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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B
1986.08.11 정인세 원장
그러니까 거기서 또 한 번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 훈련이라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훈련이라는 것은 인제 내가 내일 모레가 팔순이니까 나는 그 전에는 값싸게 생각을 했어요. 나는 이제 젊어서 고생 꽤나 했으니까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으니까 이제 죽을 때는 편안하게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제는 아주 그런 생각 아주 포기를 했어요. 이제는 아주 포기 했어요. 죽는 시간에 조용하게만 망신이나 당하지 않고 죽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언제 돌아가실지 여기 모르는 노인들도 여기 있어요. 앞으로 남은 길이 얼마나 남은 것 같아요? 지금 몰라요. 지금 나이가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무던히 세상 적으로 오래 산 것 같아요. 그러나 남은 시간이 더 걱정이요. 남은 시간이 일 년이 남았을 런지 한 달이 남았을 런지 그건 몰라요. 그런데 여기 노인들 생각하는 것은 남은 세월이 더 걱정이야.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야.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야. 더군다나 젊은 사람들은 창창하고 앞에 갈 길들을 생각하면 아이고 그 광야의 40년 생활을 언제나 저 사람들이 그 광야 40년 생활을 어떻게 지낼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이야기 할 것은 그 요단강 건너 갈 적을 생각해요. 요단강을 건너갈 적에 꼭 홍해바다를 건너던 것 같이 그런 경험을 마지막 까지 시키시는 거야. 제사장이 법궤 (法櫃)를 들고 강으로 먼저 들어가라. 그래서 강으로 들어갔어. 제사장이 물을 밟는 대로 물이 끊어 졌어. 상류에서 흐르던 물이 멈춰 섰어. 하류에서 흐르던 물은 전부 사해바다로 흘러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니 육지가 드러나 제사장이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강 한가운데 들어가서 복판에 들어가 딱 서있으니까 위에 물은 흐르지를 않고 아래 물은 다 흘러가 버리고 널따란 육지가 드러났어요. 이제 건너가라. 그래가지고 건너갔어요. 그러니까 그때도 꼭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너던 거와 같은 경험을 내가 함께 한다. 너희들과 함께 한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열두지파에서 하나씩 사람을 뽑아 가지고 돌을 하나씩 집으라고 그래요. 집어 가지고 그 강 가운데다가 단을 쌓고 이다음에 너희 자손들이 이것이 무슨 돌이야? 그러거든. 우리 조상들이 이 강을 건널 적에 하나님께서 강물을 멈추셨다는 증거다. 그걸 자자손손이 기억들을 하게 해라.
자꾸 그렇게 기념비를 세워가지고 기념을 만들어 가면서 그래가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할례를 베풀던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 생략합시다. 여리고성을 맨 먼저 제 일착으로 전쟁을 한 것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까지 들어갔지요. 여리고 성까지 들어갔는데 인제 가나안 땅을 점령을 하기 시작을 할 판인데 그런데 맨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효를 믿었어요. 적어도 칼을 뽑을 만한 사람들만 60만 명 이상이 되지요.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전쟁도 많이 했고 훈련도 많이 받았으니까 자신도 있고 이까짓 거 여리고 성 같은 건 그냥 손가락만 대도 그냥 허물어버릴 정도야. 자신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의 힘을 앞세우지 않고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성을 돌라고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아무소리도 안하고 제사장 뒤를 따라서 그 많은 군중들이 아무소리도 안 해요. 물론 기도했겠지요. 그러면서 성을 돌지를 않았소? 그리고 마지막에도 무기 들지 말라고 무기 들지 말고 여호수아가 명령 한마디만 하면 소리를 지르라고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니까 성이 무너져 버려요. 그리 들어갔어요. 들어가서는 전부 물건을 전멸 시키라고 그랬어요.
전멸 그런데 그 중에서 아간이가 외투 하나하고 금덩어리 둘하고 그것 감췄지요. 그거 감췄다고 그 다음에는 쪼그만 성 아이성을 쳐들어가다가 실패를 하지 않았어요? 쪼그만 것도 용납을 하지 않아요. 처음에 들어갈 적부터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야. 한번 떠나기도 어렵고 떠나서 가는 길도 어렵고 또 마지막에 가서 인제 구원성으로 들어갈 적에도 마지막 까지 마지막까지 사람의 힘은 조금도 용납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의 힘을 용납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키실 때 순전히 신앙의 힘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여리고 성을 함락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세상 물건은 손톱만한 것도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아간이가 물건하나 도둑질하고 훔쳤다고 그 비참한 참패를 당하게 하시고 쪼그만 죄도 용납할 수 없다. 인제 하늘나라 들어가는 데는 쪼그만 죄도 용납이 안 된다. 다 떨어버리고 들어가야 한다. 들어갈 적에는 아주 완전무결하게 그래서 성경 말씀을 보면 신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어요.
점과 티도 없이 그 앞에 두려하신다. 거룩하게 해서 점도 없이 티도 없이 이렇게 해서 그 앞에 세운다고. 거기다 볼 적에 우리들의 할 일이 창창하게 언제나 그것이 험도 없고 언제나 우리가 점도 없고 티도 없고 아주 혈기도 없고 교만도 없고 시기도 없고 욕심도 없고 다 없어지는 그런 애초에 하나님이 만드셨던 거와 같은 거룩한 완전무결한 거룩한 영혼이 된다. 그런 뒤에야 하늘나라를 들어간다. 그럼 여기서 한마디 문제가 되는 게 있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는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인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완전무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의 몸의 상처도 내가 다 치료해주마. 너희들의 몸에 묻은 더러운 것도 내가 다 씻어주마. 그래가지고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거룩하고 완전하고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우리가 인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 이렇게 되는 거야. 우리가 거기까지만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어찌되었던지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이런 말들을 합니다. 동광원 사람들이 너무 무식하다고, 여러분들 중에서 나는 무식하지 않소. 이런 말 할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을 너무 모른다. 성경을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한 장도 빼놓지 않고 몇 번씩이나 읽으셨소? 다 읽으셨소? 물론 여기 몇 번 읽은 분도 있을 거요. 그렇지만 어디를 들고 물어봐도 다 대답할 수 있겠소? 성경을 지금 제가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안내려가고 지금 예수 믿는데 까지만 하고 말았지만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기독교 역사가 지금 아담 때로부터 6천 년간의 이야기를 대강 했는데 6천년 동안에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걸 대강 줄거리는 알아야 한다는 거야. 대강 줄거리, 엿새 동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그러지만 그 엿새가 지금 하루와 같은 요런 엿새일거예요.
