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다.
한동준의 'FM팝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 중에 인기가 많았던 '내 마음의 보석송'이란 고정 코너가 있었다.
나도 기회가 되면 즐겨 듣곤했었다.
2012년 2월 10일.
나는 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실제로 전파를 탄 날은 거의 한 달쯤 지난 3월 6일이었다.
전파는 매우 큰 위력을 갖고 있었다.
평소에 연락도 전혀 없던 사람들이 방송을 들었다면서 전화와 문자를 보내왔다.
적지 않은 숫자였고 큰 위력을 실감했다.
과거에도 몇 번 나의 글이 소개되어 그런 경험을 했었다.
언론은 정말로 반향이 컸다.
내가 투고했던 글의 제목은 '천리행군과 스모키'였다.
그 편지의 전문을 여기에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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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0년대 중반에 '해병대'에서 군생활을 했었다.
해병대에 1차로 지원해 입대했고, 포항 신병 훈련소에서 2차로 지원해서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서 3년 간 복무했다.
매년 겨울이 되면 우리는 완전군장을 한 채 '천리행군'(400K)을 했었다.
집 떠나면 누구나 다 고생이었다.
지금은 2012년 2월인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칼바람이 분다.
매서운 삭풍이 옛 시절의 추억을 소환했다.
그래서 생각과 느낌이 살아 있을 때 편지를 써 보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 슬하의 3남2녀 중 셋째였지만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으로 대학 입학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군산에서 고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면서 비로소 부모님 품을 떠나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당당하게 부대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군대에 갈 나아가 되자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다.
어차피 대한의 남자로서 군대생활을 할 바엔 가장 빡세고 힘든 해병대 특수부대에서 피와 땀을 쏟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저없이 지원했다.
쫄병 땐 훈련이 너무 힘들고, 군기가 살벌해 화장실이나 보일러실에 숨어서 혼자 울기도 했었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 무슨 객기로 이런 델 지원해서 들어왔을까?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부대로 가서 겨울이 되면 '제설작업'이나 할 것이지..."
쫄병 땐 여러번 후회했다.
내가 내 가슴을 때리곤 했었다.
우리 부대는 매년 겨울이 되면 '동계훈련'을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천리행군'이었다.
말이 400킬로지, 그것도 민간인들 눈에 띄지 않는 산 속으로만 행군했다.
행군을 하면서 각 포스트에 가면 각종 전술훈련들을 병행했는데 진짜로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밤이 되면 산에서 팀별로 언 땅을 파 비트를 구축했다.
그 안에서 작은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쪽잠을 잤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트 안에서 흡연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피우고 싶고, 훈련 중엔 절대 금주라고 하면 더욱 마시고 싶었다.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발동했다.
당시 군에서 지급했던 담배는 '청자'와 '한산도'였다.
품질이 조악했다.
어쩌다 민간인들이 피우는 '솔'을 얻어서 한 모금 빨면 "아아~ 바로 이 맛이야"라면서 감탄을 쏟아내곤 했었다.
'솔'은 '한산도'나 '청자'와는 비교를 불허했던 고급 담배였다.
단 한 모금에도 만족의 미소가 질질 흘렀다.
'천리행군'을 하는 6일 내내 대원 전체는 파김치가 되었다.
그래서 교관들도 비트에 들어가면 이내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당연했다.
그들도 사람이었고 모두가 곤죽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머리가 땅에 닿으면 3초 이내에 시체로 돌변했다.
교관들이 잠든 이후엔 부대 왕고참(하리마오)들이 끔찍한 심부름을 시켰다.
그 당시 '하리마오'는 하나님과 동격이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 솔과 두꺼비를 구해 와라"
솔은 고급 담배였고 두꺼비는 진로 소주였다.
지시는 항상 짧았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 중차대한 심부름은 당연히 쫄병의 몫이었다.
작은 군용 랜턴을 들고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산을 내려갔다.
알지도 못하는 낯선 동네였지만 마을로 접어들면 민가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불빛이 보였고, 멀리에서 '컹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도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시골 마을에 움직이는 물체가 존재할 리 없었다.
가게는 대개 마을 중심부에 있을 터였다.
시커먼 밤이었지만 '담배'라는 작은 간판을 찾아내는 건 식은죽 먹기였다.
큰 산 아래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
담배 가게를 찾은 다음엔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계십니까?"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옆으로 밀쳐보니 다행스럽게도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무작정 들어갔다.
다시 외쳤다.
"계십니까?"
앳된 여고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가게에 붙어 있는 방에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 소녀는 크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록달록한 위장복에, 상대의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 훈련모에, 위장크림까지 덕지덕지 바른 낯선 군인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놀라기도 했지만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나와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던 사람은 소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음악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열린 문틈 사이로 귀에 익은 노래 한 곡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스모키의 'living next door to alice'였다.
캠퍼스에서 즐겨 들었고 나도 무척 좋아했던 곡이었다.
내가 예고도 없이 가게에 들이닥쳤을 때 소녀는 카세트 테이프로 '스모키'의 노래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아아...Smokie......."
