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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쾌활한 장례
출생 1821년
사망 1867년
샤를 보들레르
샤를 보들레르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너른 땅, 달팽이 우글거리는 곳에, 내 잠들 웅덩이를 손수 파련다.
거기 내 늙은 뼈를 편안히 눕혀 파도 아래 상어처럼 망각 속에 잠 들련다.
나는 유언도 무덤도 싫고. 찬송도 눈물도 싫다.
차라리 굶주린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 해골을 쪼이게 하라.
쾌활(快活)한 장례(葬禮), Le Mort Joyeux
기이(奇異)한 시다. 주검이 쾌활하다고 노래하다니. 누구나 가는 마지막 길에 장송곡은 물론 슬피 울어줄 사람도, 무덤도 필요 없다. 광야에 뿌려져 공중 새들의 밥이나 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주검이 쾌활하다.
시 전체가 주는 임종의 헐떡임이 차라리 통쾌하다. 죽어서까지도 집착하는 이들이 많기에.
보여 주기 식의 장례식, 부조금 회수, 명당자리, 유산 다툼. 게다가 죽음 앞에서까지 천당, 극락을 놓고 떠들 때 일순간 그 주검은 불쾌한 것이 되고 만다. 시작보다 끝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서 주검도 충분히 쾌활해야 하고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의 시처럼 쾌활할 수 있다.
보들레르에겐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기괴하다(Le beau est toujours bizarre)’는 신념이 있었다. 해골로 변한 미인을 시로 표현했고 전래적으로 악마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그 결과 시를 통해 웅변과 조형적 효과보다 미묘한 해조(諧調)와 음악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절대적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한 그의 시에는 악마적 광기가 번뜩인다. 그 광기가 주는 환상과 매력 때문에 보들레르의 이름만 들어도 전율하는 사람이 많았다.
보들레르라는 이름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프랑스 대표 시인’, ‘현대문학의 방향을 결정한 문인’, ‘21세기 신 유목민의 표상’ 등. 이런 수식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라는 사람 자체는 언제나 천진난만한 바보였다. 머물고 정착하기보다 길손처럼 대기실을 좋아했다.
그런 보들레르였기에 여러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편력을 펼친 와중에도 전 생애를 통틀어 그를 뒤흔든 여인은 ‘검은 비너스’였다.
상처를 핥아주는 암호랑이
보들레르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지금의 돈으로 20억 원이 넘는 유산을 받게 된다. 아버지의 유산이 성년을 맞은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보들레르의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떠난 이듬해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Jacques Anpick)를 만나 재혼하면서 상속권을 잃게 된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나이가 어려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결국 보들레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유산을 관리해줄 위원회가 꾸려진다. 하지만 그들은 보들레르에게 수치심과 모멸감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의붓아버지 역시 보들레르에게 권위적이었다. 학교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집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곤 했다.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 했던 보들레르는 겉도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가정에도 적응 못 하던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강압적인 학교였다. 주변 환경에 대한 증오심은 결국 그를 불량 청소년으로 만들었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땐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불미스러운 일까지 벌어지고 만다.
화가 난 의붓아버지는 보들레르를 인도의 콜카타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인도로 가던 배가 사고를 만나 아프리카 남단 인도양의 모리스 섬과 부르봉 섬에 10개월간 체류하게 된다.
열대의 작은 섬에서 그는 생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국적 정서, 붉게 타오르며 서서히 가라앉는 적도의 해 질 녘 어두운 밤 끝없이 흘러내리는 별빛을 품고 살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시심이 기지개를 켜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되자, 그의 삶은 흥청거린다.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려 술집을 전전했고, 사창가에서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때 잔 뒤발(Jeanne Duval, 1820~1862)을 만나게 된다. 혼혈 여인이었던 뒤발은 그가 10개월을 보낸 인도양의 작은 섬과 닮아 있었다. 그 섬에 작열하는 태양, 검게 빛나는 여인들과 흡사했다.
잔 뒤발
잔 뒤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부채를 든 여인〉, 1862년, 캔버스에 유채, 113×90cm,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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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없는 누런 피부와 튀어나온 광대뼈, 새까만 눈과 윤기 나는 머리카락, 풍성한 육체는 그녀의 부정과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그다지 예쁠 것도 없는 그녀에게 보들레르는 스스로 일생을 묶어 둔다.