그러면 요새 공부하는 학생들은 곧이 안 듣거든. 뭐 하루 만에 천지 만물을 그렇게 바다를 만들고 그 하루가 지금 하루와 같은 하루요. 그런 문제들을 자꾸 일어나요. 젊은 사람들은 더군다나 마음에 의심해요. 늙은이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지요.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대충 이야기를 하는 거야. 대충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나님의 하루는 우리의 천년과 같다. 그랬고 또 우리의 만년과 같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때 창세기 때는 시간이 없었어요. 하늘의 별도 생기기 전이고 해와 달도 생기기 전이니까 시간도 없었어요. 지금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과 같은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보면 무두셀라 같은 사람은 몇 살을 살았어? 969세, 그런데 창세기 6장에 보면 120살로 제한 하셨는데 어째서 그 사람은 막 오버를 해서 살았을까? 성경 보면 의심 가는 대목이 많아요. 자꾸 그냥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도 모순되는 게 없어. 성경과 같이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누가 900살을 살았다. 누가 800살을 살았다. 그것이 자꾸 나오니까 노아의 홍수 때 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가서 살아남은 사람이 900살 800살 산 사람 중에서 혹 누가 살아있던 사람 있을까? 누가 계산 해본 사람 있소? 하나도 없습니다. 싹 죽어버렸어요. 성경에도 숫자 까지도 틀리지 않아요. 숫자 까지 아주 틀림없이 그때까지는 다 없어져 버린 거야. 그러니까 이 성경은 우리가 볼 적에 의심이 자꾸 일어나도 아직도 우리가 성경에 못해서 그런다. 그거라고, 몰라서 또 믿지를 않기 때문에 이렇게 자꾸 모순이 믿지 않으면 자꾸 모순이 드러납니다. 그래 내 속에서 어떻게 그럴까? 하는 의심이 나거든요. 믿음이 없어 그렇습니다. 그렇게 알아 믿지를 않아서 아직도 믿지를 않아 믿으면 풀어져요. 성경이 저도 그럴 적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다는 몰라도 의심은 없어요.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어디를 들춰보던지 걸리는 대목은 없어요. 믿으면 다 풀어져 버려요.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역사야. 우리 믿는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의 역사를 이스라엘 역사로서 이렇게 보여주신 거야. 우리와 상관없는 게 아니야. 그런 사람 있거든요. 무슨 우리 한국 사람이 유대나라 역사를 그렇게 들춰보고 그러느냐고 그렇게 말들 하는데 그거 모르는 거야.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가나안 애급에서 끌어내서 광야로 40년간 돌려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그 과정은 우리들이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에 십년 동안이던지 50년 동안이던지 사는 동안 예수님의 발자취를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그래서 하늘나라를 어떻게 들어가게 될 것인가? 그걸 보여주신 거야. 절대로 우리와 상관없는 게 아니야. 이스라엘 출애굽기라든지 모든 신명기까지 내려오면서 모세 5경 그거 전부 우리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게 되는 거야. 마음속에 하나씩 하나씩 체험하게 되는 거야.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었는데 못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장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못합니다. 못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것을 우리가 가만히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도 없으시고 마지막도 없으신 무시무종하신 분 또 능력이 무한하신 그런 분 지혜가 무한하신 분, 또 사랑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것이 다 구비하신 분이라고 이렇게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을 먼저 이야기 하려고 그랬는데 그걸 못하게 된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이 시간은 이만큼만 이야기 하고 찬송을 부릅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서부터 몇 절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로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절까지 읽었습니다.
또 요한1서 1장 1절서부터 몇 절 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하노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오늘 저녁은 제가 말씀을 드리고 내일 새벽은 오 장로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내일 오전에 마지막 시간을 김 선생님께 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일 오전 시간까지로 이번 모임은 일단 마치는 것으로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말씀을 드리기 전에 어저께 저녁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마음에서 자꾸 한마디 뒤따라서 증거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잊어버리기 전에 그 말씀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이 공 어른 부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 공 어른 부인이 세상 뜨시기 며칠 전에 제가 도장리에 가서 뵈었지요. 그런데 그저 잔잔한 미소만 띄시고 무슨 말씀을 하신 것도 같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그 전에 등광리에 가서 또 한 번 뵈었지요.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또 도장리에 와서 또 한 번 뵌 것 같아요. 그런데 영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제 생각을 했습니다.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서 이 공 어른이 나를 보고는 말을 한마디 없으시던 분이 김 선생님 보고는 그렇게 자기 부인 일을 이야기를 다 하셨을까? 그걸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런데 그래서 내 자신을 반성해 봤지요. 원체가 딱딱하게 생겼거든요. 누가 이렇게 만나면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안생길거야. 그러니까 안하셨을 거고 그 양반은 아주 확실히 태도는 무척 겸손하고 잠잠해 지셨습디다. 그래서 임종이 가까워 지셨구나. 하는걸 알았지요. 그렇게 겸손한 양반이 저를 볼 적에는 저 교만한 놈 그렇게 보이셨을 거야. 틀림없이 그러니까 말 할 마음이 안 생겼을 거고 그래 가만히 어제 저녁에 그런데 김 선생님 보기에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속에 있던 말을 터놓았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말씀과 상관이 있어요. 여기 처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그랬어요. 이 말씀 말씀에 대해서 오늘 저녁에 생각을 좀 하려고 그러는데 이 말씀은 우주 안에 가서 충만하게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꽉차있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가 뚫어지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귀가 뚫어지는 자세가 첫째가 겸손이다. 그리고 온유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보니까 그 생각이 자꾸 앞을 서요. 그 이 공 부인이 아주 지금 속에 있는 말씀을 기어이 어디다가 털어 내놓으셔야 할 텐데 그 참 큰 비밀이지요. 털어 내놓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김 선생님을 만난거야. 그래가지고 거기다가 털어 내 놓은 거지요, 그래서 내가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할 말을 못하고들 갔을까? 그 생각을 해요. 여러분들도 그걸 느꼈을 거야. 나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정이 떨어져서 말을 못하고 그만둔 것 제가 그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다고요. 원장님한테 이야기 좀 하러 가면 딱 딱 눌러버리니까 말을 못하겠다고 그래서 이 우주 안에 꽉 차있는 진리의 말씀도 마음이 열어져야 들을 귀가 있어야 들어가는 거야. 이 말씀이, 그런데 보통 말은 아무 귀에도 쏙쏙 잘 들어갑니다. 그냥 보통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같은 거 그러나 그건 들으나 마나 하는 이야기 하나마나한 이야기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이야기지요. 그걸 말씀이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 말씀 이라는 것은 정말 꼭 들어 두어야 할 말씀 또 내 생명에 유익이 되는 말씀만 가르치는 거야.
그런데 이 말씀 이라는 말에 대한 것이 성경마다 다릅니다. 대개 보면 어떤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뭐가 있으니 그랬지요? 그러나 그 원어로 들어가면 로고스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그 로고스 그 말씀 이라는 것은 아주 해석이 어렵습니다. 말씀에 대한 것만 풀이한 책이 이만한 것을 한번 봤어요. 전부 그 말씀에 대한 뜻을 풀이해 그러나 그렇다고 그 말씀에 대해 다 풀어서 해석해 놓을 수 있냐하면 그렇게 못해요. 말씀에 대한 자체 이야기를 하려면 힘이 들어요. 힘이 드는데 여기 보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 했어요.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랬거든요 말씀이 곧 하나님이야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또 요한 1서에 가보면 그 말씀에 대한 걸 이렇게 설명을 했거든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러분 말씀 만져본 사람 있어요. 말씀을 만져본 사람 있으면 어디 손들어 봐요.
말씀을 만져봤다고 그래. 또 눈으로 보았다고 말씀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이것이 이제 문제가 되는 거야. 이 로고스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또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할수록 참 맛이 나오고 뜻이 나오는 것이 그게 말씀이야. 그리고 한번 이 말씀이 귀로 들어가서 우리 마음속에 한번 들어가 놓으면 영 사라지지 않는 것이 말씀이야. 영원히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라고 해요. 진리라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그랬어요. 예수님 자체가 진리야. 여기에도 그 말씀 들어있지 않아?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계셨다.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계셨던 분은 예수님 밖에 없거든. 예수님이 하나님과 처음부터 함께 계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하나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요새 그러지 않아도 나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하고 죽어야겠다. 그 생각이 나요. 오늘저녁에도 이거 안 나올 것을 나 온지도 몰라요. 내가 한 말 가운데 몰라요. 열 칸에 한 칸이나 여러분이 담아둬야 할 말씀이 있는지 우리들이 날마다 하고 있는 이야기는 쓸데없는 이야기 야.
