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문화혁명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 다 같이 잘 산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백성들을 기망하여 결국에는 당 간부들만 군림하고 살아가는 철저한 독재주의가 아닌가 하는 상식적 수준 정도이다. 그래서 박식한 가이드에게 문화혁명이 무어냐고 물어보았다. 자본주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파괴하고 근원이 되는 것을 부수고 잡아 죽이는 일종의 내란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식인들이 수난을 당했고 학교가 불타고 그래서 역사가 십년쯤 퇴보하는 기가 막힌 무식한 행동이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가? 모택동이 너무 늙어 통치능력이 떨어지게 되자 권력을 넘보고 충성을 한답시고 4인방이 주축이 되어 권력승계위장용으로 전국을 휩쓸었던 무화혁명은 4인방의 전격적 구속과 함께 끝이 났다고 하는 이때 지식층에 속한 자기도 농촌에 들어가 3년간이나 노동을 하며 은신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소수민족들의 수난은 필연적이고 조국에서 못 사는 슬픔은 원통하기만 하다고 했다. 강청(江靑), 왕홍문(王洪文),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등의 4인방은 당시 제1부주석인 화국봉과 군부 실력자 엽검영 등에게 체포되어 권력 승계의 음모는 끝장나고 문화혁명도 끝났다고 한다.
공산주의식 농사짓는 방법에 대하여 들어보았다. 어느 지방 누구는 무슨 곡식을 얼마만큼만 심으라고 까지 지정을 해주는데, 예를 들면 배추 4포기 담배 5포기라고 했는데 몰래 한포기만 더 심어도 검사하여 뽑아버린다고 하며 그 사람은 당장 비판을 받는다고 한다. 자본주의 꼬리자르기라는 명칭을 붙여 야밤에 갑자기 소집을 하여 밭으로 가서 확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날로 불어나고 증산 의욕은 떨어지고 가난하여 굶주리게 된다는 것이 당연하여 심각한 사태에 이르자 방법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천성에서 조자양이 시범적으로 실시해본 농사방법이란 일정한 땅을 개인에게 빌려주고 아무것이나 심어서 몇 %만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다 갖도록 해보았더니 당장에 먹고 남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등소평이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여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전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
어둠이 걷히는가? 차창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계는 현지시간으로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자리에서들 하나 둘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밤새 비가 많이 내렸는지 흙탕물들이 여기저기 고여 있는가 하면 모여서 흐르고 있었다. 끝없이 전개되는 나무숲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듯한 푸른 들판이 망망대해를 이루고 있었다. 2시간정도 달린 후 집들이 보였다. 도시 같은 모습이었다. 아, 도시다 드디어 목적지 연길에 온 것인가? 10시간 걸린다했는데 지금이 그 시간이다. 내려야겠다는 바쁜 마음이었으나 가이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점차 줄여가던 기차가 멈추었다. 역사(驛舍)가 보였고 우리60년대 초 시골역 같았다.
돈화(敦化)라는 곳이었다. 아직도 두 시간은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연착을 한 것이다. 지도를 펴서 확인해보니 아직도 10여개의 역을 더 지나야 연길이 나오게 되어있었다. 덜크덩 덜크덩 철석철석 30년 전 시골 기차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연길(延吉) 시에 도착하여
열 두 시간의 지루한 기차여행을 끝나는 아침 8시경이었다. 우리 교포들인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연길 시에 내린 것이다. 우산을 받쳐 들고 역전광장을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본 나는 거대광장에 즐비한 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백산호텔로 안내되어 맞은편에 가장 멋지고 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 건물은 우리로 말하면 도청이나 시청 같은 것이라고 했다. 1992,7,30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을 통틀어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우리 ‘한국사람’ ‘한국사람’ 했는데 며칠 후 부터는 자연스럽게 우리 입에서도 ‘조선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한반도 면적의 약44배인 중국을 이루고 있는 13억 인구는 한족(漢族)이 92%이고 8%가 55개 소수민족이라고 하는데 8%(약1억)안에 있는 우리 조선족은 약 250만 명이라고 하니까 해외교포가 가장 많은 곳은 중국이다.(현재는 미국이 300만으로 가장 많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23개성,3개 직할시와 5개 자치주로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도 성(省)과 동등한 행정단위라고 한다. 조선족은 55개 소수민족중 수가 많기로는 10위 이내이고 5개의 자치주 인정 안에 들며 대학입시 때 보면 타민족보다 3배정도의 우월성을 나타내므로 단연 우수한 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고 자기네의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는 7~8개 소수민족중의 하나로 우수한 한글 문자를 가지고 사는 긍지가 대단하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는 연변 연길시를 중심으로 돈화(敦化),연길(延吉),용정(龍井),도문(道門),훈춘(薰春)의 5개시와 3개현으로 인구 82만 명과 면적은 한반도의 5분의 1쯤 되며 중국정부에서 자치주로 인정받아 대부분의 자치권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에 발전 속도가 빠르고 소수민족으로서의 긍지도 대단하다고 한다.
