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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장 그르니에. 1898~1971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는 1898년 파리에서 태어나 브르타뉴에서 성장했고. 파리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22년 철학 교수 자격증을 얻은 뒤 아비뇽, 알제, 나폴리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누벨 르뷔 프랑스제>등에 기고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30년 다시 알제의 고등학교에 철학 교사로 부임한 그르니에는 그곳에서 졸업반 학생이던 알베르 카뮈를 만났다. 1933년에 그르니에가 발표한 에세이집 <섬>을 읽으며 스무살의 카뮈는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고, 몇 년 뒤 출간된 자신의 첫 소설 <안과 겉>1937년. 을 스승에게 헌정했다. 그르니에는 1936년에 19세기 철학자 쥘 르키에 연구로 국가박사학위를 받았고, 팔 년간의 알제 생활이후 릴,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e으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말년에 소로본 대학교에서 미학을 가르치다가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들을 발표했으며, 현대 미술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다수의 미학 분야 저술들을 남겼다.
그르니에 사상은 흔히 말하는 철학적 세계와는 거리가 있고, 실존주의적 경향을 띠고는 있지만 다분히 회의주의적이고 관조적인 철학이다. 독자들에게 장 그르니에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은 카뮈의 서문과 함께 출간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던 <섬>이다. 그 외에도 그르니에는 <어느 개의 죽음>, <카뮈를 추억하며>, <일상적인 삶> 등의 에세이집을 남겼고, 카뮈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알베르 카뮈와의 서한집>도 사후에 출간되었다. 포르티그 상, 프랑스 국가 문학 대상 등을 수상했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알제에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계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모럴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 안에 넣어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 중 몇몇 사람들에게 가난과 고통은 물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피 끓는 젊음의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세계의 진실이란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나누어 주는 즐거움 속에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감각 속에서, 세계의 표면에서, 빛과 파도와 대지의 좋은 향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지상의 양식>이 그 행복에의 초대와 함께 찾아온 것이 우리에게 너무 뒤늦은 일이었다는 점은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행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오만한 직업으로 삼고 있는 터였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탐욕으로부터 좀 딴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우리의 저 야성적인 행복으로부터 깨어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음울한 설교자들이 이 세상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들 위에 저주의 말을 던지면서 우리들의 바닷가에 서성거리기라도 했더라면 우리의 반응은 격렬하거나 혹은 지극히 냉소적인 것이었으리라.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참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곧 그 어느 시대에나 한결 같은 이 거대한 테마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막힌 새로움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다, 햇빛, 얼굴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려지면서 여전히 그 매혹은 살아남았으되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섬>은 우리에게 환멸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문화라는 것을 발견했다.
과연 이 책은 우리가 우리의 왕국으로 여기고 있던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우리의 젊은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섬>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그르니에는 그것들의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덧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곧 우리는 우리가 돌연히 느끼곤 했던 우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척박한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 속 타고장뿐이다. 이리하여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과 사막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다. 그것은 허먼 멜빌이 <마리>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 보여 준 순례와 마찬가지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감탄하다가 죽는다. 마침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책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과연 그르니에는 멜빌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그의 여행을 끝내고 있다. 힌두교도들에게 대한 말끝에 그는 그 이름을 알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항구. 영원히 이르지 못할 만큼 멀고 그 나름대로 인적이 없는 어떤 다른 섬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여기서도 역시, 전통적인 종교들과 무관하게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이 아마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지냈더라면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느날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내가 그르니에에게서 얻은 것은 확신들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확신을 줄 수도 없었고 주려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나는 그에게서 의혹을 얻었다. 그 의혹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나로 하여금 오늘날 흔히 쓰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 다시 말해 근원적인 확신들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섬> 속을 뚫고 지나가는 이 영혼의 떨림은 하여튼 나의 경탄을 자아냈고 나는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 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되풀이해 보노라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 주던 저 일종의 음악 같은 말들이다. 나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고, 우리 도시의 높은 언덕배기에서 내가 수없이 끼고 돌던 높은 담장들에 둘러싸인 채 그 너머로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동꽃 향기만을 건네주던, 가난한 나의 꿈이었던 저 은밀한 정원들 중 하나가 마침내 내게로 열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과연 비길 데 없이 풍성한 정원이 열리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내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꿈틀거리면서 말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탄생은 어떤 단순한 독서, 어떤 짤막한 대화 한마디만으로도 한 젊은이에게서는 촉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펼쳐 놓은 책에서 한 개의 문장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고 한 개의 어휘가 아직도 방 안에서 울리고 있다.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어조를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그와 동시에 벌써 그 완벽한 언어에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 수줍고 더욱 어색한 하나의 노래가 존재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푸득거린다.