해도 좋고 도리어 하면 손해나는 이야기야. 내게도 손해가 나고 아까 누가 그런 말을 조금 하더군요. 어떤 철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자기가 살아생전에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아주 유명한 선생도 만나고 학자도 만나도 그 철학자니까 말도 가려서 했을 거 아니요? 그런데 이야기 하고 나서 돌아와서 내가 그 사람 만나서 이야기 한 거 잘됐다. 이렇게 생각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항상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난 것이 후회가 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그건 깨달음이 아니야. 깨달음이 아니야. 우리가 참 말씀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요새 자꾸 나요. 그래서 여러분하고 갈리기 전에 이 말씀에 대한 걸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 이라는 것은 그대로 여기 있는 대로 빛이고 생명이야. 말씀 자체에 가서 생명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우리가 참 생명을 사는 것이고 말씀이 우리 안에 한마디도 들어와 있지 않으면 그건 껍데기 사람이고 고기 덩어리지 사람이 아니야.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 말씀 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 할 적에 요전에 시간에 제가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 했으니까 거기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거기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고기 덩어리만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거든요. 거기다 하나님이 영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그 속에 아담과 하와 속에 말씀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에 말씀을 먼저 에덴동산에 다가 심어 놓으신 거야. 그런데 마귀가 들어가서 그 말씀을 뽑아버린 거야. 그러니까 에덴에서 쫓겨난 거야. 이건 있으나마나 이런 인간은 속에 말씀이 없는 인간은 있으나마나 걸리적거리는 거 치워버리자. 그러고 에덴에서 쫓아냈어요. 그 다음에 가만히 그 우리가 역사에서 이야기 했지만 에녹 같은 사람은 말씀으로 산 사람이야. 그러니까 말씀이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간 거지요.
그 노아 때 와서 노아 한 사람만이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 속에 가서 말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전부 말씀이 없었어요. 그 사람들 속에는 말씀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전부 홍수에다가 쓸어버리신 거야.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틀림없어요. 이제 우리가 훨씬 뒤로 내려와서 아브라함 이야기도 지나가 버리고 모세 때 와서 이제 하나님이 40년 동안을 모세를 훈련시켜가지고 40년 뒤에 시내산에 갖다놓고 40일 동안 금식을 시키고 참 훈련을 해가지고 이제 40일 동안을 그 시내산에서 모세가 금식 기도를 하면서 무엇을 받았어? 계명을 받았어요. 말씀을 받은 거예요. 인제 말씀을 받은 거야. 그래가지고 이제 모세를 통해서 일 년 동안을 그 이백만명이나 되는 군중을 시내산 아래다 놓고 말씀으로 훈련을 시키신 거야. 그래 거기 많은 조항이 나오고 천막을 치는데 몇 자를 해라. 폭을 얼마나 해라. 그거 다 껍데기 문제야. 정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세워볼까? 거기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그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로 40년 동안을 돌아다니셨는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생활하고 할 적에는 조금 사는 것 같다가 말씀을 떠나버릴 적에는 전부 없애 버리셨거든요. 그래가지고 40년 뒤에 가서는 40세 이상 된 사람으로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남아있었어요. 그러지 않았소?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그까짓 거 가나안 족속 껍데기로 보기에는 강한 것 같아도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넉넉히 그를 이길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가 있으니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고 그래. 믿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전부 광야에서 쓰러졌지요.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를 그때 가나안 땅 근처까지 간 거로 이야기하고 말았지요. 이제 그 대중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건너갈 적에 요단강을 건너갈 적에 홍해바다를 건너올 적 모양으로 물이 그쳐버렸다고 그랬지요. 그 말씀이 그때에 하나님의 법궤로 상징된 말씀을 가지고 들어갔거든요. 들어갔을 적에 말씀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정지가 되어 역사도 정지가 되고 자연도 정지가 되고 그것을 가르치는 거야.
그래가지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왜 무기로 그 여리고성을 함락 시키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를 짊어지고 하루 한 번씩 여리고성을 아무소리도 안하고 빙빙 돌았느냐? 그거 순전히 말씀으로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려고 그러신 거야.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백만명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거야. 가나안 땅에 우리가 그것은 분명히 알아야 돼. 그래서 우리 사람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참 많거든요. 어째서 여리고성을 칠 때도 그렇고 아이 성을 칠 때도 그렇고 그 다음에 어디 가서든지 전쟁을 하고나면 그 도성 사람들은 늙은이로부터 남자고 여자고 어린애까지 싹 죽여 버리라고 그랬습니다. 그 참 하나님이 그렇게 그것들 때문에 시비가 많지요. 구약에 보면 전쟁의 하나님 살생하는 하나님 피 흘리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있다, 구약 때 하나님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야. 사실은 구약 때 하나님이 다르고 신약 때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야. 그 말씀을 세우고 말씀 아닌 것은 쓸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야. 그 가나안 일곱 족속은 말씀을 모르고 말씀이 들어갈 구멍도 없고 여지가 없이 말씀으로는 도저히 생기를 얻지 못할 족속이었어.
그러니까 그걸 없애 버리시는 거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죽었지요. 여호수아가 죽으면서부터 혼란이 일어났거든요. 그냥 질서가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제 나중에는 누가 이번에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어떤 성을 칠까? 하고 꼭 하나님한데 묻고 여쭈어 봤거든요. 그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그래요. 사사시대가 한 이백여 년 동안 계속 되어요. 이백여 년 동안에 열한명의 사사가 일어나지 않았소? 마지막에 사무엘까지 하면 그래 열한 명의 사사가 일어났는데 그건 아주 뚜렷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던 시대가 사사시대야. 그리고 사사시대 이외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져 버렸어요. 이스라엘 땅에서 없어 졌어요. 그럴 때는 막 아말렉이고 암몬이고 그냥 쳐들어와서 쑥밭을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그 가나안땅을 하나 견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말씀으로 통치해 보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질서를 세우고 사람들이 생활을 하게 그렇게 해보시는 거야. 그런데 그 말씀이 없어져 버리면 그건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걸 알아야 되어요. 사람을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이 잔인하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이 말을 하다가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거는 우리 속에도 말씀이 없으면 송장이나 마찬가지라 그 말이야. 하나님 앞에서는 하등 가치가 없는 존재들 속에 가서는 말씀이 없다고 제가 요새 그 생각을 더군다나 간절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광원이 그럭저럭 한 사오십년 되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나이가 오십 살이 되고 육십 살이 되고 그런데 이 이상한데 모두 병신들이 되어 모두가 가만히 보시오. 젊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전부 시들시들 비실비실 하고 전부 나쁘다. 소리만 하고 맨 약사발만 붙들고들 이거 왜 그럴까? 이거 여러 가지로 지적들을 합디다. 이번에 김 준 선생도 동광원 운동을 좀 시켜야 한다. 영혼은 말씀으로 세우지만 육신은 운동을 좀 해야 한다. 별소리 다 하지만 물론 그 말씀 다 옳은 말씀이야. 옳은 말씀이지만 속에 알맹이가 없어져 버렸어요. 모두 그래서 이렇게 약해 빠지는 거야. 말씀이 없어져 버렸어요. 속에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꾸 그 생각을 합니다. 이건 내가 세우는 게 아니야.
