민들은 그것을 재활용해 자원으로 쓰고, 먹고살았다. 시꺼먼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환경에서 중국 정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태 수습에 나섰으며 보건 및 환경기준을 강화해 많이 개선되었다는 한다.
인간이 플라스틱을 사용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83억 톤이 넘는 그것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중 63억 톤이 버려졌다고 한다. 버려진 그것은 지구 표면을 덮고 돌아다니고 있다. 인간의 위엄이 아닐 수 없다. 『문명의 붕괴』라는 책 저자인 ‘제럴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야자수 나무를 밴 이스트섬 주민은 뭐라고 하며 나무를 베었을까?”커다란 거석(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에 높이가 20m, 무게가 90톤에 달하는 정교한 거석들이 있는데 이를 모아이 석상이라고 한다)을 세웠던 이스트섬 주민들은 결국 그 많던 나무를 모두 베어 냄으로써 멸망했다는 가정하에 던진 질문이다. 답하기 쉽지는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아마 “인생 뭐 있나?”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내 문제도 아닌데 뭐!”하고 답하지는 않았을까.
1859년 영국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오스틴’은 어릴 때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 와서 살았다. 그가 40대가 되자 목양업자가 되어 120㎢나 되는 광활한 땅을 빅토리아 부근에 소유했는데, 그는 호주에서 전통적 지방 유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영국의 환경을 호주에 재현해 놓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냥감을 많이 풀어놓으면 사냥이 훨씬 흥미로워지리라는 생각을 했으며, 조카에게 꿩과 자고비, 토끼 등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영국산 토끼 24마리를 들여온 것이 화근이었다.
토끼는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 1920년대가 되자 100억 마리로 추산될 정도로 늘었다. 1㎢당 1천 마리가 넘었다. 말 그대로 ‘토끼천국’이 된 것이다. 번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먹어 치운 풀의 양도 어마어마해 식물들은 멸종위기에 내몰렸고, 다른 동물마저 위협을 받았고 토양은 허물어졌다. 애당초 토끼를 들어온 것이 대실수였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 역시도 대실패했다. 호주의 과학자들은 토끼를 생물무기로 퇴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생태계는 너무도 복잡해 한번 잘못 건드리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한 가지 또 있다. 미국에서 칡은 유해식물로 지정하고 있는데, 1930년대 일본에서 건너간 칡이 토양을 지탱하고 유실을 막는데 제격인 것으로 보았다. 또 그 역할을 똑똑히 해냈다. 그러나 다른 풀과 나무를 뒤덮어 죽이는 재주도 있다는 것은 몰랐을까. 집이건 자동차건 닿은 대로 뒤덮는 것이 칡이다. 미국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자 ‘남부를 집어삼킨 넝쿨’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들에 온통 뒤덮힌 ‘환삼덩쿨’이나 ‘가시박’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칡을 ‘유해 잡초’로 지정하고 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집권을 시작할 무렵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했다.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수천 년간 이어온 농업국가를 현대적 산업국가로 탈바꿈한다는 공산당 목표를 이루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모기가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가 흑사병을 퍼뜨린다는데는 이론이 없었다. 드디어 공산당은 범국민운동을 기획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기와 쥐 말고도 두 가지 동물을 추가했다. 파리와 참새였다. 파리는 전염병을 옮기는 매체고, 참새는 곡식을 쪼아먹으니 그 대상이 된 것이다.
1년에 참새 한 마리가 먹어 치우는 곡식이 4.5㎏에 이르면 참새 100만 마리를 잡으면 인구 6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새잡이 운동은 1958년에 시작됐고, 엄청난 기세로 진행됐다. 사람들은 파리채와 소총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소탕에 나섰다. 학교에서는 새총으로 훈련까지 시켰다. 상하이에서 운동 개시 첫날 잡힌 참새가 20만 마리라고 『인민일보』가 보도하기도 했다.
참새와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적어도 목표를 완수했다는 점에서는 그랬다. 유해 동물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운동 결과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파리 1억㎏,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음이 곧 드러났다. 10억 마리 참새가 곡식만 먹은 게 아니었다. 참새는 해충도 잡아먹었는데, 메뚜리는 참새의 밥이고 천적이다. 10억 마리 참새가 갑자기 사라지자 메뚜리가 잔치날이었다. 거대한 구름 공포를 일으키는 메뚜기가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참새 소탕작전이 위험하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참새 대신 빈대로 바뀌었다. 물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뿐 아니라, 가뭄 등 여러 요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본다.
