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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창 24장 10-21절
설교제목 : 이삭의 아내 찾기
슬픈 사건 이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요즘 출퇴근길을 도보로 걷고 있습니다. 둘레길의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고요함과 평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이 좋은 계절에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연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죽은 후 슬픔 속에서 사라의 매장지를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막벨라 굴과 그 굴 앞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사기 위해 은 사백 세겔을 투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의 성취를 미리 내다보며 자신이 에너지를 투입하여 그 땅을 샀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이를 상실했지만,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라의 죽음 이후, 성서는 시점을 정리하길, 아브라함은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복을 주셨습니다”(1)고 말씀합니다. 나이듦은 모든 희망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과의 연결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바락barak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은혜와 연결됩니다. 이미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산출력, 번식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어떤 유형의 내용도 되지만, 어떤 잠재력을 시사하는 단어입니다. 정신의 잠재력은 나이들어도 퇴보하지 않습니다. 1절 말씀에 복을 이야기 하시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종을 불러 자신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나서라고 부탁합니다. 사라의 죽음 이후 새로운 자손의 번성을 위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여성 원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실의 아픔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발판입니다.
하이에나와 바오밥 나무
지난 주 한수엘리 에터 박사님의 ‘칼라하리의 창조신화’라는 논문을 번역하면서 부쉬맨의 창조신화 속에 담긴 하이에나와 바오밥 나무 이야기를 해석한 부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이 모든 동물을 만든 후에 모든 식물과 나무를 심는 것을 돕기 위해 동물들을 소집했습니다. 하이에는 늦게 도착했고, 심을 나무는 바오밥 나무 뿐이었습니다. 하이에나를 화가 나서 반항적으로 나무를 거꾸로 심었습니다.”
"바오밥 나무가 이상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은 하이에나 때문입니다. 하이에나는 비겁하고 교활한 동물이자 썩은 시체를 먹는 타락한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부쉬맨의 창조신화에서는 하이에나가 질투심에 모성신의 배를 찢어서 세상에 피조물을 산출하게 한 장본인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런 하이에나는 정상적인 신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세계를 확장하는 존재입니다. 하이에나가 바오밥 나무를 거꾸로 심음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것, 견디는 것, 심층으로부터 천천히 자라나 빛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굳건히 뿌리 박힌 반박할 수 없는 가치를 상징하는 것을 도입하고, 가장 아름다운 꽃을 반복적으로 피우는 씨앗이 유익하고 자극적인 효과를 지닌 것임을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칼라하리의 바오밥은 파괴할 수 없는 것,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그것을 현실로 바꾸려는 자연의 끊임없는 충동의 이미지로 서 있습니다. ... 하이에나가 선의 원리에 반대되는 원리의 상징이라면, 바오밥 나무는 선의 반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놀랍고도 지속적인 효과의 이미지입니다. C.G. 융은 “우리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우리의 가장 좋은 발판이다”라고 말하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죄의 가치는 실로 매우 크므로 너무 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융, 꿈세미나, p.368). 기존 질서의 역전은 현실에서 놀라운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깊은 사랑, 이혼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은 우리의 삶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관념, 계획, 습관, 의견 모두가 갑자기 뒤바뀝니다. 우리 내부나 외부에서 어두운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습니다. 심각한 병이 발병하여 우리의 세상이 단 한 번의 타격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Hansuli Etter, The Creation Myth of Kalahari, 근간] 지금까지 배제되고, 생각할 수 없고, 거부되었던 것을 포함하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슬픈 사건과 고통을 경험할 때, 이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의 배열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여성상 찾기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게 생명력과 창조력, 생식력의 상징인 자신의 생식기를 잡고 맹세시키며 당부합니다. 두가지 지침을 제공합니다. 첫째는 고향과 친척이 사는 곳에서 배필을 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절대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서 찾아오라는 것은 다른 뿌리와 섞이지 않고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조취입니다. 