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처음 배운 늦깍이 학생' 자서전 ⑥ 소이 (부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베트남에서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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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전 데이트하며 | 내가 태어난 곳은 베트남 하이봉이다. 생일은 1987년 2월 11일이다. 엄마가 진통 없이 순산으로 나를 낳았고 크는 동안 말썽 없이 편하게 키웠다고 하셨다. 1989년 남동생이 태어났고 베트남에서 아빠, 엄마, 남동생과 넷이서 살았다.
아빠, 엄마는 무역 일을 하셔서 이틀에 한번은 꼴로 일 때문에 중국에 가셨다. 그래서 동생과 둘이서 집에 있는 일이 많았다.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 남동생과는 싸우는 일이 없이 잘 지내던 기억이 난다. 9살 때 엄마가 온 식구가 함께 먹기 위해 요리해둔 닭 한 마리를 혼자서 다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 때 엄마는 내가 다 먹은 것에 놀라셨다. 그 이후 식구들과 닭을 먹을 때는 나에게 따로 한 마리를 해주기도 하셨다. 더운 여름 전기가 끊기면 엄마는 무릎에 나를 눕히고 부채질로 시원하게 해주셨던 일도 생각난다.
10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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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에서 결혼식 후 가족과 함께 | 베트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여자가 되는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공해서 부자가 되면 모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공보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공부 다음으로 좋아했던 일은 옷 만드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형 옷을 직접 만들어서 입히고, 직접 생각하는 옷을 디자인 하곤 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내가 옷을 만들어 사람들이 입을 수 있도록 옷 공장을 개업하고 싶있다.
그리고 도시에서만 살아서 시골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래서 학창시절 친구 창미와 함께 학교 수업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가서 우렁도 잡고, 논에 들어가서 벼 사이에 숨어서 숨바꼭질 하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들께 말씀도 안드리고 창미와 시골에 놀러가서 집에 늦게 들어가서 부모님들께 혼났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창미와 함께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도 우리는 가끔 그 때 일을 이야기하면서 웃긴 했었다.
10대에 가장 기억이 남는 사건이 있었다. 도둑이 내 목걸이를 훔쳐가서 나는 도둑을 따라가서 내 목걸이를 달라고 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다시 찾기에는 힘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도둑을 잡아 아빠, 엄마가 오셔서 목걸이를 찾아주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이 용감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보낸 20대
공부를 좋아했던 나는 베트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있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선 베트남에서 들었던 것과 너무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다. 결국 목포에 있는 전문대에 입학을 했는데 학교에 문제가 생겨 2년 후에 졸업장을 받지도 못하고 등록금도 많이 날리게 되었다. 혼자 한국에 와서 여러가지 큰일을 겪게 되었지만 나는 한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기숙사에서 혼자서 한국어 공부를 하였다. 2년 후에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졸업한 후 서울에 계시는 고모네 집으로 올라왔다. 고모와 고모부도 베트남에 계시는 부모님과 동일한 무역 일을 하셔서 한국에 많은 사람들을 알고 계셔 그 도움으로 의류공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릴 때 옷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난 그 공장이 정말 좋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을 반복해서 했지만 1년 후에는 내가 직접 디자인을 하여 옷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기숙사에서 혼자서 한국어 공부한 것이 사회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남편과의 만남 &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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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사진 | 남편을 만난 건 고모부 덕분이다. 현재 남편이 고모부에게 베트남 서류 번역을 부탁하였는데 고모부가 바빠서 약속 장소에 내가 대신 나가서 처음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서류 번역과 관련하여 몇 번 만났는데 남편이 고모부에게 내가 좋다고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그 때 23세 나이에 남편과 나이 차이가 10살 넘게 차이가 나는데다 남편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엔 한동안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남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남자다운 말투와 행동, 자상하고, 생활력이 강한 모습에 점점 끌렸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남편은 부천에서 직장을 다녀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남편이 매번 나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와서 데이트를 하곤 했었다.
그렇게 연애를 하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베트남에 계시는 부모님께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내 나이도 너무 어리고,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며 부모님들은 반대하며 나를 베트남으로 불렀다. 베트남에 들어온 후 남편이 8개월 동안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한 달에 1~2번 베트남에 와서“소이와 결혼 허락해주세요”부탁도 드리고 집안일도 도와드리다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이런 남편의 모습에 부모님도 진심을 느끼셔서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주셨다.
결혼 허락 후에 우리는 베트남에서 웨딩 촬영을 하면서 여러 벌의 드레스도 입고, 화장도 하고 촬영 내내 남편이 장난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힘든 것 보다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2011년 1월 30일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베트남 하롱바이로 2박 3일 신혼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수영, 밤 낚시도 하고 배에서 회도 먹으며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 후 남편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서 결혼비자 신청 후 나를 초청하는데 3개월의 시간이 걸려 떨어져 있던 그 시간동안 나에겐 남편이 보고 싶고 중요한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11년 3월 8일 한국으로 와서 남편과 부천시 송내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2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서로의 성격과 습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현재까지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이 잘 살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며 살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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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일아트 프로그램을 수강하며 | 처음 부천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낼 때 남편은 부천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매월 1회 진행되는 자조모임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국제결혼을 한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정보 공유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는 모임으로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모임에 나가서 같은 베트남과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여 너무 좋았다. 센터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한국어교육, 네일아트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2012년 상반기 한국어교육 고급반 수업을 들으면서 수료증도 받았고, 네일아트를 배워서 중앙공원에서 5월 있었던 ‘복사골예술제’에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네일아트 자원봉사를 하여 뿌듯하였다.
그리고 신랑이 시간이 될 때마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면서 둘만의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현재는 메이크업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남편의 소개로 인천의 웨딩숍에서 웨딩촬영, 결혼식 혼주 메이크업 일을 취미로 하고 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메이크업과 옷을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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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송내동 집에서 |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여 한국어능력시험 4급에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4급에 합격도 하고 한국어를 잘하여 타국에서 여행 온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곳저곳을 알려주는 여행 가이드가 되고 싶다. 몇 년 후에는 예쁜 아기도 낳아서 남편에게는 완벽한 아내가, 우리 아이에게는 따뜻한 엄마가 되는 꿈도 꾸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남편이 퇴직 하면 남편과 아이와 함께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예쁜집도 짓고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
이 기사의 글과 사진, 만화는 부천시문해교육협의회에서 발간한 <늦깎이 학생이 펼치는 인생 수록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참고로 글을 쓴 주인공은 한글을 처음 배운 학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