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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대로 심판받는다 마16:24-28 롬1:18-32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워렌 목사는 한 교인이 아내와 가족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남자를 우연처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워렌 목사가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남자가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는 “배고픈 한 사람 더 앉아도 될까요?”라고 묻고는, 얼마 안 있어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흩어진 양떼를 돌보고 구원하시며 함께 모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듯이(겔34:12-13) 목사로서 워렌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목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꼴을 먹이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14-16).
에스겔의 말은 하나님이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예측하지만, 또한 언젠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양떼를 위해 생명을 내려놓은 그 선한 목자를 따르기를 원하십니다(요10:14-15).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당신을 돌보십니까? 사랑하는 주님 제가 헤매며 방황할 때도 주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의 품 안에 항상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엄청난 구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1. 나는 마땅히 지옥갈 죄인이다
(마15:21-28) 21 그 때에 예수께서 거기서 가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떠나 가시니 22 어떤 가나안 여자가 그 지방에서 나와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소서, 하되 24 예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되 25 그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나 26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귀신 들렸던 딸이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가나안 여인에 대한 한 사례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지금의 레바논 지방인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걸어가셨던 것은 그 여자를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여자는 이방여인인데 유대인들이 하는 것처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은 입장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좀 더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대할 때 그 태도가 잘못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거나 또 예수님을 자기 주인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자기를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직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든지 주님으로 불렀다면 잘못 부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데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들처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면 딸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외쳤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니 제자들이 그 여자를 좀 달래서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을 때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 다윗의 자손이라면 잃어버린 자는 이스라엘 민족에 해당한다. 너 같은 이방 여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을 여자는 알았습니다.
(마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말이 쏙 빠지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대답하시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아주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모욕적인 말씀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 하겠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을 개처럼 취급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이방 사람은 하나님도 없고 이성도 없고 율법도 없는 짐승처럼 취급했던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진심으로 이방 사람들을 개로 취급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낮추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마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말하는 이 여자를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인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도 네 주님, 맞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어떤 마음 일 때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은 가장 낮은 자리로 흘러가듯이 예수님의 뜻은 그 여자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처음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렀는데 그 다음에는 한 계단 낮추고 또 한 계단 자기를 낮추었을 때, 가장 겸손한 자리에 들어가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순전히 지식적인 믿음이고, 또 하나는 마음으로 가장 낮아질 때 생기는 믿음입니다. 그 여자의 믿음은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마음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아, 내가 자격은 없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니까 나도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라는 그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부스러기입니다. 우리가 덩어리를 먹을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스러기 하나를 먹어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나중에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이 떡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거두었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가 제자들에게 전해 내려가서 누구든지 부스러기같은 말씀 한마디라도 깨달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여자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그 말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받는 한 경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아주 겸손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완전히 자기를 낮추는 것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요건입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은 마음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건강한 사람에게 누군가 와서 내 등에 업히십시오 하면 그 사람은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네, 내가 왜 너에게 업히겠냐?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사람은 병들어서 자기 몸도 잘 가눌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업고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를 그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약한자가 강한 자에게 맡기는 그것이 믿음이예요. 그 때에 믿음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아무리 들어도 가장 낮은 자리 즉 여러분이 지옥 갈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아 나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믿음이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마음으로 지옥에 빠져 봐야 하는데 그러한 것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구원받기 위해 갖춰야할 요건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등등 온갖 것을 다 믿어도 마음에는 평안이 없다면 아직도 지옥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160회 이상 나오고 예수님께선 지옥이라는 말씀을 적어도 70번 정도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볼까요?
(막9:48-49)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계20:12-15)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더라. 14 사망과 지옥도 불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호수(불못)에 던져졌더라.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님은 지옥을 말씀하시면서 지옥은 사람마다 불로 절여지는 곳이라는 것은 불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데 첫째 사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첫째 사망이며 둘째 사망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진다는 말입니다. 지옥을 믿지 않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지옥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 즉 불 호수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말한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라는 실존도 사실입니다. 지옥을 인정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요한계시록 20장을 보겠습니다.
2. 구원받은 자는 심판이 두렵지 않다
(계20:10)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마귀가 지옥에 던져지니 거기엔 짐승인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먼저 들어와 있으며 그 다음에 마귀가 지옥에 던져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자들도, 불법을 행한 자들도 지옥에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창3장에서 아담이 범죄한 후 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러워서 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 두려움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물론 성경도 믿지 아니하니 두려움도 없습니다. 사람을 살인하여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여기에 두려워하는 자들은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요한일서 4장을 읽겠습니다.