악명 높은 '특수훈련'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던 나날이었다.
캠퍼스 시절의 감수성과 젊은 날의 낭만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고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고 구르던 시절이었으니까.
추운 줄도 몰랐고 아픈 줄도 몰랐다.
눈물겨운 쫄병 시절이었지만 꼭 이겨내고 싶었다.
어떤 값지불을 하더라도 내가 지원해서 스스로 기어들어온 부대였다.
생존하고 싶었고 끝까지 살아 남고 싶었다.
오로지 그 한 생각 뿐이었다.
훈련 외엔 파리 눈꼽 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혹한 속에서 뛰고 구르며 정신 없이 보냈다.
'그린베레' 쫄병의 애닲은 병영 일기가 그렇게 질박하게 가슴팍에 새겨지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시골의 어느 가겟방에서 앳된 소녀가 흥얼거리고 있었을 '스모키'의 노래를 뜻하지 않게 듣게 된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 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도 잊은 채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고목처럼 서서 '앨리스'를 향한 그리움과 순정의 선율을 듣고 있었다.
감미롭고 따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꽁꽁 얼었던 내 마음까지 녹는 듯했다.
전주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여친 생각도 났고 뭔가 딱히 세밀하게 묘사할 순 없지만 캠퍼스의 낭만과 초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하리마오'가 심부름을 시킬 땐 늘상 비슷한 논조였다.
천원 짜리 달랑 한 장을 건네며 하는 말이, "솔과 두꺼비에 오징어까지 사오고 500원을 남겨 오라"고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계산도 전혀 맞지 않았다.
심각한 괴롭힘이자 폭력이었지만 선배 대원들도 모두가 그런 과정을 겪었다고 했다.
나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하리마오'의 지시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철저하게 이행하고 또 이행했다.
무쇠처럼 얼어버린 산 속이었지만 비트 안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 좁은 비트 안에서 '두꺼비'를 홀짝거리며 순애와 영자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어둠을 뚫고 심부름 했던 쫄병에게도 '두꺼비' 한 잔과 귀하디 귀한 '솔' 한 개비가 수고비로 건네졌다.
정말 꿀맛이었다.
깊은 산 속 계곡의 얼음을 깨고 들어가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뜨거운 가슴과 조국에 대한 충정으로 혹한의 겨울을 녹여냈던 20대 초반의 열정과 함성들이 어느 땐 어제 일처럼 생생할 때도 있다.
그때 그 전우들도 그립다.
3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건강하게 전역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입사했다.
그해 12월에 8년 간 교제했던 동갑내기 여친과 결혼했고 1년 3개월 후에 딸을 낳았다.
그 녀석이 자라서 모 여대의 ROTC '창단멤버'가 되었다.
요 근자에 며칠 간 혹독한 추위가 있었다.
2주간 군부대에 입소하여 동계훈련을 받고 있는데, 그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완전군장을 메고 하는 '30킬로 행군'이라고 했다.
아직 여린 여대생들에겐 결코 만만치 않은 훈련일 터였다.
내가 400K를 하는 건 괜찮았는데 딸이 30K를 한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짠했다.
부모 마음이란 게 다 그런가 보다.
부대 입소 전 카톡으로 이런 문자를 날려주었다.
"아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즐기겠습니다. 잘 하고 올게요. 걱정마세요. 저는 아빠가 철썩같이 믿는 씩씩하고 예쁜 딸이잖아요. 사랑해요. 충성!!"
27년 전의 그리운 '해병대 특수 수색대' 전우들.
그리고 추위와 당당하게 맞서며 내일의 훌륭한 장교를 꿈꾸는 '여성 ROTC 대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아주 오래 전 정말로 추웠던 어느 날 밤, 시골 가겟방 문틈 사이로 감미롭게 흘러나왔던 바로 그 노래, '스모키'의 히트송 한 곡을 신청해 본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지금도 불철주야 노고를 아끼지 않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군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그들과 같이 듣고 싶다.
"장병 여러분. 몹시 춥죠? 하지만 늘 힘내시고 건승하시길 빕니다. 고생하는 군인들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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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이 방송을 탔다.
편지 낭독 후에 내가 신청했던 그 노래도 흘렀다.
심쿵했다.
방송이 나간 후로 또 며칠이 지났다.
어제 사무실에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뜯어 보니 방송국에서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허허. 이런 선물까지 챙겨주다니, 고마운 일이군"
박스 뚜껑을 열어보니 화장품 선물이었다.
선물 때문에 글을 보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세안 후에 이 화장품을 사용해 볼까 한다.
고맙다.
80년대에 몹시도 사랑했던 그 노래.
스모키의 고전같은 히트 곡, 'LIVING NEXT DOOR TO ALICE'
큐티 마치고 다시 한번 들어보는 아침이다.
봄도 멀지 않았다.
싱그런 아침이다.
오늘도 내내 행복하시고 더 많이 웃음 짓는 수요일이 되길 소망한다.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2012년 3월 14일.
큐티 마치고.
이른 아침에 마음을 담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