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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묵상글 들 ( 연중 29주 월요일-하느님의 작품. 등 )
* 하단에 10. 18. 묵상글 2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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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9주 월요일-하느님의 작품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돈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아직도 많고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했다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 돈 때문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모 재벌 회장은 몇 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모르긴 하지만 만약 그에게 의식이 없다면,
또 의식이 있어도 정상적인 생활을 그가 할 수 없다면
그렇게 연장하는 생명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며 그래서
생명은 어떤 생명이어야 하고 존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생각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오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비유의 끝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을,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작품답게 사는 사람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줄이 끊긴 생명은 물줄기가 끊긴 연못처럼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로 놔두면 얼마 안 있어 시들어 말라 버리는 생명에 불과하지요.
그러므로 이 생명을 빚으신 작가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도록
온전히 맡기고자 합니다.
하느님 생명의 법칙이 아니라 욕심과 욕망에 따라 살아서 벌로 병이 났다면
빨리 약을 달라고 하느님께 떼쓰지 않고 앓아야 할 병을 끝까지 앓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치유의 은총을 주신다면
그 은총의 약이 하나도 낭비되지 않도록 모두 흡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치유를 위해 몸의 고통을 약으로 주셨다면
그 약이 온몸에 스며들도록 고통을 은총으로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다 낭비해버려 덕은 쌓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아무 소용없는 돈만 쌓은 것입니다.
돈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살아있게 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살아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있을 때만 유지될 뿐 아니라
그런 생명이라야 생명답고 하느님의 작품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작품답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그 작품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을 어찌 감히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인 우리 인간을 몸뚱이만 창조하시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고 사랑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으니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의 사랑을 지닐 때만
우리가 하느님 작품다운 존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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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2,13-21
비우려면 가져야 하는 믿음: 내 것 = 근심
오늘 복음에서 어떤 억울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형이 모든 유산을 가로챈 것입니다.
아마 형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형을 좀 설득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에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고 하시며, 그런 청을 하는 동생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탐욕을 없애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탐욕은 모든 인간들 안에 원죄로 남게 되었고, 그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라고 말하고,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많은 분이 돈에 대해 기도를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
물론 딱한 사정들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런 기도를 드릴 때 들어주실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기껏해야 돈이나 벌어다 주는 그런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그런 기도의 청을 받을 때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친애하는 자매들이여, 우리가 할 일은 세속의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면서 연금이나 재물을 하느님께 빌어달라고 할 때, 나는 우습다가도 곧 슬퍼지곤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모든 것을 박차버릴 수 있게 주님께 빌었으면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뜻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경우, 하느님께서 그런 일에는 결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정성을 보아 나는 응하여 줍니다.”(『완덕의 길』 1장)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욕구를 없애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것을 청하면 구원과 멀어지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뺄셈을 하며 살아야지, 덧셈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청하는 마음 안에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잘못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잘 것은 있어야 하지만, 생존 이상의 것은 더 가질수록 더 근심스럽습니다.
2017년 3월 27일, 미국 뉴욕시 맨해튼 한 호텔 24층 객실에서 50대 남자가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머피’였습니다.
찰스 머피는 월가의 소위 잘나가는 투자 관리자로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연달아 성공시켜 이름을 날리며 백만장자 대열에 들어선 그야말로 성공의 신화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많이 걸릴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부자들이 모여 있는 서울 강남 3구가 인구 10만 명 당 우울증 치료 건수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물론 돈이 있어서 그만큼 많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있겠으나 돈이 있다고 기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억만장자 아돌프 메르클레(74)가 2009년 1월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일도 있습니다.
그는 독일 내 5위의 부자이며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순위에선 94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지구적 금융위기로 자신의 피땀으로 일군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논평에 보면 그가 모든 것을 처분하고 빚을 갚고 나도 1조 원 정도의 돈이 남았을 것이라는 글도 있었습니다.
통장에 1조 원이 남아도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 재물입니다.
많이 소유하면 많이 행복하다는 헛된 가르침을 아이 때부터 치워버려야 합니다.
많이 가지면 그만큼 근심이 늘어납니다.
이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이 많으면 무엇을 입어야 할지 근심하게 되고, 차가 많으면 어떤 차를 타야 할지 근심하게 됩니다.
