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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예요. 이 시절에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전에 받은 대로 기억을 하고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합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분이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에 어두운 부분이 있거나 세상이 어둡다는 말이 됩니다. 본문에는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 땅을 가리켜서 사망의 그늘의 땅이라 부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흑암에 행하던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편에는 이방 나라의 악재가 있고 또 다른 편에는 그들과의 싸움이 있고 그리고 중심에는 그 나라의 부패한 지도자들의 불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둡습니다. 그래서 어둠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의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출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악재와 전쟁을 끝나게 하실 것이고 그 나라를 그의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고 거기에 즐거움을 더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그냥 한 선지자의 근거 없는 희망 사항이 아니라 혼돈 위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 빛이 나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을 애굽에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큰 손으로 구원하신 이 하나님의 역사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실한 소망의 약속이죠.
그리고 구원자에 대해서 구원을 베풀 구원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6절입니다. 우리 6절은 오늘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네 여기에서 정사라는 말이 있죠. 정사라는 말 영어로 거버먼트라는 말이 여기 있는데 이거는 나라를 아니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리켜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나오는 두 번 쓰인 단어인데 요 본문에서 6장 6절과 7절에서만 딱 두 번 쓰인 겁니다. 그냥 보통 왕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 보통 왕의 권세를 가리킨 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죠. 이거는 메시아의 왕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들을 보세요. 한글 성경으로는 5개가 있고 영어 성경으로는 4개가 있는데 모두 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높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들이에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정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이거는 모두 다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아주 높은 이름들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우리에게 태어날 우리 아기, 우리에게 주어질 그 아들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는 말이 됩니다. 그 아기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되고 있는 구원자 그 아기 그 아들이 누구예요? 우리가 대림절에 기다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우리 정의에 관해 물었던 것이 있는데 그 질문과 같이 한번 해볼 수가 있어요. 비슷하게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죠 또 불의한 자들에 의해서 나무에 못 박힌 이가 어떻게 평강의 왕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평강의 왕일 수 있는가 이렇게 물을 수가 있는 거죠.
일반적으로 말하는 평강의 의미를 가지고 생각을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성경 안에서 성경의 의미로 평강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는 기가 더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여기 본문에서 평강의 왕이라고 할 때 쓰인 이 평강 이거는 히브리어 말로 샬롬이라고 해요.
다 아시죠? 우리 안에도 샬롬이라는 이름이 있죠. 샬롬이라고 하는데 한글 성경에 보면 평강, 평안, 화평, 화목 이런 여러 가지로 변형이 됩니다.
근데 이 말에 가장 가까운 우리 한국말을 찾아본다면 안녕이라고 해요. 안녕 우리 안녕하세요라고 물을 때 이 안녕이 사실 샬롬이라는 말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둘 다 걱정이나 탈이 없다. 그리고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안하다 하는 그런 일반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적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면 성경이 지금 말하는 이 평강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어요. 하나님과 화목하고 내 안에서 평안하고 다른 사람과 화평하다. 그러니까 뭐예요? 굉장히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겁니다. 물론 개인적인 측면도 있어요. 내 안에 평안이 있는 것도 평강이에요.
그러나 그에 앞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게 중요하고 그다음에 나를 넘어서 다른 사람과 화평하는 것 그 개념 뜻이 여기에 담겨 있는 거죠. 쉽게 말하면 있어야 할 좋은 것은 있고 없어야 할 나쁜 것은 없다.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인 것이든 전 세계적인 것이든 다 그렇습니다.
그 반대는 뭐겠어요? 그러면 그 반대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자기 자신 안에 평안이 없고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는 것을 가리켜요. 영적 분열, 정서적 불안, 사회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그것의 매개로서는 시기, 질투, 분노, 욕심, 열등감이나 우월감, 궁핍함이나 풍요로움이 다 될 수가 있어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되고 또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것들을 경험하는 것하고 이것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거죠.
세상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듯이 죄의 영향, 죄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것이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있죠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가 있고 또 끝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전쟁들이 지금도 진행 중에 있어요. 분노의 영향이 큽니다.