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 나도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뒤였다. 다른 책들도 이 같은 결심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그 역할이 끝나자 나는 그 책들을 잊어버렸다. 그와는 달리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 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 스스로에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쏟으며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여러 해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그 스승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정확하면서도 꿈결 같은 이 가벼운 언어는 음악처럼 흐른다. 이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은 위대한 계시들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들은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지상의 양식>이 감동시킬 대중을 발견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이제는 새로운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아올 때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펼쳐 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 없이 읽기 위해 내 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空의 매혹]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득할만한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체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벗으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바로 그러했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여러 해에 걸친 시간 속에 흩어진 꿈처럼 어렴풋한 기억이다.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나의 존재가 바로 이 순간부터 어떤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든가 훗날 내가 실제로 나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 내용들은 모두 이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만큼 어떤 유난스러운 순간을 나는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적부터 매우 여러 번이나 기묘한 상태들을 경험했다. ~~~그 상태를 경험할 때마다 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곳에 놓인 그 무언가와 접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 접촉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런 상태의 접촉들을 서로 관련지어 보려고 노력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자신의 내면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외부 세계와 대비해 보며 자신의 직관들을 하나의 체계로- 그 직관들을 빈약하게 변질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유연한 체계로 탈바꿈시키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였음 직한 그런 반응을 보였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시들어 떨어지듯이 그 상태들이 사라져 가도록 버려두고 있었다. 나는 그냥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쫓아다녔다- 여행 그 자체밖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여행들이었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 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 왔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탄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되씹어 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하여간 내면적인 사건들은 -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어느 날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오히려 변두리로 밀려나 살아가도록 마련된 것이다.
바다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부지런히 바다와 접촉하면서 살다 보니 내 마음속에는 만사가 헛된 꿈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바다, 브르타뉴에서처럼 항상 움직이는 바다 말이다. 그곳의 어떤 해안에는 한눈으로 다 껴안을 수도 없을 만큼 광대무변한 넓이가 펼쳐져 있다. 얼마나 엄청난 공허인가!바위들, 개펄, 물.... 날마다 모든 것이 전부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로 변하는 곳이니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나는 자신이 밤의 어둠 속에서 어떤 나룻배를 타고 있다는 상상을 해 보곤 하는 것이었다. 방향을 가름 할 표적 하나 없었다. 길을 잃은 채, 어쩔 도리도 없이 길을 잃은 채, 눈에 보이는 별 하나 없었다. 이런 몽상이 그렇다고 씁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 몽상을 흐믓해 하며 펼쳐 가고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병이었고 나는 달콤한 기분으로 그 병을 즐겼다. 무한의 감정은 내게는 무라는 것이 그러했듯 아직 이름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 결과 내가 느낀 것은 거의 완전한 무심, 일종의 고요한 무감각 -눈을 뜬 채 잠자는 사람과 같은 그런 상태였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그 음울한 목초지로, 씨앗 하나 싹트는 일 없는 그 황량한 모래톱으로 쏘다녔다. 나는 물결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물결은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아갔다 하면서, 마치 든든한 밧줄로 바다 깊숙이 비끄러매 놓은 부표처럼 끝내는 나를 제자리에 그대로 남겨놓는 것이었다. 그 같은 무감각 상태에서 헤어나기란 존처럼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었던가? 전혀 아무것에도, 무엇이나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설사 그 상태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삶 자체가 어찌나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는지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은 조그만 일로도 나는 쉽사리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왜냐하면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무엇이나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인 단 한 가지에 비하면 그래도 얼마 되지 않으나마 어떤 가치를 지닌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는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 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 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리는 대신 나는 마음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 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가장 비싼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 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외발로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앞으로 다가서면서도(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보상을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넠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드시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고양이 물루]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2)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공부할 때 동무가 되어주고, 내 한결같은 생각과 내 단 하나의 행복에 내가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줄 고양이 한 마리를 가졌으면 했다. ~~~바로 그러한 참에 무덤 파는 사람이 내게 고양이 한 마리를 주었다.
