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7)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2장 자객 예양(豫讓) (7)
그 무렵, 조양자(趙襄子)는 외출할 때마다 철저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울러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했다.
진양성 밖 용산(龍山)에 커다란 저수지 하나가 생겼다.
지난날 지백(知伯)이 조양자를 공격하기 위해 파놓은 저수지였다.
조양자(趙襄子)는 그 저수지를 없애기가 아까웠다.
잘 이용하면 농사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너진 저수지를 보수하고 왕래가 편리하게끔 그 위에 다리를 설치하게 했다.
- 적교(赤橋).
다리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
적(赤)은 '붉다'는 뜻으로 '불(火)'의 상징이다.
불과 물은 상극이라 물의 기운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뿐이다.
저수지 위에 적교를 세워 모든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윽고 적교(赤橋)가 완공되었다.
조양자는 수레를 타고 적교를 보러 나갔다.
공궁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하던 예양에게 이 정보가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기회가 왔다.‘
예양(豫讓)은 날카로운 비수를 구해 가슴에 품고 미리 적교로 갔다.
주변 지형을 살피던 예양(豫讓)은 다리 건너편 쪽 바로 밑에 조그만 공간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곳에 숨어 있다가 뛰어나가 조양자(趙襄子)를 일거에 찔러 죽이리라!‘
그는 다리 밑으로 들어가 부랑자인 양 엎드려 잠자는 체했다.
마침내 조양자 일행이 적교 가까이 다가왔다.
앞서 호위 무사들이 지나가고 조양자(趙襄子)를 태운 수레가 막 적교 위로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별안간 수레를 끄는 말들이 콧바람을 내면서 사납게 울어댔다.
어자(御者)가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말들은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조양자(趙襄子)는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듣기로 훌륭한 말은 주인을 위태로운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이 말들이 적교(赤橋)를 건너려 하지 않으니, 이 다리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예양(豫讓)이라는 자가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자가 이 근처에 숨어 나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한 조양자(趙襄子)는 호위 무사들을 불러 다리 일대를 수색하도록 분부했다.
얼마 후 무사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이 근방에 수상한 자는 없고, 다만 건너편 다리 밑에 거지 하나가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조양자(趙襄子)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떠졌다.
"새로 세운 다리에 어찌 거지가 잠자고 있을 것인가.
필시 예양(豫讓)이란 놈이 거지로 가장하고 누워 있는 것일게다.
당장 이리로 끌어내 오라. 내가 친히 문초해 보리라.“
무사들이 다리 밑의 거지를 끌어내 조양자(趙襄子) 앞에 대령시켰다.
보기만해도 흉악스럽게 생긴 몰골이었다.
조양자(趙襄子)는 유심히 거지의 얼굴을 살피다가 소리쳤다.
"이 자는 예양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예양(豫讓)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하하, 하늘이 나를 돕지 않아 또 발각이 되었도다. 그렇소. 내가 바로 예양이오."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진짜로 예양임이 확인되자 조양자(趙襄子)는 두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지난날 나는 주인에 대한 너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살려 보내주었다.
그런데 너는 그 은혜를 저버리고 또 나를 죽이러 왔다. 이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하늘이 어찌 너 같은 자를 도울 리 있겠는가. 내 너의 목을 베리라!"
조양자의 외침소리에 예양(豫讓)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양자(趙襄子)가 물었다.
"너는 죽는 것이 무서우냐?“
"내 어찌 죽는 것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다만 나는 내가 죽고 나면 지백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이 없음을 원통히 여겨 울었을 뿐이오."
예양의 대답에 조양자(趙襄子)는 눈꼬리를 누그러뜨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지난날 너는 처음에 범길사(范吉射)를 섬겼다. 그러다가 다시 순인(筍寅)을 섬겼다.
범길사와 순인이 망하자 이번에는 지백(知伯)을 섬겼다.
세 사람 모두 패망하여 죽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굳이 지백의 원수만을 갚으려 하느냐?"
