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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일체 하지 않겠다는 항목, 그리고 귀사가 지정한 보통 작물을 토지의 용법에 따라 재배하겠다는 것들이 세세 낱낱 적혀 있었다. 그것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소작인은 소작지를 애호하고, 조금이라도 지력 소모를 가져올 것 같은 것을 경작하지 않음은 물론, 모두 귀사의 지도에 따라 전심으로 농사 개량에 정려하고 이를 열성, 충실히 실행하겠다고 하는, 말 같잖은 말 같은 것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숨이 다 막혔다.
하늘 아래, 내 땅이야 있건 없건, 농사꾼이 농사를 지으면서 누가 제 자식 같고 어버이 같은 땅을 아끼지 않겠으며, 또 어느 누가 열심을 다하지 않겠는가. 말하지 않고도 너무나 당연한 것까지 위압적으로 적어 놓은 그런 항목들은, 순리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라는 차꼬를 차고 앉아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 버린 징역살이 같은 생각이 들게하여, 소작인의 며가지를 조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 좋아 '지도'지 사실은 '감독'인, 동척의 유사 행차도 참으로 못 당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또 백 보 양보해서 아무래도 좋았다.
집조지, 그러니까 도조 세 잡을 땅의 소작료는 총 수확의 백분지 오십, 말하자면 오할로 하되, 그 집조지가 수리조합 구역 내에 있다든가 혹은 개량 공사를 시행할 토지일 경우에는 소작료가 총 수확고의 백분지 오십을 초과하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만은, 그야말로 두 눈깔이 튀어나올 노릇이었다.
"그렁게 순 날강도지, 날강도. 뻬 빠지게 농사 지어 갖꼬 딱 절반을 뺏깅게 두 눈꾸녁 번언히 뜨고 날강도를 당허는 거이여."
"절반? 전부 다제. 그거이 어찌 절반이여? 껍데기만 냉기고 다 갖다바치는디."
그것도, 수리 조합이 있는 구역 내에서는 물세를 포함하여 소작료 육할을 거두어 갔다. 열 가마 거두면 다섯 가마나 여섯 가마를 소작료로 내야 하니, 동척의 농사 지도원이
"검견."
하겠다고 구두로 통지를 해 오면, 사람들은 머리 속이 아찔하게 휘돌리며 다리에 힘이 수르르 빠지는 것이었다.
소작료를 매기려고, 논에 서서 눈을 가무스름하게 뜬 채로 휘이휘이 사방을 둘러보는 유사의 얼굴을 헐끔헐끔 바라보는 작인의 허옇게 메마른 입술은 애가 타다 못해 다닥다닥 딱지가 앉아 있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매겨진 소작료는, 동척이 지정한 기일에 지정한 장소로 가서 바쳐야 했는데 마일 기한 내에 내지 못하면, 그 미납액에는 월 이푼의 과태료를
물렸다. 그리고 만일 소작료가 체납되어 소작 해제를 당하는 경우에는 해당 토지의 작물을 모두 무조건 내놓아야만 했다. 혹시 이것에 대하여 보상을 할 경우에 그 평가액은
"귀사 사정에 따르겠다."
고 계약서에는 박혀 있었다. 그러나, 소작료를 못 내서 빼앗기는 작물에 보상을 해 주는 일은 거의 없어서 다만 허울뿐인 구절이었다.
그 대신
15. 소작료는 곡물 검사규칙대로 하여 한 가마니 미만의 우수리일지라도
가마니에 넣어 납입하겠음.
이라고 되어 있으니, 다만 몇 되, 몇 홉일지라도 모두 깡그리 훑어 빼앗아 가는
이것이 바로 야차나 두억시니가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그 모습이 흉칙 추악하고 어두운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해친다는, 잔인하고 혹독한 귀신 염마졸도 이보다는 덜 악착스럽고, 더 인정이 있을 것만 같았다.