뒤발은 사랑의 고수였다. 순진한 보들레르의 애만 태울 뿐 쉽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밀고 당기며 보들레르를 애를 태운 덕에 2년 동안 뒤발이 해달라는 모든 것을 해주느라 유산의 절반을 탕진한다.
이 일로 분노한 어머니는 법원에 소송을 낸다. 결국 한정치산자가 된 보들레르에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비용의 유산만 주어지면서 궁핍한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보들레르의 문학에 있어서 뒤발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거액의 돈 대신 예술적 야수성(野獸性)을 안겨준 것이다. 보들레르의 문학을 견인한 목마름이었고 호기심이었다. 명저 《악의 꽃(Flowers of Evil)》도 뒤발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
보들레르에게 뒤발은 한없이 ‘되돌아오는 유령’이었다.
마치 야수의 눈을 가진 천사인 양,
어둔 밤의 그림자를 타고 그대 침실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리라.
갈색 여인아. 나 그대에게 주리라. 달빛처럼 아득한 입맞춤을,
아침이 밝아 올 때 너는 알리라. 내 자리가 비어있음을. 저녁까지 그곳이 싸늘하리라. 남들이 그대 삶과 젊음을 애정으로 대한다 해도 나는 공포로 그대에게 군림하리라.
보들레르의 낮이 이성이었다면 밤은 감성이었다. 감성은 항상 이성을 이겼다. 밤이 되면 이성이 아무리 막아도 보들레르는 대뇌피질이 없는 야수처럼 뒤발을 찾았다. 날이 밝으면 내가 잔 뒤발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있다고 큰소리쳤으나 밤만 되면 군림이 아닌 지배당하는 처지였다. 진정한 승자는 밤에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들레르는 애처로운 노예였다.
수많은 비평가가 보들레르의 모든 불행이 그녀 때문이라 타박해도 그녀만이 나의 즐거움, 유일한 휴식, 최고의 소일거리라며 ‘나의 검은 비너스’라 찬양했다.
낮의 여인 하얀 비너스
뒤발이 보들레르의 밤을 지배하는 여인이었다면, 낮의 여인은 아폴로니 사바티에(Apollonie Sabatier, 1822~1889)였다.
당대 프랑스 최고의 미녀였던 사바티에의 살롱엔 언제나 사람들로 들끓었다. 미모와 교양을 갖춘 그녀의 단골이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그녀를 모델로 삼고 싶어 했다. ‘하얀 피부의 마돈나’라 불렸던 그녀는 하얀 피부에 조각 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서 모델이 되는 순간 그 작품은 화제의 중심에 떠오르곤 했다. 보들레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뒤발과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지 7년이 되던 1848년이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보들레르 역시 사바티에의 살롱에 단골이 된다.
뒤발의 관능에 허우적대던 브들레르에게 사바티에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여인이었다. 뒤발이 악의 꽃이었다면 사바티에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여인이었다.
화가의 작업실
화가의 작업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54~1855년경, 캔버스에 유채, 361×598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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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초겨울, 오랫동안 사바티에를 가슴에 품고 살던 보들레르는 익명의 구애 편지를 보낸다. 이미 수많은 구애 편지를 받고 있던 사바티에인지라 보들레르의 편지도 가벼이 여긴다. 그러다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명문장의 연애시가 매주 월요일마다 날아들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딱 한 번 그대 고운 팔이 내 팔에 닿았다오. 그 추억이 내 넋의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오. 이슥한 밤, 장엄한 어둠이 강물처럼 파리 위를 흐르고 보름달은 금메달처럼 하늘에 걸려 있소. 고양이들은 집들의 처마를 따라 지나가고 있구려. 이 달빛 아래 성스러운 그대에게 내 시린 심정으로 찬가를 드리고 싶소. 아무리 어둡고 고독한 거리에서도 그대의 환영은 헛불처럼 허공에 있네. 그 환영이 감히 내게 말하네.
‘미의 여신인 내가 네게 명한다. 오직 나만 사랑할지라. 내가 곧 뮤즈요, 마돈나요 수호천사니라.’