인류는 왜 딱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아 모든 결정 권한을 몰아주는 방식을 택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통치자가 된 그들은 무력이나 다양한 형태의 강압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을 테니까 말이다. 이집트 파라오 왕조는 무력 통일과 함께 출범했고, 수메르 왕은 도시국가 간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등장했다. 수메르는 수백 년간 이어지다 기원전 2334년 사르곤 왕에게 정복당하고 사르곤 왕은 세계 최초 제국을 세웠다. 힘에 의한 전쟁으로 상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냐, 전쟁이 먼저냐’는 닭과 달걀의 문제와 같다. 항상 함께 등장한다. 역사상 한 나라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이들은 그럴만한 자질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기원전 222년 이때 로마는 겨우 이탈리아반도에서 영토를 더 넓힐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진시황은 이미 방대한 제국을 세우고 오래 지속될 긴 역사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그는 치밀한 계획하에 나라 기틀을 마련하고 제후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중앙집권 관료제를 확립했으며, 화폐와 도량형, 서체까지 통일했다. 방대한 도로망을 기초로 우편제도와 정보, 물자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만리장성도 쌓았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진시황은 모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철저히 짓눌렀다. 통치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탄압하고 반대자를 처형했으며, 생업에 종사해야 할 농민을 토목공사에 강제 동원해 노비처럼 부렸다. 그것은 인류사에서 벌어진 일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놀랄 일은 그가 불로불사에 집착해서 황제의 위세를 총동원하여 영생의 비밀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찾게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가 몸소 검사한 영약의 상당수는 수은이 들어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명대로 살지 못했다. 그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라가 반란에 휩싸였고, 진나라왕조는 오늘날까지 강국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히틀러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존경하고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비난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어하겠지만, 그는 집단 학살광 외에도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나치 조직은 무자비하지만 능률적인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 정치에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며,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고,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시 많은 독일 지도층은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것이 오히려 득세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총리가 되기 전에 그의 연설을 듣고는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한심한 얼간이, 무능력자 집단’이라며 ‘어중이떠중이들 잔치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기도 했다.
독일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았을까? 아마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당시 공보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서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래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라고 썼다. 또 그의 절친이던 친구 한프슈탱글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했는데, 관료들은 히틀러의 기분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보좌관을 지낸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면 그가 베를린에 있을 때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에 관한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공보담당관 디트리히가 꼬박꼬박 신문을 스크랩해 갔다주었다고 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남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에는 질색이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일은 좋아했다.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금방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우리는 히틀러가 행한 끔찍한 사건의 배후에는 치밀한 고도의 기획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비극은 악당이 사주한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벌어질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천재나 악당의 눈에 띄지 않으면 별일 없겠구나’하고 안심하기가 쉽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이 오판임을 말해 준다. 우리는 거듭 역사 속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다.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들은 대개 악당의 소행이 아니라 오히려 바보나 광인들이 등장해 저지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쟁을 애호하는 취미가 있다. 가장 오래된 집단 폭력의 흔적은 14,000년 전 나일강가의 ‘제벨 사하바’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전에도 싸움은 있었다. 인류사에서 90∼95%는 전쟁을 꼬박꼬박 치른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과 거의 담을 쌓았던 소수 사회는 유목민이나 수렵·채집생활을 한 비교적 고립된 사회인 경우가 많았다. 세월이 한 찬 지난 후 영국은 스페인을 손봐 주기로 결심했다. 1625년 제임스 6세가 서거하고, 아들 챨스 1세가 막 왕위에 오른 무렵이었다. 챨스는 왕자일 때 스페인 공주와 결혼을 퇴차 맞은 것에 앙심을 품고 앙갚음을 해 줄 참이었다. 옛날 방식대로 해적질을 벌여서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을 싣고 오는 스페인 함대를 급습한다는 계획이었다.
