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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경이로움
1.출애굽 여정(4절)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한 이후 수르광야, 마라, 신광야, 르비딤, 시내산, 바란광야, 가데스, 아랏을 거쳐 호르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지역들을 지나는 동안에 홍해기적(출 14:21-31), 마라의 물이 달게 되는 기적(출 15:22-25), 신광야에서의 메추라기와 만나 기적(출 16:13-20), 르비딤의 반석에서 물이 솟는 기적(출17:5-7), 르비딤에서 아말렉을 물리치는 기적(출 17:8-16),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 현현사건(출 19:16-20:17),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기적(민 17:1-10), 가데스의 반석에서 물이 솟는 기적(민 20:10-13), 아랏 사람들을 전멸하는 야훼전쟁 등(민 21:1-3)을 경험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불뱀사건을 만난다.
2.감사 대신 불평 불만(5절)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많은 기적과 구원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현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불평한다는 사실이다. 불평이 극에 달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전에도 여러번 모세를 향하여 불평하면서 출애굽 자체를 후회하기도 하였다(출 15:22-24; 16:2-3; 17:1-3; 민 11:4-6; 11:20; 20:5)
그들의 불평의 주원인은 음식과 물 때문이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항상 물이 부족하였고, 또 음식도 이집트에서처럼 풍성할 수가 없었다. 본문에 나타난 불평도 "물과 박한 음식" 때문이었다. 개역의 '박한', 개역 개정판의 '하찮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클로켈'의 어근은 '칼랄'로서 "가벼운"(to be light), "하찮은", "조악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박한(하찮은) 음식"이란 말 그대로 반찬이 별로 없는, 겨우 배고픔을 면해 주는 하잘 것 없는 음식을 의미한다. 민 11:6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가 맛이 없다고 불평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박한 음식"이라고 불평하는 음식은 만나를 의미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마르틴 노트). 이러한 음식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평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이해할 만도 하다. 분명히 현재 그들의 음식이나 주거환경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상황보다도 나쁜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꿈꾸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자유의 땅에 이르기 위한 광야의 훈련(5절)
그러나 그들은 자유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의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을 향한 쾌거였다. 그러나 이 자유의 땅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40년 동안의 광야길이었다. 40년 동안의 광야길을 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 놓여 있는 지리적인 공간을 지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광야 길은 가나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는 민족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훈련기간이었다. 광야길을 걷게 하신 의미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명기 8:2-3에서 광야길의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목적은 이스라엘을 낮추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풍요하게 되고 자유롭게 될 경우에도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겸손의 훈련을 하신 것이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 겸손해지고 부자가 되어서도, 지위가 높아져도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고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은 평안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고난이 닥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시험하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길을 가게 하셨다. 배고프고 가난할 때, 고난을 당할 때에도, 욥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후에 축복을 받아 풍요로운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광야의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또 하나의 이유는 가난과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광야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요로운 삶을 살 때에 고아, 과부, 나그네, 품꾼 등 민중들의 고난을 못본채 하지 말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돌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굶주리면서 광야 길을 걸어 가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깊은 뜻이 있어서 일부러 광야 길을 걷게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고 불평하기 보다는 감사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광야길을 걷게 하시고 우리를 시험하시고 훈련하신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불평하기 보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임을 알고 이 훈련이 더욱 온전히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4.불뱀과 놋뱀(6-9절)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물려 죽었다. 불뱀은 시나이 반도에 사는 뱀이다. 이 불뱀들이 이스라엘이 범죄하지 않을 때는 해를 끼치지 않다가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물어 죽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우리를 해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명령에 충실할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 이러한 존재들이 우리를 해하는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중재기도를 요청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했고, 이 놋뱀을 쳐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치유함을 받아 살게 되었다. 이 놋뱀 자체에 치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시다(요 3:14). 높이 들리운 놋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지금까지 땅만을 바라보고, 먹고 마시고 쾌락을 추구하는 일만을 생각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불평, 불만하던 삶에서 돌아서서 하늘을 쳐다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경건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우리의 모든 상처들이 치유받을 수 있음을 이 놋뱀사건은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놋뱀 자체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고 이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 섬겼던 것 같다(왕하 18:4). 광야에서의 놋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존재일뿐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르고 섬겼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무지몽매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히스기야는 이 놋뱀을 아세라 등 우상들과 함께 제거하여 버렸다.
