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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합운동으로의 전환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1928.5가 협의회파와 촉성회파로 양분되자 양 파는 각자 유일당 조직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협의회파의 중심세력인 정의부는 촉성회파에 앞서서 유일당을 조직하려는 목적에서 1928년 7월중에 참의부와 신민부에 제1차 3부 통일회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먼저 기존의 유력단체인 3부만이라도 통일을 도모하여 유일당 조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제안에는 정의부가 재만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었다. 정의부의 제안에 따라 참의부는 8월 중 김희산김승학·김소하장기초·김강 등 3명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신민부는 3부 통일회의 개최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였으나 대표 파견문제로 군정파와 민정파가 대립하여 각기 자 파의 대표권을 주장함으로써 파견대표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군정·민정 양파의 대립으로 신민부가 대표를 결정하지 못하자, 정의부와 참의부는 이백파를 신민부에 파견하여 대표문제를 교섭하게 했다. 이와 함께 이일심李一心과 이범석을 길림으로 초청하여 신민부의 사정을 문의하는 등 3부 통일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일심과 이범석이 군정파에 유리한 진술을 하게 되자 신민부 민정파는 자파의 대표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소속 구성원 300명과 함께 정의부 다수파가 주도하는 협의회에 가담하겠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한 군정파도 김좌진이 신민부의 대표로 3부 통일회의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정의부에 통지하였다. 이에 따라 정의부는 참의부와 정식회의를 열고 신민부의 대표자격을 심사하여 3부 통일회의의 신민부 대표권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정의부의 이와 같은 자격심사 결정을 김좌진이 거부하여 3부 통일회의가 결렬되었다. 더욱이 1928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정의부의 제5회 중앙의회가 길림현 동경수하자東坰水河子에서 개최되었으나, 민족유일당 조직문제에 대한 이견 대립으로 중앙집행위원인 지청천·이종건李鍾乾·최명수崔明洙·김원식·이규동·김상덕·김동삼 등이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정의부가 유일당 조직문제에 대하여 협의회를 지지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촉성회파를 지지하던 지청천 등 8명의 중앙집행위원이 탈퇴한 것이다. 지청천은 1928년 5월의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에서도 “혁명관을 달리하기 때문에 협의회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자신하고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여 협의회파에 대해 반대의사를 명백히 표명하였다. 그러나 3부만이라도 통합을 추진하려는 정의부의 노력과 친일단체의 박멸과 일제에 대한 조직적인 대항 등의 과제가 부상하면서 재만 한인사회의 민족유일당 출현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점증하였다. 이에 정의부의 제안으로 1928년 9월 하순부터 길림현 신안둔新安屯에서 제2차 3부 통일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참석한 3부의 대표는 다음과 같다.
정의부 : 김동삼·현익철·최동오·김이대·김원식
신민부 : 김좌진·김종진·김돈·이연·송상하·여호림·황학수
참의부 : 심용준·김소하·임병무
제2차 3부 통일회의는 11월 초까지 재만동포의 자치문제와 민족유일당 조직 등을 위해 당파를 초월하여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유일당 조직방법론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 본 회의는 개최하지도 못한 채 결렬되었다. 민족유일당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단체본위 조직론’을 주장했던 정의부측은 참의부 및 신민부와 가진 회의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계속하였다. 물론 참의부와 신민부 대표들의 의견이 정의부와 같을 수는 없었다. 이들 두 단체도 정의부와 마찬가지로 남만주와 북만주에서 군정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긴 했지만 관할 호수나 영역 등 세력은 정의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부의 주장대로 단체본위 조직론으로 3부가 통합되면 통합기관의 주도권이 정의부로 넘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참의부와 신민부 대표들은 정의부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① 신민부·참의부·정의부를 완전히 해체할 것.
② 과정의 조직으로서 잠시 그 잔무를 정리 청산할 것.
③ 촉성회 대 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하고 전만全滿일반의 대당大黨주비 籌備를 실현할 것.