또 전쟁이 어붙는 평화로워야 할 나라들 안에서는 안보라는 이유로 압재적인 독재가 있고,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칼 들지 않는 권력, 암투 권력 쟁투가 있으며, 자본주의라는 보호 아래 축제의 탐욕이 만연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은 그들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서 그들의 분노로 인해서 그들의 전쟁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거나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듣는 일반적인 뉴스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관심을 가지고 조금만 찾아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어디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바뀌었죠. 앞에서는 어떻게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본 지금은 이런 때에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찾을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 차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고 평안을 찾을 수 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죠. 카일 중커라는 사람이 있어요. 특별히 불안과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평강의 왕이 되실 수 있는지 자기 삶으로 경험을 하고 그것을 지금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교회를 다녔어요. 그러니까 세컨더리 스쿨 마칠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졸업할 때는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노미놀 크리스천이었다는 거죠.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서는 아주 강경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기독교회 모든 오류를 다 안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조롱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그 시절에 그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어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이 세상 에서 가장 성공하고 가장 재미있고 가장 흥미롭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원인을 모를 공황 발작, 페닉 어택이죠. 공황 발작과 불안 앵자이어티 이 불안을 당하면서 너무 고생을 했고 포기할 때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하나님의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함께 듣고 생각해 볼 내용이 좀 더 있기에 이 뒷부분을 좀 더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마침 우리 청소년들이 함께해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뒤에 얘기를 하자면 뒷부분 후반부 얘기를 하면 이 카일은 자기의 영광을 추구했어요. 퍼스널 글로리피의 이케이션을 추구했다고 했죠.
그런데 동시에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19살에 공황 발작이 시작되었고 그 증세를 겪어본 사람은 알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패닉 어택의 횟수가 자꾸 늘고 예측이 더 어려워지면서 이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몸은 더 나빠졌고 목이 부어서 숨 쉬는 것조차 걱정을 해야 했고, 손 발, 얼굴 이 모든 것에 떨림과 버닝 열기 무감각 사이를 오가게 되었습니다.
2015년 15년 대학 마지막 학기에는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약도 찾아먹고 MRI도 찍어보았는데 의사들도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하죠. 졸업하고 이제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할 때 이제 공부, 운동, 잠 이 세 가지에 집중을 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기간이 3개월이었는데 이 기간에 다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너무 힘들었는데 딱 두 개만 바랬다고 합니다.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는 것, 그리고 여자친구인 한나에게 결혼을 청하는 것, 청혼하는 것이었어요. 두 가지를 간절히 바라면서 버텼는데 때가 되어서 이 둘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바라는 것을 다 얻었는데 평안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도대체 그렇다면 이 평안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자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친구 한나와 함께 자주 다니는 길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일요일마다 근심 없는 근신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면서 계속 본 겁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교회 가자고 한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뭘 믿으려고 는 뜻도 아니었고, 바뀌자 하는 뜻도 아니었고, 신의 도움을 구하자는 뜻도 아니었고, 그냥 음악도 듣고 교재도 보자 하는 뜻으로 이제 가자고 그리고 미래의 남편 될 사람으로서 좀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가자라고 제안을 한 겁니다. 그래서 6시 저녁 예배에 참석해서 구석진 곳에 사람들이 많이 없는 구석진 곳에 앉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자기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또 목사님도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제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하려고 섰을 때는 카일이 회의적인 모습이었고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자기 머릿속에서 난도질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본문은 마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재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창세기 22장이었어요. 이 본문은 카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도 기독교를 비판하고 조롱할 때 종종 사용되는 본문입니다.
사람이 아니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누군가에게 그의 아들을 재물로 바치라 그의 아들을 죽이라 명령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가라는 게 도전이죠.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눈이 조금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은 이 카일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자비한 신의 무자비한 시험이 아니라 정말로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치르셔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라 미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 이렇게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들은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생각했죠. 복음은 적어도 이 강단에서 이 설교에서 선포된 복음은 자기가 생각했던 허수아비 허수아비 같은 종교가 아니다 느낀 거예요.
뭔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배워봐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을 피고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기독교 변증에 관한 책들 어폴로제틱스라는 책이 있는데 그런 책들도 같이 읽었어요.