애인이 많아도 어떤 애인과 결혼해야 할지 근심이고
가진 책이 많아도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근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은
한 가지 옷과 신발만 입고 신었습니다.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이유는 많이 외롭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공허함을 물질로라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느낌으로 자란 아이들은 커서 안 쓰는 물건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심하면 병이 되어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걱정이 많아서 물건이 많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물건이 많아서 걱정이 많아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기도 하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뺄셈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많이 비워야 채워질 사랑의 공간이 넓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탐욕을 경계하라 하시며 곳간을 새로 짓는 부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곳간만 짓다가 구원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집에 수납장이 있으면 반드시 채워집니다. 쓸모없는 것으로라도 채워집니다.
사실 채워지지 않아도 걱정이고 채워져도 걱정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탐욕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을 주님께 봉헌하며 나머지 모든 것도 주님 것이라고 고백하고 내 것처럼 여기지 않으면 그것들이 더는 근심거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가진 것으로 친구를 사귀십시오.
재물이 아니라 관계가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 재물을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근심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 것은 곧 근심거리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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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소 2,1-10
루카 12,13-21
썩어 없어질 창고가 아니라, 영원히 안전한 창고인 하느님의 창고 안에 부(富)를 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다보면 참 특별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청빈을 서원한 수도자에 대한 개념이 없으셔서 그런지,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금방 갚아드릴테니 돈을 좀, 그것도 엄청난 금액을 빌려달라 하십니다.
어떤 분은 때만 되면 골백번도 더 전화하셔서, 그 유명한 족보를 강매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벨기에 출신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시다 돌아가신 구신부님께서는 강권에 못이겨, 결국 구씨 족보 책을 두권 사기까지 하셨습니다.
백과사전, 전집류, 20부작 다큐멘터리 영상물 등등...
복음선포 활동에 매진하시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군중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 불쑥 튀어 나오더니 한다는 말!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2장 13절)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 유산 문제를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왜 정신없이 바쁘신 예수님께 부탁하는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척 당혹해하시고 어이없어 하시며,
세상 웃기는 청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복음 12장 14절)
예수님께 세상 웃기는 청을 한 그 사람은 아마도 장남인 형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게 유산을 배당 받았는가 봅니다.
너무나 억울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개석상에서 예수님께 청을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가 너무나 재물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산을 적게 배분받은 것에 대한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게 진리나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 같은 더 중요한 요소들은 뒷전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생각에 온통 빠져있었기에, 영적인 삶이나 신앙이나 하느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호회나 취미활동, 만남이나 티비 드라마에는 몇 시간, 몇일이고 투자하지만,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찬 성경이나 영성서적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중요하고, 보다 우선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선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이 흠뻑 빠져 있습니다.
재물이 하느님보다 훨씬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복음 12장 20~21절)
예수님 말씀 하나도 틀린 것 없습니다. 백번 천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세상 떠나시면서 평생 모은 재산이 들어있는 통장 손에 들고 떠나시는 분, 단 한명도 못봤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우리 모두는 빈손으로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분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는 사람들 많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안전은 오직 하느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부(富)는 하느님 앞에서의 부입니다.
그 부는 영적인 부이며 살아생전 나눔과 희생,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쌓아올린 부입니다.
그 부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썩어없어질 창고가 아니라 영원히 안전한 창고인 하느님의 창고 안에 부를 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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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이영근 신부님.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합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중재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 주며, 자신을 지지해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수 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드릴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요,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실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었고, 탐욕으로 채우고자 한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도 아닐뿐더러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에게 소유당한 사람은 탐욕에 소유당하지만, 참된 주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안토니오 더블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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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29주간 월요일(루카12,13-21)<참부자가 되십시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쌓아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멸망에로 이끌어 갑니다.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야 하겠지만, 정당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선 욕심을 탐욕이라고 합니다. 충분한데도 욕심을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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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고 하신다.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런데 ‘탐욕을 경계하는 것’이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을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그분을 성가시게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좋은 신앙을 나누어 가지도록 일러 달라고 할 것이다.
탐욕은 악마의 함정이며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막대기와 돌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탐욕은 악한 영들의 올가미이다. 그것을 인간을 옭아매어 멸망으로 끌어간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이 탐욕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류가 다 싫어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절) 그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재산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잠언 13,8)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그런 재산이 없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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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한상우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 20)
많은 물질이
족쇄가 된다.