(3)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것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때에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 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해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르낭은 아침마다 히브리어 사전을 열심히 읽으면서 삶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연구라는 것에 그 이외에 다른 흥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별 볼일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게 하는 인내의 놀이를 배우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한 모범으로 한 마리의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케르겔렌 군도]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내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해 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 즉 단순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인 힘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환상에 속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같은 타고난 부족함을 무슨 드높은 영혼의 발로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그런 비밀에 대한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루소는 에름농빌에 숨어 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부대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생활이라면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영위했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도무지 변화라곤 없이 단조로운 데다 계속적이며 공개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그 비밀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살았던 집에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기념관을 붙여 놓았지만 사실 그 집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평범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베니스에서 보낸 시절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오랜 여행 끝에 그곳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내 수중에는 단 한 푼의 돈도 남지 않은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형편이었으므로 나는 일찌감치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희망 없는 노동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지 못했던 때라 나는 오히려 신바람이 났다.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봤으나 물론 퇴짜 맞고 되돌아 나왔다. 베를리츠 중학교에서는 마침 비어 있던 자리에 사람을 채워 넣고 난 참이라는 이야기였다.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프랑스 출신 상인이 자기도 나와 같은 곤경에 처했던 경험이 있다면서, 호텔에서 외국 손님을 맞는 카운터의 일자리를 구해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밤을 세우고 또 반나절을 더 일해야 했으니 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젊을 때야... 하지만 이런 식의 현실적인 면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못 되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잡다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 자연이라! 그러나 나는 베니스에서 한 달 이상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싸구려라도 좋으니 단 한 편의 영화만 구경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석호들을 다 버리고 떠나고만 싶었으니 말이다.
순전히 물질적인 구속 외에는 아무런 구속 없이 지내는 그 이상적인 생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위적이며 속이 텅 빈 생활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처음은 항상 멋지게 마련이다. 다만 그다음은 멋이 덜해진다. 카사노바가 플롬의 감옥을 탈출하여 리바 스키아보나의 대기를 들이마셨던 아침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침이었겠는가! 그때의 도취한 기분은 쉽사리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역시 더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에스클라본의 산책로도 다음 날부터 당장 따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는 숱한 약혼녀들에게 자기는 본래 결혼이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보헤미아 지방의 어느 해묵은 성과 결혼하여 그의 생애에서 가장 쓸쓸한 최후의 날들을 거기서 보내고 만다.
