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 동기 우일이와 영호 셋이서 동해로 나섰다. 7번과 31번 국도를 중심으로 지방고속도로를 번갈아 타며 동해로 다가섰다. 동해로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올해로 일흔다섯을 맞은 죽마고우(竹馬故友) 셋이 한차로 떠난 겨울여행은 한없이 맑고 청정했다. 동해안 지리에 밝고 건강한 우일이가 2박 3일 동안 핸들을 잡고 부산으로부터 해금강이 너머다 보이는 강원도 고성까지 무려 510km를 달렸다. 투석환자가 떠날 수 있는 가장 긴 여행이다. 2010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동해안 탐방로로 ‘해와 파란 바다를 보고 걷는 길’이라고 이름 지은 해파랑길과 겹치는 곳이 많았다. 우리 셋은 남해와 동해의 분기점인 부산을 출발하여 울산, 경주, 포항, 영덕, 강구, 후포, 울진, 삼척, 동해, 옥계, 정동진, 강릉, 주문진, 양양, 낙산, 속초, 고성, 화진포,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 등 굽은 해송과 한 쌍의 장난감 같은 등대가 그림 같은 어항과 바다를 향해 엎드린 고즈넉한 갯마을, 해안선 따라 굽이굽이 꼬리를 문 금모래빛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 달렸다. 해변에서 진종일 들려오는 해조음(海潮音)이 자신과 마주 서서 어떤 미움과 갈등도 말끔히 씻으라고 속삭였다.
동해는 다른 바다와 몇 가지 달랐다. 첫째는 시인 신경림이 ‘동해바다’에서 “널따란 바다”라고 읊었고 소설가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라고 했듯이 동해의 수평선은 양끝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아득하게 끝없이 펼쳐진다. 망망대해(茫茫大海) 그대로다. 수평선을 오래 응시하고 있으면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이 되살아나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다음은 대양으로부터 쉼 없이 달려드는 파도가 윈드서핑을 타거나 해양스포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끝으로 남해처럼 양식장이 조류를 막지 않고 서해처럼 개펄이 없는 동해는 사시사찰 맑고 푸르다. 입춘을 지나 우수로 가는 길목의 봄 바다에는 계절을 앞서가는 물 맑은 물길이 눈에 시리다. 첫날밤은 정동진(正東津)에서 묵으면서 동해와 태백산맥이 만나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맞기로 했다. 이곳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헌화가(獻花歌)의 작품현장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던 노옹이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 위험을 무릅쓰고 깎아지른 절벽에 핀 꽃을 목숨을 걸고 꺾어다 바치며 사랑을 고백했다는 프로포즈의 감동이 머무는 곳이다.
옥계를 지나면서 떠오른 정월대보름달이 우리를 줄곧 따라왔다. 정동진의 진입로는 어둡고 차량통행이 뜸했으나 해변에 들어서자 주말여행객들이 넘쳐났다. 정동진은 조선시대 한양의 경복궁 정동쪽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강원도 강릉시 강릉면 정동진리는 문화재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조용한 갯마을로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정동진역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역에서 내리면 바로 백사장인 정동진역은 석탄을 실어 나를 때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으나 폐광이 늘어나면서 강릉, 동해, 삼척의 아름다운 해안선 58km를 달리는 바다열차의 기착지로 거듭났다.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에서 겨울 밤하늘의 보름달을 향해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쳐오시라.”라고 두 손 모은 아내의 정성이 갸륵하다. 그뜻은 “달님이시여 부디 높이 돋으시어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내 사내들의 어두운 뱃길 비추소서. 내 님 돌아오는 길에 부디 암초를 비켜서고 무서운 비ㅏ람 잠재워 끝까지 살피소서.”라는 아낙의 기도가 하늘에 가닿았는지 오늘도 보름달이 높이 떠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밝힌다. 해송과 철길이 어우러진 해변의 달밤은 여행객들에게 감성을 풀기에 좋은 밤이었다. 옛날처럼 술을 마다하고 사는 우리는 오히려 열정과 상실의 황혼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생각을 나누었다.
적당히 늙은 우리 셋은 기상시간부터 달랐다. 꼭두새벽에 일어난 우일이가 어두운 해변을 걷고 영호는 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베개를 가져간 나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초당순두부로 아침을 나눈 뒤 주변의 시간박물관과 모래시계공원을 둘러보았다. 숙소를 나온 우리는 해안단구 위 높은 곳에 세워진 썬크루즈 카페에 들러 기암괴석이 펼쳐진 부채길을 내려다보며 한 컵의 생맥주를 마셨다. 정동진에서 행운의 월출과 일출을 맛본 다음 양양군 강현면의 실로암 메밀국수를 맛보기로 했다. 강릉을 지나면서 서쪽 차창으로는 먼 산에 흰 눈이 싱그러웠고 오른 쪽으로는 짙푸른 동해가 우리와 함께 달렸다. 길섶 나뭇가지 끝마다 새봄의 전령, 초록빛이 조심스럽게 생명의 기별을 전했다. 동치미 메밀국수 한 대접이 온몸을 맑고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새로 지은 메밀국수집은 흰 눈 덮인 두타산과 오대산 그 위로 설악산을 이어달리는 태백산맥과 마주한 여섯 그루의 자작나무가 하얀 속살을 드러내보였다. 시인 백석은 시 ‘백화(白樺)’에서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라고 읊지 않았던가.