④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을 획득할 것. 참의부와 신 민부의 의견은 기존의 단체를 동시에 모두 해체하고 구성원 의 요소를 개인으로 하여 민족의 대당을 조직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그동안 민족유일당 운동과정에서 제기된 촉성회파의 주장을 반복한 것이었다. 결국 두 단체의 주장은 정의부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어서 3부 통합운동은 이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조건에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더욱이 이러한 의견이 개진되고 정식으로 대표회의가 개최되기도 전에 회의에 참여한 참의부와 신민부에서 참석한 대표들에 대해 소속단체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3부 통합운동의 양상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신민부에서는 이른바 대표권 항쟁문제가 발생하였고, 참의부에서도 대표 소환문제가 일어났다. 대표권 항쟁문제는 신민부 분열의 결과로 형성된 민정파와 군정파 사이의 대립에서 출발하였다. 신민부는 1927년 3월 일본경찰과 이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 1개 중대의 습격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인 김혁과 경리부위원장 유정근 및 본부 직원 여러 명이 체포되는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 뒤 신민부 내부에는 향후 투쟁노선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을 비롯하여 황학수·정신·백종렬白鍾烈·오상세吳祥世·김종진金宗鎭 등은 큰 희생을 계기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 김좌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민사부 위원장인 최호를 비롯하여 김돈·이일세·문우천·독고악·최학문 등은 이번 기회에 신민부의 노선을 교육과 산업에 최우선을 두고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신민부 내부의 갈등은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절정에 달하여 결국 군정파와 민정파의 두 세력으로 사실상 분립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각기 자신들만이 신민부의 정통세력임을 주장하며 군정파는 영안현寧安縣 밀강密江 신안진新安鎭에, 민정파는 동빈현同賓縣 소량자하小亮子河 농평農坪에 본부를 두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부 통합회의에 참여한 신민부 대표 김돈은 민정파에 속하는 인물이었기이었기 때문에 군정파는 김돈의 대표성을 부인하며 통일회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군정파의 문제제기에 의해 총체적인 대표권을 인정받지 못한 대표가 참석한 통합회의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정의부는 ① 대표문제를 무조건 타협할 것, ② 타협이 불가능할 때에는 쌍방이 함께 출석할 것, ③ 위 두 항을 실행하기 곤란할 때에는 심사기관에서 정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타협안을 마련하여 신민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註142) 이에 대하여 신민부 민정파는 ①과 ②항에는 반대하지만 ③항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군정파는 정의부가 제시한 타협안 전부를 반대하여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의 한 정보보고는 3부 통합운동 실패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관찰하고 있다. 협의회파의 중핵인 정의부는 유일당 조직의 계제階梯로서 기성 유력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통일을 꾀하고 나아가 촉성회파에 앞서 유일당의 완성을 기하여 자파에 의한 재만 운동단체의 영도권 장악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7월중 참의부와 신민부에 대하여 3부 통일회의 개최를 제의하고 대표의 참가를 권유했는데, 이에 대하여 참의부는 응락하고 8월중 김희산, 김소하, 김강 등을 대표로 파견했지만, 신민부는 정의부의 제의에는 응하면서도 신민부 내의 군정파 대 민정파의 내홍으로 인하여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정의부와 참의부의 양 부에서는 이백파李白波를 신민부로 보내 교섭한 바 있었는데, 끝내 신민부의 군정파와 민정파는 다같이 대표권 문제를 가지고 각기 자파에게 대표권이 있음을 주장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표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정의부와 참의부는 신민부의 내홍이 3부 통일의 화근임을 알고 신민부의 내정에 밝은 이일심李一心, 대구인, 이범석을 길림에 초청하여 내정을 청취했던바 양인은 군정파에 유리한 진술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민부의 민정파는 사태가 자파에 불리함을 깨닫고 궁여지책으로서 자파의 대표권을 인정한다면 당원 300명을 이끌고 무조건 정의부가 지지하는 협의회파를 지지하겠다는 조건을 내놓았다. 한편 신민부의 군정파 김좌진 등은 10월 초 길림에 도래하여 신민부 대표로서 3부 통일회의에 출석하겠다는 통보를 정의부에 보냈다. 정의부측은 순리대 로 말하면 군정파의 대표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민정파의 조건 제시가 정의부로서는 중대한 이해관계로 되기 때문에 참의부와 협의하여 신민부의 대표권 문제를 결정하겠노라고 했다. 즉 정의부와 참의부의 정식회의를 열고 거기서 신민부의 군정파·민정파의 자격을 심사하여 3부 통일회의의 신민부 대표권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자 김좌진은 누가 누구를 자격 심사한다는 것이냐고 크게 분노하여 이를 거절하였다.이와 같이 되어 정의부는 점차 괴로운 경지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8월 하순에 개최된 제5회 중앙의회에서는 유일당 조직문제에 있어서 촉성회파로 넘어가버린 이청천·김원식·김상덕·김동삼 등이 드디어 위원의 직무포기를 성명하고 사실상 정의부를 탈퇴하게 됨으로써 3부 통일회의의 전도는 암담하게 되었다. 