내가 믿음을 사람의 믿음을 집어 넣어줄 수도 없고 어떻게 북돋아 줄 수도 없고 가만히 보니까 병만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을 보면 제일 걱정 되는 것이 저거 믿어야 할 텐데 약으로만 저렇게 씨름을 하지 말고 믿어야 할 텐데 아 그 속에서 간절하게 일어나거든요. 믿음이 없어서 저렇게 시들시들해진다. 그래서 이 말씀이 들어가서 살적에 그때 사람이 생기가 나는 거야. 그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골짜기에 사람의 송장 뼈다귀가 꽉차있었지요. 그때 에스겔이가 가보니까 아주 징그럽게 뼈다귀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랬어.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그 뼈다귀가 전부 일어나서 사람이 되었는데 큰 군대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생기가 빠져버리면 전부 뼈다귀야. 오늘 세상을 잠깐 본다고 해도 교회 건물이 좋다고 해서 생기가 있는 것 아니야. 나라에 정치가 잘되고 군대가 강하다고 해서 생기가 있는 것 아니야. 그것은 히틀러의 정치를 보던지 무소르니를 보던지 일본 제국을 보던지 그 나라들이 아주 쇠 덩어리보다 강하고 이건 조금 잔소리 같은 이야기지만 히틀러가 망할 적에 군대가 약해서 망한 줄 압니까? 아마 여기 히틀러가 누군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히틀러가 망한 뒤에도 독일 군대가 세계를 상대로 넉넉히 싸울 수 있도록 무기도 있었고 군인들도 있었다고 그렇게 많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히틀러가 망한 것도 그렇고 어떤 나라가 망할 적에도 전부 망한 이유를 찾아보면 정신이 빠져서 그래 정신이 죽어져 버려서 그래요. 정신이 썩어져버려서 그래요. 그러면 그 나라가 망해요.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고구려 때로부터 죽 내려오면서 나라가 망할 때를 보면 정신이 부패하면 나라가 꼭 망해요. 동광원도 똑같아요. 동광원도 믿음이 식어져 버리고 사랑이 없어져 버리고 정신이 죽어져버리면 동광원같은 건 문제도 없어요. 아 지금 일천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 가운데 동광원은 한웅큼도 못되는 수효가 무엇가지고 되겠소? 어찌되었든지 그 말씀이 속에 가서 살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가 그것이 문제야. 한 사람만이라도 한 사람 만이라도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동광원은 떠다밀어도 폭파를 시켜도 안 망해요. 노아의 홍수 때 모양으로 노아 한사람으로 해서 보전된 거 모양으로 그래서 역사를 보면 언제든지 하나님은 그걸 찾았어요. 하나님하고 아브라함하고 문답한 거 있지 않아요?
그냥 소돔 고모라 성을 찾아갈 때 의인 20명만 있으면 치시렵니까? 열 명만 있으면 치시렵니까? 자꾸 그런 거지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다만 몇 만 있어도 이 소돔 성을 치지 않을 텐데 멸망시키지 않을 텐데 그것이 없어서 소돔성도 쳐버려요. 그러니까는 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돼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 보니까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서 천지 만물을 창조 하셨다는 그런 것도 심지어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한 마리까지도 이거 공중에 날아다니는 먼지 하나까지도 다 말씀하고 상관이 있어요. 말씀하고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 우주 만물 가운데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그랬으니까 하다못해요. 이런 무생물인 책상 까지도 전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전부가 말씀에서 힘을 얻어가지고 생기를 얻어가지고 나와서 물질이 되기 시작을 한다고 그래서 말씀만 걷어가 버리시면 이 우주는 무너져 버려요. 하늘의 별들도 다 떨어져 그 마지막에 거기를 조금 보지요.
계시록 17장인가 거기를 보면 지금 제가 갖은것은 구역성경입니다. 구역성경입니다. 19장 13절 봅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여기 지금 묵시록 19장은 대 환란이 지나가고 심판을 하는 마당입니다. 심판을 하는 마당인데 군대들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마지막으로 가서 인류의 역사를 심판하는 것도 말씀으로 심판해요. 마지막에 가서 천지창조 하실 때도 말씀으로 하시고 마지막에 가서 심판하실 적에도 그러면 말씀이 없는 부분은 심판을 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어디로 가면 어쩌느니 어디로 무슨 교파로 들어가면 심판을 면하니 그거 다 도깨비 같은 소리야 쓸 데 없는 소리지, 말씀이 그 속에서 살아 있으면 심판을 이기는 거야. 인제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 후에 생각을 합시다. 어찌 되었든지 마지막에 가서도 모든 일을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가르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다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증거 하는 것이지요. 말씀이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러면 아담 하와도 흙을 빚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느 사람도 전부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서 사람의 꼴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달랐지요. 예수님만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잉태시키신 게 그래서 그러신 거야.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서 구세주를 만들지 않았느냐? 그 육신으로 된 인간 가지고는 육신으로 망한 인간을 건질 수가 없으니까 내보내신게 예수님이야. 말씀을, 다시 한 번 내보내서 사람의 형상을 뒤집어쓰고 오게 하셨어. 그래서 말씀이, 말씀이 이번에는 직접으로 육신이 되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이번에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육신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이 차고 넘치게 만드신 것이 예수님이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죽지 않으실 몸이신 동시에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 진리가 충만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이것이 예수님 밖에는 없는 거야. 그러니까 독생자야. 이 땅위에 어떠한 존재든지 그 피조물 가운데 육신을 갖은 가운데 은총과 영광과 진리가 충만한 것은 예수님 외에는 없어요. 예수님 외에는 없어요. 그런 예수님을 다시 땅위에 보내셨어요.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과정이지요. 제가 지금 줄여서 간단하게 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과정이 다른 세상 만물을 만드신 과정과는 다르게 은총과 진리와 영광이 충만하도록 만드신 건 한번 밖에 없는데 그것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인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중요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람들이 인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에서 이탈 되었어요.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말씀에서 이탈 되었어요.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말씀 없이 살아왔다. 이 말이에요. 말씀 없이 살아왔다. 그런 것이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서 다시 사람들 속에 생명 새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말씀을 되찾으시는 거야.
우리 사람 속에다가 말씀의 씨를 떨어뜨리시는 거야. 심어 주시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래서 요한1서에는 그것을 지금 사도요한이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신 줄 압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사도요한이 사도요한은 생명을 받은 사람이거든요. 사도 요한이 손으로 만졌다. 이건 직접으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만져봤으니까 손으로 만져 봤다는 것도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육체를 만져본 것 가지고 만져보았다는 것이 아니야. 사도요한은, 그 예수님 안에 있어서 살아서 움직이는 그 말씀, 그 생명을 손으로 만져 보는 거와 같이 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우리가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통으로 말 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다. 어제 저녁에도 주로 말씀한 것이 가장 어찌하든지 제가 곁에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여러분 속에다가 사랑을 좀 쳐 넣어 아마 그때 김 선생님 생각 같으면 그냥 마다리에다 보리 한 차대기씩 쳐 넣듯이 여러분들 속에다가 쳐 넣고 싶으신 심정인 것 같아. 그냥 받으셔야 합니다. 사랑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사람 속에다가 말씀을 이렇게 털어넣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여러 가지 이거 믿음이라고 그래도 좋고 사랑이라고 그래도 좋고 어찌되었든지 우리 사람 생명 속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그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이 힘을 얻어요. 힘을 얻어, 그래서 나는 그 믿음으로 병 고친다는 거 그거 믿어요.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아픈 사람을 더러 찾아가면 아휴 선생님 병 낫게 기도 좀 해주세요. 나 한 번도 기도 안했습니다. 이 사람 병 좀 낫게 해주시오. 기도 나는 이 선생님처럼 이빨이 썩어내려 앉게 해 주시오 그런 기도는 안했어도 병 낫게 해주시라는 기도는 안했어요.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그 병난 몸둥어리 썩어 들어가는 몸둥어리 그냥 아주 힘을 타지 못해서 안 쓰러 워서 쓰러지는 몸둥어리 저 속에 믿음만 들어가면 생기가 날 텐데 그 생각은 있거든. 그 생각은 있어요. 어떠한 병 종류든지 믿음으로 다 낫습니다. 믿음으로 안 낫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반드시 믿음으로 어떤 병이든지 믿음이 들어가서 그 생명에다가 새 생명의 기운만 불어넣어 주면 그때는 사실은 문둥병으로 썩어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지요.