3부에 계속
혼불 최명희 5 1985
2권
1부에 이어
8
혼불4
지은이: 최명희
출판사: 한길사
10 귀.천
"그런 좋은 육송은 참 흔치 않을 것이다. 나도 보고는 놀랐더니라. 수령이 한 이백 년 가차와 보이던데, 물고기 비늘 같은 노송의 송린은 차라리 용의 비늘이라 하는 것이 옳더라. 그 둥치의 기상이 땅의 정기를 뽑아 올려 하늘로 토하는 용틀임 그대로인데 , 또 어떤 이는 화제에 적갑창발이라 쓰기도 했으니, 소나무가 붉은 비늘 갑옷을 입고 그 머리를 검푸르게 두른 모양을 말한 것 아니냐. 예전에 이영구라고도 하고, 이성이라고도 하는 사람은 뛰어난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름이 높았더란다. 항상 용반봉저로, 마치 용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몸을 서린 것같이 몸통을 그리고, 봉황이 날개를 솟구쳐 하늘로 날으려는 것처럼 송엽 상서로운 머리를 그렸다 하더라. 본디 송이란, 유덕 심정한 단인정사의 품격으
로, 기개는 준초하고 자태는 잠룡이니, 이 속된 세상의 먼지 속에 서 있으나, 저 깊숙한 산속에 홀로 서 있으나, 그 나무 있는 곳은, 물 속 같은 유곡의 그윽함을 느끼게 하지 않느냐. 비록 젊어도 예스러운 풍치를 저절로 지니고 있는 것이 소나무지만, 또 해가 묵어 둥치가 늙어도, 늙을수록 그 자세와 기상이 힘있고 젊어서 감히 범하기 어려운 것이 소나무인지라, 신묘한 풍모라 아니하랴. 무릇 형체 가진 것 중에 그만큼 아름다운 모양과 기를 타고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니라. 그런 소나무가 한 그루도 아니고 두세 그루도 아니고 오죽하면 내가 일일이 세어 보았다. 마흔 몇 그루가 그리 똑같이 아름드리로 무성허드구나. 그 군송은 흡사 붉은 주칠 두리기둥들이 두뚝우뚝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 같았는
데, 그 늠름 기품이라니. 어떤 것은 여윈 듯 메마르고 단단한 것이 위로 휘익 치솟다가 철장을 구부린 것처럼 목을 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곧게 뻗어 직간 대송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데, 또 어떤 것은 살지고 윤택해서 풍모 넉넉하고, 어떤 것은 가지 꺾인 자리가 해묵어, 마원이 그린 파필의 노송인 양 고기가 울
연하더라. 그 나무들이 들어찬 기세 성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우리 집안이 저처럼 가득 차서 창성한다면 얼마나 좋을 꼬, 탄식이 절로 나왔었다."
생전의 청암부인은 민촌 고리배미를 지나오다가, 그 경관에 놀라 가마를 멈추고 내려서 보났던 적송 수풀에 대하여 이기채에게 이야기 했었다. 그때 이기채의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나는, 아깝다, 했더니라. 저 볼 만한 군송 송림이 매안에 있었더라면 이 굽이에, 아니면 저 굽이에... 그러면 창송취죽, 푸른 솔에 푸른 대가 어울려 참으로 보기 좋은 성관을 이루었을 터인데. 그랬다면 온 마을에 그 푸른 기운이 청청 가득차고 솔바람,대바람 소리도 언제나 소소하여 귀를 적시었으련만."
"그곳에 어찌 정자가 없으리까."
"여부가 있겠느냐, 좋은 이름 짓고, 좋은 글씨 현판해서 두렷하게 달어야지. 어떠냐, 정자 이름은 네가 한번 지어 볼래?"
청암부인은 눈에 웃음을 머금고 지긋하게 이기채를 바라보았다. 반은 희롱삼아 해 보는 말이었지만, 반은 그 소나무 둘레를 그대로 떠다가 매안의 어디쯤에 옮겨서, 절가의 경관을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기채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솔바람 소리 귀를 적시리란 말씀을 들으니, 문득 들을 청에 솔 송짜를 써서 청 송정이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호."
"솔바람 소리야 사시에 좋지만, 그 중에 일품은 역시 흰 눈 성성한 설송에 이는 바람 소리 아닐까요? 이는, 귀만이 아니라 뜻에까지 들릴 것이요, 뜻이라면 바로 소나무의 선비다운 자태와 기상이 지닌 천품에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이름이로구나. 가히 속으로 새겨들을 만하다."
"그곳에 서 있는 정자 이름은 무엇이던가요?"
"없었다."
"아예 정자조차도?"
"오냐."
"어찌 그러하리까? 정자가 당치않으면 모정이라도 있을 법한데."