신민부의 군정파 대 민정파의 암투 및 참의부의 내홍 등은 더욱 심해졌는데 참의부는 신민부의 김좌진파에 접근하려는 태도로 나와 3부 통일의 정식 대표회의는 도저히 가망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의부가 주도한 3부 통합회의에는 참의부 대표에게 제기된 대표 소환문제도 있었다. 이것은 참의부 본부에서 제기한 것인데, 회의에 참석한 참의부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김소하金蓧厦는 반동 적탐敵探이니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 집행의 권한을 정의부에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참의부 본부는 김소하와는 별도로 통합회의에 참가한 다른 대표들에게는 본부로 소환명령을 내림으로써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참의부로부터 김소하 ‘처분권’을 위임받은 정의부는 참의부 내분사태의 진위를 가리고자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김승학김희산에게 질의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승학은 오히려 본부에 있는 자들이 김소하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소하는 자진하여 대표권 을 포기하였다. 김소하의 의사표명이 있고 나서 3부의 대표들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참의부 대표들과 회의를 속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참의부측의 대표 소환문제는 정돈되었다. 그러나 신민부의 대표권 항쟁문제는 여러 안이 제기되었지만 결국 해결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정의부는 협의회파를, 참의부와 신민부는 촉성회파를 지지하여 서로 대립하다가 이를 극복하고 우선 민족주의 기관 3부만이라도 통합을 달성하기 위해 개최하려 했던 통합회의마저 결렬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의부는 3부 대표를 초월한 ‘재길운동자간담회在吉運動者懇談會’를 개최하여 3부 통일회의의 지속과 내분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간담회 역시 신민부의 대표권 자격문제와 함께, 신민부·참의부가 정의부의 만주 독립운동 단체 장악기도에 대해 반발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 11월 초 3부의 대표들은 통합회의가 결렬되었음을 선언한 뒤 해산하였다.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
1927년 초부터 본격화된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3부 통합운동에까지 이르렀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1928년 5월 화전현과 반석현을 오가며 개최된 회의의 결과로 단체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와 개인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 두 그룹으로 갈라지는 결과를 초래하 였다.
민족유일당 결성운동과 3부 통일회의 등 일련의 통일운동이 결렬된 뒤 만주의 민족운동자들은 두 그룹을 중심으로 헤쳐모이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속해 있던 기관과 단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두 그룹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속단체를 부인하고 개인별로 가담하여 중앙집권적 체제의 민족유일당을 만들기를 원하는 인사들은 촉성회에 가담하였고, 기존의 소속단체를 유지하며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를 원하는 인사들은 협의회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도 두 계열로 갈라지면서 기존의 단체가 완전히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와 촉성회 측의 주장대로 개인이 단위가 되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분쟁이 3부 통일회의를 결렬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러한 내분은 통일회의가 결렬된 뒤에도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화되었다. 예컨데 3부 통일회의가 결렬되었다는 통고가 있기 전인 1928년 10월 20일 빈주에서는 신민부 관할의 한인 4, 50명이 회합하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한인의 자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는데,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가 이 회의를 민정파가 자신들을 음해하기 위해 주최한 비밀회의로 오해하여 회의 주최자인 황혁黃赫 등 여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한인동포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註146) 이에 민정파 지지세력은 같은해 11월 하순 영안현에서 북만주민대회를 개최하고 군정파의 행위를 성토하였다. 3부 통일회의 이전부터 싹텄던 내부의 갈등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정의부도 1928년 5월 민족유일당 준비회의가 개최되면서 협의회파와 촉성회파로 나뉘어졌다. 이후 정의부는 두파의 분열이 심화되어 완전히 대립적인 관계가 되었다. 촉성회파를 지지하는 김동삼·이종건李鍾乾·김상덕金尙德 등은 정의부 협의회파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1928년 11월 중순 반석현에서 민족유일당 명의로 동맹규약을 발표하고 동맹원의 모집에 착수했다. 