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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6) 사제의 사죄권
사제에게 사죄권 있지만 용서의 주체는 ‘하느님’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는 죄를 사제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요?
개신교는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두고 죄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께 속한 것인데 어떻게 한낱 인간일 뿐인 신부가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이기에, 그분을 믿고 직접 그분께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명시적으로 주셨음을 확신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위임해 주신 ‘화해의 직분’(2코린 5,18)을 교회 안에서 수행하였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도들에게 맡겨진 용서의 권한이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주교의 협력자인 신부의 사죄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제에게 사죄권이 주어졌다고 하여도 고해성사에서 용서의 주체는 사제가 아닌 하느님이시며, 이는 고해성사의 사죄경인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가 지은 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만이 아니라 이웃에게 상처를 준 것도 포함되기에 고해성사에서 사제는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대표하여 고해자에게 용서를 선포해 주는 공동체적 화해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정교회와 성공회에는 아직 고해성사의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신부도 나약한 인간인데 죄의 고백을 들으면 고해자의 치부를 기억하거나 고해자의 비밀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부는 사죄권을 함부로 남용하거나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는 경우 교회법에 따라 사제 직무가 정지되고 때로는 자동 파문의 제재를 받을 정도로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고해소는 고해자에게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사제들에게는 사죄의 권한을 지닌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봉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7) 면죄부와 대사
죄를 사한다는 ‘면죄부’는 잘못된 용어
개신교가 말하는 ‘면죄부’와 천주교가 가르치는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요?
흔히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된 대사부에 대한 용어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적지 않은 개신교는 16세기에 가톨릭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짓기 위하여 기금을 모으면서 죄를 용서해 주는 면죄부를 남용하였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전통과 죄의 용서 뒤에 남는 벌에 대한 면제를 뜻하는 ‘대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라틴어 ‘인둘젠시아(Indulgentia)’란 ‘대사(大赦)’ 곧 ‘관대한 용서’라는 뜻으로,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죄는 용서받지만 그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 잠시적인 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의 권한을 교회에 위임하셨기에 고해성사를 통하여 사제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선포하더라도 죄에 따른 벌은 고해자 스스로가 보속 행위를 통하여 갚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 이후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결과로 남겨진 벌은 보속 행위로 갚아야 하는데 이것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최근 고해성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대사에 대한 의식도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는 고해성사 이후 남은 벌을 면제받고자 사제가 주는 보속 행위를 해야 하지만, 보속 행위를 했다 하여도 삶에 남겨진 죄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보속 행위의 경중을 따지기보다는 교회의 공로로 베푸는 대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성심과 이웃에 입힌 상처를 갚고 영적인 치유와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사는 통상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습니다. 대사의 조건으로 고해성사, 영성체, 기도, 성지 순례 등의 신앙 실천이 필요하며 어떠한 물질적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대사는 고해자에게 남겨진 모든 잠벌을 면제해주는 전대사와 일정 기간 동안 쌓인 잠벌을 면제해주는 한대사(부분 대사)로 나뉩니다.
16세기 전후로 가톨릭에서는 대사의 전통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제가 강론에서 대사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대사부에 대한 비난과 교회의 세속화로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대사부를 오용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대사부’가 ‘면죄부’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습니다. 개신교가 사도들의 후계자에게 맡겨진 사죄권을 넓게 해석하여 죄의 결과인 벌을 면제해 주는 ‘대사부’를 죄까지 사면해주는 증서로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면죄부(免罪符)’란 용어가 가톨릭교회가 금전적 대가를 받고 신자들의 죄를 사면해주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잘못된 표현으로 시정을 요구하였고, 벌을 사면하게 한다는 뜻의 ‘면벌부(免罰符)’로 용어 변경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개신교는 죄의 용서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으로 보기에 교회의 중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와 벌의 관계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개신교는 연옥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죄의 결과로서 죽은 이가 연옥에서 남은 벌에 대한 정화를 필요로 하고, 대사를 받은 이는 연옥 영혼에게 대사의 은혜를 양보할 수 있다는 교리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8)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서로를 인정하며 대화와 기도, 연대해야
일치 운동은 영적 일치를 위한 기도와 전문 신학자들의 대화 외에도 그리스도 복음 정신을 실천하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협력과 연대에서도 중요하게 표현됩니다.