2.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 하용삼목사, 수산교회)
머리말
이 시대는 진정한 지도자가 없어서 탄식하는 시대입니다. 이 땅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과오나 과실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며 핑계만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지도자라 함은 자신의 과오나 실수에 대해서 당연히 책임지고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하며, 자신의 과오나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안에 있는 구성원의 실수나 과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나 책임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세상이 아파하고 신음하는 현실이라면 그러한 현실을 정직하고 건전하게 치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진 이 패역하고 엉망인 이 현실에 대해 누가 지도자이며,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책임지고 올바른 판단으로 어지러운(Kaios)세상을 고쳐나가며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의 지도자인 까닭이다(롬15:1-2).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이 땅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이 하늘,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지켜야 할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 속에서 불평, 불만하며 그로 인한 불뱀의 고통을 겪는 백성과 하나님의 계획을 말없이 수행하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우리는 이러한 출애굽의 여정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참된 자녀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때로는 참고 인내하며 침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친히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쉽거나 안이한 길이 아닌 광야 길로, 힘들고 어려움이 있는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실 때, 아무런 이유나 연고 없이 그러하셨겠습니까? 분명 그 길로 인도하심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값비싼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관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공짜나 어떤 땀의 대가도 없이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들의 그 심보를 거부하십니다. 밭에 감추인 보물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농부의 비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땅을 소유할 만한 자질이나 자격, 그리고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행보에 대해 불평합니다. 불평의 이유는 음식과 물 때문입니다. 물론 음식과 물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광야 길에서 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목마름은 그들이 참고 견디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무수히 많이 되풀이되는 당신의 섭리와 경륜과 역사 속에서 이 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그들의 곤궁을 풀어주셨으며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당장 자신의 곤궁함과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떠합니까? 본문을 보면 모세는 그 어떤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며, 오리려 백성들의 노여움의 대상이었고 불평을 받아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음식과 물이 충분해서 그러했습니까? 모세도 백성들과 함께 배고프고 박한 음식으로 입이 즐겁지 않았고 백성들의 목마름과 똑같이 모세도 목이 바싹하게 말라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합니까? 모세는 이 과정을 참고 견디며 침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에게 이르기까지 인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펼쳐질 때가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으며 달려온 길에서도 우리는 이루 말하지 못 할 어려움으로 괴로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이 분단의 민족적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고 견디어 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제 잘났다고 떠들어되며, 어느 누구 하나도 이 불법의 현실에 대해서 책임지겠노라고 나서는 이 없고 서로 잘못했다고 시시비비만 가리는 이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물을 수도 있고, 또 불만하고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떠들고 같이 몰려다니며 불만하고 한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현실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드러날 때까지 침묵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을 말없이 기다리는 모습, 그것이 이 땅을 책임지며 이 땅에 대한 주인의 모습이며, 불법의 시대에 대한 지도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고 명확하지 않으며, 그저 참고 기다려야하는 그 시기에 자기 멋대로 떠들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면,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불뱀의 고통 속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지도자로 놋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을 때, 지도자로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때, 우리는 땅을 박차고 일어나 놋뱀을 들어야 합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치유를 의미합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만하고 불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 불뱀에 물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불뱀은 시나이 반도에 흔한 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 이 광야 길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어떤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훈련의 과정 중에서도 나름대로의 섭리와 돌보심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음식과 물로도 훈련을 시키셨지만, 불뱀이나 자연 재해와 같은 위험에서도 철저히 그들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중, 삼중의 계획과 돌보심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심판과 회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의 시대나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며, 심판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나 잘못에 대해 죄 없다 아니 하시며, 그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며, 그에 상응하는 심판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과 징벌로서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기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생명과 회복의 계획도 예비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불뱀으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더불어 놋뱀을 통해 불뱀에 물려 죽음에 이른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인도하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시대와 이 현실이 아무리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법으로 가득 차 있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하더라도 이 시대와 현실이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이 시대와 현실은 아름답게 고쳐지며 생명을 잉태하는 