계속해서 이들은 같은해 12월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박근식朴根植·김만전金萬全·손일무孫一武·손호의孫好儀 등과 한교동향회·고려동향회 등을 조직하여 반석현과 화전현 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으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협의회파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촉성회파 지지자들을 반동분자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의부 내부의 분열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925년 후반에 이미 상해임시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간에 서로를 불신하고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정의부 내 이 두 최고기관의 대립의 결과로 1926년 1월에 성립된 군민대표회 이후부터 간부들 사이에서는 민정과 군정 중 어느 활동에 방향을 더 치중하느냐 하는 문제로 갈등이 야기되었다. 참의부의 내분도 민족유일당 결성의 방법론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정의부나 신민부와 마찬가지로 참의부도 재만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사실상의 군정부였다. 성립 초기에 참의부는 3부 가운데 무장투쟁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참의부는 일제 무장대의 주된 공격대상이 되었으며 1925년 2월 27일에는 집안현 고마령에서 참의장 최석순 이하 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도중에 일제 초산경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수가 전사하는 등 극심한 피해 를 입었다. 불시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받은 참의부는 그 원인이 2중대장 홍석호洪碩浩가 일제에 밀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서로간에 살상까지 하는 분란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925년 6월 중·일간에 「삼시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지금까지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참의부가 특히 표적이 되어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참의부 내부에 자치활동을 강화하면서 점진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치활동의 강화를 주장하는 세력과 무장활동 위주의 노선을 고수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요컨대 참의부 또한 심각한 내부적 갈등의 상황에서 3부 통일회의에 참가했던 것이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분열만 노골화되었던 것이다. 참의부는 이러한 분열로 마침내 일부가 3부 통합회의가 결렬되었다는 발표가 있기도 전인 1928년 10월 기존의 재만 친일파들과 협력하여 친일단체인 선민부鮮民府를 조직하여 이탈하는 사태까지 생겨났다. 이처럼 참의부와 정의부·신민부는 통합회의가 있기 전에 분열되어 있었고 이것이 민족유일당운동에 이어 3부 통일회의마저 결렬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같은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분열의 소지는 언제든 잠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자치활동 혹은 무장투쟁 위주의 주장과 노선은 사회주의 세력의 전략과도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물론 3부의 구성원 모두가 자치 혹은 무장투쟁 중심의 활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협의회파 혹은 촉성회파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협의회파와 촉성회파는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방법의 차이 때문에 구분된 것이지 민족유일당을 조직한 뒤의 노선까지를 표명한 것으 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결과 1928년 12월 하순 정의부의 인사들 중 촉성회를 지지하는 측과 신민부의 군정파 및 참의부의 일부가 연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註149) 혁신의회는 정식의 통합기관이 설립되기 전까지 1년 이내로 운영될 과도적인 임시기관이었다. 과도적 기관이기는 했으나, 이 혁신의회는 업무를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중앙의 집행기관을 구성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에 김원식을 선임하였고, 위원에는 김승학·지청천·정신 등을 선출하였다. 혁신의회의 주요 업무는 ① 대당大黨 촉성의 적극적 방조, ② 군사후원 및 적세 침입 방지, ③ 합법적 중국 지방자치기관동향회 조직, ④ 잔무정리 등이었다.
혁신의회의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 김원식 군정 정리위원 : 황몽호황학수
민정 정리위원 : 김승학 재정 정리위원 : 김동삼
제1분회 군정 정리위원 :박창식 제1분회 민정 정리위원 : 이영희
제1분회 재정 정리위원 : 박희빈
제2분회 군정 정리위원 : 지청천 제2분회 민정 정리위원 : 이광민
제2분회 재정 정리위원 : 이관일
제3분회 군정 정리위원 : 委某 제3분회 민정 정리위원 : 朴某
제3분회 재정 정리위원 : 정윤
혁신의회가 첫번째 과제로 내세운 “대당 촉성의 적극적 방조”란 유일당 촉성을 뜻한다. 혁신의회는 이의 실현을 위해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를 조직하였다. 혁신의회는 1928년 5월 중순에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회의에서 협의회파와 촉성회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지켰던 인사들이 조직한 기성회와 통합하여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책진회를 조직하였다. 책진회는 혁신의회의 이면기관 역할을 하면서 민족유일당의 촉성을 위한 조직체였다. 이 책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동삼, 중앙집행위원에는 김좌진·전성호全盛鎬 등이었고 다음과 같은 활동방침을 정하였다.
① 일반 구성분자를 책려하여 당의 집성토대에 분투시킬 것.
② 조선의 혁명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여 운동의 내재적 모순을 정리하고 대당大黨촉성의 준비 에 노력할 것.