(요일4:18)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버립니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있으면 사랑하는 남편이 칼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내는 두려움이 없으나 강도가 들어와서 칼을 휘두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다는 말은 로마서 5장에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지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옥가는 부류의 사람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하는 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불신자들은 지옥에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술객들은 점치는 사람들을 말하니 무당이 술객입니다. 사람의 관상을 본다든지 운명을 감정해 주는 사람을 술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술객에게 가서 자신의 운명을 감정했다든지 점을 쳤다든지 굿을 했다든지 우상숭배를 했다든지 하면 그것은 지옥에 들어가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사람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장을 읽어보겠습니다.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내가 이 말씀을 읽고 ‘내가 거룩한 사람인가, 속된 사람인가’를 한번 평가해 봅시다.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영원한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졌더라(계20:12-15).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보좌 앞에 있는 생명책에는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또 다른 책들이 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지은 죄가 낱낱이 다 기록된 책들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모양의 죄를 지을 때마다 책에 기록이 되는데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5:21-2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노한다는 말은 화내는 것인데 한 번 노했다고 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A라는 사람이 한 번 화를 낸 만큼 심판을 받고 B라는 사람은 욕을 했으며 C라는 사람은 도적질을 했고 또 D라는 사람은 간음을 범한 만큼 죄를 지었는데 심판을 받으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한 번 노한 A는 지옥에 들어가서 노한 만큼 벌이 있습니다. B라는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서 욕한 만큼 벌이 있고 도둑질 한 사람은 도둑질한 만큼 벌이 있고 간음을 범한 사람은 간음을 범한 만큼 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기보다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고 죄를 심판하는 이유는 지옥에 들어가서 받을 벌의 양을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재판도 모든 죄인이 똑같은 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종신형을 받고 남의 물건을 훔쳤으면 1년 징역을 받든지 해서 죄에 따라서 형의 양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벌주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이 세상에는 한 가지 죄를 여러 번 짓는 사람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죄를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하고 싸우고 간음을 범하며 또 도둑질도 하며 여러 가지 죄를 지은 사람은 그만큼 지옥에서 받는 고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죄라도 여러 번 지었으면 한 번 짓는 사람하고 열 번 짓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의와 사랑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를 보고 그냥 계실 수가 없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 죄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주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셨는데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죄를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은 행위대로 심판 받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이 있고 그것이 지나고 나면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는 것이 첫째 부활이며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있는 자들이며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시도다(계20:5-6) 천년왕국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부활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모든 사람은 다 부활합니다. 하지만 짐승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부활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절대로 영원히 멸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죽으면 음부에 가고 구원받은 영혼이 죽으면 낙원에 간다고 했습니다. 낙원에 가 있는 영들은 천년전에 부활 해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음부에 있는 영들은 천년왕국 후에 부활해서 지옥에 갑니다. 그 때 심판받는 것이 계시록 20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어 물고기가 와서 뜯어 먹고 그 물고기를 사람이 잡아먹어 버렸다면 도대체 어떻게 부활하겠느냐는 불가능할 것 같이 생각이 들지만 그 영혼이 살아있는 한 육체가 다시 형성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에 부활합니다. 어떤 사람의 시체는 화장터에 가서 불에 타 재가 되었어도 불에 탔다고 해서 원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는 본래 헬륨이라는 원소에서 만들어지는데 불에 타면 원소로 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부활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 부활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부활이냐 생명의 부활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생명의 부활을 원한다면 주님의 가셨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겠습니다.