그해 11월 영국은 네덜란드와 군함 100여 척과 병력 15,000명으로 연합군을 꾸려 스페인 남부 카디스만으로 쳐들어갔다. 실컷 노략절을 벌일 참이었다. 그런데 딱하게도 카디스만에 도착하기 전에 싣고 온 식량과 식수가 바닥나 버렸다. 지휘관인 에드워드 세실 경은 허기진 병사들에게 전투를 잠시 멈추고 일단 식량을 찾을 것을 명령했다. 스페인 땅에 상륙한 병사들은 행동에 착수했다. 카디스의 와인 창고로 직행했다. 그들은 오래 굶은 갈증을 포도주로 충당했고, 고주망태가 되었다.
세실 경은 현명하게도 계획을 포기하고 병사들에게 돌아오라고 했고, 불명예를 안고서라도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대다수가 돌아왔지만 1,000여 명은 헤롱거리며 카디스를 돌아다니다가 스페인군 손에 모두 죽었다. 영국의 카디스 침략은 그렇게 실패했다. 이 일은 전쟁사 가운데 최악의 실패로 꼽히기도 하지만, 병사들이 죽은 대목만 빼면 꽤 훈훈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느 외지에 가서 휴가도 아닌데, 진탕 마시고 취해볼 수 있겠는가? 술은 이 밖에도 최악의 전투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많지만 이만 줄인다.
세계를 탐험하고 개척하는데, 인간종만큼 고유한 특성을 지닌 존재는 없다. 그 덕분에 사피엔스와 그 사촌들은 진화사 관점에서 ‘눈 깜짝할 새’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1492년 콜럼버스가 망망대해에 배를 띄운 것도 그런 탐험심의 발로였는데,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연 것이다. 그전에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땅을 차지했을 때는 유럽과 아시아 간 육상 교역이 활발했지만 흑사병 창궐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육로가 막히고 기술의 급성장에 고무된 유럽이 바다로 눈을 돌린 것이다.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에 산타마리아호를 좌초시켰을 때 그 섬에 살던 타이노족 인구는 수십만 명이었다. 이후 스페인이 이곳에 노예제도와 채굴을 시작하면서 20년이 지나자 이섬에 남은 인구는 32,000명에 불과했다. 과거의 일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 아니다. 역사가는 역사를 밝혀내고 서술하고 전후 맥락에 비추어 고찰할 뿐이다. 사실 역사란 골치가 지근거릴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과거를 제단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그것을 제단해 주기도 한다. 식민주의는 나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기서 gossip(가쉽) 하나. 1930년 영국의 ‘루이스 레시터’는 자신이 호주에서 방대한 금맥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찾으러 호주 중부 사막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다시 갔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결국 그가 데려간 대원들은 그를 버리고 떠났고, 낙타들도 그가 큰일을 보는 사이 도망가 버렸다. 그는 사막에서 홀로 쓸쓸히 죽었다.
우리는 칭기즈칸에 의한 몽골제국은 잘 알면서 그에 대항했던 호라즘 제국은 잘 모른다. 왜일까? 그것은 호라즘 제국이 너무 빨라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몽골은 북중국을 제압하고 사절단 550명을 호라즘 왕국에 보내 교역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트라르의 성주 이날축 카이르칸은 그들의 물건을 모두 빼앗고는 모두 죽였다. 단 1명 목욕하는 사이 화를 면하고는 돌아와 그 사실을 몽골에 알렸다. 죽은 상인들은 몽골인이 아니라 위구르의 이슬람 상인으로 교역로에 위치한 이슬람 도시에 갔다 어이없게 몰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오트라르에서 벌어진 만행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했다. 몽골 입장에서는 물자공급을 위한 통상협상이 여전히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슬림 1명과 몽골인 2명 등 3명의 사절단을 보내 호르즘 왕 무함마드와 오해를 풀고 평화체제 복귀를 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사과는커녕, 1명의 목을 베고, 2명은 수염을 불태워 처참한 모습으로 돌려보냈다. 무함마드 입장에서는 칭기즈칸이 자신들을 ‘해지는 땅’운운한 것에 모욕감을 느꼈을 수 있다. 드디어 1219년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벌에 나섰다. 이번에는 오해의 여지 없이 “전쟁을 각오하라. 그대가 대적할 수 없는 대군을 이끌고 가리라”라고 하는 편지를 먼저 보냈다. 이때 몽골군은 10만 명, 호라즘군은 그 두 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라즘군은 버티는 전법을 썼다. 효과가 있었고 몽골군은 고전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학습 속도는 엄청 빠르다는 것이었다. 민첩했고 군기가 잘 잡혀 있었으며 지략에 능했다. 기습공격, 지원군 차단 동시다발적 공격으로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무서운 속도로 호라즘을 휩쓸었다. 점령한 도시마다 항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응하지 않으면 잔혹한 처분이 내려졌고, 재물은 남김없이 털어갔다.
