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1010 서울산천 강의 땅이름`4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406 `한강 `나루 `경강상
990612 서울산천 방송 교통방송 서울로미래로(임국희) 29 `한강 `나루
한강의 나루들
한강은 조선 5백년을 두고 수운(水運)에 큰 구실을 하였다.
삼남(三南)의 많은 세곡이 이 한강을 통해 들어왔고, 목재나 약초, 특산물 등이 이강을 타고 한양에 공급되었다. 당시 한양 사람들로서는 이 한강이 생활의 젖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런만큼 한강 주변에 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나루 곳곳엔 창고들이들어섰고 야적장이 마련되었다. 나루터에 닿는 배나 뗏목 위엔 한강을타고 들어온 지방 물건들이 그득했고, 물건 임자와 장사꾼들 사이에 흥정하는 소리가 강물 위로 늘 물결쳤다.
□ 짐배 상대로 떼부자 된 경상들
강가에 서 짐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을 '경강상(京江商)' 또는 '경상(京商)'이라 고했다. 그들은 배로 들어온 물건들을 사서 서울 장안 사람들에 게 팔았다. 막대한 이익을 챙겨 돈을 번 상인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세간에 선이들을 일컬어 '경강부상(京江富商)' 또는 '경강거상(京江巨商)'이라 고했다.
강가엔 경상들의 마을이 곳곳에 이루어졌다. 술집과 여관들도 많이 생겼다. 나루터엔 시골 짐배들이 닿는 외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로 해서더욱 북적거렸다.
나루터는한자로 흔히 '도(渡)'나 '진(津)'이라 하는데, 이것은크기에 따른 구분이다.'도'나 '진'보다 작은 나루는 '제(濟)', '섭(涉)'이라 고 했다. 그래서중국의 황하, 요하와 같이 큰 강을 건널 때는 '도하(渡河)'라 했고, 보다 작은압록강, 한강 같은 강을 건널 때는 '진강(津江)'이라 했다. 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내를 건널 때는 '제천(濟川)'이라 했고, 논밭사이로 흘러가는 도랑물을 건널 때는 '섭수(涉水)'라 고 했다.
□ 광나루에 서 서빙고나루까지
서울의 한강에 는 일찍부터 광나루[광진.廣津], 삼밭나루[삼전도.三田渡], 한강나루[한강진.漢江津], 서빙고나루[서빙고진.西氷庫津], 동재기나루[동작진.銅雀津], 노들나루[노량진.鷺梁津], 삼개나루[마포진.麻浦津], 서강나루[서강진.西江津], 양화나루[양화진.楊花津楊花渡] 등이 개설돼 있었다. 이 중에 서 광나루, 삼밭나루 ,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는 '5강진로(五江津路)'라 하여 더욱 중요시되었다.
한강물줄기는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 위치가 사뭇 다르다. 이것은 홍수또는 인위적 영향에 의 한 것인데, 특히 평야가 넓게 퍼져 있는 지역에 서물줄기의 이동이 심했다.
옛날엔잠실 남쪽으로 강물이 지났다. 이것은 옛 지도를 살펴보아도 분명히나타난다. '송파나루'와 '삼밭나루'는 잠실 남쪽을 지난 그 한강 본류에 위치해 있었다.
송파나루는현재의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로,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번성하면서장터가 크게 이루어졌다. 송파나루의 장터를 '송파장'이라했는데, 여기에 는객주와 거간을 비롯해 사공, 여행객, 장꾼, 장사꾼들로 크게 성황을이루었다.
근처의 '삼밭나루'는 '한강나루(한강도)', '버들고지나루(양화도)', '노들나루(노량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도선장의 하나였다.
송파나루보다훨씬 상류쪽, 지금의 광진교가 있는 근처에 '광나루'가 있었다.
이나루는 서울에 서 광주로 가는 중요 길목으로서 노량도와 더불어 태종때에 처음으로 별감이 배치된 곳이다.
지금의 뚝섬 유원지 부근엔 '잠실나루'가 있었다. 한자로는 '잠도진(蠶島津)'인데, '독백(禿白)'이라 고도 하였다. 효종 때에 이 곳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였고, 조선 후기 경강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강 상류(강원도지방)의 목재가 물길로 많이 운반돼 왔다.
현재의 한남동 강가에 는 한강나루 즉 한강도(漢江渡)가 있었다. 남쪽 연안은 모랫벌이어서 전부터 '사평리(沙坪里)'라 했는데, 이 때문에 그 쪽에 서는 '사평나루[사평도.沙坪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제1의 도선장으로서 판교역을 지나 용인, 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여기에 는 별감이 파견되어 인마(人馬)의 통행을보살폈다.
한강진보다 조금 하류엔 '서빙고나루'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강가에 있던 나루. 본래 이 곳은 태조 때에 동빙고와 아울러 궁중에 서쓰는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설치됐던 곳이다 이 곳이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다.