육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찌되었든지 사람이 생기를 얻어서 일어날 수가 있는 거야. 생기를 얻어서 병이 무섭지가 않아지는 것은 사실이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 일 수 록 병이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선생님 같은 분은 폐병 균을 사랑한다고까지 하지 않았소? 모두 잘 믿는 양반을 보면 모두 병균을 사랑하고 다미엔 같은 성인은 그냥 온 몸이 썩어져 들어가니까 아휴 이제 감사합니다. 자기 소원이 이루어 졌거든. 문둥병자하고 친구가 되니까 그 이야기 아시지요? 다미엔이 문둥병자한테 가서 전도를 하는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암만 그래도 문둥병자들이 픽픽 웃고 듣지를 않아요. 자기는 몸둥어리가 성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 뭐, 사랑이 뭐야? 그래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자기가 문둥병자가 되면 그 사람들이 조금 말을 알아들을 것 같거든. 그 다음에는 문둥병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요. 그래서 다미엔이 문둥병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문둥병인데도 아주 악성 문둥병이 되었어요.
손가락이 이렇게 부어서 줄줄 다미엔의 사진을 보면 참 볼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고 코가 이렇게 돼서 떨어지고 귀가 떨어지고 이제 그렇게 되가지고 떡 강대상에 올라서서 문둥병자들 보고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때는 아멘, 그러더래요. 문둥병자들이 그때는 마음이 통했다는 거야. 문둥병자가 되니까 마음이 통했다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거기서 전도하다 죽지 않았소? 그러니까 좌우간 그 다미엔과 같이 내가 저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 사람들 속에 파고 들어가서 그 사람 속에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넣어주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넣어 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저 사람처럼 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대개들 보면 성자들 보면 거의가 그런 사람들이야. 그래서 자신이 문둥병자가 되고 그냥 몸둥어리가 망쳐지고 어찌 되었든지 그 사람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런데 그것도 한 개의 노력뿐이지 그렇게 한다고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고 믿음이 들어가는 건 아니야. 가만히 모르겠어요. 여러분 속에 어저께 저녁에 사랑이 얼마나 받으셨는가? 그 참 조사해 보고 싶어요.
김 선생님이 아마 이것이 깨지도록 책상을 두들기고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셔도 한 푼어치도 안 들어가는 사람 안 들어 살 거야. 오늘 낮에 생둥, 생둥 하고 생둥 하게 그대로 돌아다니지 사랑이 사람이 나 그런 이야기 나왔으니 한번 합시다. 언젠가 한번 당진서 왔다고 청년이 하나 왔습디다. 저 웃집에 예배당 방에 자고 있는데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져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데 산에 가서 이 주먹으로 가지를 치면서 제게 사랑 주시라고 기도를 했어요. 사랑 주시라고, 그런데 끝끝내 했는가? 그건 모르겠어요. 어찌 됐든지 사랑 주시라고 그래서 여기가 죄 깨져 버렸대요. 피가 나서 그 청년도 놀라운 청년 입디다. 나는 그렇게 안 해봤어요. 그 말을 듣고 대답할 말이 없어지더라니까요. 나는 그렇게 까지 하나님한테 사랑 주시라고 바위에 손이 깨지도록 했나? 그래서 그냥 뭐 할 수 있소? 하나님이 주실 거요. 나는 그러고 말아버렸지. 그렇게 구하는데 안주실거요? 어찌 하든지 그렇게 받아보려고 애를 쓰고 마음에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또 믿음을 받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이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야.
그게 들어가기만 하면 그런데 그것이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거든요. 그냥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별 방법을 다 써서 그 사랑이 들어가요. 지금 교회에서도 그것들을 사랑을 집어넣어 주려고 예수님의 믿음을 집어넣어 주려고 모두 부흥회들을 하고 마루 장을 두드리고 통곡들을 하고 철야를 하고 그러지 않소? 그거 뭐 다른 거 때문이요. 믿음 받으려고 좀 믿게 해 주시라고 그러고 야단들을 해요. 그런데 어쩌든지 그것이 들어가야만 살아요. 우리들은 그런데 여기 요한 1서에 보면 우리가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말씀에 대한 건 지금 여러분이 제가 말하는 거 다들 듣고 계시지요? 졸지 말고 들으시오. 귀들 열어놓고 들어요. 말씀 하는 것을 듣기는 들어요. 듣기는 들어요. 그러나 육신이 듣는 것이 듣는 거요? 마음으로 들어야지, 마음으로 들어야지 또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어찌 하든지 저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듣고자 애를 쓴다 해도 마음에서 깨달아 져야지 깨달아 져야지, 그래서 그것이 이렇게 사도 요한과 같이 이렇게 증거 할 수 있어야 해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사도요한은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요.
사도요한도 실수 많이 했지요.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도 엉뚱한 소리도 많이 하고 실수 많이 했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이 요한 1서는 주후 92년경에 쓴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사도요한도 나이가 90살이 넘고 이제 아주 사랑의 사도라고 이름이 날 정도로 사랑으로 녹아진 때쯤 되니까 마지막에 가서야 이것이 느껴져요.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본 것 같고 귀로 들은 것 같고 손으로 만져본 것 같아요. 그러니까는 요한 1서 밖에 없거든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일언이폐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걸 한마디로 설명 하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더라. 그건 사도요한만이 할 수 있는 소리야. 우리가 암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소리를 지르고 목청이 터지도록 애를 써도 알아지지 않아요. 사도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만져보았고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여기 이 말씀이 주목하고 라는 이 말씀이 우리나라 말에는 단순이 주목이라고 그랬는데 외국어 성경에는 그걸 여러 가지로 표현을 했어요. 일본말 성경에 보면 그 스라스라 라는 말로 쓰였는데 스라스라 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근사하게 표현을 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아주 눈이 뚫어지도록 닳아지도록 종일 상고해 봤다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걸 예수님에 대한 걸 그렇게 해보니까 그건 틀림없이 손으로 만진 바인데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되었으니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이 사도 요한이 여기서 증거 하는 것은 아주 그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고 체험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보고 이건 틀림없이 진리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았어요. 사도요한은, 우리가 우선 거기까지만 놓고 생각을 해보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걸 얼마나 알았는가 모르겠어요. 그냥 예수님 이라는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안 돼. 또 약간 좀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물만 조금 찔끔거리고 아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어요. 그러고 조금 마음에 감동만 느끼는 그것가지고도 안 돼요. 이것은 뒤집어 놓거나 제쳐 놓거나 자기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가 되어서 분리시킬 수 없는 상태, 분리시킬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빠져버리면 사도 요한 자신도 없어져버릴 정도로 된 상태로 되어버린 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이가 그런데 그 요한이가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걸 제일 많이 말을 했지요.