멈출 줄 모르는
우리의 욕심이다.
물질에 갇힌
어리석은
우리들
자화상이다.
사람의 길은
떠나야 할
나그네 길이다.
기다려주지 않는
생명의 시간이다.
소중한 목숨에
다시 눈 뜨는
시간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 사라져
갈 것들이다.
아무도
나의 것은
없다.
되돌려
드려야할
하느님의
목숨이다.
하느님께서
되찾아 가신다.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기도한다.
그 어떤 것도
움켜쥐고선
아름다울 수 없다.
오늘은
아름다워야 할
삶의 날이다.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이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의
오늘이길 기도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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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탐욕을 조심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님.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지금 이 상황은, 형제간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듣는 앞에서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죽은 이들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것도 ‘죽은 이들’이 할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도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3) 뒤의 말씀을(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에 관한 다툼이 생긴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에,
둘 다 탐욕을 버리면, 또는 한쪽이라도 탐욕을 버리면 그 다툼은 바로 해결됩니다.
(만일에 둘 다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그 다툼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선행과 사랑 실천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선도 없고 사랑도 없이 돈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더 유리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진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빈손’이 될 것이고,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사람이 많지만,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에 관한 가르침 뒤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많이 가진 자들이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은 탐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의 목숨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만물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죄 - ‘탐욕’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죄 - ‘방탕’입니다.
또 그는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죄 - 교만입니다.
여기서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에게 몇 시간의 여유는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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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새벽을 열며.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어렸을 때 너무나 좋아했던 군것질이 있습니다. 바로 번데기입니다. 학교 앞에는 손수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를 파시는 아저씨가 계셨지요. 이 아저씨에게 돈을 내고서 동그란 원판에 화살을 잘 던지면 번데기를 더 먹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종이 고깔에 가득 담아 준 번데기, 번데기가 입안에서 터질 때 느껴지는 고소함은 어린 저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종이도 아니었음에도 맨 밑에 남아 있던 국물까지도 아까워서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이 번데기를 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사 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징그럽다고 도망가는 사람도 꽤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긴 어느 방송을 보니 번데기가 세계 혐오 음식 7위에 올라와 있더군요.
어렸을 때는 모두가 즐겨 먹었기 때문에 혐오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긴 남미에 가니 우리나라의 치맥처럼 그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꾸이’라는 음식이 있더군요. 저는 이것을 죽어도 먹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음식은 쥐와 거의 똑같은 ‘기니피그’ 요리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것을 우리는 멀리하지 않습니다. 함께 함은 좋은 기억을 계속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함께 함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탐욕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정의를 위한다고 예수님께 청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형과 함께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돌아갈 돈인 유산을 원했던 것이지요. 이런 탐욕은 이 형제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합니다. 탐욕은 오히려 형제를 갈라지게 합니다. 많은 성인·성녀들께서도 이 탐욕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탐욕이 하나의 우상숭배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형제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이 부자는 하느님 사랑이, 장차 올 세상에 필요한 유일한 준비물인 선한 행실이라는 습관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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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 (루이스 파스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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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분이 빵집에 갔다가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케이크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맘고생크림케이크’
자기 자신도 요즘 힘들어서 맘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맘고생을 하면 이런 이름의 케이크까지 생겼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빵집 직원에게 이 케이크를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여기 맘고생크림케이크 하나 주세요.”
그런데 직원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네? 네?”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직접 가리키면서 “이거요.”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이 케이크 이름을 잘못 읽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케이크의 이름은 이러했습니다.
‘망고 생크림 케이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마음, 희망과 기쁨이 담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그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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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님.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에페 2,1-10; 루카 12,13-21 /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인간인 우리 존재의 근본과
지향이라는 기본 사실을 일깨워주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물론 살아있는 동안 이룩한 업적과 모아 놓은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모두는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주도권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으며
종종 이 기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 기본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된 피조물로서 우리가 이룩한 선행의 업적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기본 사실을 알게 해 주는 힘은 믿음인데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 등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초점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지구의 중력이 어느 한 순간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아 쌓은 재산이나 이룩한 업적 역시
그분께 봉헌해야 하는 예물이지 우리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착각한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도덕적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를 서양에서는 귀족의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합니다.