(마16:24-27) 24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2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혹은 사람이 무엇을 주어 자기 혼을 대신하게 하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요. 그때에 그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만일 여러분이 지금 세상을 떠난다면 어떤 첫째 부활을 받을 것 같습니까?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 따라가는 자들은 확실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둘째 사망인 지옥의 유황 불못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며 그들이야 말로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마5:25-26) 25 네가 네 대적(너를 송사하는 자와)과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합의하라. 그 대적(송사하는 자가)이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너를 직무수행자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 재판받는 실례가 있는데 인생은 나그네처럼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법관에게 끌려서 심판받을 그곳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지 모르든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다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25절에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합의하라. 길을 가는데 같이 가는 사람이 송사하는 자 다시 말하면 검사라는 뜻입니다. 검사가 이 사람의 죄를 다 취조해서 재판받게 하려고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송사자인 검사에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 심판 자리에 도착하기 전에 송사자와 합의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좋게 합의하지 않으면 결국 심판대까지 가야 합니다. 검사와 잘 이야기해서 검사가 불기소 처분을 하면 재판을 안 받게 됩니다. 불기소 처분을 받을 수 있도록 검사에게 잘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하면 송사하는 자가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재판을 해서 직무수행자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옥은 지옥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검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이 검사는 여러분의 양심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심판 받으러 가는 길을 걷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증명합니다. 양심의 가책, 양심의 송사가 심판대 앞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마음은 두 가지인데 죄를 짓는 마음과 죄를 후회하는 양심, 이 두가지 마음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도 분명히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 짓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죄를 짓고 후회하며 가책받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2장을 보겠습니다.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2:14). 여기서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는 말은 양심의 법을 가리킵니다. 계속해서 읽어보면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5). 이방 사람에게 율법은 없지만 그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양심의 법이 와서 ‘너는 도둑놈이다’ ‘네가 누구누구의 물건을 훔쳤구나’. 하고 송사합니다. 내 양심이 계속 괴롭다 보면 내 마음 한 쪽에서는 ‘할 수 없지 뭐’ ‘난 도둑질을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든데 어떻게 해’. 하고 변명하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한 쪽에는 검사가 있고 한 쪽에는 변호사가 있어요. 자기가 잘못하면 후회되고 가책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생 그것 때문에 가책만 받으며 살 수는 없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얼버무려 속에서 변호를 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지나갑니다. 그 때에 그 죄가 책에 기록되는 것이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고가 남이 있습니다. 로마서 2장을 보겠습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6).
양심의 가책은 검사입니다. 그것을 적당히 변명해서 뒤로 미뤄 놓았는데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밀히 숨어 있는 그 죄가 심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합의하라(마5:25). 양심이 검사이니까 양심과 합의를 해야 하는데 구원을 받게 되면 양심의 송사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 속에서 구원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양심의 송사가 끝이 납니다. 그러나 믿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양심인 검사에게 소송당하여 재판관에게 내어 주어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 호리란 말은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손톱만한 죄, 티끌만한 죄 그렇게 작은 죄라도 반드시 죄의 값을 다 지불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까지 사는 동안 지은 큰 죄나, 작은 죄나 그 죄가 다 갚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을 믿지 못하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율법 이외에 한 의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행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롬3:21-22) 21 이제는 율법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22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롬3:25-26)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26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도둑질하고 살인한 죄는 없을지 모르지만 아주 작은 죄라도 지었으면 다 심판을 받기 전에 예수님 앞에서 마음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당신은 정말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선포하는 진리를 믿으면 됩니다.
(롬4:7-8) 7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죄값인 지옥행에 대해 엄중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5:29). 오른 눈으로 죄를 지었으면 빼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오른 쪽 눈이 죄를 지어서 온몸이 지옥으로 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른쪽 눈을 빼면 왼쪽 눈을 가지고 죄를 지을 것이고 오른 손을 찍어 내면 또 왼손 가지고 죄를 지을 건데 찍고 빼내고 나면 나중에 뭐가 남겠습니까? 죄는 결국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더럽고 악하고 마음속에 음란이 있고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그런 마음이 나를 대표하는 것이니까 내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전도사 한 사람은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성경에 보면 손이 죄를 지으면 잘라 버리라고 했기 때문에 잘랐다고 했지만 그렇게 잘라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 말은 실제로 자르라는 말이라기보다 칼로 자르라는 것처럼 눈이 빠지는 것처럼 아프게 마음에 뉘우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죄를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지은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해 보셨습니까? 많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과연 그런 마음 상태를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는 변명이 통할지라도 하나님앞에서는 통할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어 결국은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4.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들이 지은 죄
로마서 1장을 보겠습니다.
(롬1:18-20)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죄,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는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지만 심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롬1:21-23) 21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그들은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감사치도 아니하고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요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감사를 많이 합니다. 물 한잔 들고도, 사과 한 쪽 들고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월초하루가 되면 신년 감사헌금, 생일되면 생일감사, 취직하면 취직 감사, 결혼하면 결혼감사, 아기낳으면 또 감사, 감사가 줄줄이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근본적인 감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구원받은 감사가 없으면 다른 감사는 다 소용없습니다. 여기서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는 말은 바로 그 감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12장을 보겠습니다.