그래서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살아생전에도 예수님을 제일 가깝게 따라다녔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 유대나라 풍습에는 밥을 먹을 적에 이렇게 한 사람이 이렇게 하고 밥을 먹으면 그 다음 사람은 가슴에다 기대고 길게 비스듬히 앉아서 밥을 먹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되어있어. 예수님이 사도요한을 품에 안고 다니셨겠소? 가슴에다 이렇게 어찌되었던지 예수님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많이 지냈어요. 그런데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으로 알지를 못했어요. 사도요한이 그래서 중간에 보면 가끔 가다가 엉뚱한 실수를 많이 하지 않았어? 그런데 나이가 8-90세나 되어가지고 그 밧모섬에 가서 귀양살이도 하고 그 에베소 교회 가서 그 어려운 일도 많이 하고 그 큰 교회거든요. 거기 가서 눈물 콧물 많이 흘려보고 그러고 그때 가서야 조금씩 예수님의 사랑이 알아졌어.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 그렇게 사도요한이 마지막으로 강대상에서 설교 할 적에는 이렇게 말을 많이 안했대요. 기운도 없어서 너무 늙어서도 그랬지만 그냥 이렇게 손을 벌리고 다 쓰러져가는 태도로 올라서서 서로 사랑해라. 한마디만 하고 그만 두었대요.
그것이 큰 감화를 주고 마음을 자극을 줬다는 거 아니요?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이렇게도 설명을 그러니까 요한 1서에 가보면 그냥 4장 근처에 가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저는 처음에 여기서 시간이 나면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제 멋대로 마음대로 만들어 가지고 믿으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그걸 좀 제 나름대로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것을 좀 이야기 하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도요한의 말을 빌리면 그것도 쓸데없는 짓이야. 그냥 사도 요한더러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한마디로, 그냥 그렇게 말하고 그친 거야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동시에 체험도 보통 체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사랑 화 해버려야지. 그래서 뒤집어 놓고 봐도 제쳐 놓고 봐도 그 사람 속에는 사랑 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해요.
우리가 말로든지 생각으로든지 행동으로든지 사랑의 법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야지요. 가령 쉽게 말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같이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뭐 어쩌고 아주 노래들도 잘하지 않습디까? 그것이 그대로 구비가 되어 있어야 해. 그 조건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되어버렸어야 이제 조금 사랑 화 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그렇게 변해져야 우리 자신이 제가 오늘도 느꼈습니다만 제가 외손녀딸이 두어서넛 있습니다. 그런데 꽤 할아버지를 따르는 것 같아요. 마음으로, 오면 인제 큰 손주 딸은 조금 나이가 먹어서 조금 떨어져 앉아서 얌전을 뺍니다. 그리고 둘째하고 셋째는 서로들 여기 와서 이렇게, 그런데 나는 이걸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걸 안아주고 너를 사랑한다. 그래야 만족 하려는지 말로도 이렇게도 안 되겠고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이 오면 얼떨떨해져요.
아 이거 사랑을 받기는 받아야겠고 사랑을 주기는 줘야겠는데 어떻게 줘야할지 참 딱해요. 이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그대로 온전히 상대편에다가 전해 주기도 어렵고 보여주기도 어렵고 이 사도요한이쯤 되면 아주 확실하게 보고 듣고 손으로 만져본 것이라고 했거든. 만져본 것이라. 이제 그때 가서야 말씀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조금 우리가 사랑에 대한 것을 말씀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때 가서 그러니까 우리 생활이 만일 그렇게 해가지고 사랑으로 전체가 그냥 참 녹아져 버렸으면 우리 사랑이 녹아져 버렸으면 그러면 그때 가서 사랑을 말할 수 있지요. 사랑을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이제 말씀이 태초에부터 있었다 하는 걸 거꾸로 올라가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먹은 거야.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면 이제 사랑에 대한 것을 지금 자꾸 예로 들었지만 어떠한 덕목을 들어놓고 봐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덕목이 풍성하게 성숙되어 가지고 있는 말씀을 가르치는 거야. 다시 말하면 온유 겸손 겸손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해진 사람은 뭐 뒤집어놓고 봐도 제쳐 놓고 봐도 두들겨 패도 겸손이야. 겸손 밖에는 없어. 그 사람 속에는 도저히 혈기나 교만이 붙어 있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겸손해 졌어. 그런 사람은 겸손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보면 설교 할 사람 어디 있겠소? 몰라요. 다른 분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로 내가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체험한 사람이야. 겸손에 대해서 온유에 대한 것도 그렇고 절제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인내에 대한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그 열매를 풍성하게 갖으라고 그랬어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갖으라고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겸손과 절제와 인내와 양선과 자비와 모두 그런 거지요. 그런 건데 그 중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이렇게 견주어서 생각해 볼 때는 절제라든지 인내라든지 그거 한가지만이라도 우리 안에서 익어 들어가면 사실은 그런 거지요.
많이들 말씀하는 거지만 아무 덕목이라도 좋아요. 친절이라도 좋고 절제라도 좋고 인내라도 좋고 한가지만이라도 완성되면 다른 건 저절로 다 완성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은 말씀에 대한 건 이것 다르고 이것 다르고 그런 법이 없어요. 가만히 그건 조금만 명상을 해보면 알아져요. 진리는, 진리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진리라고 그러신 것이 그렇게 일생동안 보고 씹어보고 생각해봐도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는 거야. 예수님이 어째서 자기는 진리라고 그랬을까? 물론 예수님에게는 거짓이 없으니까 진리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그것으로 될 것 같은데 그것만이 아니야. 예수님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그랬지요. 사도 바울은 그걸 강조 했거든요. 그 안에는 모든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그러니까 그 전에 여기 광주 나중에 목사가 되었지요. 장로님 일적입니다. 김 용화 장로라고 아주 성경 잘 아는 분인데 인제 그 양반은 어디 가서 그렇게 성경 공부를 많이 했는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잘은 모르겠는데 아주 참 성경에 도사야. 도통을 했어요.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의례 이런데 와서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데나 한군데 읽어 보시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아무데나 에베소 33장하면 33장 1절을 읽습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풀어나갑니다. 풀어나가면 그냥 꼭대기로 창세기까지 올라가고 아래고 묵시록까지 내려가고 아주 그냥 절수 외우는 거라든지 참 도통한 양반이야. 그런데 그 양반이 이야기 할 적에 보면 하나님의 빛에 대한 걸 이야기 하면 빛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데도 하루 종일 서서 그냥 낮에는 얼굴이 환해지고 광채가 나도록 그냥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그래도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요. 그래서 확실히 저 양반은 말씀을 체험한 사람이로구나. 말씀을 말씀에 도통한 사람이로구나. 그런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그 전에, 그랬는데 지금 그분 제자들이 몇 분 있지요. 광주에도 그 말씀이 자기 속에 와서 그렇게 화해져 버리도록 그렇게 되는 데는 일생을 걸려도 어려웁디다. 대개 보니까, 그런 사람은 결점이 없느냐하면 그래도 결점이 나와요. 그러니까 완전히 뒤집어 봐도 제쳐 봐도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고 결점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을 아직은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영이 열리지 못했으니까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본 중에 이 현필 선생님이 근사한 분이다. 그렇게 보여 졌으니까 그분을 따랐지요.