"모르니 그러는 것 아니냐. 므릇 좋은 산수 가운에 당호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얼굴에 미목이 있는 것이나 같이 당연한 일인데. 사람이 낯바닥만 있고 눈과 눈썹이 없으면 맹라, 곧 눈먼 문둥이일 것이다. 산수 경관도 마찬가지니라. 모든 사람 눈에는 그저 거기가 거기같은 지형을 보고도, 명사 신안은 땅의 정기가 모인 혈의 자리를 알어보고, 용한 의원은 표시 없는 신체에 침구를 놓을 때도 올
바른 혈을 귀신처럼 짚어내는 법. 산수 경관, 그 면목 생김새를 살피면 반드시 천연에 스스로 지닌 혈이 있느니. 고리배미 적송 수풀도 예외가 아니리라. 바로 그 숲자리 혈에 정자를 하나 단아하게 세운다면, 다 그려 놓은 용의 얼굴에 눈을 그려 넣는 것같이, 멍머구리 눈먼 풍경에 점정이 되련만. 그 정자 한 점이
지어져 눈으로 찍혀야 비로소 적룡의 무리 등천하려 하는 풍경이 완성될 것인데. 우선은 보는 눈이 뜨여야 이런 저런 무엇을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안고수비라는 말이 있어서, 마음은 크고 눈은 높아도 재주가 모자라 손이 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기도 하다만, 수비는 나중 이야기고 우선은 안고가 되어야
한다. 보는 눈이 먼저 열려야 분별을 하게 되고, 눈에 격이 생겨야 그 격에 이르려고 부지런히 손을 익힐 것 아니냐. 타고난 재주가 아무리 출중허고, 일평생 익힌 솜씨가 아무리 능란해도, 눈이 낮은 사람은 결국 하찮은 몰풍정을 벗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사람은 눈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우리 사람의 정신 속에도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곳에 제대로 있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하지. 허나 쑥대강이 어거진 더벅수풀 뒤범벅인 정신 가진 사람 보고는 '미쳤다'하고, 정신 속으로 난 길이 항상 어수선하여 무슨 사지곡직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사람을 보고는 '정신이 없다'고 하느니. 허지만 애초에 그 사람들이라고 그런 정신을 타고났겠느냐. 물론 그 중에는 남보다 부실한 정신을 타고난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제 정신 간수를 잘못해서 그 모양이 되었을 것이니라. 혹은 방심하고, 혹은 게으르고, 혹은 몰라서. 아니면 헛군데 정신을 다 쏟아 버려서. 아무리 칠흑같은 비단 머리라도 단 사흘만 안빗고 방치해 두면 금방 짚북 더미 되는 것이나 같지. 그러니 사람은 제 정신 돌보고 가꾸기를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는 것처럼 부지런히 하고 거르지 말어야 한다. 그렇게 단정하고 맑은 정신을 갊아 놓고, 밝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거기 혈이 어찌 보이지않으랴. 이제는 바로 그 자리에 꼭 알맞은 모양의 당호를 앉혀야 하리라. 집이
든 정자든. 그런다면, 그 정신의 경치가 수려,우미함이 어찌 빼어난 산수보다 아름답지 않겠느냐. 그런 정신은 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둘레를 두루 향기롭게 만들고, 제 몸 담은 주변 풍경까지도 귀격으로 높여 놓으니, 어느 누가 그것을 고귀하다 하지 않으리.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 하는데, 큰 정신 하나의 그늘이야 어찌 기껏 팔 십 리에만 미칠 것인가. 세월을 넘어 팔백 년, 팔천 년을 뻗어오는 정신가진 분을 우리는 성현이라 하지만, 그만은 못하다 할지라도, 구슬같이 영롱한 제 정신의 눈을 바로 뜨고 있어야 비로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그뿐이냐. 한 사람의 인생에도 역시 형이 있을 것인즉, 그 형을 찾고 다루는 일이, 정신에 그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제 인생의 맥 속에서 참다운 혈을 못 찾는 사람은 헛되이 한평생 헤맬 것이요, 엉뚱한 곳에 집착한 사람은 헛 살았다 할 것이다. 사람마다 제 인생의 결혈을 찾는 간절함이, 채금하려는 자가 광혈을 찾아 산천을 누비고 다니는 것만큼 절실하다면, 비록 폐광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노정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리라. 하물며 제 혈을 제대로 찾은 경우에야 . 오직 혼신의 힘을 다하여 채굴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꼭 알맞은
정자를 짓는 일이나 같다. 즉 그것이 인생의 경영이니라. 만일에 정신이나 인생에 그 형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아무것도 모르고, 설혹 안다 해도 못 찾고, 또 찾았대도 그 자리를 그냥 방치하여 비워 둔 채 쓸모없이 버려 둔다면, 이는 제 정신이나 제 인생을 눈먼 문둥이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아니, 눔먼 문둥이는 그대로 눈의 시눙이나 있지, 아예 민투름한 살덩어리에 구녁도 뚫리지 않은 얼굴 형상을 생각해 보아라. 불구가 아니냐. 어찌 참혹다 하지 않으리. 그러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제 자신이나 인생에 꼭 갖추어야 할 모양이 있는 것이다.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면 '비었다' 하는데, 빈 것은 허하지. 허한 것은 힘이 없느니."
