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딸 잃은 아버지의 그 후 30년 [만물상]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3.05.22. 20:48
업데이트 2023.05.23. 00:26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소설가 박완서는 작품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 잃은 아픔이 더 컸다고 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중략) 오직 참척(慘慽·자식 사망)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조각상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자식 잃은 아픔은 신도 위로할 수 없기에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아픔을 큰 사랑으로 승화한 부모들이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의 부모는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천안함 용사 정범구 병장과 차균석 중사의 어머니들은 보상금을 아들의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서울 서대문의 이진아기념도서관은 평소 책 좋아했던 딸을 사고로 떠나보낸 부모가 세웠다. 성악 하던 아들을 학폭으로 잃은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도 장학회를 만들었다.
▶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영국에선 등교한 아들을 심정지로 떠나보낸 부모가 전국 학교에 심장제세동기 6000여 개를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지난 12년간 6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미국에서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뒤 장학재단을 만들고 공원과 도서관, 테니스장을 조성해 아들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기부한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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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도 작품을 통해 비슷한 일을 한다. 가수 에릭 클랩턴은 아들을 추락사로 잃고 방황하다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발표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그 노래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리고 살아가야 해/(중략)/ 나는 네가 있는 이곳, 하늘에 머물 수 없으니까.’ 시인 김현승도 자식을 잃고 시 ‘눈물’을 썼다. 그 슬픔을 꼭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라는 시행에 담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한꺼번에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가 19일 별세했다. 정 변호사는 생전에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고 했지만 세상을 오래 원망하지 않았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30년 가까이 시각장애 학생들을 지원했다. 눈물 속에 딸들을 보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되살려 냈다.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정 변호사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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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2023.05.22 21:48:32
고 정광진님의 기사를 몇일간 연달아 접하고나니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아름답고 존경합니다. 천국에서 영면하소서...
답글작성
16
0
마부작침
2023.05.22 21:48:21
고통이란 참는게 아니고 이겨내는거라 하셨던 박완서 작가님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어르신 들의 겪언에 공감하는 부분이죠 가슴절절한 세월 잘이겨내시며 여러방면으로 기부하시고 마음의 위로를 받으신거 같습니다
답글작성
12
0
오병이어
2023.05.22 23:08:09
정변호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참척'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며 형벌이다.나의 부모님도 자식 셋을 가족병력으로 보내셨다. 동생도 암수술을 했고. 선친께서는 막냇동생이 떠나고 일 주일 뒤 심근경색으로 선종하셨다. 모친은 우울증이 알츠하이머로 진전되었다. 신앙이 떠돌던 마음을 정박시켜 줬다. 시간은 슬픔을 잠재워주는 보약이다.)
답글작성
9
0
Hope
2023.05.23 02:51:19
왜곡 선동질로 국민세금 ?센低都?좌파들의 수준과 너무나 비교가된다....이제 친중종북좌파들의 만행이 모조리 드러나면서 국세낭비한 비리와 부정한돈 환수하고 감옥에 보내자....위안부돈 해처먹은 윤미향과 세월호로 헛돈 날려먹은 좌파들의 작태 말이다.
답글작성
2
0
바우네
2023.05.23 02:36:43
'심장제세동기 6000여 개를 보내는 운동'(?)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인 '제세동기(除細動器)'를 순화된 '(자동)심장충격기(心臟衝擊器)'로 했으면 좋겠다. 2015년 3월 중앙행정기관 전문용어 개선안 검토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답글작성
1
0
나무.바람
2023.05.23 02:16:40
그 사이 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 말 한마디라도 또 같이 하고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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