시대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책임자로서 그리고 이 세대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실현시켜야 할 사람들로서 우리는, 모세가 아파하고 신음하는 반역과 불법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놋뱀을 고추 세웠듯이 우리도 역시 생명의 놋뱀을 이 시대를 향해 드높이 치켜세워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생명의 놋뱀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법과 반역 시대요, 오욕의 세월인 이 현실을 향해 우리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꼿꼿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이 세상을 책임져야 하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피폐해지는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고, 저 마다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 속에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 때로는 침묵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으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더불어,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이 땅과 이 시대를 책임지는 청지기의 모습이며 새로운2000년대를 맞이하는 하나님 자녀 된 모습입니다.
설교2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기나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가나안이었고 그들의 지향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길은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 있었고,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과 시련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으며,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과정 중에 심한 불만과 불평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모습과 행동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어야 하고 견디어야 하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무엇인가를 향한 삶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지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짧고도 기나긴 여정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는 본향을 향해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로 우리에게도 우리가 지녀야하고 갖추어야 하는 삶의 모습과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고 험한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얻고, 유업으로 얻은 그 땅에서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은 반드시 거쳐야 하고 견디어야 하는 시련이 있음을 보여준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주인의 신분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견디고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가 견딜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과 시험거리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시련거리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불만하고 불평한 것은 박한 음식과 물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음식과 물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보살핌은 늘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 늘 알맞게 뿌리시며, 알맞게 자라게 하시며, 늘 알맞게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가 질 수 있는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베푸심과 돌보심을 신뢰하지 못 함으로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견디며 지어야 하는 십자가를, 광야 길에서 훈련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과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견디어야 하는 과정을 견디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훈련 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고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책임져야 하고 견디어야 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우리는 순종함으로 짊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의 소망은 이루어지며, 하늘나라의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결코 한눈을 팔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결코 한눈을 팔아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어가던 그 광야 길에서 불뱀이 한둘이었겠습니까? 불뱀은 시나이 반도에 사는 뱀입니다. 당연히 광야 길에는 불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들은 한번도 불뱀의 위협이나 불뱀의 독의 위험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불뱀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걸어온 그 길에서는 불뱀이 위협적인 것이나 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며 불만과 불평을 품었을 때, 불뱀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위에는 항상 우리를 해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한눈을 팔게되면, 그 즉시 이러한 위험이 우리의 존재를 해하려고 달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물위를 걷을 때는 그는 당당히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위의 풍랑과 파도를 바라보고 주님을 자신의 시야에서 놓쳤을 때, 그는 물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늘나라를 향해 걸어갈 때, 우리는 당당하고 거뜬히 세상의 풍랑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지만, 우리가 만일 한눈을 판다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죽음의 지경까지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한눈을 팔아서는 안되며, 천국의 소망을 이루는 그 날까지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이루는 그 날까지, 불뱀의 고통 속에서도 놋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실수하고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넘어지기도 하고 한눈을 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하고,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소망인 하늘나라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한 뒤에 그것을 용서받고 다시 회복되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잘못했다면 당연히 우리는 혼나야 합니다. 혼나고 징계 받은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순종하며 하나님의 치유를 기대하며, 회복을 간구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와 심판을 내리시지만 그분의 치유하심을 고대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치유의 영과 회복의 영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불뱀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놋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약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새로운 2000년대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도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결코 주저앉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다짐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우리의 행진을 계속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