병역의무, 공공시설을 위한 재산 기부, 공동선을 위한 법안 제정 등에 있어서
귀족들이 솔선수범함으로써 고대 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중세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합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백 년 동안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장기간의 항전 끝에 더 이상 식량과 보급 물자가 떨어지고
원병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칼레는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을 지휘하던 에드워드 3세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 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6명의 목숨을 요구했습니다.
칼레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재산이 많았던 부자가 자원하자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 6명이 나섰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처형당하기 위해 쇠사슬에 묶인 채로 교수대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임신 중이었던 왕비가 자신의 아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나쁜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영국 왕도 이에 동의하여 살려주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면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서양에서는 기득권 계층의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조선 시대 귀족의 특권을 누렸던 양반 선비들은 물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부자들과 정치인들이나 지식인 등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 자들은
이 상식을 대놓고 어기기 일쑤였고 그 기득권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썼습니다.
그러니 사회통합이 무너지고 공동선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현안이요 가장 중대한 사회악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믿는 이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교훈과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비추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믿음에 따른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그로 인한 결과로 주어질 것입니다.
진정 복음화야말로 단순히 신자들을 늘리려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도덕적 의무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의한 행동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이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갈 은총을 받으며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간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세속적인 어느 특권보다도 더 귀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며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할 혜택이며,
또한 이 특권이자 혜택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귀하게 살아가는 삶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책임으로 남습니다.
이 사회적 책임이 입증되어야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치가 참된 것이며 가톨릭교회는 믿을 만하다는 가신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자 하는 원의도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과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모시는 신앙인들의 삶과 활동을 통해서
그분은 지금 여기에 부활하여 계시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화를 위해서나 우리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나
공동선을 위한 투신이라는 이웃 사랑의 증거가 필수불가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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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어느 선배 신부님이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니 교우 분들이 쌈짓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들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성지 주변의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영어를 통 몰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는데,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아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성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신부님은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외국어를 몰라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참 편하고 당당해지는 세상입니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 미사 때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세월, 예수님, 우정, 부모님, 사랑, 하늘 나라, 믿음 등 의외로 많은 것들을 대답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제주교구 신학생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교구의 모든 신부님을 찾아가 세배하고,
이때 받은 세뱃돈을 모아 일 년 살림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적어도 십 분의 일 이상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나눔의 가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는 법을 이렇게 신학생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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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나방은 불을 좋아해서 불 속으로 날아갑니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나방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죽을지도 모르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나방만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명예, 재물, 권력’이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도박, 마약, 도벽’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욕망, 시기, 질투’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허영, 교만, 위선’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평생을 힘들게 쌓아왔던 명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평온했던 가정이 깨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손가락으로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식별의 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가짜뉴스와 거짓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짜뉴스와 거짓뉴스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릇된 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까지 초대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비방을 유발하는 뉴스를 검색하는 시간을 줄이면 좋겠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뉴스를 검색하고 이웃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에 함께 해 준 동창신부님들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뉴욕에 있어서 갈 수는 없고 동창회장 신부님께 송금을 해 드렸습니다. 기분 좋게 송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동창회장 신부님도 저의 마음을 받았고, 일부는 돌려주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지구장 신부님의 착각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본당 건축기금으로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에도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선행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자선, 희생, 봉사, 나눔, 친절, 온유, 겸손도 선행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여유가 없어도,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 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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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 믿음이 답이다 -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피정지도시 제 단골 인용 말마디 둘입니다.
1.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믿음, 건강, 돈이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믿음이다.
말하면 거의 대부분 공감을 표시합니다. 하느님 믿음이 우리 인간의 품위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무지의 탐욕에 대한 대책이 무망합니다.
탐욕을 제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믿음뿐입니다.
어제 오늘 주석을 읽으며 새롭게 공감한 진리가 있습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진리입니다.
바로 ‘탐욕은 두려움의 표현’이란 것입니다.
사실 인간 생명은 허약하기에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언가 본능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탐욕은 너무나 본능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의 방어, 보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나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탐욕이요 소유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함은 너무 자연스런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탐욕이 지나쳤을 때입니다.
