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이야기] (7) 제천 덕산면의 순교자들
이 필립보는 제천시 덕산면에 살았는데, 1866년 10월 13일 7명과 함께 체포되어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이 필립보의 하인인 김 작은쇠(토마스)는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출신으로 덕산에서 살다가 1868년(무진년) 4월 초순에 단양에 포졸이 오는 것을 보고 자수하였다. 충주로 이송되어 형벌을 많이 받으면서도 배교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모니카(18세)는 유순하고 숨은 희생으로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면서 동정을 지키기를 갈망하였다. 부모와 함께 덕산면 선림리(仙林里)에 살다가 1866년 박해에 풍기 은풍(예천군) 홀목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1866년 가을 충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데, 좌우 관속이 ‘한 말만 하면 놓이리라’고 하자, ‘무가내(無可奈)하라.’고 배교를 거절하였다.
이 마리아는 덕산면 선림리에 살았는데, 1866년 10월 단양읍에 사는 큰 집으로, 또 경북 풍기의 서 서방 집에 비자(婢子) 하나를 데리고 피신하였다가 충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70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제천시와 문경시 사이에 있는 대미산(1,115m)을 중심으로 건학(안동교구), 여우목(청주교구), 부력(불억, 원주교구)이 교우촌이 있다. 대구(혹 내포) 출신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49세)는 입교한 후 예천, 문경 건학(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이주하여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예천에서 교우촌을 약탈하기로 마음먹은 황가(黃哥)가 예천현감에게 포졸 한 명을 얻어 교우촌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약탈하고 불을 질렀으며, 미처 피하지 못한 남자 교우 하나와 여교우들을 끌고 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건학에서 온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와 문경읍 중평리 여우목에서 온 회장 아들 이 시몬(24세)이 용감하게 뒤쫓아 갔다. 포졸은 투항하라고 하면서 둘을 심하게 내리쳤다. 이때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풀려났고,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와 이 시몬과 부력이 남자 교우 등은 예천 관장에게로 끌려갔다. 그 교우는 배교하고, 둘은 혹형을 당하면서도 굳은 믿음을 지켰다.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는 이 시몬이 약해질 때마다 권면하여 신앙을 보존토록 하였다.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을 때 “천지만물 대주재를 공경하다가 어찌 생명을 아껴 배반하리이까?”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천주의 기본진리인 천주의 존재, 천주의 주요한 속성, 창조, 구속, 천주의 계명 등을 설명하였다. 감사가 임금께 순종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모호한 말 한 마디만 하라고 재촉하자, 이 시몬이 “저희 사지를 나뭇가지에 매서 잡아 배고 저희 몸을 갈기갈기 찢고 저희 뼈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놓으신다 해도 저희는 배교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1865년 12월 10일 마지막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나서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는 시몬에게 “자네는 나보다 젊으니까 내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너무 무서워할까봐 염려되네. 자네가 먼저 가게. 나도 곧 뒤쫓을 테니”라고 하였다. 그는 시몬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한 지 몇 주일 후에 칼레 신부가 건학 마을로 성사를 주러 갔다.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의 가족들이 와서 순교자들을 위한 미사를 청하고 그 미사 중에 아내와 장남이 성체를 모셨다. 칼레 신부가 8살 된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이때 둘째 아들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아버지는 저기 천당에 계셔요.”라고 대답하였다. 전 프란치스코 하베리오의 아내도 대모를 따라 문경읍 중평리 호항리(狐項里, 여우목)에서 살다가 1866년 대모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 지금까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고해 주신 여진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2022년 10월 30일(다해) 연중 제31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