회춘의 샘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우리를 속인다. 인간의 정신과 시간 사이에는 견디기 어려운 관계가 맺어져 있다. 청춘, 자유,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항상 스탕달이 산피에트로인 몬토리오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풍경을 앞에 두고 썼다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말이 왜 생각나는지 까닭을 모르겠다. “오늘 내 나이 쉰 살이 되었다.” 이야기를 더 하지 말자. 그러다가는 또 파스칼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꿈을 버리게 하는 것은 꿈의 헛됨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 같은 비밀의 감정은 마치 끈질기고 머리 아픈 어떤 냄새, 심지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두어도 가시지 않는 냄새와 같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 버린 어떤 친구가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이 끌리는 쪽은 댄스홀이나 다른 쾌락의 장소들이 아니라 어둠이 내릴 무렵 여인들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건네 오는 한적한 골목길들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풍토에서는 오직 궁핍만이 마음 약한 사람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하고 굳건하게 만든다. 궁핍은 그것이 야기하는 장애물들의 크기에 의해 한동안 모든 것에서 외적인 것을 고립시킨다. 육체노동의 필요가 상호 접촉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어느 오래된 도시 부근에 살고 있을 적에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포석이 고르지 못하여 매우 높은 두 개의 담장 사이에 꼭 끼여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곤 했다. 때는 4월이나 5월말이었다. 내가 그 골목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를 때면 강렬한 재스민과 라일락 꽃 냄새가 내 머리 위로 밀어닥치곤 했다. 꽃들은 담장 너머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꽃내음을 맡기 위하여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나는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낯선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실제보다 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예를 들어 사실은 어떤 나라를 가 봐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게는 익숙한 어떤 사상을 누가 장황하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처음 듣는 것처럼 하고 싶다. 누가 나의 사회적 지위를 묻는다면 나는 지위를 낮추어 대답하고 싶다. 내가 실제로 감독이라면 인부라고 말하고 싶다. 유식하게 떠드는 사람의 말은 듣기만 할 뿐 그걸 반박하지 않았으면 싶다. 나는 격이 낮은 사람들과 왕래하고 싶다.
무엇인가 감출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파리를 좋아한다. 그곳에서는 이주으 삼중 혹은 그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것은 아니다. 아무런 감출 것이 없을 때도 자기를 감출 수는 있는 법이다. 파리에서는 아파트 경비원이나 호텔의 수부 계원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는 일 없이 자기가 사는 동네일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한 달 동안이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훼손당하지 않고 제대로 보전하려면 데카르트처럼 하루에 두어 번씩 경비원이나 호텔의 계원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감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의 주제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호기심에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그들에게 속내 얘기를 털어놓기도 해야 한다. 보다 더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하고 싶으면 그럴수록 그때의 속내 얘기는 더욱 솔직하고 소상한 것이어야 할 터다. 그런 속내 얘기들이 완전히 무해무득한 분야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리하여 기분 내키는 대로 일시적 변덕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예를 들어 이름 없는 어떤 술집의 한갓진 뒷방에서 두 시간씩이나 허송할 수도 있다. 그렇다. 정말 허송하는 것이다.(런던에도 그런 술집들이 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문을 여는데 우리는 마치 도둑처럼 슬며시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마실 것을 날라다 주는 보이와 더불어 최근 돌파된 비행 기록에 대해 한담을 한다. 그는 전혀 의심하는 빛이 없다. 자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그는 모른다(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비밀스러운 삶이 반드시 부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우리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파스칼은 이것을 하지 않았다. 파스칼은 잉]것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같은 식으로 떠들어대는 문학 비평가와 대화를 하느니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는 미장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파스칼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밀스러운 삶이 반드시 우리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여기서 어떤 생활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만인에게 감춰진 삶에는 어떤 위대함이 있다. 구태여 데카르트와 파스칼의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 예수에게는 공적인 생활 이전에 감춰진 삶이 있었다. 그에게는 내려야 할 계시가 있었고 성취해야 할 신성한 소임이 있기 때문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나는 어떤 여행자가 쓴 케르겔렌 군도에 대한 묘사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묘사는 내가 암시하려는 명상의 방향을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케르겔렌 군도는 선박이 다니는 일체의 항로 밖에 위치하고 있어서 (....) 약 3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해안에는 흔히 안개가 끼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선박들은 극도로 조심하며 그 군도에 접근한다..... 그 고장의 내부는 완전히 황폐한 상태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행운의 섬들]
사람들은 여행을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동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 마음속의 저 내면적 노래가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여러 날 동안 바로셀로나에 머무르면서 교회와 공원과 전람회를 구경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남은 것이란 람블라 산호세의 풍성한 꽃향기 뿐이다. 기껏 그 정도의 것을 위하여 구태여 여행을 할 가치가 있을까? 물론 있다.