③ 대당이 아직 성립하기 전 과도기에 있어서 악독한 마수의 침입을 방 지하는 한편 소위 만몽 침략 적극정책을 배제할 것.
두번째 과제는 “군사후원 및 적세침입敵勢侵入 방지”였다. 3·1운동 직후부터 독립전쟁론이 대두되어 만주지역에 삼둔자·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격렬한 독립전쟁이 벌어져 한국독립군이 잇달아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이 만주지역에 직접 출병하여 간도사변을 일으키고 수천 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등 잔인무도한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또한 1925년에는 만주의 군벌정권과 「삼시협정」을 맺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 실패하자 1927년경엔 일본영사관 경찰과 밀정을 동원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재편성을 와해하려는 공작을 꾀했다. 이에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제의 공작을 분쇄하기 위해 무장투쟁으로 적극 대응하는 한편 밀정을 색출해 처단하기도 했는데, 혁신의회도 이러한 활동에 주력하고자 했다. 세 번째 과제는 만주의 관할지역에서 합법적인 지방자치기관동향회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재만한인사회에 바탕을 둔 것이며, 1920년대에 활발했던 독립전쟁 역시 한인사회의 인적·물적인 지원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50여 개를 헤아리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5년에 이르러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개 단체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 세 단체는 사실상 자치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3부는 재만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되었고 이 지역들은 주로 농촌이었으며 재만한인들은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농촌지역은 바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근거지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자치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장기적인 독립운동 전략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네번째 과제는 ‘잔무정리’였다. 혁신의회는 정의부의 탈퇴파라 할 수 있는 김동삼과 지청천, 신민부의 군정파, 참의부의 주류파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속했던 단체로 돌아가서 새로이 혁신의회의 행정·관할구역으로 설정된 지역들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같은 활동은 잔무정리라기보다 오히려 혁신의회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혁신의회는 자신들의 관할·통치구역을 잠정적으로 설정하기로 하여 남일구南一區·중일구中一區·북일구北一區 등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남일구는 참의부가 통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참의부 대표로 혁신의회에 참여한 김승학과 관련이 있었고, 중일구는 정의부의 행정구역으로 이것 또한 정의부 대표인 김동삼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일구는 신민부의 대표인 김좌진과 황학수 등이 혁신의회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민부의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본래 혁신의회는 1년을 기한으로 하는 과도적인 단체로서 그후에는 이를 토대로 군정부를 설립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가 결성되었으며 계획대로라면 1929년 5월 이전에 군정부가 출범해야 했다. 그런데 길림지역에서 정의부가 주축이 된 협의회파가 신민부 민정파와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국민부를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는 바람에 혁신의회는 행정구역을 중일구라고 했으나 사실상 길림지역에서는 국민부의 세력에 밀려 새로운 군정부의 성립이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신의회는 1929년 5월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의해 1년 만기가 되어 해체를 선언하고 책진회를 중심으로 군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만주 각지에서 모였던 책진회의 간부들은 오랜 기간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김좌진과 김종진 등은 북만주로, 지청천은 오상현으로, 김희산과 박희곤·이백파 등은 남만주로 돌아가고 나머지 일부는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즉 혁신의회 의장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었고, 김승학과 박창식·김소하 등도 통화현에서 중·일 경찰에 체포되어 김동삼은 10년, 김소하는 15년, 김승학은 5년, 박창식은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러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던 북만주 위하현 시가지주요 간부들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역시 혁신의회에 이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후 신민부 군정파인 김좌진은 정신鄭信·민무閔武 등과 함께 북만주 중동선 일대에 근거지를 정하고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였다. 1930년 1월 한족총연합회를 이끌던 김좌진이 암살을 당하여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정신 등은 연합회의 명칭을 한족자치연합회로 바꾸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1930년 7월 홍진·지청천·민무·안훈조경한·황학수·신숙·이장녕 등은 이들 한족자치연합회와 생육사를 기반으로 한국독립당과 소속 당군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의 활동과 국민부의 성립