먼저 일반 신자들은 다른 전통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과 일상적인 우정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관대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각자의 고유한 전통에 계속 충실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정서를 해치는 태도와 언행을 삼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일치 운동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다양한 전통에 속하는 사목자와 목회자들 사이의 우정 어리고 형제애로 묶인 관계는 친교의 영성을 증진하는 데에 으뜸가는 수단입니다. 사목자가 보여 주는 모범은 그리스도인 일치에 관한 문제에서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가르침이 됩니다. 따라서 사목자는 지역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또는 전례력의 중요한 시기에 기도와 형제적 교류를 위하여 다른 전통의 성직자를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의 개인 생활이나 사목 생활에 중요한 일이 생기는 경우 연대성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 신뢰와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에 힘쓰는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일치 운동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각 교단의 주요 행사와 특정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합니다. 그리고 상호 교단의 구성원이 함께 일하고 대화하며 분열과 오해를 극복하여 일치를 이루기 위한 기도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동 증언과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직접 지원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 존엄성의 올바른 존중을 위하여, 또는 평화 증진을 위하여, 또는 복음의 사회 적용을 위하여, 또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학문과 예술을 진보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또 기아와 재난, 문맹과 빈곤, 주택난이나 불공정한 부의 분배와 같은 현대의 곤경에 대한 온갖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협력이 필요”(일치 교령 12항)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 등을 통하여 강조한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보호 운동에 동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 전통의 영적 지도자와 학자들의 저서와 가르침에서 뽑은 성경 해설을 출판하거나 성경과 관련된 영적 갈증 해소를 위하여 시청각과 전자 미디어 매체를 활용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나 자료를 함께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도 중요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공동 연구와 번역 작업 등을 통하여 상호 이해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분열 이전 시대에서 유래한 공통 전통을 재발견하거나 분열 뒤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된 신학적, 영적 자원을 공동으로 연구하여 출판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여기고 성모님의 동정성을 존중하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그 밖의 다른 교회들은 성모님에 관한 전례 거행과 교리 선언, 기도와 신심에 반영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증언을 함께 연구하며 서로 다른 심신과 영성의 다양한 전통을 배우고 인정하는 일을 장려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서로의 교회에서 인정하는 영적 스승들과 성인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문헌을 공동 연구하면서 영적 쇄신의 원천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9) 개신교가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이름 지은 베드로, 교회의 반석 상징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의 주교이고 전 세계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보편 교회의 최고 사목자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케파, 곧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고 맺고 푸는 권한을 주셨다는 성경 말씀(마태 16,18-19 참조)에 근거하여 교황직을 베드로의 후계자 직분으로 인정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17)라고 하시며, 교회를 이끌고 보호할 것을 당부하셨기에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직무를 교황이 이어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천주교가 가르치는 교황 직무의 근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먼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교회 설립의 근거를 두고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한 인격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루터와 칼뱅은 이 성경 구절을 “나를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내 교회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하였지만, 곧이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이를 말리자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하고 말씀하셨기에 베드로가 온전한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개신교의 이러한 입장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 바르요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케파, 곧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는 고유한 소명을 지녔음을 상징합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170년경 그의 저서 「이단 논박」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선택하셨고, 사도는 주교를, 주교는 후계자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주교들이 선택되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사도들의 으뜸 제자로서 지닌 교회의 수위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베드로에게 직접 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교황 직무는 세속적인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섬김의 직무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마태 28,19-20 참조)하는 사명을 받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직무는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된 「천주교 용어집」(개정 증보판, 2017년)에서는 ‘교황’ 호칭과 함께 교회의 가장 으뜸이라는 의미로 ‘교종’(敎宗)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안내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30) 개신교 신자는 왜 죽은 이의 영정 앞에서 절을 하지 않나요?
개신교 신자 조문 가서 절해야 되나
장례식장에 가면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서로 어색해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빈소의 영정 앞에 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천주교 신자와 영정 앞에서 절을 하지 않고 대신 고인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짧은 기도로 대신하는 개신교 신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장례 문화를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계승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절을 허락하는 천주교의 입장과는 달리 개신교는 죽은 사람의 영정에 절을 하는 행위가 우상에 대한 숭배로 비추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본래 조상 제사는 중국 선교 초기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가 유교 문화를 수용함에 따라 효경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도회들이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반대하면서 교황청과 중국 황제 사이에 중국 의례 논쟁(1645~1742년)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이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상 제사를 엄격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조상 숭배와 제사 문화에 뿌리를 둔 유교 정신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 큰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1791년 윤지충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자 조상의 위패를 불사른 것이 천주교 박해를 촉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9년 12월 8일 비오 12세 교황이 공자와 조상 제사를 허용하는 ‘중국 의례에 대한 훈령’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이 한국 천주교회 기관지였던 「경향잡지」 1940년 2월호(919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교구장들은 「조선 8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에서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 천주교는 제사를 조상 공경의 미풍양속으로 이해하고, 조상에게 절하는 것을 효(孝)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개신교가 죽은 이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상(고인)의 사진이나 이름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죽은 이를 추모하는 행위이기에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례 예식에서 유교의 조상 숭배를 연상시키는 ‘신위’(神位), ‘신주’(神主), ‘위패’(位牌), ‘지방’(紙榜)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개신교 신자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을 때, 이러한 개신교 전통을 존중하여 절을 하지 않고 짧게 고개를 숙여 기도를 바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31) 천주교 성직 제도와 개신교 목회직은 서로 다른가요?
신부님과 목사님은 어떤 점이 닮았을까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마태 16,18 참조), 그를 머리로 하는 열두 제자의 사도단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신앙 공동체로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12, 13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말미암은 죄책감과 부귀영화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에 대한 회의가 교회 안에 커졌습니다. 그 결과 종교 체제로서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신비로운 직접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황청과 일부 수도원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들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연속선상에서 마르틴 루터는 성직 제도를 지닌 제도 교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교회 쇄신을 위하여 교황 제도와 함께 성직주의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가톨릭의 교계 제도를 비판하면서, ‘만인 제사장’ 또는 ‘만인 사제설’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만인 사제설’이란 누구나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직접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을 일으켰고, 20세기 초까지도 가톨릭교회는 교황권을 강조하며 성품을 받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교계 제도를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는 교계 제도를 부정하며 성령을 받은 신자 공동체라는 영적 교회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대립된 해석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일치 운동을 촉발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교회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결합된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백하며,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를 인정합니다. 이는 교계 사제직과 그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각기 고유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10항 참조)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처럼 서품을 통하여 주교직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고, 장로들이 중심이 된 회중교회의 형태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개신교 목사는 천주교처럼 성사적인 서품을 받지는 않고 합당한 자격을 가진 이가 기도와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교역(敎役)을 수행합니다.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의 사목자는 직무 수행에 앞서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세상에 봉사하는 직무로 부름 받았다는 점을 기억하고 함께 협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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