바레스의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톨레도를 비극적임 모습으로 상상할 것이고 대성당과 그레코의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감동을 느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오히려 발길 가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분수가에 앉아 지나가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편이 더 좋다. 톨레도나 시에나 같은 도시에 갈 때면 나는 철책을 친 창문들이나 분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안뜰, 그리고 요새 성벽처럼 두껍고 높은 벽들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밤에 창문 하나 없는 그 거창한 벽들을 따라 거니노라면 마치 그 벽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저 방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게 마련인 저 방벽.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잇을 것 같은 저 신비 - 그런 모든 것에 붙일 수 잇는 이름이란 바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종류의 사랑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코홀을 이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인식에 도달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깨 멀미가 나면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r서을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인식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cslrn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토스카나, 혹은 프로방스의 햇빛 찬란하고 위대한 풍경들 속에서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광대한 평원들이 보이지만 자세한 구석구석 또한 모두 다 글씨로 쓴 듯이 확연하다.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힌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2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 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 이상으로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생각들의, 그의 마음의 무無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과연 어떤 광경들, 가령 나폴리의 해안, 카프리 또는 시디부사이드의 꽃 핀 테라스들은 죽음에의 끊임없는 권유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그득 채워 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간을 파 놓는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는 무덤들이 있다. 그 무덤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엄청난 빛을 보고 그만 질려 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세비야에서는 궁전, 성당, 과달키비르강 등등을 무시해 버리고 나면 삶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유쾌해진다. 그러나 그 고장의 의미심장한 매혹을 참으로 느끼려면, 히랄다의 꼭대기에 올라가려다 그곳 수위에게 제지당해 보아야 한다. 저기는 두 사람씩 올라가야 합니다. 하고 그는 당신에게 말한다. 아니 왜요? -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지요.
위대한 풍경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다. 그리스의 사원들이 매우 자그마한 것은 그것이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 빛과 가없는 풍경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해진 인간들을 위한 대피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햇빛이 가득 내리쪼이는 풍경을 보고 사람들은 어찌하여 상쾌한 풍경이라 말하는가? 태양은 세상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 놓아 생명 있는 존재는 저 자신의 모습과 -아무런 기댈 곳도 없이 - 대면하게 된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어디나 구름과 안개와 바람과 비가 하늘을 가리고, 일거리니 걱정거리니 하는 따위를 구실로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은폐해 준다.
나는 생피에르섬에 서 맛본 행복감에 대한 루소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 감탄하여 마지하지 않는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며 항구적인 어떤 상태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 한 시간들보다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 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어느 날 어떤 친구와 더불어 노르망디식과 비잔틴식 궁전들로부터 지중해를 굽어보고 있는 라벨로까지 걸어 올라갔을 때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충만감을 맛보았다. 침브로네 테라스의 포석들 위에 가만히 엎드려서 나는 대리석 위에 춤추는 빛을 내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었다. 나의 정신은 그 투명함과 그 저항의 유희 속으로 가뭇없이 빠져들더니 이윽고 고스란히 회복되었다. 나는 모든 지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장관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탄생을, 나 자신의 탄생을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다른 존재가 태어나는 것일까. 구태여 다른 존재라 할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획득했다고 그날 나는 몇 번이나 되외었다.(1924년 성탄절이었다) 나는 획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잃고, 또 헛되이 다시 만회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시간에, 내가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단숨에 획득했다. 내 생각을 제대로 이해시키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단숨에 획득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자격을 갖추면 우리는 온갖 것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단 한순간에 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말의 힘을 당신은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더 이상 말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다음에는 무로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가느다란 실 같은 빛이 남아 잠 속에까지 따라오고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전에 어느 날.... 그럴진대 나 자신보다 더 내면적인 그 존재의 깊숙한 곳으로 천분의 일 초 동안에 내가 또다시 달려 들어가지 말라는 법이야 있겠는가?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 나는 또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더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이스터섬]
[상상의 인도]
(인도와 그리스)
그리스는 무인도처럼 메마르고 팽팽하게 긴장된 곳이다. ~~~인도는 물렁물렁하고 불명확하다. 처녀림처럼 사람을 홀린다. ~~~인도는 그 성년의 발육 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다. 인도는 우리들 눈에는 영원한 유년 같은 모습이다. 인간으로서는 어른다운 척도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계시)
플로티노스는 두 가지의 죽음을 구분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에 앞서 올 수 있는 철학적 죽음이다. 철학적 죽음은 힌두교도의 목표다. 그러므로 업적을 이룩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의 방향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또 다른 세계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다.