촉성회파의 주도로 혁신의회가 조직되자 3부가 주도해 온 만주지역 한
인 민족운동의 구도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혁신의회에 가담하지 않고 3부에 잔류한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들도 새로운 통합체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일을 가장 주도적으로 한 것은 정의부 측 다수파였다. 정의부는 민족유일당 준비회의 뒤인 1928년 8월 24일부터 개최된 제5회 중앙의회에서 이미 단체의 명의로 협의회파를 지지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협의회파를 지지한 세력은 정의부 주도세력과 신민부의 민정파, 참의부에서는 심용준沈龍俊·최재경崔在京·이영희李永熙·박대호朴大浩 등이 통솔하는 그룹이었다.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심용준계의 ‘협의회’파 인사들은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에 대응하여 1928년 9일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하고 통일된 자치정부와 유일당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현정경·김이대·고활신·신일용·송상하·독고악 등 10여 명의 동맹원들은 1929년 1월 26일부터 2월 5일까지 길림에 모여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임원을 개선하고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였으며, 주요 당면정책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대표로 현익철과 김이대를 선출하고, 주석단으로 고활신·김이대·황기룡김찬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8개의 집행부서를 설치하여 정치부 현정경, 조직부 김이대, 선전부 신일용, 군사부 이기덕, 노농부 최지문, 청년부 및 부인부 황기룡, 경리부 고활신 등으로 간부위원을 임명했다. 이와 함께 북만주 및 동만주에 있는 고려국민당과 남만주에 있는 다물당을 해체하고 소속 당원들을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서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에 황기룡과 신일용 등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간부로 선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註158) 이 때문에 이 조직은 일부 공산주의 색채를 띠는 강령을 채택하고 노농운동·청년운동·부녀운동 등 대중적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부문운동을 강화하기로 하는 등 이 시기에 공산주의 세력에서 취하고 있던 대중획득 방식과 유사한 방침을 취했다. 이 조직이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한 뒤 당과 국민부·조선혁명군의 진로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던 것도 이러한 지도부의 구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29년 1월 26일 개정·결의된 「민족유일당 조직동맹 규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동맹원
제1조 : 본 동맹원은 만 18세 이상의 남녀로서 본 동맹의 강령을 승인하 고 규약을 준수하며, 본 동맹의 결의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함.
제2조 : 본 동맹원은 맹원 2인의 보증으로써 이력서를 첨부하여 가맹원 을 제출하고 세포를 경유하여 구區집행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함.
제3조 : 동맹원은 세포에 반드시 가입하고 이주 때는 원호原住세포에 보 고해야 함.
제4조 : 맹원의 이주보고를 받은 세포는 상급기관에 보고하고 이주지방 세포에 등록해야 함.
제2장 조직
제5조 : 본 동맹은 중앙·지방·구·세포의 4단계로 함.
제6조 : 세포는 동맹원 5인 이상 10인 이내, 구는 3세포 이상 7세포 이 내, 지방은 3구 이상 7구 이내, 중앙은 지방 전체로서 각각 조 직함. 단, 특수한 경우에는 중앙상무위원회의 결의로써 독립세 포 및 독립구를 설치하되, 독립세포는 구, 독립구는 지방의 예 에 준함.
제7조 : 본 동맹의 기관은 다음과 같이 설정함.
1. 중앙대표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2. 지방대표대회, 지방집행위원회
3. 구대표대회, 구집행위원회
4. 세포회, 세포위원회
제8조 : 각 집행기관의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둠.
1. 중앙집행위원회 35인, 중앙상무위원회 7인
2. 지방집행위원 5인
3. 구집행위원 3인
4. 세포위원 약간인
제9조 : 중앙집행위원회는 중앙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은 중앙집행 위원회에서, 지방집행위원은 지방대표대회에서, 구집행위원은 구대표대회에서, 세포위원은 세포회에서 각각 선정함.
제10조 : 중앙상무위원회는 책임비서 1인을 호선하여 본 동맹을 대표케 함.
제11조 : 세포회는 각 해당 세포에 소속한 맹원 전체로서, 구대표대회는 각 세포에서 1인씩선출한 구대표로서, 지방대표대회는 각구에 서 1인씩 선출한 지방대표로서, 중앙대표 대회는 각 지방에서 1인씩 선출한 중앙대표로써 각기 조직함.
제12조 : 세포회는 매월 2회, 구대표대회는 3개월에 1회, 지방대표대회 는 6개월에 1회, 중앙 대표대회는 매년 1회, 중앙집행위원회는 6개월에 1회씩 정 기 개회함. 단, 각 회의 임시회는 필요하다 고 인정될 때 중앙대표대회는 중앙상무위원회의 결의로, 지방· 구·세포회는 각 해당 집행위원회의 결의로 소집할 수 있음.