〈고백〉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시가 날아들 즈음 사바티에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보들레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말투와 시의 문체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었던 보들레르와 사귀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바티에가 눈치를 채고 보들레르에게 남다른 친절을 베풀자 보들레르는 살롱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3개월 뒤, 편지 한 통이 양장본 시집 하나와 함께 배달되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궁금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영상이며 나의 비밀스러운 미신입니다.
편지는 사바티에를 감동시켰다. 그날 밤, 사바티에는 보들레르를 초대하여 함께 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사바티에는 보들레르에게 편지를 쓴다.
어젯밤 일을 차분하게 돌이켜 봅니다. 지금껏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제 마음을 당신이 이토록 들뜨게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쓴 첫 편지였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사바티에가 직접 보들레르를 찾아갔다. 보들레르는 냉담했다. 별로 반기지 않는 보들레르에게 낙담한 사바티에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이를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끝나 버렸다. 이 무렵 보들레르는 이미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새로운 연인은 몽마르트르에서 상영된 ‘금발 머리의 미녀’를 통해 유명배우가 된 은막의 스타 마리 도브랭(Marie Daubrun, 1827~1901)이었다.
마리 도브룅
마리 도브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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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랭 역시 뒤발과는 판이했다. 겸손하고 친밀했던 그녀에겐 건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도브랭은 이미 시인 테오도르 방빌(Thedore Banville)과 동거 중이었다. 친구였던 방빌의 여인이었지만, 보들레르의 구애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지만, 방빌과의 신의(信義)때문에 더 이상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그 일로 친한 친구였던 보들레르와 방빌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안녕! 짧았던 찬란한 여름날은 가고 벌써 안방 부엌에 장작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그래도 다정한 임이여. 오늘만이라도 심술궂은 내게 가을 석양의 감미(甘味)가 되어 주오.
보들레느는 도브랭에게서 시적 영감을 얻어 〈가을의 노래〉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긴다.
사랑에 이유가 있을까?
보들레르가 사바티에는 물론 친구의 연인인 도브랭과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뒤발과는 헤어지질 못한다. 삼중연애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둘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심지어 사바티에와 도브랭과 헤어진 뒤 뒤발과 동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술과 남자로 세월을 보낸 창녀 출신의 뒤발이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자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삼십 대에 중풍이 오고 사십 대에 병원을 전전하느라 수많은 치료비가 들었지만, 보들레르는 묵묵히 그 비용을 지불했다.
시인의 입지를 굳힌 보들레르가 병들고 가난한 창녀를 위해 헌신하자 모두가 의아해한다. 특히 뒤발의 치료를 위해 빚까지 지고 사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잦았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보들레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뒤발과 풍파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이별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좋은 경치를 볼 때 안타깝고, 귀한 물건을 보면 뒤발이 떠오릅니다. 뒤발만이 내 위안이고 제 쾌락이며 유일한 동무입니다. 저도 이런 자신이 놀랍습니다.
편지 속에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보들레르의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미모라면 사바티에가 있었고 착한 성품이라면 도브랭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늘 돈이나 요구하던 무지하고 욕심꾸러기인 뒤발 곁에 남아 있었다.
검은 피부에 육감적인 몸을 가졌던 뒤발은 ‘검은 비너스’라 불렸다. 보들레르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던 그녀는 순진한 보들레르 앞에서 때로는 악마처럼 때로는 천사처럼 굴었다. 늘 허무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허우적거리던 보들레르는 몸과 마음으로 자신을 농락하는 뒤발에게서 해방감을 맛보곤 했다.
뒤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환멸 했고,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자신을 보며 절망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뛰어난 시로 승화되었다.
이런 뒤발을 보들레르는 ‘보석’과 ‘고양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내 님은 알몸. 오직 소리 나는 보물 하나 지니고 있지.
돌 같은 내 넋은 춤추는 듯 비웃는 듯 날카로운 그 소리에
빛이 뒤섞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미칠 만큼.
그녀는 내게 몸을 맡긴 길들여진 호랑이.
바다 같은 내 사랑에 호랑이처럼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
거기에 교태가 어우러져 나날이 신선한 변모. 이것이 내게 끊을 수 없는 마력.
보석
이리 오렴. 나의 예쁜 고양이.
발톱일랑 감추고 내 품에 안기렴.