이런 탐욕의 제동 장치가 바로 하느님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탐욕을 조심하여라’ 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복음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바로 무지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인간 영혼의 근원적 무지의 병이 탐욕과 어리석음입니다.
불가의 삼독인 탐진치貪瞋癡(탐욕, 분노, 어리석음)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우리를 일깨우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탐욕과 어리석은 무지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전혀 하느님 믿음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에 차단된, 자기 안에 갇힌 수인囚人의 모습입니다.
하늘 위로 향한 문이 닫혔고 미래에 대한 문이 닫혔고 옆의 형제들에 대한 문이 닫혔습니다.
참으로 고립단절된 하느님과 이웃과 무관無關한, 관계 맺지 못한 혼자만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물론이요 희망도 사랑은 물론 이웃과의 나눔의 사랑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아닌 이기적 괴물입니다.
바로 이게 무지의 죄이자 지옥입니다. 바로 무지한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참으로 실감나게 전개되는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반응이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참 좋은 묵상감이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의 자기도취의 독백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우선 많은 소출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현자의 모습이 아니라,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이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사실 이런 노후의 안정된 삶은 누구나 바라는 소망일 것이나 과연 참 행복이, 참 자유가, 참 기쁨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웃과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누고 돌보며 사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부자에겐 통째로 빠졌습니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이지만 평소 하느님과 이웃과 맺어 둔 우정의 관계, 사랑의 관계, 믿음의 관계라는 풍부한 내면만 지니고
그분 앞에 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빈손으로 가도 하느님은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땅에 재물을 쌓으며 살다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텅빈 하늘 창고를 본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반면 지상에서는 부단한 선행과 자선과 나눔의 생활로 청빈하게
살다가 그분 앞에 가 내 하늘 보물 창고를 열었을 때 보물로 가득하다면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할까요.
요즘 배밭을 산책하다 보면 수확이 끝난 배나무들의 홀가분한 모습을 보면 텅 빈 충만의 행복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하늘에 보물을 쌓는 ‘텅빈 충만’의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삶인지, 땅에 보물을 쌓는 ‘텅빈 허무’의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삶인지 현재의 우리를 살펴보게 합니다.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반응은 꿈속에 일어났던 일화는 아닐까 하는 상상도
됩니다. 정말 이런 꿈을 꾼 어리석은 부자라면 잠을 깬후 미몽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즉각적인 회개를 실천했을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사랑의 나눔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으로의 전환의 회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줍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이자 무지에서 벗어난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우리 본래의 참사람의 모습으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현재진행형중인 하느님과 내가 완성해가야할 미완성 작품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새롭게 창조하시어 하느님 작품의 완성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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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누가 주인인지 물으십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형제 간 유산 다툼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재산 문제는 비단 예수님께 와서 호소한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비유까지 들어 이르십니다.
살려면 재물이 필요하지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정신적 영적 존재이기는 하나 육신을 지녔기에 생명을 유지하는 각종 수단이 필요하고, 그 수단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물질이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사회, 자유경제 체제 아래 살아가려면 재물 없이는 곤란합니다.
문제는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재물을 균형 있게 사용하기보다, 재물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재물은 인간의 주인 자리를 꿰어차고 또다른 우상 자리를 차지해 버렸지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제공되는 공평한 미래입니다. 그 때를 미루는 데 재산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절감합니다. 생명을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까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비유 속 부자는 줄곧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 "내 모든 곡식과 재물", "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등등 그에게 재물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평안, 영화를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에게는 이 모두를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감사도, 함께 수고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굶주리는 이웃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그는 이처럼 철저히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의 부유함"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유형의 재물로는 그분 앞에서 부유함을 뽐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분의 것이고 어떤 연유로 잠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베푸시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9-10)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물질적인 재물들과 영적인 선물들 모두는 하느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재산과 관계, 성품과 이성, 믿음과 은총까지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저절로 생긴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 것도 아니면서 자랑할 수는 없지요. 그저 주신 분의 의향을 잘 살펴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선행"
사도는 우리 창조 목적을 콕 짚어 이야기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창조된 우리기에 선행을 하도록 존재적으로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선한 목적으로, 선한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욕망과 재물을 과도하게 탐할수록 선함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각박하고 인색해지며 오늘 비유 속 부자처럼 자기중심적, 이기적으로 변해갑니다.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응당 그래야 하고 그게 당연하다는 유혹에 쉬이 영합하지요. 그게 사람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이 바라는 바이고, 탐욕의 속성입니다. 이런 이는 지상에서 사용하는 숫자 상으로는 부자일지 모르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분과 어울릴 수 없는 가련하고 비천한 존재일 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 2,10)
완전한 선이신 분이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시고는, 선을 행하도록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창조의 본질은 그래서 선입니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태생적으로 받은 선함을 마음껏 발휘하고 한껏 꽃피우며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를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이지요.