제13조 : 본 동맹의 중앙집행기관 부서는 다음과 같음.
1. 정치부 2. 조직부 3. 선전부 4. 군사부 5. 노농부 6. 청년부 7. 부녀부 8. 경리부
제14조 : 각 부 사무는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분담 장리掌理함.
제15조 : 본 동맹의 각 집행기관은 상급기관의 지시 명령에 따라 각각 사무를 집행함.
제3장 재정
제16조 : 본 동맹의 재정은 맹원의 의무금·백일금白一金·보조금·임시수입 으로 충용함.
제17조 : 의무금은 매월 은銀 1각角 5분分, 백일금은 연 소득의 1/100로 정함.
제18조 : 각급 기관의 경비는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산정함.
제19조 : 맹원이 의무금을 고의로 3개월 이상, 백일금을 1개년 이상 체 납할 때는 정권停權을 명함. 단, 질병·실업 기타 부득이한 사 유가 있을 때는 중앙상무위원회의 결의로 면 제 혹은 유예할 수 있음.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만주를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을 결성하되 그 범위를 해외까지 넓히기로 했다. 그리고 흡수 가능한 청년단체를 모두 망 라하여 전만주적 통일기관을 민족 유일당의 창당 이전에 실현하되, 중국 관내의 청년단체와도 밀접하게 연계를 갖기로 하였다.
농민층에 대해서는 청년단체와 마찬가지로 이미 동맹에서 지도하고 있는 단체와 앞으로 조직될 가능성이 있는 각 지방에서 농민단체를 조직하여 창당 전에 전만全滿 규모의 농민기관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농민의 생활개선을 위해서는 소작조건의 개선, 중국 공민권의 획득, 무명세 혹은 과중부담에 대한 항쟁, 일본의 만몽 침략정책에 대한 투쟁 등을 통하여 ‘혁명적 훈련’을 부여하기로 했다. 농민의 당면이익을 위해서는 산업조합운동을 장려하기로 했다. 또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는 만주에서는 노동자가 극소수이고 각지에 산재하기 때문에 이들 노동자를 단결시켜야 하고, 그들로 하여금 지위 향상과 노동조건의 개선 등 당면이익을 위해 투쟁하게 함으로써 동맹의 지도를 관철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특히 재만한인의 자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치기관을 중국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힘쓰고, 합법적 자치기관에서 실행해야 할 과업으로는 공민권 획득, 한인을 위한 특수교육시설 구비, 자치행정 실현 등을 설정했다. 합법적 자치기관은 구區·현縣·성省·중앙中央의 4단계로 조직하고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로 하기로 했다. 이 자치기관은 1928년 9월 만주지역 한인의 귀화·입적과 자치기관을 표방하며 결성되었던 ‘동성귀화한족동향회東省歸化韓族同鄕會’를 적극 지지하여 완성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재중청년동맹과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혁신의회 등은 혁명운동을 방해하고 중국관청에 무고하여 ‘혁명동지’를 체포·구금케 하므로” 친일주구배와 연락하는 ‘반혁명단체’로 인정하여 박멸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서 조직방식을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로 한다고 천명한 사실 은 만주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 운동이 중국관내지역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인 1929년 3월 1일 상해지역에서 전개된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에서도 ‘절대독립의 민족혁명’과 ‘전민일치의 대독립당’, ‘민주주의의 중앙집권’ 등 3대 과제를 통일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란 농민이나 노동자 등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적 운영방식을 취하되, 프롤레타리아의 정예분자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당 지도부가 집중적으로 당이나 국가권력을 운용한다는 공산당의 지도원리로서, 레닌이 제창한 정당의 운용방식이다. 따라서 적어도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상정한 유일당의 형식은 러시아의 볼세비키당이나 중국의 국민당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족해방운동 정당이었을 것이다. 또한 1920년대 후반 중국관헌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자치’를 실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동맹이 중국당국과 협조관계를 통해서 당면문제를 해결하려 했음을 뜻한다.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3부를 통합하고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를 위하여 조직동맹은 ‘동성귀화한족동향회’를 적극 지지하고 각 지방에서 지회조직 및 경비조달을 빠른 기간 내에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동성귀화한족동향회를 바탕으로 해서 국민부를 조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일제의 만몽 침략에 반대한다는 방침에 따라 1929년 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명의로 「충고동삼성관공리문忠告東三省官公吏文」이란 격문을 살포하여 한·중 양 국민이 연대하여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주구기관인 선민부鮮民府·양생계養生契·재만동포옹호단 등을 박멸하자고 선언하였다. 선민부는 과거 참의부 간부 일부가 통화의 일본영사관에 투항한 뒤 1928년 12월 조직한 친일어용단체로, 일제와 결탁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재만한인들을 박해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 에 원래 참의부 관할이었던 통화·환인·집안현 등의 한인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다. 