(사12:1-4) 1 그 날에 내가 말하기를 오 주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였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또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기 어떤 것에 대한 감사라고 되어 있습니까? 바로 구원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고 자기만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돈 자랑하고, 권력 자랑하고 또 우상숭배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날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1738년 5월24일 저녁 8시 45분에 구원받았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17세기 위대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파스칼도 구원받은 날짜가 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선두 역할을 한 D.L 무디도 구원받은 날이 있습니다. 개신교 선교운동의 선구자인 진젠도르프 백작도 구원받은 날이 있어요. 분명히 성경에도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구원받기 전에는 노하신 하나님이 무서웠습니다. 이젠 구원받으심으로서 그 노가 쉬었습니다.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1-4). 성경말씀을 깨달을 때 성령이 오시면서 한없는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감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감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 감사가 없었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장을 보겠습니다.
(롬1: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섬긴다는 것인데 여러분 자신을 한번 비춰 보신다면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물질, 보물 집 등 이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겼는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도둑질 등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지은 죄만 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나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5-40). 율법사가 제일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예수님은 이런 답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사랑해야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만큼 사랑합니다. 남녀 사이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해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되면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굉장히 축복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내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행복이 아닙니다. 이 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신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건데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내속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아요. 죄는 하나님을 미워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려고 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내속에 사탄이 심어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사탄이 내 속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딤후 3장을 보겠습니다.
(딤후3:1-5)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밖에 돈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얼마전에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해서 가족을 모두다 죽였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한 가족을 다 죽여서 마당에 묻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팔아 먹고 어머니가 딸을 팔아 먹고 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돈 밖에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설날 (10일) 새벽 1시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남성 A 씨가 어젯밤 술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같이 사는 50대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A 씨는 범행 직후 함께 술을 마셨던 지인에게 전화해 자신의 범행 사실을 알렸습니다.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숨진 어머니 옆에서 잠들어 있던 A 씨를 붙잡았습니다. A 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진술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오늘 새벽 서울 성북구의 한 골목에서는 60대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온 20대 아들에게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얼굴 등을 다친 아들은 곧바로 응급실로 후송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목격자 : (아버지와 아들이) 뒤엉켜 싸우는데, 젊은 친구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나도 막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는데….]
이런 사건들이 마지막 때의 징조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전혀 없어요. 남녀간에 사랑하는 것도 다 형식입니다. 육신적인 정욕, 성생활 잠깐 맛보는 그것뿐 진정으로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혼해 버리지 않습니까? 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기든지 도박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쾌락이라는 문제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들끓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죄악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저 죄악의 소굴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늘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왔는지 만일 그렇게 못 살았다면 이 시간부터라도 하나님 앞에 뉘우쳐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마음속에 깊이 뉘우치는 그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실망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에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롬1:26-27)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남자들도 이와같이 본래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결혼을 해서 순리대로 정상적인 성생활을 해야 하는데 순리대로 살지 않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성행위 하는 동성연애를 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바로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짓는 다른 죄는 하나님이 직접 벌을 내리는 경우가 드문데 에이즈는 동성연애자에 대한 징벌입니다. 물론 지금도 암이라든지 여러 가지 새로운 병이 생겨납니다. 많은 새로운 병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이 환경오염 때문에 점점 이지러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마지막 때인 환난 속에서 더욱더 크게 번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다 거짓이고 참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 그 참되신 하나님을 마음속에 간절히 사모하고 간절히 찾고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겠습니다.
(롬1:28-29)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며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나 깨나 돈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마음에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언제나 그 남자가 마음에 있고 남자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속에 늘 사모면서 내가 언제나 주님을 만날까?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만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해야 할 그 마음속에 별 잡다한 것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마다 가지고 싶고 귀로 듣는 것 전부 다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모해서 세상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싶은 마음을 기울이면 왜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성경말씀을 들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고 이 책을 덮고 나면 온갖 세상의 것을 여전히 생각하고 그것만을 향해서 마음이 달음박질 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에 만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면 만나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까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았든지 마음을 돌이키면 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어요, 지금 읽을 성경에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모든 죄가 다 나열되어 있는데 이 죄가운데 여러분 자신에게 해당되는 죄가 무엇인지 한 번 마음속으로 짚어 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그 합당치 못한 일은 첫째 모든 불의입니다. 불의란 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생기지 않은 것이 내 주머니 속에 있으면 불의한 것입니다.
(롬1:30-32) 30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31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32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
남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한마디로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자비한 자요, 동정을 베풀지 않는 자들에 대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롬1:32). 여기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둘째 사망을 뜻합니다. 같은 일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멸망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인간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없이는 어느 인간도 구원받는 길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생명의 길로 가는 유일한 코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