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길 모퉁이 돌아 좌측 골목길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기다란 남새밭이 있다. 밭고랑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경고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농작물에 손대지 마시오,
누가 가져갔는지 다 알아요.
-스님 백
눈을 크게 뜨고 이쪽저쪽 사방을 둘러본다. 그 흔한 CCT도 하나 없고 망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농작물을 몰래 뜯어간 사람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합판 위에 갈겨 쓴 흘림체 글씨가 왠지 익살스럽다.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자란 오이와 토마토를 따 먹고 싶은 도심(盜心)이 발작을 해도 경고판을 보면 선뜻 손이 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스님 백〉이라고 써 놓았으니, 마치 대웅전 부처님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경각심을 느낀다. 스님도 아마 이런 심리를 간파하고 이렇게 웃기는 팻말을 세웠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파트 근처에 ‘불국정사’라는 범어사의 말사가 하나 있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남새밭이 담벼락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고 끝나는 지점에 절이 보인다. 상추, 고추, 오이, 토마토가 담벼락 햇볕을 쪼이며 먹음직스럽게 자라고 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딸 수가 있는 지척이지만 스님에게는 주식과도 같은 귀한 작물인데 차마 손이 가지 않는다. 부처님께 시주는 못 할망정 당신께 올릴 찬거리를 훔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이 몰래 작물을 뜯어가는가 보다. 오죽하면 기상천외한 경고장까지 써 놓았겠는가.
불현듯이 바보 시리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 산골 마을에 칠덕이와 팔덕이가 살았었다. 어느 날 칠덕이가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금덩어리를 발견하고는 땅속에 묻어놓고 팻말을 써 놓는다. 〈여기에 금덩어리가 없음〉이라고, 며칠 후에 팔덕이가 나무하러 갔다가 이 팻말을 보고 금덩어리를 가져가 버린다. 그리고는 팻말을 남긴다.〈팔덕이는 금덩어리를 가져가지 않았음〉이라고. 뒤늦게 금덩어리가 없어진 걸 알게 된 칠덕이는 이장 집을 찾아가 금덩어리를 찾아 달라고 애원을 한다. 이장은 칠덕이를 어여삐 여기고 방송을 한다. “동민 여러분, 금덩어리 도둑을 잡아야 합니다. 오는 저녁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모이시오. 팔덕이는 빼고.” ㅎ ㅎ ㅎ. 누가 더 바보일까? 칠덕이일까 팔덕이일까 아니면 반장일까? 많이 웃었다. 스님의 익살스런 경고판이 오버랩 된다. 스님도 칠덕이 아니면 팔덕이가 아닐런지.
산책 나가는 길에 불국정사를 들렀다. 스님은 출타중이고 중년 보살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따뜻한 백설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어떻게 농작물을 훔쳐 간 사람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순간 그 옛날 재미있게 보았던 연속극 〈궁예〉의 관심법이 떠올랐다. 혹여 스님께서도 궁예의 관심법을 쓰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후고구려, 태봉의 시조 에꾸눈 궁예는 관심법으로 정적을 제거했다. 심지어 왕비 강씨를 증거도 없이 간통죄로 몰아 죽이고 두 아들마저 죽인다. 궁예의 관심법은 일종의 독심술이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이 오직 독심술 하나만을 믿고 군신(軍臣)을 반란죄로 몰아 단죄하고 숙청했다.
궁예의 신하 중에는 왕건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건을 따르는 추종세력이 불어났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궁예가 관심법으로 왕건을 처단하려 했으나 왕건 부하의 기지로 죽임을 면한다. 이윽고 왕건이 세를 몰아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국가 ‘고려’를 탄생시킨다. 훗날 궁에는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다. 관심법의 종말이다.
고대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근세를 반추해 보면 궁예의 관심법 같은 치세(治世)가 없었는지 눈여겨 볼일이다. ‘백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범죄자를 만들지 말라.’하는 법문이 있다. 만에 하나 스님께서도 궁예의 관심법 같은 독심술로 무고한 행인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사 누군가가 빨갛게 익어가는 토마토를 한 두알 따 먹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하늘 같은 자비심을 베풀기를 충심으로 합장(合掌)한다. 그리고 팻말도 다음과 같이 바꾸기를 권고한다.
불국정사 남새밭 야채를 뜯어 가시오.
누가 뜯어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스님 백
스님, 이렇게 자비로운 팻말로 바꾸시면 오가는 길에 법당을 찾아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선한 관심과 자비는 성불로 가는 길이니까요,
첫댓글 곽 작가님, 참으로 글을 재미있게 쓰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제 마음이 넉넉해 졌습니다.
작가님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드립니다. 더위에 몸 조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