열흘 동안에 학살을 끝낸 후 몽골군은 도시 안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여 복수의 본때를 보여주었고, 구르간지를 막고 있던 댐을 헐어 도시를 싹 쓸어버리기도 했다. 도망간 무함마드는 그 후 1년 동안 칭기즈칸 병사 2만 명이 쫓아가 1221년 1월 어느 섬에서 누더기 차림의 그를 발견했으나 그는 폐렴으로 이미 숨져있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것을 확인한 칭기즈칸이 거기서 진격을 멈췄다면, 무함마드와 호라즘 이야기는 역사 속 여담으로 남았겠지만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호라즘 파괴는 1221년 내내 계속되었고, 저항하는 도시의 인구 전체를 말살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고려는 그래도 부마국이 되면서 버텨냈다는 것에 위안을 가져야 할지?
1227년 칭기즈칸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이제 정복할 수 있는 데까지 정복하자는 야욕이 넘쳤다. 아시아 이슬람권은 거의 손에 넣었고 유럽까지 밀고 들어갔다. 몽골의 최전성기 때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영토를 점유해 멀리 폴란드에서 동쪽 고려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때 몽골의 유산은 20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 통치한 나라가 ‘부하라 토후국’으로 1920년 볼세비키에 의해 정복되면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여러 가지지만 탐험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는 그중의 하나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1998년 처음, 화성에 우주선을 보냈다. 〈화성 기후 궤도선〉이 그것인데, 발사 얼마 후 궤도선은 어이없게도 화성 표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콜럼버스가 계산 단위를 착각해 아메리카 대륙에 산타마리호를 좌초시킨 후, 500년 만에 NASA 기술자들도 단위 계산 잘못으로 화성 표면에 우주선을 추락시킨 것이다. 콜럼버스가 지구에 국한된 실수를 보여주었다면, 이제 전 우주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화성 궤도선의 결함이 드러난 것은 화성에 우주선을 발사하고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우주선의 경로를 조정해 항로를 유지 시키려고 할 때마다 의도대로 지정되지 않았다. 결함이 치명적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우주선이 화성 궤도에 진입하려는 순간 지상 관측소와 교신이 끊긴 것이다. 우주선이 목표로 했던 고도보다 약 100㎞ 이상 화성 표면에 까깝게 접근한 것이었다. 궤도에 진입하려는 순간 화성대기에 강하게 충돌했고, 3억 2,700만 달러짜리 최첨단 우주선은 곧바로 산산조각이 나고 표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당시 공산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에는 과학기술 대결이 한창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발견과 기술혁신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은 상대국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련이 우주 비행 기록을 연달아 세우자 미국은 충격에 빠졌고, 마침내 1969년 7월 달 표면에 인간이 탑승한 아폴로11호가 내리기도 했다.
납이 치명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특히 어린이는 어른보다 납을 체내로 5배 더 많이 흡수하므로 아주 위험하다. 미국에서만 192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7,000만 명의 아동이 중독 수준의 혈중 납 농도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납은 신체질환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경계 발달에 커다란 피해를 준다. 이로 인해 IQ 저하와 지적·발달장애를 초래한다.
현대 사회는 10년 만에 아니, 1년 만에도 몰라보게 변한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쉴 새가 없다.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도 점점 빠른 속도로 반복하고 있다. 똑같은 실패와 실수는 죽어도 예견하지 못한다. 자고 일어나면 듣도보도 못한 것들이 새롭게 쏟아지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릴 때 쓰는 휴리스틱(정보를 활용하여 실현 가능한 결정을 하려는 목적)들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정보가 폭증하다 보면 처리가 버거위지기 마련이다.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가 더닝 그로우 (점점 커지는) 현상에 빠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최초’가 끝없이 쏟아지지만, 그 대부분은 예견하지 못했거나 예견한다 할지라도 무시한 결과들이다. 그리고 그 최초들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영국의 ‘매리 워드’는 최초로 자동차를 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6㎞로 달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자동차로 컴벌랜드 거리 모퉁이를 돌다가 자동차가 넘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그녀는 최초의 자동차 사고 사망자였다.
