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메이저리그의 사이영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코리 클루버(31·클리블랜드)는 1위 표 28장과 2위 표 2장을 얻어 1위 표 2장과 2위 표 28장에 그친 크리스 세일(28·보스턴)을 제치고 2017년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가 됐다(총점 클루버 204점 세일 126점).
2014년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인 클루버는 클리블랜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사이영상을 따낸 투수가 됐다(다른 클리블랜드 사이영 투수 - 1972년 게일로드 페리, 2007년 CC 사바시아, 2008년 클리프 리). 반면 세일은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 이후 처음으로 300탈삼진을 달성하고도 막판 부진(마지막 8경기 3승4패 4.30)으로 인해 첫 수상의 좋은 기회를 놓쳤다.
내셔널리그에서는 맥스 슈어저(33·워싱턴)가 클레이튼 커쇼(29·LA 다저스)를 꺾고 2연패에 성공했다. 슈어저는 1위 표 27장과 2위 표 3장을 얻어 1위 표 3장과 2위 표 25장에 그친 커쇼를 어렵지 않게 제쳤다(총점 슈어저 201점 커쇼 126점).
슈어저는 이로써 역대 10번째이자 현역으로는 커쇼에 이어 두 번째로 통산 3회 수상자가 됐다. 3회 수상은 2000년 이후 시대를 풍미했던 로이 할러데이(2회) 요한 산타나(2회) 팀 린스컴(2회)도 달성하지 못한 대업이다. 8명의 3회 수상 은퇴 선수 중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투수는 최다 수상자(7회)이지만 약물 논란 선수인 로저 클레멘스뿐이다(하지만 클레멘스는 5번째 투표에서 54.1%를 득표함으로써 턱걸이 가능성이 생겼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지가 가장 오래된 팀에서 뛰고 있는 클루버(클리블랜드 1948년 마지막 우승)와 1969년 창단 후 월드시리즈를 올라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팀에 소속된 슈어저는 그러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는 데는 실패했다. 디비전시리즈가 시작된 1995년 이후 23년 동안 사이영상 투수가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한 것은 1995년 그렉 매덕스(애틀랜타) 그리고 2001년 월드시리즈 공동 MVP에 올랐던 랜디 존슨(애리조나) 두 명에 불과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2010년 2012년 2014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린스컴이 사이영 2연패에 성공한 것도 2008-2009년이었다.
사실 클루버(사진)의 클리블랜드는 가장 유력한 월드시리즈 우승 후보였다. 전체적인 전력도 탄탄했지만 클루버라는 강력한 에이스가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도 큰 점수를 받았다. 2016년 첫 포스트시즌에서 빼어난 활약(7경기 4승1패 1.83)을 했던 클루버는 정규시즌 마지막 두 달 동안 12경기 10승1패 1.42라는 무시무시한 피칭을 했다. 2015년 제이크 아리에타(시카고 컵스)의 마지막 두 달(12경기 11승 0.41)에 못지 않았던 폭주였다.
그러나 테리 프랑코나(58) 감독은 클루버를 1차전 선발로 내지 않았다. 그리고 클루버는 2차전 2.2이닝 6실점과 5차전 3.2이닝 3실점의 실망스런 피칭으로 팀의 디비전시리즈 탈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리즈가 끝난 후 프랑코나 감독은 클루버가 대단한 9월을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 때부터 팔의 높이가 점점 떨어지는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역시 목 부상을 당하는 등 마지막 두 달 동안 페이스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던 슈어저는 3선발로 포스트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슈어저는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6이닝 무실점 후 팀이 1-0으로 앞선 7회 1사 2루에서 교체됐다가 후속 투수가 2루주자를 들여보냄으로써 승리가 날아갔고, 이틀 휴식 후 구원 등판을 했던 5차전에서는 1이닝 4실점(2자책) 패전을 안았다. 사이영상을 위해 9월을 불사른 투수가 10월에도 뛰어난 활약을 하는 것은 흔하지 않는 일이다.
클루버와 슈어저의 또 다른 공통점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영 투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표인 200이닝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를 했다는 것이다(클루버 203.2이닝, 슈어저 200.2이닝). 2002년 랜디 존슨(260이닝)과 2003년 로이 할러데이(266이닝) 이후로도 사이영상 투수들은 그래도 220이닝 정도는 소화를 해줬다. 그러나 이제는 200이닝도 사이영상의 충분 조건이 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2000년 이후 사이영투수의 이닝수
2000 - 랜디 존슨(248.2) 페드로 마르티네스(217)
2001 - 랜디 존슨(249.2) 로저 클레멘스(220.1)
2002 - 랜디 존슨(260) 배리 지토(229.1)
2003 - 로이 할러데이(266) 에릭 가니에(82.1)
2004 - 요한 산타나(228.1) 로저 클레멘스(214.1)
2005 - 크리스 카펜터(241.2) 바톨로 콜론(222.2)
2006 - 브랜든 웹(235) 요한 산타나(233.2)
2007 - CC 사바시아(241) 제이크 피비(223.1)
2008 - 팀 린스컴(227) 클리프 리(223.1)
2009 - 잭 그레인키(229.1) 팀 린스컴(225.1)
2010 - 로이 할러데이(250.2) F.에르난데스(249.2)
2011 - 저스틴 벌랜더(251) 클레이튼 커쇼(233.1)
2012 - R A 디키(233.2) 데이빗 프라이스(211)
2013 - 클레이튼 커쇼(236) 맥스 슈어저(214.1)
2014 - 코리 클루버(235.2) 클레이튼 커쇼(198.1)
2015 - 댈러스 카이클(232) 제이크 아리에타(229)
2016 - 맥스 슈어저(228.1) 릭 포셀로(223)
2017 - 코리 클루버(203.2) 맥스 슈어저(200.2)
역대 단축 시즌이 아닌 시즌에서 200이닝에 실패한 선발투수가 사이영상 수상에 성공한 것은 두 번. 1984년 릭 서클리프는 클리블랜드(AL)에서 15경기 4승5패 5.15에 그친 후 컵스(NL)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컵스에서 기록한 20경기 16승1패 2.69(150.1이닝)의 성적을 가지고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따냈다. 컵스는 그 해 서클리프 경기에서 18승2패를 기록한 덕분에 1945년 이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승률을 중요하게 여겼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수상이었다.
