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바람
열어놓은 문들이 없다 여름인데 집들은 열리지 않은 문들로 꼭꼭
닫혀있다 산에서 내려온 바람은 닫힌 문들 앞에서 갈 길을 잃는다 닫힌 문들의 안쪽에서는 어김없이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다 어쩌다 닫지 않은
창문이라도 있을까 싶어 바람은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지만 스며들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문들이라곤 죄다 꼭꼭 닫혀있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바람의 온몸에는 이내 비지땀이 흐른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지만 일단 땀으로 끈적끈적한 몸부터 씻어야겠다 지친 바람은 바다로 간다
문들로부터 냉대받고 갈 데 없어 모여든 바람들로 바다는 시끌벅적하다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바다로 모여든 바람들은 저마다
핏대를 올리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뜨거운 여름마다 열어놓은 문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한 시원함을 사람들은 이제 잊었단 말인가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큰 바람이 되어 닫힌 문들을 열어제치러 가자 바다에서 시작된 분노에 찬 함성이 마을까지 들려온다 사내는
문을 열어 하늘을 바라다본다 태풍이 불어온다 슈퍼 싸이클론이 다가온다 초대형 허리케인이 몰려온다 그러나 사내는 문을 닫지 않기로 한다 여름인
것이다
<시작 노트>
여름은 열어놓는 계절이다.
에어컨을 끄고 모든 문을 열어놓자.
바람이 잘 통하도록 대문과 방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놓자.
열린 문들을 통해서 들어온 바람을 부채로 잘 대접해서
보내자.
숨이 잘 통하도록 코와 입도 열어놓고 가끔씩은
항문까지도
열어놓자.
바다에서 다가오는 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방귀를 뀌는 것*이니 말이다.^^
* '방귀를 뀌다'를 영어로는 'break wind'라고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