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면 알게 되는 것들
이삭빛
1.
그대, 나이 들어가는 것을 슬퍼하지 마라
저기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보아라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태워야만
비로소 세상이 붉게 물드는 법이다
우리네 삶이 기우는 것이 아니라
떫었던 땡감이 찬바람을 맞고
속살까지 붉고 달게 익어가는 것이니
주름진 얼굴은 세월이 빚어낸
가장 향기로운 무늬가 아니겠는가
2.
굳이 높은 곳에 오르려 하지 마라
화려한 해바라기보다
담장 밑에 낮게 엎드린 별꽃이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더 오래 붙잡는다
이기는 것보다 져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이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저 상처 난 세상의 무릎을 덮어주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명천 한 장이면 족하다
3.
배움이란 늦깎이 봄눈 같은 것
금이 간 항아리라고 버리지 마라
그 실금 사이로 새어 나온 물이
메마른 흙을 적시고
결국 이름 없는 풀꽃 하나를 피워내지 않던가
우리의 서툰 몸짓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하니
오늘도 창문을 열고
새날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실 일이다
4.
나무는 새를 쫓기 위해 가지를 흔드는 게 아니다
비바람에 젖은 날개를 말리고 가라고
묵묵히 제 팔을 내어주는 것이다
화려한 꽃이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 짐을 내려놓고 기대앉을 수 있는
등 굽은 의자 하나면 충분하다
보아라,
일상이라는 텃밭에서 흙을 만지는 당신
그대가 바로 이 세상을 데우는
넉넉한 햇살 한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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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틈새에서 피어나는 빛, 그 향기로운 저녁의 미학
— 이삭빛의 <저녁이 되면 알게 되는 것들>을 읽고
시평 미애 시인
1. 상실이 아닌 완성의 시간
이 시는 인생의 저녁을 단순한 하루의 끝이 아닌, 가장 찬란한 완성을 향한 제의(祭儀)로 묘사한다. 시인은 늙음을 떫은 땡감이 달콤한 홍시로 변모하는 발효의 시간에 비유하며, 세월이 주는 풍화작용을 긍정한다.
젊음이 푸른 잎사귀처럼 싱그럽지만 설익은 것이라면, 노년은 비바람을 견디고 속살까지 단맛이 든 열매와 같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깃든다(Grace is joined to the wrinkle)'고 했다. 시인에게 주름은 감추고 싶은 흉터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얼굴에 새긴 가장 향기로운 무늬이자 훈장이다.
2. 낮아짐의 미학: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지혜
2연에서 화자는 높은 곳을 지향하는 ‘해바라기’의 삶 대신, 낮은 곳에 엎드린 ‘별꽃’의 삶을 선택한다. 이는 ‘이기는 것’보다 ‘져주는 것’이 주는 마음의 평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가르침처럼, 시인은 다투어 올라가는 대신 아래로 흐르며 상처 난 세상의 무릎을 덮어주는 ‘무명천’이 되기를 자처한다. 화려한 비단이 아닌 소박한 무명천은 그 자체로 치유와 포용의 상징이며, 이는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묻는 묵직한 화두다.
3. 상처의 역설: 깨진 틈으로 들어오는 생명의 빛
3연에 등장하는 ‘금이 간 항아리’는 이 시의 백미(白眉)다. 세상은 완벽함을 강요하지만, 시인은 그 결핍과 균열을 생명을 살리는 통로로 바라본다. 마치 항아리의 깨진 틈이 물을 새게 하여 메마른 흙을 적시고 꽃을 피우듯,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가수이자 시인인 레너드 코헨은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빛은 그 틈으로 들어온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고 노래했다. 이삭빛 시인은 이 ‘틈’을 통해 흐르는 물이 결국 생명을 틔우는 원동력임을 통찰하며, 우리의 서툰 몸짓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4. 일상의 영웅: 등 굽은 의자가 되어주는 사랑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는 비바람에 젖은 새를 위해 기꺼이 팔을 내어주는 나무이자, 누군가 편히 쉴 수 있는 등 굽은 의자로 변모한다. 화려한 꽃이 되기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삶, 그것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데우는 인간 난로와 다름없다. 시인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일상의 텃밭에서 묵묵히 흙을 만지는 평범한 ‘당신’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넉넉한 햇살임을 선언한다. <저녁이 되면 알게 되는 것들>은 저물어가는 것들에 대한 찬가이자, 서로의 체온으로 세상을 데우는 사랑의 교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