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정사
정사, 학당, 서원은 조선시대 학당이었고, 명망이 높은 선비나 향리에 지체높은 어른들 자식들이 교육하는 기관이다.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에는 ‘月溪精舍(월계정사)’가 명월현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월계정사는 서재, 김녕정사는 동재로 삼았다고 하였다. 조선조 초기에 향교에 이어 인구가 늘고 제주향교나 정의향교, 대정향교가 거리문제로 정사가 세워지면서 가까운 곳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다 1831년(순조 31) 월계정사 개량서당 교육기관인 右學堂(제주목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으로 전승되었다.
후일 김녕정사는 좌학당으로 세화리로 이설하였고, 아라리 오등동에는 남학당, 애월 상가리에는 서학당으로 1837년 한응호 목사 시 건립하여 서민층 대상을 중심으로 공부했던 곳이다.
월림리 탄생
1956년 6월 한림面이 邑으로 승격하면서 한경면이 만들어진다.
당시 상명월이 상명리로 상명월 하동과 저리지 하동인
두 자연마을을 합쳐 ‘월림리’가 된 것이다. 월림 ‘月’은
명월에 月자이고 ‘林’자는 한림에 림자를 차용한 이름이다.
월계라는 명칭은 지금에 옹포천이라고 하는 하천이 월계천이였기에 붙은 명칭이다.
월계정사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기념식수로 팽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없다. 고려시대에는 월계사라는 절도 있었다는데 누구도 절터를 확실
하게 아는 자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고려시대 작은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강상이물 교량을 걷너면서부터는
강상이물은 강생이 강세이 즉 강아지와
같이 아주 작은 물이 흘러서 붙은 명칭이다.
이곳에서 한림중학교 학생들은 교장선생님 인솔하에 집으로 갔고
질토래비 단원들은
2011년 11월 개통한 강생이다리를 건넜는데
월계정사 표지석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수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명월성지
일부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계정사 표지석을 잠시 벗어나면
한수풀 역사순례길이라는 안내표지가 세워 있다.
지금부터는 비포장 농로를 따라 명월진성으로 이어진다.
지금이야 돌담길이 아름답고 정겹지만 1980년대 농사가
주였을 때만 하여도 비포장도로는 농민들에게 불편했다.
상수원 관리동을 뒤로 하고
앞에 간 질토래비 일행을 따라 나도 걷는다.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만조봉수가 있는
망오름(느지리오름)도 눈 앞에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선배들 숨결에 빠져보는 시간이다.
애써 농사 지었는데 양배추 가격
폭락으로 갈아 엎어버린 것이다.
봉고트럭 하나가 들어 갈 입구 밭의 경계담을 보니 先代 사람들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생각이 난다. 밭에서 끝없이 나오는 자갈을 모아서 아래 밭이 굴렁져 빗물의 유입을 막기 위하여 자갈 돌을 아래 촘촘하게 넓게 쌓고 조금씩 큰돌을 이용하여 높이 약 1m 정도 쌓는 방식이다. 이러한 밭담을 백해담 이 지역에서는 잣담이라고 한다.
안쪽에 있는 밭으로 갈 때는 농사지은 것이 밟힐까 봐서 잣담으로 다녔다.
그렇게 다닌 잣담 길을 '잣질'이라고 부른다.
자갈이 많은 밭은 작지왓으로 부르는 곳도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귀덕리 '잣질동네, 城路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