마노(瑪瑙) 같은 네 눈빛에 잠겨.
네 머리와 유려한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전율하는 네 모양에 나도 전율에 젖는다.
너는 앙증맞은 고양이, 투창처럼 차갑게 꿰뚫는 눈빛이다.
네 숨소리는 위험한 향기가 되어 그 갈색 몸을 감도는구나.
고양이
검붉은 꽃의 노래
뒤발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들고양이였다. 보들레르는 뒤발의 발톱을 깎아주기보단 감추는 일에 급급했다. 그런 면으로 보면 사바티에나 도브랭은 발톱이 잘 다듬어진 고양이였다. 이런 여인들 곁에 머물렀다면 보들레르의 삶도 편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에 안주했다면 보들레르는 평범한 시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발톱을 드러낸 뒤발 곁에서 빛을 발했다. 보들레르라는 시인은 상처 난 마음 그대로 치료하지 않고 살아가는 뒤발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발톱이 없는 뒤발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보들레르의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이성과 논리를 세워야 하는 인위적인 분위기와 보들레르는 맞지 않았다. 윤리나 법, 규칙이나 제도, 종교와 같은 것이 필요 없는 열대원시림 같은 곳에서야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십 대의 그에게 숨겨진 감성을 일깨워준 열대의 원시림만이 그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아폴로니 사바티에 조각상
아폴로니 사바티에 조각상 오귀스트 장 바티스트 클레쟁제르(Auguste Jean-Baptiste Clésinger), 〈뱀에 물린 여자〉, 1847년, 5×180×70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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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발만이 그의 숨통을 터주었다. 광물질(鑛物質)이며 밀림 속 호랑이이며 앙칼진 고양이였다. 그녀의 비이성적 행동만이 어머니의 재혼 이후 소외와 허무감으로 깊게 팬 보들레르의 상처를 핥아줄 수 있었다.
보들레르도 이래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난감해 했다. 뒤발을 ‘검은 베일’이라고 지칭하고 자신을 ‘검은 베일에 가린 해’ 또는 ‘신들린 사나이’라 표현하면서도 그녀 곁을 벗어나질 못했다. 뒤발에게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처한 처지를 망각하기 일쑤였다.
보들레르 곁에 머물던 어느 날, 뒤발이 사라져 버린다. 거리의 삶이 익숙했던 터라 집에 머무는 삶이 견디기 어려웠다. 다시 뒤발을 만난 곳은 파리 교외의 요양원이었다. 사창가로 돌아간 뒤발이 손님에게 술주정을 부리다가 요양원으로 끌려온 것이다. 보들레르가 그녀를 찾았을 때, 뒤발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보들레르의 생명력도 앗아갔다. ‘끝없는 몽상의 모티브’인 뒤발의 절명(絶命) 앞에 보들레르는 절규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증오와 사랑, 나태와 열정, 고통과 쾌락이 모두 그녀에게서 나왔는데, 그녀가 떠난 후 그 무엇도 볼 수 없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무슨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애증의 대상이자 영원히 곁에 머물렀던 뒤발이 사라지자 보들레르는 실어증을 보였다. 위태로운 삶을 살며 뒤발을 그리워하던 그는 혼자 파리 뒷골목 길을 걷다가 쓰러진 지 일 년 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뒤발의 뒤를 따른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앙리 뒤파르크의 〈여행에의 권유〉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앙리 뒤파르크는 작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신경이 쓰이면 과감히 파기해 버렸다. 그 덕에 지금껏 전해지는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행에의 권유〉는 그렇게 살아남은 곡 중 하나다.
이 노래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실린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를 쓸 무렵 마리 도브랭과 사랑을 속삭이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두 사람에겐 모두 만나고 있는 다른 이성이 있었다. 심지어 도브랭의 남자 방빌과 보들레르와 단짝이었다.
사랑이냐 의리냐? 두 사람은 그 어려운 질문에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오랫동안 낯선 나라를 떠돈 경험이 있던 보들레르에게 여행은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친구와 연인,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뒤발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던 그에게 여행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하지만 그 여행은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 도브랭에게 동행을 권하고 있다.
