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조정원(24)씨는 학교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것은 음악 소리가 아니다. 밀가루 반죽을 휘젓거나 케이크 시트를 까는 소리다. 치즈케이크를 만들 때 나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한다. 조씨는 “공부할 때 집중이 잘된다”고 말했다. 친구 추천으로 이런 소리를 들은 지 1년이 넘었다. 언론사에서 인턴을 하는 김소희(24)씨는 영화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가 즐겨 듣는 소리 영상 목록엔 해그리드 오두막에서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는 소리, 호그워트 마법학교로 가는 기차 소리처럼 영화 속 소리가 담겨 있다. 김씨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할 때 틀어 놓는다”고 말했다.
유튜브 콘텐트 1000만 개 넘어
책 읽거나 쉬거나 잠잘 때 들어
“좋은 경험 연상, 정신 건강에 도움”
스토커 등 롤플레이 영상 공유도
이런 소리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라고 한다. 안정감이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소리를 의미한다. 백색소음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만 백색소음은 거슬리는 외부 소음을 덮어주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ASMR은 듣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trigger)해 기분 좋은 느낌(tingle)을 주려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ASMR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2014년. 이후 젊은 층 사이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어 콘텐트가 유튜브에만 80만 개에 달한다. ASMR은 세계적으로도 ‘힐링 사운드(healing sound, 치유의 소리)’로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ASMR 콘텐트는 유튜브에만 1000만 개, 전문 채널만 30만 개를 넘어섰다. 유튜브 외에도 인스타그램,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전문 홈페이지 등에서 공유되고 있다. 대학생 조씨가 주로 듣는 채널은 외국의 ASMR 채널 ‘ASMR Magic’과 ‘EMOJOIE CUISINE’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노토킹(no talking) ASMR이라고 한다. 인턴 김씨 역시 유튜브에서 해리포터 영화 속 공간 분위기나 소리를 담은 콘텐트를 이용한다.
ASMR의 종류는 다양하다. 두드리는 소리인 태핑(tapping)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물체의 반복적인 소리를 담은 콘텐트다. 재질에 따라 나는 소리가 다르다. 유리컵·휴대전화 등을 손톱이나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나는 소리를 담은 ASMR 영상이 여기에 속한다. 입으로 내는 소리인 입소리(mouth sounds) 유형도 있다. 책을 읽어 주거나 일정한 발음을 반복하며 속삭이는 소리를 말한다. 또한 역할극을 뜻하는 롤플레이(role-play) 유형은 사람 목소리가 섞여 있어 어떤 상황인지 상상할 수 있는 영상을 말한다. 실제로 누군가가 옆에서 귀지를 파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영상도 있다.
가수 아이유가 지난 7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액체 괴물 슬라임 영상. 조회수 100만 건을 돌파했다. 슬라임의 말랑거리는 촉감과 만질 때 나는 소리에 젊은 층은 열광했다.
이 밖에 내셔널 지오그래픽(NGC)이 2011년 제작한 ‘우주 끝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는 잠 못 드는 사람들을 위한 ASMR 콘텐트다. 흔히 ‘꿀잠 영상’이라고 불린다. 이 다큐멘터리는 태양계, 성간, 성운, 항성의 죽음, 은하계, 빅뱅 순으로 우주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태양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최근엔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퍼지고 있는 액체 괴물 ‘슬라임(slime, 영화 등에서 나오는 액체 상태의 끈적끈적하며 기괴한 생명체)’을 만질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광고에서도 ASMR이 활용되고 있다. 배달앱 ‘배달의 민족’은 ‘오늘은 치킨이 땡긴다’는 TV광고에서 치킨을 기름에 튀길 때 나는 소리를 영상과 함께 제공해 시청자의 청각을 자극했다.
그렇다면 ASMR은 왜 국내외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을까. 직장인 김보겸(27)씨는 퇴근 후 인스타그램에서 슬라임 영상을 보는 게 취미다. 김씨는 “진주나 펄이 들어간 슬라임을 조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한다. 휴일에 물풀과 베이킹 소다 등을 구매해 직접 진주 슬라임을 만들기도 했다. 이를 녹화해 ‘나만의 ASMR’ 영상을 제작했다.
대학생 박준기(26)씨는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물건을 두드리거나 긁는 소리의 ASMR을 듣는다. 한 달에 한두 번 ASMR 동영상을 재생시켜 놓고 잠에 든다. “편안하거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ASMR을 듣는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ASMR 헤드폰을 비치한 수면카페도 생겼다. 캡슐형으로 생긴 수면룸에서 ASMR 헤드폰을 사용해 물소리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런 시설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20, 30대 학생이나 직장인이다.
ASMR의 효과에 대해 검증된 의학적 근거는 없다. 윤병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ASMR에 대해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는 뇌파와 맞는 소리를 듣는다면 안정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다. ASMR이 기억의 연상 효과를 갖는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배명진(전자정보공학부 교수)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장은 “ASMR은 좋은 경험을 연상시키게 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해준다”고 말했다. “무엇인가 튀기는 소리가 들리면 과거 튀김을 먹었던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ASMR은 정신건강을 좋게 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피부 관리실이나 미용실에서 누군가의 세심한 관리를 받았던 경험을 연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볼거리의 홍수 속에서 피로감을 느낀 이들이 대안으로 ASMR을 선택한다는 해석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이라며 “시각 중심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반영하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짚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소음의 시대와 경쟁적인 인프라가 만들어지다 보니 본인의 안정을 추구하는 ASMR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영상의 시대에서 오디오 매체인 라디오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실시간 라디오 청취율은 2011년 9.5%에서 2014년 13.9%로 47% 증가했다. TV와 스마트폰이 발달하면 라디오가 사양길에 들어설 것이라는 우려와는 다른 결과인 셈이다.
ASMR을 제작하는 유튜버(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들도 이런 점에 신경을 쓰고 있다. 유튜버 ‘수프(Soupe)’는 “ASMR을 제작할 때 현장감을 살리는 데 가장 신경을 쓴다”며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 스토리를 재연하기 때문에 특정 공간의 특징을 살리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실제 ASMR 제작 기간도 짧지 않다. 최소 2, 3일부터 일주일까지 기획, 소리 수집 및 편집 과정을 거친다. 외부 소음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유튜버 ‘톰왔(Thomwhat)’은 모두가 자는 늦은 시간에 녹음하고 유튜버 ‘미니유(Miniyu)’는 집 안에 따로 방음부스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들이 만든 ASMR을 들은 사람들은 불면증으로 고생하다 수면패턴을 찾았다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 임신부는 ASMR을 들은 뒤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ASMR 유행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ASMR 이름을 달고 일부 자극적 콘텐트가 유통되기도 한다. ‘납치극’ ‘스토커’ ‘성폭행’ 등을 가상으로 설정한 롤플레이 영상이 ‘ASMR 19’ ‘ASMR 꾸금’과 같은 제목으로 유튜브, 전문 사이트 등에서 공유되고 있다. 대부분 콘텐트에는 연령이 제한돼 있지 않아 미성년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자극적인 영상들을 규제하기도 하지만 규제는 신고와 검색 이후에 이뤄져 상당수의 자극적인 영상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ASMR의 대부분이 유통되는 유튜브가 해외사업자인 것도 규제에 걸림돌이 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유튜브가 해외 사업자이기 때문에 행정 처분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