주님께서는 재물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많이 가진 부자들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으시지요. 오히려 세상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재산을 선하게 사용하는 착한 부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받은 능력을 십분 활용해 재화를 모았다는 성취감에, 나눔이 주는 보람이라는 선물까지 덤으로 받을 것이고, 사람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부유한 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만 잊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한 번 허락된 생명을 누리면서 내 것도 아닌 것을 움켜쥐느라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면 참 부질없는 삶이 되어 버리겠지요.
주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을 감사히 사용하고, 지혜를 다해 잘 관리하며, 사랑으로 나누는 주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쌓이고 쌓인 선행의 기쁨과 보람이 우리를 진짜 부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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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9.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12,15)
'방하착'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으니,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인 어떤 사람이 자신 만을 위한 끝없는 욕심과 탐욕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우리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공수래공수거 인생'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때는 빈 곳을 채우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때가 되면 서서히 채워진 것을 비워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끝인 죽음의 상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방하착!'
이는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으로, '마음속에 있는 번뇌와 집착과 탐욕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방하착의 계절'입니다.
자연의 피조물들은 방하착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자신들의 모습을 단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죽음의 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연의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욕심과 탐욕을 '방하착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오늘 독서를 통해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지 말고,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선행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끝까지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는 바보가 되지 말고, 탐욕을 선행으로 바꾸는 지혜로운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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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8. 키엣대주교님묵상. 하늘나라의 희망은 인생의 길잡이입니다(연중 제29주일)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신비의 정점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하나의 완벽한 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큰 임무를 완수하셨고 마치 성공과 승리의 보상처럼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하늘은 과연 어디에 있고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은 우주는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들이 다스리는 가장 높은 곳 하늘과 우리가 사는 땅, 악귀와 죄인을 가두는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우주는 점점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전하는 첨단 망안경으로 더 멀리 내다볼수록 우주는 점점 커져가고 지구는 거대한 우주 사이에 있는 작은 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땅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늘인가요?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닌 하느님이 다스리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신 곳은 하늘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늘"’ 곧 ‘함께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지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신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도 동시에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전권, 아버지의 능력을 함께 나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정의 실현에 대한 희망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하느님은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말에 대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공정한 심판과 벌과 상을 주는 분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정의는 불공평함을 이기며, 선은 악을 이깁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여덟가지 참 행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은 이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온유함으로 비난과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불의를 이기셨습니다. 세상의 정의는 나약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정의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위안으로 세상의 슬픔을 씻고 온전한 행복을 얻으셨습니다.
고귀한 운명에 대한 희망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운명 또한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발전하고 번성하기 위해 태어났고, 고통이 아닌 행복을 누리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영예롭게 하늘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스승님이 가신 곳, 주님의 제자인 우리도 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머리이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머리가 영예를 얻으면 몸도 영예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하늘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수 많은 고난을 겪지만 우리는 고귀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행복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망은 인생의 길잡이
행복한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의 임무를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만 합니다.
언제나 하늘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비록 오늘해야 할 일에 떠 밀려 정신없이 종종 거리며 직장과 집을 오고 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하늘을 지향해야 합니다. 지향을 잃고 헐떡거리며 이 세상의 삶만 쫓아가다 보면 지금 이 세상은 헛되이 빨리 지나갈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산상수훈 참행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린다면 다시 얻고 두배로 채워지고 행복을 다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초월하고 버림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랑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버림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천상의 행복은 배가 될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땅만 바라보느라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잊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언제나 하늘을 지향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여덟가지 참 행복 중 어떤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까?
2. 지금 나는 어느 곳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3. 내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행복을 주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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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8. 이영근 신부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을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스승’의 신원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되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라야 참된 스승이 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동시에,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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