그분은 아주 생활이 말씀대로 사는 양반이다. 하는 걸 내 이 이야기는 드문드문 했지만 또 하고 싶어요. 제가 맨 먼저 이 현필 선생님을 왜 따랐는지 알겠소? YMCA 총무로 있을 때 거기 왔을 때 가만히 그 양반을 보니까 성경 말씀대로 사는 양반 같아. 제가 이 현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 공 어른도 잠깐 뵈었지요. 이 공 어른도 잠깐 뵈었는데 이 공 어른도 말씀대로 사는 분이라고 그런데 이 선생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무서워 보이지 않습디다. 처음에 그 이 공 어른은 처음에 보면 무서워요. 제일 무엇 때문에 내가 무서워했는가 하니 그 양반은 말씀 한마디 이렇게 성경에서 깨달으면 그대로 산대, 그대로 실천으로 옮긴대. 그것이 무섭더라니까 말씀 한마디, 한마디 그대로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 땅위에 어디가 있겠소? 성경을 그러니까 아휴 저 양반 무서운 양반이야. 그렇게 그런데 이 선생님도 가만히 보니까 말씀을 그대로 생활로 옮기는 분이야. 뭐 조그만 것 하나도 가령 이거 좋지 않은 예가 나오지만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셨지요. 입원하고 계실 적에 그 현 동완 선생이라는 양반이 훌륭한 양반이지만 또 한쪽으로 짓 굳은 양반입니다. 제가 서울 올라가서 이 선생을 이야기를 조금 했어요. 그래 정말일까? 그런 사람이 있을까? 내가 한번 가봐야지. 그러고 이제 광주를 처음 내려왔어요. 그 양반은 꼭 어디를 가면 유 영모 선생을 모시고 다니거든요. 그래 유 영모 선생하고 둘이 광주에 왔어요. 그래가지고 자꾸 다녔어요. 그 다음에는 이 현동완 선생이 광주를 다니면서 이 현필 선생의 흠만 보기 시작을 했어요. 저 사람이 저렇게 완전한데 첫째는 한두 가지만 예를 들어야지. 음식을 통 안 잡수거든. 이 현필 선생 음식 잡수는 거를 볼 수가 없거든. 저 원래 밤중에라도 먹지 않을까? 혼자 있을 때 몰래 먹지 않을까? 그것을 찾느라고 애를 썼었어요. 그래 한번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가보니까 그 메트레스 있지 않소? 두꺼운 요, 그걸 둘을 포개서 깔고 그때 제중병원 원장 카딩톤씨가 아주 이 선생을 예수님 모시듯 했어요. 그래가지고 돈 한 푼도 안내는 양반을 일등실에다 모셔놓고 아주 특별대우를 했지요.
몸은 약하고 힘은 없고 아마 불쌍해서도 그랬겠지만 매트레스를 둘을 깔아 드렷던 모양이야. 딱 그걸 보고 나오시더니 ‘이 현필이 틀렸어. 매트레스를 둘씩 깔고,’ 그런데 그 말씀이 귀에 들어갔어요. 어떻게 들어가니까 단통 매트레스 하나 치우라고 어찌되었든지 무슨 소리든지 자기 잘못을 누가 지적을 하면 한 번도 발끈하고 노여워하는 것을 내가 보지를 못했어요. 그냥 그 시간에 고쳐버려요. 그 시간에 그것이 겸손이지요. 아주 이 현필 선생 교만하다고 소문이 났었지요. 누구 말 듣지 않고 그래도 자기 잘못된 것을 누가 지적만하면 아주 제꺼덕 제꺼덕 그냥 일분도 지체를 하지 않고 용기가 있어 과감성 있게 그냥 그렇게 가만히 보니까 하는 양반을 내가 못 봤거든요. 통, 그리고 옷도 처음에 떨어진 옷을 이렇게 입고 제가 YMCA총무로 있으면서 양림회관에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부부생활을 할 적이거든요. 추운 겨울이야. 아마 11월인가 12월인가 눈보라가 드리치는데 밖에 가서 유리창 문이 있고 안에 가서 미닫이문이 있고 그런데 누가 와서 이렇게 유리창을 똑똑 두드려요. 그래서 이렇게 내다보니까 이 현필 선생이야. 그때는 제가 그렇게 친할 적도 아니에요. 이 현필 선생이 밖에 와서 계셔요. 그래서 잠옷 입은 채로 뛰어나왔어요. 왜 그러시냐고 아 이렇게 보니까 그 추운 겨울인데 이 볼기짝 살이 드러날 정도로 그냥 홑 것 의가 찢어져서 캄캄한 밤중이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뭐 얼음 덩어리 같아. 사람이 그래서 옆에 불 안 땐 방이 하나가 있어서 그리 들어가시라고 그런데 그렇게 찾아왔어요. 찾아왔는데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뭐 단단히 하실 말씀이 있어 왔던지 전도를 하러 왔겠지 하는데 말씀 한마디 없었어. 그날 저녁에 꼭 그 양반 찾아오면 그렇게 모양만 비치고 가십니다. 말씀 잘 안하십니다. 그러고 밤에 나도 따라서 그 곁에 방에서 덜덜 떨고 밤을 새고 그리고 이튿날 가시게 했지요. 그러기를 처음에 몇 번 했지요. 내가 처음 만날 적에 그랬는데 그 양반 하는 태도 보니까 알듯 하면서도 통 모르겠어요.
그 양반이 그때는 내가 그 뭐라고 그래요. 미쯔소로에를 뭐라고 그래 신사양복 쭉 뽑아서 하고 머리고 갈라붙이고 막 뻐기고 다닐때에요. 구두신고 그 양반이 나를 그거 한번도 지적해 본 일이 없어요. 그 양복 벗어버려라 그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양반 보고 있는 가운데서 자꾸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서 이 양복 입은것이 거지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그런 생각이 나서 슬금슬금 벗어져 버렸어요. 양복을 그 머리도 슬그머니 깍아져 버렸어. 언제 깍았는지도 몰라. 그래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변해져 가지고 나중에 구두도 벗어버리고 가방도 집어 던지고 그 다음에 책이 꽤 많이 있었지요. 있던걸 평양신학교 다닐적에 꼭 이 책은 평생 붙들고 다니자 한 가지가 헬라어 책이 있엇어요. 요것만은 내가 늙어 죽도록 가지고 다녀야겠다. 하는 그 책가지도 없애버렸어요. 성경 주석 좀 좋다고 뽑아 놨던거 다 없애 버렸어요. 그 양반 말 한마디도 듣지 않았어요. 그대로 필요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성경 주석을 안봐도 통하는게 이상한거야. 성경 주석을 하나도 보지 않아도 성경을 어디를 보던지 뜻이 뚫어져요. 생활이 바꿔지니까 여러분들 참고를 하시오. 여러분들 중에도 성경보고 모르겠으면 말이야 뜻을 모르겠으면 회개하면 돼요. 회개 생활을 고치면 성경 뜻이 알아져요. 나도 지금 다 안다는것 아니야. 다 안다는게 아니야. 그게 내 경험이야. 자꾸 껍데기를 벗어버리니까 성경이 자꾸 보여지더라니까. 지금도 나 주석 안봐요. 성경주석은 다 모르지만 안봐요.