친적내 결혼을 통하여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아들을 지금 땅에서 절대로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한 고향 땅에서 그곳의 화려함과 편리함을 보고 그곳에 안주하려는 마음으로 바뀌면, 약속의 땅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하기에 그곳에서 다음 세대가 약속을 실현가야한다는 것을 강력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먼 시선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판기나 인스턴트 음식처럼 빨리 무언가를 실현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가치와 시선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소명과 약속의 성취를 위해 지금 당장이 아니라 먼 시선을 응시하며 갈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진술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너의 앞에 보내셔서 거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주님은 네 앞서 천사를 보내셔서 너를 도울 것이니 염려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미래와 가능성을 위한 여정을 떠나려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순적하게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사자를 앞서 보내셔서 우리를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새로운 변환을 위해 떠나려는 자에게는 앞서서 길을 안내하고 도움을 주는 주님의 사자가 어떤 모습으로든 나타날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아들의 아내를 찾는 일은 다가올 시간에 새로운 여성상을 찾는 과제입니다. 보통 민담에서는 왕의 아들들이나 부자의 아들이 아내를 찾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는 새로운 여상성 찾기이며, 집단 정신의 감정과 에로스 원리를 대변하는 여성상을 찾는 과정입니다. 결국 며느리를 찾는 과제, 새로운 여성상을 찾는 일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낡은 어머니 사라의 세계를 떠나고 새로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리브가(그물끈, 고리라는 뜻)가 새로운 여성상으로 등극하는 일입니다. 이런 여성원리는 우리 시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시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 에로스
이 나이든 종은 마치 지혜로운 노인처럼 기도합니다.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자신뿐만 아니라 낙타까지도 물을 주겠다고 하는 여인을 만나면, 그 여인이 이삭의 아내인 줄 알겠다고 자신의 기준을 정합니다. 이 종은 ‘나홀’ 성에 당도하여 우물가로 갑니다. 우물은 성 바깥에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우물가에 여인들이 오길 기다리다가 해질 무렴 여인들이 올 때 한 아리따운 소녀에게 다가가 물을 청합니다. 여기에서 우물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아인(צין)입니다. 원래의 뜻은 ‘눈(eye)’입니다. 우물이 눈과 연결되는 것은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감정기능과 연결되기도 하고, 우물이 새로운 인식과 통찰을 불러올 수 있는 것과도 연관되는 듯합니다. 우물가는 감정과 에로스의 원리와 접촉하는 곳이며, 새로운 통찰을 가능케하는 장소합니다. 물을 마심으로써 새로운 활력과 생명력, 통찰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물을 좀 마시게 해달라는 이 노인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왠 노인이 나를 귀찮게 하네!, 자기는 손이 없어 팔이 없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저함없이, “할아버시, 드십시오. 하면서 급히 자신이 뜬 물동이를 내려 손에 받쳐 들고 마시게 합니다(18).” 이어서 “제가 물을 더 길어다가, 낙타들에게도 실컷 마시게 하겠습니다.”
리브가는 물을 구하는 노인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나아가 낙타까지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물을 실어 날랐습니다. 마을 밖까지 나와서 물을 긷는 행위는 늘 번거롭고 힘들고 지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낯선 자를 환대하며 물을 마시게 합니다. 우리는 외적 내적 세계에서 물을 달라고 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를 요구하는 실체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꺼이 환대하며 물을 주고,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환대의 마음, 에로스가 있어야 합니다. 무수한 꿈에서 우리 정신에 필요한 내용을 요구합니다. 돈을 달라고 요구하고, 때로는 반지를 요구하고, 때로는 옷을 달라고 하고, 손에 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요구를 넘어서 거칠게 도둑처럼 침투하여 우리에게 훔쳐 가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억압하거나 배제하기 때문에 무의식적 내용들이 거칠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아의 이기적인 욕망에 도취된 우리 자신은 팽창적으로 살아가든지, 각박하고 삭막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세계는 낯선 자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는 에로스 원리가 시급합니다.
이 소녀는 낯선 노인을 환대할 뿐 아니라 낙타에게까지 물을 먹입니다. 이는 본능상을 돌보고 그것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보면, 낙타는 사막을 건널 수 있도록 운반해주고, 오아스시로 안내하는 동물입니다. 낙타는 신성한 본질의 숨겨진 중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본능입니다. 낙타가 무릎을 꿇어 기수를 태우기 때문에, 겸손과 복종을 의미하며, 척박한 조건을 참고 이겨내는 특성으로 절제를 의미합니다. 구약성서에서는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으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신에 바친 동물로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힌두교 도상학에서는 죽음과 관련하여 악의적인 요기니(yogini)의 상징으로 묘사됩니다.
이 소녀는 사막의 척박한 땅을 건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낙타의 본능을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돌봅니다. 이 여성 안에 신의 본질에 숨겨진 중심에 이르도록 안내하는 본능상과 친밀한 유대를 지닐 저력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안에 본능을 건강하게 돌보면, 그것은 거친 삶을 뚫고 신성한 중심에 도달하게 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몸을 돌보고, 절제와 겸손으로 충동을 길들이면 본능적 저력이 사막같은 척박한 땅을 지날 수 있도록 우리 삶을 안내할 것입니다. 낙타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행위는 다시 낙타의 본능에 활력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겸손과 절제하는 본능적 힘은 사라졌고, 우리를 더 깊은 신성한 본질에 다다르게 할 운반 수단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그물 끈, 고리”이라는 이름을 지닌 리브가의 이름처럼 낯선 것들을 환대하고, 자신의 본능과 건강하게 연결할 수 있는 에로스 원리가 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팎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세계에 이런 에로스 원리를 통하여 개인과 집단이 새로운 변환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