예양(豫讓)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모음지기 군주와 신하는 의(義)로써 관계를 맺는 법이오.
군주가 신하를 자기 몸처럼 대우하면 그 신하는 임금을 자기 몸처럼 받들게 되오.
이와 반대로 임금이 신하를 개돼지처럼 부리면 그 신하 또한 군주를 길가는 사람 대하듯 대하게 마련이오."
"...........................?“
"지난날 내가 범씨를 섬겼을 때 범길사(范吉射)는 나를 일반 사람으로 대했소.
또한 순인(筍寅)은 나를 종처럼 대했소.
그러나 지백(知伯)만은 나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존중했소.
또한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준 사람은 지백 뿐이었소.
이것이 내가 그대를 죽이려는 이유요."
비록 자기를 살해하려는 암살자였지만 조양자(趙襄子)는 감동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아, 예양이여! 그대는 이미 지백(知伯)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고, 또한 명예도 이루었다.
나 또한 그대를 용서함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 그대는 내 앞에서 스스로 자결할 생각이 없는가?“
말을 마치자 칼을 예양 앞에 내밀었다.
예양(豫讓)은 순순히 그 칼을 받았다.
하지만 선뜻 칼을 뽑으려 들지 않았다.
회한(悔恨)의 그림자가 얼굴에 스쳐갔다.
"아직 할말이 남아 있는가?“
예양은 잠시 조양자(趙襄子)를 바라보고 나서 대답했다.
"있소. 경(卿)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해보라."
"자고로 충신은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진 임금은 다른 사람의 의리를 무시하지 않는 법이오.
지난날 경(卿)이 나를 한 번 살려준 것에 대해 나는 만족하오. 어찌 다시 살려주기를 바라리오.
그러나 나는 두 번이나 경(卿)을 살해하려다 실패했소. 어찌 원통한 마음이 없겠소?
바라건대 경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나에게 주시오.
나는 그 옷을 벰으로써 주인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오.
그렇게만 되면 나는 마음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소.“
"아..........!“
조양자(趙襄子)는 예양의 집요함에 질리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도 생겼다.
물끄러미 예양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비단 겉옷을 벗어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내주었다.
"이것을 예양에게 주어라.“
예양(豫讓)은 칼을 뽑았다.
앞에 놓인 조양자의 옷을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예양(豫讓)은 옷을 허공으로 던졌다.
"야압!"
칼을 세 번 휘둘렀다.
조양자의 옷은 세 조각으로 찢어져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졌다.
흡사 세 마리의 나비가 땅에 내려앉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하하하............! 이제야 나는 지하에 잠든 지백(知伯)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도다.
주군이여, 기다리십시오. 이 예양이 주군을 섬기러 가겠습니다.“
예양(豫讓)은 손에 든 칼을 거꾸로 쥐고 목에 댔다.
그대로 엎어졌다.
푹, 하는 묘한 음향과 함께 칼 끝이 예양의 목을 뚫고 뒤에까지 삐져나왔다.
그 광경을 조양자(趙襄子)와 가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후우.................."
이윽고 조양자의 입에서는 긴 숨이 터져나왔다.
"시체를 염하여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어라."
좌우 사람들이 세 조각으로 찢어진 옷을 주워 조양자에게 바쳤다.
조양자(趙襄子)가 옷을 받아 살펴보니 칼에 맞아 찢어진 곳마다 피가 벌겋게 번져 있었다.
그 피를 보는 순간 조양자(趙襄子)신의 몸이 칼을 맞은 듯 섬뜩했다.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헉!“
그 날부터 조양자는 매사 의욕을 잃었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여를 지내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BC 440년(진애공 18년)의 일이었다.
지금도 그 곳에 가면 예양(豫讓)이 자결했던 적교가 남아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다리를 '예양교(豫讓橋)'라고 고쳐 부름으로써 예양의 처절한 복수와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