(정신 의학도들이 본 인도)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광증의 주된 증상은 관심 상실이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개인적, 사회적 미래에 대한 큰 희망과 관심이 발달하는 반면, 환자는 조금씩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무관심해진다. 공부는 따분하게 느껴지고 놀이나 스포츠에도 별 흥미가 없어지며 자연은 빛을 잃은 듯 회색으로 보인다. 큰 사건이 일어나도 마치 옛날이야기 속의 사건인 것처럼 냉담하게 받아들인다.
결과는 무기력. 환자들은 여러 날 동안 마치 이집트의 석상이나 고행자처럼 꼼짝도 않는다.
정서적 감정의 약화: 어떤 불행의 소식을 접해도 반응은 태연하거나 심지어 빈정거리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애매한 감정: 일체의 사상은 한 결 같이 무가치하며 따라서 그 반대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흥미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0=-0
내면적으로 야릇하고 견디기 어려워지는 느낌. 예: 나는 열반에 들었어요.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나는 일체의 인간적 사고의 밖에 있어요. 나의 사고는 허깨비예요. 그것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 뿐이에요. 등등
(인식의 가치)
(실현)
[사라져 버린 날들]
2월 6일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1934년의 어떤 정치적 일화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해 2월 6일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그저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그리고 오늘로 나는 한 살 더 먹었구나 하는 생각.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했고 시간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들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 등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無를 열망하고 있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러 나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수많은 페이지들이 거의 공백 상태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인심 좋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쪼잔 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변절시키지 않는 일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재구성하여 표현해 본 그때의 생각. 그 불경한 생각은 사실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생각은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 녹아내렸다. 알제에서 보낸 2월 6일. 나는 바다를 바라보려고 아랍인들 동네 카스바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엄청난 정적..... 그렇다. 날씨가 나빴는데도 엄청난 정적이었다. 바람에 퍼덕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들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 내 정신을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판에 박힌 타성으로 변질된 직업의 속박.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 불능, 같은 땅에 모여 살면서 서로 싸우는 대신 믿음 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찾아내야 마땅할 이 백성들의 상호 몰이해 등 - 어떤 성질의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지 않다고 느껴야만 비로소 삶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 이 기회주의자에게 그토록 슬픔을 안겨 주던 그런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얼마나 엄청난 정적이었던가! 나는 그 단조롭게 퍼덕이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치 자기의 수단을 상실한 비행사가 자기에게 전해오는 음파의 파동만을 믿듯이 그 소리가 인도 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냥 그렇게 걸어만 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떤 무를 향한 걸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잡아 주고 있는 어떤 줄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무늬 같은 카스바,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창가의 푸른빛 장면, 상자 갑같이 반듯반듯한 유럽 사람들의 집들, 내 발밑에 펼쳐진 고등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팔처럼 곡선을 그리는 해군청,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나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 주고 있었고 그 존재가 내겐 환상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한 환상도 덜한 환상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 결 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주고, 매 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 나가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서로의 피를 주고받음으로써, 그 자체로 환원된 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은밀하게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그 같은 응결된 통일성에 단번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응결된 통일성은 오로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세월이 감에 따라 비로소 얻어진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나는 어떤 가상의 고통 때문에 곧 그곳을 떠나 버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시험 삼아 그리고 마치 감방에 갇힌 수인이 감방에서 나가듯 중심에서 변두리로 한번 나가 본 것이었다. 