이 무렵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또한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의 이름으로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적 합병에 의해 조선민족은 유린과 가혹한 착취정책 하에서 신음과 고통을 겪고 있으며, 구주대전 이후 선진문명국의 계급혁명과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합류한 결과 우리 2천만 민중의 이면에 잠재한 혁명열은 이에 절실한 각오로써 3·1운동을 시작으로 전민족적 대동원으로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고, 남북만주 및 시베리아 각지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무장대는 일본제국주의와 결사적 투쟁을 전개하여, 이에 전민족적 혁명세력의 성장과 의열혁명군의 무장행동에 공포를 느낀 일본제국주의는 가혹한 법률로써 수백 명의 우리 전위투사를 감금함과 동시에 무력으로 러·중 양령에서 혁명군의 토벌을 단행하여 가석하게도 무수한 열혈장사를 혁명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쳤으나, 어떠한 군대 혹은 경찰의 힘으로 압박해도 전민족적 생사를 결정하는 혁명운동을 근저까지 파괴하려는 압박계급의 계획과는 반대로 압박이 심할수록 우리 혁명세력은 오히려 일층 심각화하고 … 이러한 무익유해한 자멸의 대립적 투쟁을 하루라도 빨리 폐기 숙정하여 조직적 대동단결의 기치를 고양하며, 정연한 일대진영의 완성을 중심으로 희망함과 동시에 아래의 2대 강령과 3개의 투쟁조건으로써 조선국민당의 당시黨是로 삼고 이를 대중 앞에 선언하여 대동전선의 완성에 한 부대의 역할을 맡기로 서약함.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령과 당면의 투쟁목표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처음에 ‘조선국민당’이란 이름의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령〉
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독립의 완성을 기함.
一. 일체의 대생산기관을 공유하여 노농대중의 생활보장을 기함
一. 세계 피압박민족과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제국주의를 박멸할 것.
一. 노농대중의 계급적 단결과 훈련에 노력하여 조직적 군사행동을 실현 시킬 것.
一. 중국의 민중혁명운동과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일본의 만몽 침략정책 을 파괴할 것.
이 내용은 1929년 말에 결성된 조선혁명당의 강령 초안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이란 민족유일당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공산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강령에서 표방한 두 가지 목표는 고려혁명당 및 다물당의 그것과 공통점이 많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이 조직이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혁명운동 정당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투쟁조건’에서 ‘조직적 군사행동’을 실현할 것으로 밝힌 것은 이 조직의 투쟁방략이 무력으로 일제를 타도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3부의 합동에 의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강화한 협의회파는 1929년 3월 하순 길림에서 3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정의부다수파의 대표로 이동림·현익철·고이허·고활신·최동욱·이탁, 참의부심용준파의 대표로는 심용준·임병무林炳武·유광흘劉光屹, 그리고 신민부민정파의 대표로는 이교원李敎元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며칠간에 걸친 회의의 결과 통일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자는데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 3부 통일회의 명의로 선언문을 발표하고 국민부를 성립시켰다. 새로운 통합체인 국민부는 4월 1일자로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고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였지만 3부의 명칭은 계속 유지하다가 국민부 집행위원회가 성립될 때에 취소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부의 성립으로 3부 통일회의는 해체되고 이후부터 중앙집행위원회가 조직될 때까지 이동림·이교원·심용준·현익철·고이허 등 5인을 대표위원으로 선정하여 통일을 위한 잔무를 처리하게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29년 12월에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고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산하의 무장부대로 조선혁명군이 창설되었다. 결국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중국 만주지역의 한국 민족주의운동은 비록 민족유일당의 조직과 3부의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했지만, 북만주를 기반으로 한 한족총자치연합회―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 계열과 남만주를 기반으로 한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계열의 두 흐름으로 양분되었다고 하겠다. 이들 양대 세력이 한 조직으로 합류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비교적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당·정·군 체제를 구비하게 된 사실은 그들의 역량강화와 적극적 대일항쟁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