그때 이기채는 오직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비록 취처하여 장가는 들었다 하나, 아직 스물을 막 넘긴 나이로, 어머니 청암부인의 말씀을 깊은 속으로 알아듣기에는 어린 때였던 것이다.
"허나, 이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눈일지라도, 그것은 귀하고 아름다워서 오직 있을 만한 곳에만 있어야 하니라. 사람의 얼굴에도 눈과 눈썹이 아주 없어도 안되지만, 거꾸로 너무 많아서도 안되지 않겠느냐. 가령, 아무리 오색 광채 찬란한 눈이라도, 어떤 사람이 얼굴 사방에 눈이 달려 있고, 또 그것도 모자라 온몸에 다닥다닥 눈이 달려 눈투성이라면 어떻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일 것이다. 마치 산수 너무 찬란하여 여기도 아깝고 저기도 아까워, 군데군데 층층 누각을 겹쳐서 상첩하게 짓는다면, 그 경치 단상하기보다는 오히려 소란하기 시정 같지 않으리. 그곳에는 잡배들이 끓기 마련이라, 바쁘고 시끄러울 뿐 도무지 고졸한 맛이 없고, 주인 많은 나그네 밥 굶는다고, 실이 없느니, 사람이 뜻이 너무 많고, 뜻마다 착수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성공투성이여서 좋을 것 같지만, 한 군데 정신을 쏟아 정진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고, 복도 또한 그러해서, 복투성이 인생이란 어쩌면 눈투성이 몸뚱이처럼 오히려 기괴한 것일는지도 모르지. 경치고, 정신이고, 인생이고, 결혈의 묘처는 오직 한 군데 아니면 많아야 두 군데에 불과할 것인즉, 이 자리를 수중하게 아끼고 잘 갊아서 제 새애를 다한 집을 세워야 하리라. 그래야만, 생애는 이 집을 바라보고, 집은 생애를 돌아보는 묘미가 있지 않겠느냐."
청암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한 적송의 무리를 동네 어귀에 수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리배미 사람들은 그저 범경의 범백사물로 그것을 대하니, 그 무심을 순박하다 하랴, 어리석다 하랴."
"허면, 정자를 앉힐 만한 자리에는."
"소를 매 놓았더라."
"무엇을요?"
"제 소똥을 깔고 앉아 새김질을 하는 황소였다."
"저런."
"사람이 자기 정신의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면 그 정경이 꼭 그와 같지 않겠느냐. 눈이 밝아야 세상이 바로 보이는데, 눈구녁 자리에 소똥을 범벅해 놓고 짐승이 짓이기게 해 놓는다면 그 인생이 걸어가는 앞길이 오죽할까. 차라리 가련하다고 해야 하리. 눈이 없어 어둡고 미련한 사람이 한낱 무지랭이라면, 저
혼자서나 미물로 굼벵이처럼 구부린 채 뒹굴다 가지만, 만일 한 집단의 어른이나, 남을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 또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 가진 사람이 그런 눈을 하고 있다면, 온 집안, 온 나라를 미욱한 어둠 속으로 캄캄하게 처박으면서, 온통 짐승들이 횡행하는 똥밭으로 만들고 말 것이니. 얼마나 겁나고 무서은 일이냐. 눈은 곧 빛인데, 빛이 밝으면, 저 혼자서만 제 것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에 의지해서 모인 다른 사람들 것도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랏님도 다를 바 없지만, 아무쪼록 너는 한 가문의 종손이니, 부디 이런 말을 명심하거라."
"어머니, 잠깐 다른 생각이온데, 그 고리배미 송림이 타고난 제 값을 못하는 것은, 그 주변 경관 탓도 있지 않을까요? 만일, 금 송곳으로 돌을 쪼고 학의 부리로 무래를 그은 것 같은 절묘한 풍관 속에 그 수풀이 앉았더라면, 그런 무지몽 매한 대접을 받을 리 있겠습니까? 고리배미야 그저 민틋한 동산 아래 두리두리
멍석을 펴 놓은 것 같은 마을일진대, 송림 홀로 울연 창창하다 하나, 그런 범하지골의 풍경 속에서는 제격이 제대로 드러나기도 어렵고, 심지어는 개발의 편자처럼 제 격을 갖추었다 하기도 어렵겠습니다."