1891년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나마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의 공장이 의회보다 전쟁을 더 일찍 종식시킬 것이오. 어느 군대든 적군을 삽시간에 섬멸할 수 있게 되는 날, 모든 문명국가는 엄습하는 공포감에 군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노벨보다 몇 년 뒤인 1897년 ‘케틀링 건’을 발명한 ‘리차드 케틀링’은 자신의 발명품이 인도적 전쟁의 시대를 열 줄 알았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이면 날마다 군인들이 전장으로 떠나고 다치고 병들고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고 … 이런 생각이 들었네. 내가 만약 어떤 기계(속사총을 가르킴)를 발명해 군인 1명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큰 군대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투를 크게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1971년 러시아 우주인 게오르기 도브르볼스키, 빅토르 파차에프, 블라디슬라프 볼코프 등은 우주 정거장에서 귀환하던 중 소유즈 캡슬에 공기가 누출되어 우주에서 사망했다. 우주에서 사망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2016년 시베리야 야말반도에서 순록을 키우던 유목민 사이에 탄저병이 돌아 12세 소년이 죽고 20여 명이 입원했다. 이 지역에서 75년 만에 탄저병이 발생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고온으로 여름철 온도가 평년보다 25도까지 올라가자 얼음층이 드러났고 수십 년 전에 형성된 얼음이 녹으면서 1941년에 죽은 순록의 사체가 노출되면서 잠재해 있던 탄저병이 발생한 것이었다.
170년 전 미국 서부로 일확천금을 쫓아 사람들이 몰려왔던 골드러시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면 믿겠는가? 암호화폐 회사들이 값싼 전력, 임대료, 넓은 유휴 공간을 찾아 워싱턴, 몬테나, 네바다 등지의 작은 시골 마을로 몰려와 수억 달러를 투자해 거대한 채굴 시설을 짓고 있다. 이런 현대판 금광 채굴꾼들이 몰려온 어느 시골 마을 주민들은 불만이 높다. 24시간 돌아가는 서버의 소음과 빛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 건강문제가 심각하고 야생동물들은 도망가고 없다고 한다. 2018년에 비트코인 채굴에 사용된 에너지만 해도 오스트레일리아 전체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와 맞먹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멍청이처럼 보이기 딱 좋은 일이다. 다가올 수십 년, 수백 년은 인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참신하고 획기적인 실수를 줄줄이 저지르지 않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기를 걸어야 한다면 과거에 저질렀던 똑같은 실수를 계속 저지를 것이라는 데 거는 게 현명할 것이다.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더웠던 18번의 해 중 17번이 2000년 이후였다. 지질시대 들어 처음으로 2018년 4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10 PPM을 넘어섰다. 루시가 살았던 시기는 지금보다 해수면 높이가 20m가 더 높았다. 우리 인간이 결정할 일을 컴퓨터 알고리즘에 점점 많이 위임함으로써 파멸을 맞을지 모른다. 뭔가 더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에서. 설사 잘못되더라도 우리 잘못이 아니기에. 그런 경향은 가속화하기가 쉽다. 자동주행 자동차를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그런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미 알고리즘은 주식매매, SNS에 뜨는 뉴스 선택 등에 쓰이고 있고, 범죄자의 재범을 저지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결정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주입한 그 모든 편향과 그릇된 전제를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자신의 발명품에 의해 파멸되리라는 시나리오는 황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똑똑하다는 사람들 중에 그 가능성을 꽤 진지하게 간주하는 이들이 우려스러울 만큼 늘고 있다.
앞으로 1년 혹은 10년 후, 100년 후,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어떤 뜻밖의 변화가 일어날지 몰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우리가 처한 불행은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고 정교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해 우리가 지은 죄는 잊으려하거나 덮으려 할 것이다. 경제 위기가 터진 후에는 대중 영합적 정치인에게 표를 줄 것이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아웅다웅할 것이다. 집단 사고를 통해 광풍 확증 편향에 빠질 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우리 계획이 아주 좋은 것이고 절대 잘못될 리 없다고 되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무에 올라가도 떨어지지는 않을 날이 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