양양을 거친 우리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지고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속초, 고성, 화진포를 거쳐 더 나아갈 길이 없는 통일전망대가 우리의 앞을 가로 막았다. 이틀째 밤은 대포항에서 묵기로 했다. 동부전선의 최북단 DMZ와 남방한계선이 살아있는 분단의 현장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금강산로에서 쌍안경을 통해 철책너머 북녘 산야를 살펴보았다. 해금강 자락이 동해로 침몰하는 절경과 그 위로 흰 눈 덮인 금강산의 구선봉 너머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릴 때 경험한 6. 25 한국전쟁을 DMZ박물관에서 새삼 회상하며 비무장지대에서 통일을 위한 마음의 기도를 바쳤다. 7번 국도가 이어진 고성해변에는 동해성당을 비롯해서 간성, 거진, 대진성당이 말없이 통행차량을 맞고 보냈다. 길은 우리의 우정을 이어주었다. 때로는 서로 견해가 달라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눙치는 일은 우리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다졌다.
어두워지기 전에 양양에 도착한 우리는 대포항과 낙산해수욕장을 걸었다. 생떽쥐페리의 “바다를 미치게 그리워하게 하라.”는 말이 새삼 밀물져왔다. 저녁은 오징어와 생선회를 배불리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방은 넓고 따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흘째 아침은 전라도식당의 해물뚝배기가 입맛을 돋우고 힘을 돋우었다. 청량한 솔향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낙산사 보타전과 의상대, 해수관음상과 홍련암을 향해 등을 밀었다. 낙산사 홍련암은 10여 년 전 산불로 아픔을 겪었으나 강화 보문사와 여수 향일암,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도량으로 건재했다. 이곳의 파돗소리는 잠들지 않는 독경소리요 그윽한 기도가 되어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것 같았다. 흰 눈 밟고 선 몸이 바다와 마주하면 절로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빠져 마음의 문을 왜 열어야 하는지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게 했다. 낙산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다래헌에 들러 쌍화차를 앞에 놓고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나누었다.
이번 여행은 공덕을 쌓아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과 중생 구제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참뜻을 터득하게 했다. 나아가서 반야심경에 빠져 모든 것이 시적과 끝도 없는 공(空)이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는 연기(緣起)를 상기시켰다. 관동팔경의 으뜸인 경포대를 비롯한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님이 태어난 오죽헌,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기회로 남겨 두었다. 서둔 출발이 어두워지기 전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유로웠다. 이제 남은 일은 긴 겨울방학 끝에 오는 3월 첫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제4기 예가인문학교실 <읽고 생각하며 쓰는 삶>의 13강 강의일정과 교안에도 이번 여행의 감동을 담을 것이다. 동해안의 해안선 따라 7번 국도는 내륙으로는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태백산맥이 오른쪽에서 물 맑은 봄 바다가 펼쳐진 동해를 끼고 부산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오는 길에 이번 나들이에서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참고 견디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집에 들어서면서 낙산사 다래헌 문설주에 나붙은 입춘방(立春榜) “꽃이 피어 봄이 아니라 당신이 웃으니 봄입니다.”는 말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첫댓글 올해 가고싶은 곳 60곳을 정해놓고서도 운전에 자신이 없어 두달째 허송세월하네요.
운전 잘하시는 아저씨가 부럽습니다.^^
운전 잘 하시는 분을 섭외하세요.^^
가고 싶은곳, 꼭 가보시기를요.^^♡
저도 설이 지난지 며칠 되지않아 지리산으로 여행을 다녀 왔어요.^^
마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듯 길이 환하게 웃더라구요.
흙집에서 참나무장작으로 불을
때주어 너무 좋았네요. 저도 그리움님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요.^^
저에게 있어서 2박3일을 넘기는 여행은 꿈입니다.
젊은 날의 두세 달씩 해외 취재와 성지순례는 이제 먼 나라 얘기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이 내게는 큰 울림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엘사의 감시를 벗어나서 뚝배기도 먹고 생맥주도 마셨답니다.
그것도 250cc 한 잔을요. ㅋㅋㅋ
동해의 넘실대는 푸른 물결을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어요. 부산에 온 뒤로 강원도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토
마스와 저도 한국에 돌아가면 똑같은 여행을 해보고 싶어요. 계절과 동행인은 달라도 참 즐거울 것 같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받으신 힘으로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 바래요.^^
여행은 볼거리, 먹거리 못지 않게 팀웤이 중요하지요.
태평양 연안의 필립핀 해변과는 다른 동해 바닷길이 정감이 있고 시적 감성이 넘쳐요.
동해안으로 달리면서 토마스 형제랑 '내나라 내겨레'를 불러보세요.
바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