그리고 예배에는 매번 계속 출석을 했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아직도 불안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였어요. 교회를 출석을 하고 신약 성경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히는 불안은 아직도 있었어요. 교회에 출석 4개월 후에 어느 날 밤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고, 그리고 평소처럼 거실에 있는 요가 매트를 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어요.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 잠을 들기 위해서, 쉼을 얻기 위해서, 평안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그래서 포기하고 매트 위에 엎어졌어요.
이 글에 따르면 완전히 엎어졌다고 해요. 얼굴을 방해하고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엎어진 겁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다 지친 자신을 보았어요. 노력하는 것, 노력해도 안 되는 것에 지쳤고, 불안에 지쳤고, 두려움에 지쳤고 또 지치는 것에 지친 것입니다. 그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말로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를 했어요. 이 비 우리가 주기도문 할 때 하는 기도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인데, 제가 이 카인이라는 사람은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다가 죽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그냥 기도를 짧게 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제가 읽은 부분에서는 그때 겪은 변화를 빌립보서 4장 우리가 잘 아는 6절에서 7절 말씀으로 표현을 해요.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우리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시작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라.
네 이 말씀으로 자기가 받은 변화를 표현을 하니까 분명히 이 말씀에 대한 대로 경험을 했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 어둠의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끝으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나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힘을 주었고, 기쁨과 소망이 우울과 절망을 대체하면서 내 몸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사가 의 도움으로도 어떤 약으로도 이길 수 없었던 문제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고침을 받은 산 증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카일이라는 사람의 간증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와 같이 예수께로 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으라 하는 인비테이션 초청이기도 한 것이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보여줘요.
그의 삶은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면 사람이 인정한다 부정한다. 그래서 있고 없는 분이 아니죠. 하나님이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신다면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의 인정이나 부인에 상관없이 그곳에 계시다.
또 보여주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보여주는 겁니다. 카일은 다른 독특하게도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이런 병을 얻었었죠. 굉장히 힘들었고 죽을 위기까지 갔던 것입니다. 또 보여주죠. 바라는 것을 다 얻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이 하나님이 평광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광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인지 리얼한 것인지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 얻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과 본질적으로 달라요. 디퍼런트 인네이처 인 퀄러티 본질적으로 다른 게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세상에서도 세상에서 얻는 성공, 소원, 성취, 음식, 내가 좋아하는 거, 약, 여행, 운동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주는 게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 하지만 그것들을 아무리 해도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이 있다 하는 것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이 평안 이 평강, 그리고 우리를 위해 오시고 일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지금도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평강 이 평강은 이 세상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아까 말한 불안 걱정,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을 이기게 해주고, 또 우리 안에 있는 우울감과 절망감, 그것을 기쁨과 소망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싸움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믿으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들 그 아들 평광의 왕이라 라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 들고 그를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다른 어떤 곳에서 아니면 다른 그 무엇으로 지금 카엘이 얻은 것과 같은 그런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로 가셔도 되죠.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그 평안이 진짜 평안이다. 지난주에 연결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준 그 정의가 참 정의다라고만 믿는다면 그분을 참 임금으로 왕으로 제대로 모시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이겨낼 수 없을 때 그냥 어떤 말로 위로로 격려로 힘의 말로 극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주시는 이 평강을 잘 새롭게 깊이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안에 사로잡혔던 이 카일 준 것처럼 설교 성경 말씀 그걸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그 뜻에 맞게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하나님의 평강이 성경에 글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삶에 살아 있는 능력으로 에너지로 들어오는 것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평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도 카이리 칼 중커와 갔던 그 교회처럼 교회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안에 그 얼굴에 웃음이 있고 그 삶에 기쁨이 나타나 보일 수가 있습니다.
꼭 웃음이 아니고 즐거움이 아니어도 교회를 들어오고 나가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함과 신실함, 사랑이 함께 할 수 있다 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교회를 바라보고 함께 나가기를 원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정말로 경험을 얻고 경험을 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오늘 예배에 온 여러분 모두, 또 예배에 함께 참석하지 않은 우리 모두 성도 가정에 함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