2014년 커쇼(21승3패 1.77)는 198.1이닝으로 243.2이닝을 던진 자니 쿠에토(20승9패 2.25)를 꺾었다. 그것도 만장일치 수상이었으며 심지어 내셔널리그 투수로는 1968년 밥 깁슨(304.2이닝 22승9패 1.12) 이후 처음으로 리그 MVP가 됐다. 그러나 사이영 투수가 무쌍한 활약을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에 앞으로는 200이닝 미만 사이영상 수상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ML 선발투수의 이닝 분담률
2014 - 66.5%
2015 - 65.0%
2016 - 63.2%
2017 - 61.9%
메이저리그 선발투수의 이닝 분담률은 1988년 70.9%를 마지막으로 70%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2014년 만 해도 66.5%를 기록함으로써 1995년(66.3%)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내년 또는 내후년에는 60%대가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선발투수의 이닝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전보다 더 전력 피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8,9번에도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들이 배치되면서 쉬어갈 틈이 없어졌다.
ML 선발투수의 투구수 구간별 피안타율
[2014] .247 / .251 / .260 / .257
[2015] .253 / .252 / .259 / .261
[2016] .253 / .254 / .258 / .265
[2017] .251 / .254 / .263 / .268
*1~25구 / 26~50구 / 51~75구 / 76~100구
2014년과 2015년 만 해도 선발투수가 51~75구를 던졌을 때와 76~100구를 던졌을 때의 피안타율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홈런에 대한 스트레스가 본격화된 2016년 이후로는 75구를 기점으로 흔들리는 투수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각 팀들이 불펜을 빨리 가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03년 부임 1년차 시즌이었던 보스턴의 테오 엡스타인 단장(현 시카고 컵스 사장)은 뉴욕 양키스와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을 앞두고 그래디 리틀 감독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선발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31)의 투구수가 80개가 되면 꼭 바꾸라는 지시였다. 실제로 정규시즌에서의 마르티네스는 75구까지 .202였던 피안타율이 76구 이후로는 .249로 올랐다.
그러나 리틀 감독은 8회 이미 80구를 넘어선 마르티네스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마운드를 올라갔다 혼자 내려왔다. 결국 마르티네스는 데릭 지터, 버니 윌리엄스, 마쓰이 히데키, 호르헤 포사다에게 연속 4안타를 맞고 3실점 동점을 허용했고(5-5) 보스턴은 연장 11회말 팀 웨이크필드가 애런 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했다. 시리즈가 끝나고 엡스타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리틀을 해임한 것이었다.
LA 다저스의 리치 힐(37)은 2선발로 나선 이번 포스트시즌 네 경기에서 4이닝 2실점, 5이닝 1실점, 4이닝 1실점, 4.2이닝 1실점의 준수한 피칭을 했다. 하지만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그를 78구 79구 60구 58구에서 교체했다. 선발투수의 '75구 위기론'에 대입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 그러나 문제는 힐이 75구 이후로 흔들리는 투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17 리치 힐의 피안타율 변화
0.228 (1~25구)
0.191 (26~50구)
0.194 (51~75구)
0.194 (76~100구)
다저스의 프런트와 로버츠 감독이 힐을 계속해서 일찍 교체한 것은 불펜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다저스 불펜은 1패밖에 당하지 않고 올라온 덕분에 포스트시즌 시작 후 월드시리즈 1차전까지 30.2이닝밖에 던지지 않았다. 챔피언십시리즈부터는 무실점 행진을 이어오고 있었다(평균자책점 0.88 피안타율 .118). 빈틈이 없어 보였던 다저스 불펜은 그러나 공교롭게도 힐을 일찍 내린 2차전부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다저스는 불펜이 7이닝 4피홈런 7실점을 기록한 2차전과 5이닝 4피홈런 7실점을 기록한 5차전을 놓쳤다.
2014년 캔자스시티는 불펜이 단기전에서 어떤 활약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2015년 캔자스시티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매디슨 범가너를 만나지 않은 것 외에도) 자니 쿠에토, 에딘손 볼케스 등 선발투수들이 2014년보다 더 좋은 활약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올해 다저스의 우승 실패는 불펜 활용에 대한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과거의 감독들은 에이스 경기에서 아낀 불펜을 나머지 경기들에 투입하면 됐다(로이 할러데이의 등판일은 불펜의 '휴일'이었다). 하지만 완투가 사라진 이제는 에이스 경기조차 승리조를 쉬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200이닝 사이영 투수의 시대. 27개 아웃카운트에 대한 고민은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