□ 동작나루에 서 공암나루까지
'동작나루(동재기나루)'는문헌에 보면 과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돼 있다. 지금의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모랫벌과 동작구 동작동을 왕래하는 나루로, 옛날엔 물이 깊어 물가운데에 '모로리탄(毛老里灘)'이라 는 여울이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발달한도선장인데,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빠지는 대로의 길목이어서나룻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노들나루'는지금의 노량진 수원지 부근이다. 이 나루는 건너쪽에 서는 '새남터나루'라 고도했는데, 서울에 서 시흥, 수원을 거쳐 충청 전라 도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이용하였다. 4대 도선장의 하나로서 인마(人馬)의 왕래가 많았다. 이나루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그의 부친(사도세자.思悼世子) 능에 행차할때 수시로 이용하였는데, 왕이 도강할 때는 배다리를 놓아 행차를 편리하게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1790년에 친히 '주교지남(舟橋指南)'을제정하여 한강 가교의 제도를 마련하고, 오가는 왕복 도강의 안전을기할 수 있게 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 곳을 제외한 모든 진도의 통행을금하여 강을 건너기가 몹시 어려웠고, 연료의 채취도 어려웠다고 한다.
'삼개나루'라 고도불렀던 '마포진(麻浦津)'은 지금의 마포동 즉 마포대교가 있는 곳이다. 주로 여의 도를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로, 여기를 건너면 여의 도 백사장을건너 영등포를 거쳐 시흥으로 가게 된다. 서해안의 새우젓을 실은 배가이 곳에 주로 닿아 마포 강가에 는 새우젓 시장이 따로 형성될 정도였다. 지금의 서강 근처의 동막(東幕)은 이 새우젓 시장에 독을 만들어 공급하던 곳이었다. 동막은 원래 '독막'으로 독을 만드는 곳이라 해서 나온 이름이다. 도선장에 는 뱃짐장수(선상.船商)들이 주로 모여들었고, 나룻배도 사선(私船: 개인의 배)이 중심이었다. 근처에 사대부들의 별장이 있어 지방에 서소작료를 실어 오는 배들도 많았다.
양화나루는한양에 서 김포 강화쪽으로 가는 중요한 나루였다. 이 양화진은 한강진, 노량진과 함께 옛날 서울 삼진(三鎭)의 하나였다. 지금의 양화대교 위쪽(상류쪽)에 있던 나루로, 여기의 배들은 건너쪽 서강과 잔다리[세교동.細橋洞] 즉 지금의 서교동쪽을 왕래하였다.
조선시대의 서거정(徐巨正)은 이나루에 대하여 이렇게 읊었다.
'양화도어귀에 서 뱃놀이하니
별천지가바로 예로구나.
어찌신선과 학을 타고
놀아야만하는가.
해가서산 마루에 지면서
황금의 물결 이루노니
흥이절로 이누나.'
위시의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나루는 훌륭한 뱃놀이터였다. 근처에 선유봉(仙遊峰), 잠두봉(蠶頭峰) 등 경치 좋은 곳이 많아 조선시대엔중국 사신이 오면 대개 이 곳에 서 뱃놀이 행사를 베풀었다. 선유봉은 선유도(지금의 양화대교 중간에 있는 섬)에 있던 작은 산인데, 양화대교를 가설할 때 그 산머리가 잘려 나갔다. 잠두봉은 지금은 보통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부르는, 누에 머리 모양의 산으로, 지금 그 마루 위에 절두산 성당이위치해 있다. 양화나루 부근엔 경치가 좋아 이 곳에 도 장안 사대부들의 별장이 많았다고 한다.
영조때에 진(鎭)을 열었지만, 나루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양천(陽川)을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라 강화가 배도(背都)로서 중요시되던 당시엔 이 나루의 비중이 대단했었다.
조선연산군 때엔 노량도 외의 모든 나루를 막아 버리고 나룻배를 모두 동원, 국왕의 뱃놀이에 써서 양화도 역시 쇠퇴하였지만, 중종 초기의 기록에 는나루를 이용코자 하는 사람은 많고 배는 단지 2 척뿐이어서 배에 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건너는 바람에 자주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어영청으로 하여금 이 곳에 별장(別將)을 두고 관리케 하였다.
양화도에 서하류로 조금 내려가면 '공암나루'[공암진.孔岩津]가 된다. 지금의 강서구가양동 궁산(宮山) 부근에 있던 나루인데, 강 건너 고양 땅의 행주와 왕래하였다. 이 때문에 건너쪽에 선 이 나루를 '행주나루'[행주진.幸州津]라 하였다. 나루가 작아 양화도 관할하에 있었고 배 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곳을 '공암진'이라 한 것은 강 가장자리에 구멍바위, 즉 공암(孔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잠실 근처 신천동 강가에 있었던 '새내나루'[신천진.新川津], 용산에 있었던 '용산나루'[용산진.龍山津], 여의 도 옆 밤섬에 있었던 '밤섬나루'[율도진.栗島津], 마포나루에 서 조금 내려간 쪽에 있었던 '서강나루'[서강진.西江津] 등이 있었는데, 이들 나루도 그 근처 사람들에 겐 자주 이용되던 나루였다.
서울외곽의 유명한 나루로는 강 상류 쪽의 '뱀개나루'[사포진.蛇浦津], '용나루'[용진.龍津], '도미나루'[도미진.渡迷津]가, 강 하류쪽의 '새곶이나루'[철곶진.鐵串津], '조강나루'[조강진.祖江津] 등이 있었다.
옛사람들의 기쁨과 눈물을 싣고 이 배와 저 배를 번갈아 보내고 받았던 한강 가의 많은 나루터. 그러나, 지금은 삐그덕삐그덕 노젓는 소리도없고, 물결을 타고 너울너울 저 멀리까지 퍼져 갔던 사공의 뱃노래도없다. ///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www.travelevent.net 080411
210509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