연변 자치주의 중심지는 연길 시이고 자치위원회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도 연길 시에 있다. 25만 인구의연길시는 56%가 조선족이며 어디를 가나 우리말과 글이 잘 통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왜 남의 나라인가? 하는 의아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시에 비해 건설 붐이 활발했고 시민들의 표정이 밝고 씩씩하며 활기가 느껴졌다.
8시 30분경 백산호텔에서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출발해야한다고 하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방문 용정중학교를 거쳐 백두산 입구 천지호텔까지 가야한다 했다. 날씨가 비온 뒤라 그런지 흐리고 가끔씩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우산은 계속 들고 다녔고 길은 질컥거렸다. 6,1유치원을 방문하였다. 시범유치원이라고 하는 이곳은 직원이 60명이라고 하고 아이들은 360명이라고 하였다.
직장에 나가는 가정의 애들이 대부분이며 유치원에 내는 납부금은 정부와 부모가 반반씩 부담한다고 했다. 음악실에서는 귀여운 꼬마들이 손풍금을 켜고 있다가 우리가 사진을 찍자 귀엽게들 웃어보였다. 다음은 연길시 중앙 소학교를 방문하였다. 학생수가2500명으로 연길 시에서는 가장 크고 조선족의 대표적인 학교인 것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니 우리식으로 환경정리가 되어있었는데 모두가 한글로 씌어있어서 친근감이 더했고 가끔씩은 한자도 섞여있었다.
가장 중요한 위치에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맑스와 레닌의 초상화도 옆에 걸려있었다. 문자는 우리 한글이고 사람은 남의 나라 인물, 기분이 좀 묘했다. 중국의 학제는 소학교 6년, 초중3년, 고중3년, 대학4년(일반대학), 의과대학5년, 연구생(대학원)2년이라고 하니 우리와 거의 비슷했다. 조선족들은 대학입시 국어과목에 우리 국어를 보기 때문에 거의 만점을 받고 들어간다고 했다.
해란강과 일송정 : 연길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20km쯤 가면 용정이 나온다. 시골길을 한참 달리는데 비온뒤의약간 흐린 안개가 넓은 들판에 깔리고 있었고 길게 흰 물줄기가 보였다. 누군가가 저게 해란 강이라고 소리쳤다. 선구자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해란강인 것이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사진기를 창문 가까이 갖다 대고 찍어보았으나 차가 뛰고 요리조리 가로수가 가려서 찍을 수가 없었다.
차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넓고 길고 푸른 들판으로 이어지는 해란강과 일송정은 잘 어우러져 시가 나올만하였고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하늘 끝에 안개비가 자욱하고 흐린 날씨는 더욱더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하였다. 차에서 잠시 몇 사람이 내려 200여m 잘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 사진들을 찍고 왔다.
제법 번화한 거리로 들어서니 이곳이 용정이라고 했다. 용정중학교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인물을 많이 배출한 용정중학교(옛, 大成中學校)는 교문 우측 바로 인접한곳에 구 건물을 보전하여 유물 전시관으로 꾸며놓았으며 깊숙이 안쪽에 새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구 교사인 전시관에 들어가 보니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사진과 설명이 전시되어있었고, 일행은 민족시인 윤동주 옆에서 사진 찍기 바빴다.
윤동주 시인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놈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다가 끝내 거절하자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나오는 길에 용두레 우물이 있는 곳에 잠깐 내려 사진들을 찍었다. 저마다 사진기 하나씩을 들고 제 모습을 서로 찍으려하니 사진기 많은 것도 참 복잡하였다.
날씨 때문에 모두들 걱정을 하였다. 이 고생을 하고 가봐야 천지를 못 보면 모두가 헛일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날씨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라고 아무 걱정 없습니다. 했다. 이유인즉 천지의 날씨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고 주변의 날씨가 좋아도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는 등 변덕이 심하니 운에 맞기고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절대로 날씨 걱정은 말자고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들놀이를 가거나 여름, 겨울야영 갈 때마다 비 온다던 일기예보가 있다가도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