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비잔틴 제국의 몰락, 이슬람의 승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33)장-조제프 벙쟈망-꽁스떵의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비잔틴의 고립
동ㆍ서방 교회의 통합으로 비잔틴 제국을 구하고자 한 양측 교회의 대표자 베사리온과 쿠사노의 노력은 허망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었고,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반세기 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Ⅰ, 재위 1389~1402)는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 아시아 쪽에 거대한 요새를 세웠다. 마침 몽골 제국의 티무르가 사망(1405년)했고,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 틈을 타서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힘을 그리스와 발칸반도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 마호메트 2세(Mehmet II,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이르러 유럽 쪽에 두 번째 요새를 세워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다.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모든 길이 끊어진 채 섬이 된 상태였다. 콘스탄티노플 성벽 밖에는 무슬림 군대가 차곡차곡 모여들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남겨둔 채, 성벽 밖에서 최후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콘스탄티노플을 과연 유럽은 도와줄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자기네 상처를 치료하기도 바빴다. 두 나라의 군주는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그렇게 위협하면 안 된다는 외교 서한만 달랑 한 통씩 보냈다. 경제적인 교역로 확보만 걱정하던 베네치아는 제국의 원군 요청에 1452년 8월 크레타 섬에 주둔하던 소수의 함선을 보냈지만, 과거 제4차 십자군 당시 콘스탄티노플 약탈에 동원된 병력에 비하면 시늉에 불과했다.
강력한 포병 갖춘 오스만 군대의 공격
당사자인 콘스탄티노플의 상황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안니스 8세(1448년 사망)의 뒤를 이어 동생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1437~1439년, 형 요안니스 8세가 피렌체 공의회 참석차 자리를 비운 사이 섭정한 적이 있었다. 다른 동생 데메트리오스와 재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웃기게도 적(敵)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1449년) 이런 상황이라, 양측 교회 인사들만 발을 동동 구른 셈이었다.
오스만 군대가 포위 공격을 시작한 것은 1453년 4월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고, 군인은 8000명이 채 안 되었다. 반면에 오스만 군대는 적게 잡아도 20만이 넘는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였고,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을 뚫을 것 같은 강력한 포병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200척이 넘는 함대가 동행하고 있었다. 준비기간을 고려하더라도(처음 징후가 나타난 것이 1년 전) 병사의 숫자와 병기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전쟁이었다.
마호메트 2세는 이런 병력 차이를 인식하고,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항복하면 도시는 약탈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마호메트 2세는 누구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탐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측의 오만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집착으로 술탄의 제안을 거절했고, 비잔틴 장수들은 항복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 미사… 함락 후 학살과 약탈
1453년 5월 28일, 새벽부터 오스만 군대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의 성벽, 난공불락의 성을 향해 무섭게 대포를 쏘아댔다. 성벽 근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시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그날 저녁,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이시도로 추기경에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정교회 전례로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도록 했다.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신자는 미사에 참여했고, 황제도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 사이로 황제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백성도 절규했다. 미사가 끝나고 황제는 모인 콘스탄티노플의 전 신자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제노바의 장수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Giovanni Giustiniani Longo, 1418~1453)와 그가 이끌던 400명(혹은 700명) 남짓의 라틴 군인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1444년 바르나 전투 이후, 적은 숫자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구하겠다고 참가한 거의 유일한 서방측 군대였다.
5월 29일, 마호메트 2세가 직접 이끄는 최후의 공격에서 성벽을 방어하던 론고는 오스만군의 대포에 맞아 크게 다쳤다. 전투 초기, 론고의 카리스마 덕분에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군대는 잘 싸워 주었는데, 론고의 부상과 후퇴는 성벽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큰 손실이었다. 일부 사료에는 부상 이유를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퇴각했고, 그리스의 제노바령 히오스 섬으로 가던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퇴각 소식은 비잔틴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트렸고, 마호메트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투르크 군에서 선발된 술탄의 호위병들과 소부대원들이 론고가 지키던 성벽을 무너트려 잠입에 성공했고, 오스만 군대는 도심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대포를 성벽에 쏘면서부터 진입까지, 사망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도 성문 중 하나를 방어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수천 구의 시신 더미에서 누군가 황제만 신는 적색 신발을 신은 사람을 찾기는 했으나 그것도 추정에 불과했다. 역사는 황제가 그냥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마호메트 2세는 도시로 들어가기에 앞서, 3일간 학살과 약탈을 허락했다. 도시는 오스만 군인들이 사냥감에 달려드는 사냥꾼처럼 약탈과 강간, 학살이 범람했다. 모든 것이 처참했다.
초상화와 프레스코화 많이 남겨
소개하는 그림은 프랑스인 장-조제프 벙쟈망-꽁스떵(Jean-Joseph Benjamin-Constant, 1845~1902)이 그린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1876년)이다. 작가는 일찍 고아가 되어, 두 고모의 손에 자라며 툴루즈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21살에 파리로 옮겨 파리 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교사로 재직했다. 처음에는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스페인과 1872년 모로코 여행은 그의 작품 전반에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보는 그림도 작가가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동방의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듯 시공을 가득 채운 밝은 색상이 다소 어색하기까지 하다. 1876년 살롱에서 발표되자, 오귀스탱 미술관(Muse des Augustins)에서 샀다.
꽁스떵은 1800년대 말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초상화와 프레스코화 작품을 남겼다. 초상화 중에는 레오 12세 교황과 영국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 애 단마르크가 있고, 프레스코화로는 파리의 드 빌 호텔(Htel de Ville)과 오페라 코미크 국립극장(Thtre national de l‘Opra-Comique)의 천장화, 소르본의 여러 벽화 작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벽에 ‘공의회를 주관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등이 있다. 오리엔탈리스트 시대를 제외하고는 낭만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들을 밟고 콘스탄티노플 성문을 들어오는 21살의 승자,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 장식의 기(旗)를 손에 번쩍 들고 있다. 작가의 연극적인 배경 감각과 글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다. 부서진 성벽 안쪽에 ‘성모자’ 벽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호메트 2세로서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확보한 것이고, 일생 최고의 업적이었으리라.
이후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성당들을 모스크로 바꾸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고, 점점 더 강력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훗날 비오 2세 교황으로 즉위하는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다음날 친구 벤볼리엔티에게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인들이 지배하던 곳이, 이제 터키 제국이 시작되는구나!(Fuerunt Itali rerum domini, nunc Turchorum inchoatur imperium)”.
비잔틴 제국 1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렇게 사라졌다. 중세기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며 로마 제국 문화의 산실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종말은 서방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후 서방은 동방에서 오던 교역 물품들을 얻기 위해 ‘인도’를 찾아 바다로 향했다. 대항해 시대는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장- 조제프 벙쟈망- 꽁스떵, ‘술탄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1876년), 오귀스탱 미술관, 프랑스 툴루즈.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