“꿈꾸어라 달콤하게 그곳으로 떠나가 함께 살 것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고 죽고, 너를 닮은 나라에서!”라는 부추김의 끝에는 ‘그곳에선 모든 것이 질서 아름다움, 풍요, 고요 그리고 쾌락’이 반복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여행을 권하는 남자의 속내는 뻔하다.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은 욕망을 여행이라는 달콤한 단어 속에 숨기고 있다. 그래서 노래는 서정적이고 풍부한 감성이 가득하지만, 숨길 수 없는 욕망과 관능이 묻어난다.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어린 나이에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보들레르는 쾌락에 빠진다. 타국의 바람과 별빛 속에서 풍부해진 감성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감성은 잔 뒤발을 통해 해소된다. 절반의 유산과 맞바꾼 감성이었다.
거액의 돈 대신 예술적 야수성을 돌려받은 보들레르의 감수성을 문학으로 꽃을 피운다. 영리한 뒤발의 농간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보들레르는 그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수많은 비평가가 보들레르의 모든 불행은 뒤발 때문이라 타박해도, ‘나의 즐거움, 유일한 휴식, 최고의 소일거리’라며 그녀를 옹호했다. 하지만 뒤발과 다른 여인을 그리워했다.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사바티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서를 보냈으며, 겸손하고 친밀했던 도브랭을 얻기 위해 우정을 버릴 결심도 한다.
사랑은 보들레르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면서도 뒤발과 결별하지 못한다. 결국 거리의 여자로 생을 마감한 뒤에도 뒤발은 보들레르의 발목을 잡는다. 평생 온전히 보들레르를 사랑하지 않은 여인, 그리고 그런 여인을 평생 끌어안은 보들레르. 평생 함께였지만, 그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맘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라고 말하는 조광조의 노래는 둘의 사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멍 뚫린 독과 같아서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뒤발 곁에서 애증으로 평생을 함께한 보들레르의 마음은 조광조의 호소력 깊은 목소리를 통해 절절하게 다가온다.
사랑은 첫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남자에게 이상형은 처음 만난 여자다. 끊임없이 첫사랑을 갈망하고, 새로운 여인을 향해 눈길을 보냈지만, 결국 뒤발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도돌이표 같은 인생을 살았던 보들레르에게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욱 더 하겠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난 난 잊을테요’라고 노래해주고 싶다.
#작가#명화#세계문학#문학#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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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동연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평단문화사 전체목차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 스토리와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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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미술관
해바라기
해바라기 그림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장식하고 친구인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그렸어요. 태양을 사랑했던 고흐는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작품 중에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어요. 이 그림은 친구인 고갱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장식하기 위해 그렸어요. 고흐는 이 해바라기 그림을 그릴 때, 동생 테오에게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것이라고 들뜬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낼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어요. 파리에서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으로 이사를 간 고흐는 자신의 작업실을 꾸미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고흐는 아름다운 곳에서 친구 고갱과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에 가득 찼어요. 이 시기가 고흐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때였어요. 고흐는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진짜 꽃처럼 튀어나올 듯 표현했어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뒤로 보이는 벽도 노란색으로 칠했고, 탁자와 화병도 한 가지 색으로 단순하게 색칠해서 해바라기 꽃이 더
버지니아 울프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버지니아 울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한 작가로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빅토리아 시대에 당당히 문학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의 소설가로,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 및 사회 진출이 제한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남성 중심의 문명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적, 경제적, 자아의 측면에서 여성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적 메시지는 물론, 그녀의 명성 그 자체로 말미암아 여성의 지위에 대한, 특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가 새로이 조명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본명은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이며, 1882년 1월 25일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 게이트 22번지에서 레슬리 스티븐과 줄리아 덕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저명한 문예 비평가로 《영국 인명사전》 및 잡지 〈콘힐〉의 편집장을 지냈다. 레슬리와 줄리아는 둘 다 재혼이었는데, 재혼할 당시 각자의 자녀들을 둔 상태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10여 명의 대가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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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한 진보학자이자 교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 신영복(申榮福)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했던 경상남도 의령의 간이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독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1965년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에서 경제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안병직 등을 따라 잡지 〈청맥〉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원'에 참석하면서 훗날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일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종종 반미적인 논설이 실렸다.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이문규·김질락은 사형을 당했고, 그는 여러 차례 재판 끝에 무기징역형을 받고 안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