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 호설암의 철학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中 청나라 상인 `왕치`>>
"小富由勤 大富由命(작은 부자는 근면함에서 나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 - 명심보감 -
<장사의 신 거상 호설암의 철학>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청나라 최고의 거상이 된
호설암(胡雪岩)은 평소에 인품도 훌륭했지만,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단호하게
훈계하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다음 투자 시에는 반드시 시장을 잘 분석해
자금을 경솔하게 투입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한 상인이 호설암 집에 방문했는데
상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 상인은 최근 사업이 기울어 목돈이 급히 필요했기에
가지고 있는 자산을 아주 낮은 가격으로
호설암에게 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호설암은 상인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호설암은 상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상인의 재산을 헐값이 아닌
시장 가격으로 매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놀라 휘둥그레진 상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설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 당신 자산을 보관할 뿐이오.
당신이 이번 난관을 잘 넘겨서 나중에 다시 매입하시오.
다만 원가만 받기는 좀 뭣하니 아주 약간의
이자만 받도록 하겠소."
상인은 호설암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고 호설암의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아 물었습니다.
"스승님, 다른 사람들에겐 호되게 훈계하시면서
정작 자신의 수익은 왜 신경 쓰지 않으신지요.
입에 들어온 고기도 삼키지 않으시다니요."
그러자 호설암이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이번 일은 단순한 투자가 아니다.
한 집안을 구하는 일이었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었으며,
상인으로서 양심에 부끄럼 없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을 수 있는데
위급할 때 타인을 도와준 사람은 나중에 똑같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호설암은 상인이라면 이득을 위해서는
칼날에 묻은 피도 핥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법의 범위를 벗어난 검은돈을 경계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탈취하지 않으려 했으며
신의와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돈을 벌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호설암의 성공 철학의 중심은
돈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얻은 이익은 재물을 베풀어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혜택을 돌리려 했습니다.
그는 늘 구두쇠로 살 게 되는 것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따뜻한하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中 청나라 상인 `왕치`>
왕치(王炽)는 청나라 거상(巨商)이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물질적 지원을 했다. 당시 최고의 상인이었던 호설암(胡雪岩)을 능가할 정도로 유명하다.
왕치(1836년~ 1903년)는 호설암과 함께 상인이라는 신분으로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 수 있는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红顶商人)으로 불렸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THE TIMES)는 왕치를 19세기 세계 4위의 갑부로 선정했는데 이는 동양인으로서 최초였다.
왕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자가 아닌 자수성가형 상인이었다. 이하(李贺)의 ‘전왕: 왕치대성인생방략(钱王:王炽大成人生方略)’에 따르면 왕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형을 잃고 힘들게 살다가 어머니의 마지막 예물을 팔아 마련한 은 20냥을 갖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기개가 넘치고 영리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 100냥 이상을 벌게 됐다.
대상(队商, 상인집단)을 거느리게 되면서 장사에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충칭(重庆)에 오늘날의 은행인 ‘천순상전장(天顺祥钱庄)’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쓰촨(四川)·구이저우(贵州)·윈난(云南) 지역의 무역업의 강자가 됐다. 청나라 동치(同治) 11년에 왕치는 쿤밍(昆明)에 동경풍(同庆丰)이라는 상점을 열어 금융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광저우(广州)·장시(江西)·한커우(汉口) 등 15개 성과 지역·베트남·말레이시아에 잇달아 지점을 설립해 명실상부한 대형 은행그룹으로 거듭났다. 둥촨(东川)과 거지우(个旧)의 구리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주변 지역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힘쓰고 가난한 학생을 위해 장학재단 성격의 ‘흥문당(兴文当)’을 설립하기도 했다.
왕치는 돈을 잘 벌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잘 쓸 줄도 알았다. 광서(光绪) 26년, 산시성(陕西省)과 산시성(山西省)에 가뭄이 들자 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은 2만냥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팔국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광서제(光绪帝)와 자희태후(慈禧太后)가 황급히 시안(西安)으로 도망을 갔을 때도 왕치는 군말 없이 도피 자금을 지원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당시 천순상전장 덕분에 청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정치가 이홍장(李鴻章)도 그의 재산을 가리켜 ‘청나라의 국고와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다.
훗날 청나라는 왕치에게 ‘급공호의(急公好義, 대중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라는 편액과 일품 홍정상인(一品红顶商人)의 작위를 하사했다. 왕치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일품 홍정상인이 되어 ‘이품 홍정상인’인 호설암의 명성을 능가했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