좁은 골목들, 높은 집들, 숨 막히는 공기, 나는 멀리 와 있었는데도 갇혀 있었다. 어디서부터 멀리? 어디에 갇혀서? 훗날 나는 내 주위에 여러 개의 뿌리들이 내리게 한 뒤에야 내가 욕망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또 그 다음에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과 나 자신을 더 이상 분간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행복감에 젖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가까이 있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하여 내게 필요했던 저 물밑 작업의 생각과 나 자신은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나의 떨어져 나옴과 나의 향수의 항상 현전하는 추억과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가까워지는 것.....나는 오직 나무들, 하늘, 동물들, 침대, 탁자의 일상적인 되풀이를 통해서만, 육체적이고 자연적인 기조에 의해서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딜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존재를 우리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른 존재는 단순한 정신적 애착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약한 나는 기껏 죽은 자의 입이 흙에서 가까워지듯 가까워지는 것이다.
[보로메 섬들]
이런 말을 구태여 할 필요가 있을까? 이걸 솔직히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 북쪽 지방의 어느 낯선 고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내게는 삶이 무겁고 시가 없어 보였다. 시가 없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단조롭기만 한 것에서 매 순간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만드는, 저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새롭게 여겨지는 것에서 단조롭기만 한 면을 발견해 가는 중이었으니....
나는 나를 자연과 가장 가깝게 이어 주는 무엇이 없나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 보았다. 거리를 지나는 동물들(말들과 개들), 나무들 -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 그리고 심지어 꽃가게 진열창 너머 자라고 있는 식물들까지. 그런데 어느날 그 어느 꽃가게가 ‘보로메 섬으로!’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늘은 어둡고 포석들은 더럽고 집들은 잿빛인 이 도시에서 이 간판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 것일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조에 나는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탈리아 북부 마조레 호수에 잠겨 있는 세 개의 섬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섬, 어부들의 섬, 아름다움의 섬, 종려수들, 오렌지 나무들, 레몬 나무들. 그것은 곧 지상낙원의 모습이었으니..... 연옥에 있는 나를 위하여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미모사, 등나무 꽃, 장미꽃 냄새로 가득 찬 공기를, 이솔라 벨라의 비둘기 떼가 날아다니는 그 너무나도 무거워진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요즘 사람들이 모두 다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그 육체적인 행복을,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갖고 싶어 하는 그 육체적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다른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나 타고난 능력이나 은총과 맞먹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 육체적 행복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그 무엇을.
오랫동안 나는 왜 그런 간판을 붙이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연상시키는 것을 꿈꿔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거기서 가장 먼 곳의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을, 신기루의 매혹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꽃가게 주인이 어떤 절박한 꿈의 힘에 굴복한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를 알게 되었다. 허름한 가게치고는 너무 화려한 그 이름은 그의 전 주인이 지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전 주인은 어떤 이탈리아 외교관과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여자였다. 그러고 보면 그 섬들은 북쪽 지방의 어떤 돈키호테의 이상이나 안개 낀 지방 어느 부르주아의 가상 천국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 감정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내게 어떤 경고같이 여겨졌다. 가장 먼 곳과 이제는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행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테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이상의 여인. 돈키호테가 꿈에 그리는 여인)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짧은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 두자. 마조레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내용품들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그렇다.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의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 무너지기 쉽고 너무나 인간적인 보호인 마른 돌이고, 어느 시골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주기에 족할 것이나..... 한 번의 악수, 어떤 지성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다.