그래서 이 선생님 생활을 조금씩 조금씩 따라가다 보니까 맛을 알겠더라니까. 예수 믿는 맛을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 선생 제자가 되었지요. 그 양반이 날더러 따라오라고 한마디 했겠소? 한마디 이상스러운 소리는 했지요. 제가 수피아 여학교 교감으로 있을적에 한번 오시더니 제가 왔다가 가시니까 따라 나가는데 이거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나갑니다. 저 남광주 정거장으로 나가십디다. 그래 나도 인제 거기까지 따라나갔지요. 따라나가는데 이러고만 계셔도 될까요? 그럽디다. 바로 여수사건 전이야. 바로 전이야.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가족들은 제게다 맡기십시오.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이 거지같은 양반이 볼기짝이 들어나고 그냥 콧물이 쪼르르 흐르는이가 그때 내가 일곱식구인가? 여섯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는 판인데 가족을 자기에게다 맡기라고 참 엉뚱한데가 있구나. 그러더니 이제 피를 많이 흘릴겁니다. 일어나셔야지요.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런 뜻으로 말을 해. 그래서 그냥 남광주 정거장에 가서 한참 앉아있다가 갈렸거든요. 그리고 그 뒤에 만나서 같이 이렇게 돌다가 여순 사변이 강진가서 만났나? 강진가서 만났어요. 그래가지고 그런데 그 양반의 생활 태도를 보면 성경이 그대로 보여지는것 같아. 그 양반의 사시는 태도를 보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양반 말씀을 듣는거 보다 생활을 자꾸 들여다 봤어요. 생활을 자꾸 들여다봐. 그런데 말씀 하는것도 그렇거든요. 말씀 하는것도 절대로 이렇게 큰소리 내거나 더러 큰소리 하시지만 내지 않고 조용조용히 그냥 아침부터 저녁가지도 선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내가 아는 성경 지식에서 한발자국도 옆으로 나가지를 않아. 전부 성경말씀을 그대로 하시거든. 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나가는것 같지만 그 양반 말씀을 들으면 그런것이 없습디다. 그래서 그 양반 이렇게 그래서 그 양반은 성경을 생활화 한 양반이다. 하는걸 내가 보게 된거야.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 생활화 하는게 문제야.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이도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진리에 대한것이 생활화 되었어요. 그러니까 손으로 만져보았다. 눈으로 보았다. 귀로 들었다. 암만 자세히 자세히 상고해 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더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가서야 우리가 말할 자격이 생긴다. 그 말이지요.
그때 가서야 말할 자격이, 그 다음에 그 외에 말하는건 전부 헛소리 들이야. 요새 정신병자들 우리가 많이 데리고 있어서 의례 정신병자가 무슨 말하면 쓸데 없는 소리야. 듣지 말라고 자기들이 하는 소리는 쓸데 있는 소리인가? 맨 씨부렁 거리고 종일 하는 소리들이 하나도 안해도 좋을 소리들만 종일하고 있는데 맨 그리고 이왕 거기가지 이야기가 났으니 우리가 말을 하는데 사람의 말이라는건 꼭 뜻이 있어요. 뜻없는 말을 하는건 짐승 개가 짖는거와 같아. 뜻없는 말을 하는건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이왕 뜻이 있으면 이왕 뜻이 있으면 진리의 근처까지는 가야지요. 진리를 고대로 말하는건 은혜받지 않고는 안되는 거지요. 진리를 그래도 말하게 되면 진리하고 상관도 없고 동떨어진 말만 씨부렁 거리는건 그건참 불쌍한거야. 종일 그런 말만 씨부렁 거리고 사는것은 그건 참 불쌍한거야. 그래서 여기 말씀이라는 말로 처음 시작을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 그 말입니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시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은 진리 그대로이고 안과 밖이 없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말씀 요한 1서에 기록된 대로 보면 이 말씀 가운데는 생명이 그 안에 있었다. 진리가 그 안에 있었다. 말씀 안에가서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다. 그러니까 그 말씀으로 만물이 지어졌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한번 엄숙하게 앉아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우주가 하나님의 목적 없이 이렇게 너저분하게 별을 박아놓고 이러지 않으셨어요. 무슨 큰 뜻이 계셔요.
이 지구 덩어리 만든것도 에덴 동산을 만든것도 전부가 큰 뜻이 있어 만든거야. 이렇게 우리들 모양으로 옷모양이나 내고 밥이나 세끼 죽여버리고 그러고 뒷간이나 왔다갔다 하고 그러고 살라고 만들어 놓으신게 아니라 그 말이에요. 말씀으로 만드셨어요. 말씀 그러니까 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우주만물이 전부 뜻없이 생긴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야. 전부 뜻있지, 그러기에 그런 말들을 더러 합니다. 모기를 하나님은 왜 만드셨을까요? 어디 그 누구 대답해 보시오. 아 그 귀찮은 모기를 하나님은 왜 만드셨을까요? 자기가 모른다고 결론들을 짓지만 모른다. 다 모기도 목적이 있어요. 만드시고 파리도 목적이 있어 만드시고 하루살이도 목적이 있어 만드시고 이 공중에 날라다니는 먼지 하나도 목적없이 만들어진게 하나도 없어. 이 세상에 있는 물건 쳐놓고 목적없이 만들어진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조금 생각있는 양반들은 이 공어른 같은 양반은 길을 가다가도 이렇게 조그만 벌러지 하나 지렁이 같은게 하나 떨어지면 반드시 손으로 집어서 옆에다 이렇게 놔두고 가고 그러셨다지 않소? 이렇게 풀잎 하나라도 함부로 쓰러뜨리고 제가 그전에 이 선생하고 육이오때 화학산 속으로 돌아다녔지요. 화학산 속으로 그 이 선생님은 이렇게 앞에 가시는데 화학산 속으로 그때 이제 막판에 가서는 9월 말경까지는 거기있었나? 그랬습니다. 어찌던지 그 깊은 소반바위 근처에 가면 그냥 풀이 이렇게 많아요. 그 큰풀을 이렇게 헤치고 지나가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그림자와 같이 곱게 지나가시는지 바람같이 지나가셔요. 풀을 밞아서 쓰러뜨리지를 않아요. 그 바쁜통에 지금 빨치산에게 피난을 다니는 판인데 그런데도 그 풀틈으로 다니시는데 살살 이렇게 풀을 손으로 헤쳐가면서 그렇게들 아주 생명체 하나도 다치지 않으려고 산 생명 하나도 다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이 공 어른 같은 양반은 가다가 개미 한 마리가 이렇게 밟히면 아휴 내가 네게 밟혀 죽어야할 내가 너를 밟아 죽였구나. 그러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렇게 생명체들을 아끼고 하나님의 피조물에는 다 뜻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신것이 까닭없이 만드셨을 리가 없어요. 저도 그건 말은 요렇게 하지만 거의 무시하고 삽니다. 말도 못할 정도로 무시하고 사는데 그래서 이게 내가 지금 육신이 살아있고 거듭나지 못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생명의 말씀이 없어서 이렇게 거칠게 살고 지나가는구나. 세상을 지나가는것이 왜 좀 평화스럽게 은혜롭게 곱게 지나가지를 못할까? 이 세상을 하나님처럼은 살지 못해도 하나님의 아들 답게 하나님의 딸답게 그렇게 이 세상을 걸어가지 못할까? 그 성경에 그 말이 나오지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만물이 무한한 탄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그런 말씀이 있지요? 만물이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사는데 신음을 하고 있다. 신음을 하고 있다. 그냥 뭐 저런 선머슴 어린애들이 산에가서 나뭇가지 뚝 뚝 꺽는건 말할것도 없고 그저 꽃가지가 조그만 이쁘면 여기는 그런 사람 없을거야. 아마 그냥 꽃가지 딱딱 꺾어서 꽃병에 갖다 딱딱 꽃고 그냥 견딜수가 없어. 만물이 꽃나무도 견딜수가 없고 그냥 여기 지금은 이를 잡아서 요렇게 모셔놓는 이들은 없지요. 그때 한참은 그랬거든. 그래서 아주 그것 때문에 소문이 났지 어찌되엇든지 조그만 생명 하나라도 다치지 않고 상하지 않고 곱게곱게 이렇게 이 세상을 지나가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지나가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 말이지요. 만물이 무한한 탄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인제 말로 다시 돌아갑시다. 말로 어떻게 사람을 많이 죽이는지 아시오? 말로 말 함부로들 하거든. 말 함부로들 그냥 그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처를 받을 소리 함부로 하거든요. 아무 이유도 없는 말을, 우리가 먼저 이 시간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