[Review]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성서. 전도서 1장)
이 책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인간의 삶은 유한하나 욕망은 무한한 데서 오는 허무함을 표현한 성서의 전도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 책에서 흐르는 느낌이 그러했다. ‘그르니에’의 제자였던 카뮈도 이 책에 바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감탄하다가 죽는다. 마침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카뮈
그러면서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누군가는 해주어야 할 것인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말했다.
‘장 그르니에’는 1898년 파리 태생으로 솔로본 대학을 수학했으며 알제의 고등학교에 철학 교사 시절 ‘알베르 카뮈’를 만났다. 스무 살의 카뮈는 1933년에 ‘그르니에’가 발표한 에세이집 <섬>을 읽으며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고 극찬했다,
총 여덟 편의 에세이가 수록된 이 책의 주제는 ‘그르니에’가 알고 있는 지중해 연안의 섬들에 대한 에세이지만 그가 말하는 섬은 지형적이라기보다는 내면의 공간, 세상과 마주하는 삶의 여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닌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의 글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분주하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상처받는 나약한 존재이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는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본문)
그르니에는 상처받기 쉬운 유년 시절 어느 한 보리수 그늘에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겪은 무 無의 인상이 성년이 되었을 때까지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다시 일어서게 했다고 말했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넠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드시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본문)
인생의 질문과 해답 사이에는 언제나 여백이 있다. 특히 행복과 불행은 현실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차이만큼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모호함 속에서 책 속의 문장들이 가깝게 다가오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멀리 달아나 버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옆에 두고 보아야 할 책이다. ‘카뮈’는 이 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과연 이 책은 우리가 우리의 왕국으로 여기고 있던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우리의 젊은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섬>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그르니에는 그것들의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덧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곧 우리는 우리가 돌연히 느끼곤 했던 우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척박한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카뮈 ■
(본문)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카뮈
“바다, 햇빛, 얼굴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려지면서 여전히 그 매혹은 살아남았으되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섬>은 우리에게 환멸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카뮈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섬>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그르니에는 그것들의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덧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카뮈
“척박한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 속 타고장뿐이다. 이리하여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과 사막 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카뮈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다.”-카뮈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감탄하다가 죽는다. 마침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책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과연 그르니에는 멜빌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그의 여행을 끝내고 있다. 힌두교도들에게 대한 말끝에 그는 그 이름을 알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항구. 영원히 이르지 못할 만큼 멀고 그 나름대로 인적이 없는 어떤 다른 섬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카뮈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 나도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뒤였다.”-카뮈
“정확하면서도 꿈결 같은 이 가벼운 언어는 음악처럼 흐른다. 이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카뮈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은 위대한 계시들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들은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카뮈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 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 왔다.”
"나는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낯선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실제보다 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예를 들어 사실은 어떤 나라를 가 봐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게는 익숙한 어떤 사상을 누가 장황하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처음 듣는 것처럼 하고 싶다. 누가 나의 사회적 지위를 묻는다면 나는 지위를 낮추어 대답하고 싶다. 내가 실제로 감독이라면 인부라고 말하고 싶다. 유식하게 떠드는 사람의 말은 듣기만 할 뿐 그걸 반박하지 않았으면 싶다. 나는 격이 낮은 사람들과 왕래하고 싶다. "
“가장 먼 곳과 이제는 작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 속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은 항상 멋지게 마련이다. 다만 그다음은 멋이 덜해진다. 카사노바가 플롬의 감옥을 탈출하여 리바 스키아보나의 대기를 들이마셨던 아침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침이었겠는가! 그때의 도취한 기분은 쉽사리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역시 더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에스클라본의 산책로도 다음 날부터 당장 따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동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 마음속의 저 내면적 노래가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내 일생 속에는 수많은 페이지들이 거의 공백 상태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인심 좋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쪼잔 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변절시키지 않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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