"옳다. 내 그래서, 그 붉은 용의 무리 같은 육송들을 바라보면서 한탄했더니라. 어쩌다 저만한 귀골의 씨앗들이 이런 민촌으로 날아와 떨어졌을까. 그 풍향의 곡절은 알 리 없었으나, 자리를 잘못 앉은 것만은 분명하고, 애석했었다. '삼밭의 쑥'이라고 옆구리로 기어 크는 구불구불한 쑥도 곳곳하게 위로 크는 삼밭에 들면, 저절로 반듯하게 자라나지만, 거꾸로 쑥밭에 떨어진 삼씨는 제 본성도 다 잊어 버린 채 쑥을 따라 구불구불 땅바닥으로 크는데, 그것이 하찮은 풀뿌리라 서만 그렇겠느냐. 아무리 크고 좋은 유자라도 강을 건너 다른 나라 땅으로 가면 탱자가 되고 만다 하더라. 그래서, 저 적송, 귀문의 종자들이 한미하고 변변치 못한 민촌 어귀에 잘못 앉아, 하릴없이 그 격으로 되고 말았구나 싶었다. 주위 경관하고 격에 맞게 어우러지지도 못하고, 누가 제대로 알아보는 이도 없어, 자연히 마땅한 대접조차 못 받으니, 저 무성한 군송의 기개와 풍자가 참으로 속절없지 않으냐, 하였다. 사람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있지만, 용은 개천에서 살 수 없다. 개천에 빠진 용은 제 비늘도 다 못 적시는 개
골창 물 속에서 뒤척이며 몸부림치다 죽든지, 아니면 굳이 그렇게라도 살아야겠으면 미꾸라지가 되어야 하리. 눈에 보이는 세상살이도 그렇지만 안 보이는 정신 자리, 사는 자리도 똑같다. 그것을 천한 곳에 두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내 마음을 추리고, 추리고, 또 추려서 균형을 잡고, 훌륭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 그 자리를 밝혀 가는 수련을 하는 것이 바로 '공부'니라. 부디 이 갈고 닦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오직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숨 쉬는 일처럼 몸에 익어 일상이 되도록 자신을 건사하고, 이재를 하듯이 정신을 관리해야만 정신의 토양이 비옥해 질 것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세운 무릎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청암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하기는 무엇이 귀한 것이고, 무엇이 천한 것이랴. 또한 양반은 무엇이고 상늠은 무엇이겠느냐. 귀천에, 반상에, 격조와 운치를 아는 풍류나, 도무지 그런 것이라고는 모르는 몰풍이나, 모두다 사람이 만들어 낸 편견이요 생각의 오랜 관습일 뿐, 본디 그 사물이 가진 본성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도 모르지. 소나무는,
그 종자가 무엇이든, 그것이 어대에 떨어져 어떻게 뿌리 박고 서 있든, 그저 오직 소나무일 따름, 저한테 단아하고 어여쁜 정자를 지어 주든 소똥 깔고 앉은 황소를 누렇게 매어 놓든, 거기 따라 소나무 자체의 본성이 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면 사람은 또 사람대로 천연인으로서 다만 사람일 뿐, 무슨 무슨 분별이란 다 헛된 것이 아니겠느냐."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하오나, 소나무라 하지만 그것도 하나하나보면, 해송, 육송, 적송, 백송, 거기다가 다박솔. 성질도 다르고 생김새됴 다른데, 사람 또한 조상 따라 근본이 다른즉 후에 태어난 자손도 다 달라서 분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씨가 다르니..."
"씨라. 그 씨의 근원은 또 무엇일꼬. 어느 누구라도 선조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초에 미련한 선조가 어디 있겠느냐. 허나, 어진 현조의 자손들은 그 조상이 밝힌 정신의 등을 받어서 불을 댕기어다른 등으로, 또 다른 등으로 연방 옮겨 붙여 고금에 이어 내려오면서 훤하게 불울 밝힌 집안을 이루겠지만, 아닌 경우에는 상어오는 중간에 못난 사람이 생기고, 무식해지고, 선대와의 끈도 끊어지고 집안가지들도 흩어져 각동백이가 되면서 빈곤해지면, 발등 비출 등불조차 어두워져 상놈들이 되겄지. 그러다가 죄를 짓고 등불이 아주 꺼지는 일을 당허면 천인이 되고 말아 그 인생이 깜깜한 밤중을 헤맬 것 아니냐. 저 하나만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엄하고 혹독하게 서러운 굴레를 써야 하니, 불행히도 그런 사람을 선조로 둔 후손은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상고에서는, 살인한 죄인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몰수해서 노비로 삼었다는데, 백제에서는, 간음한 여자를 노비로 만드는 형법이 있었다더라."
그러니 죄의 씨가 종인가. 이렇게 죄를 지어 그 벌로 한번 노비가 되면 그는 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신분을 물려받은 신분 노예가 생기고, 또 다른 곳에서는 지은 빚 때문에 몸이 잡힌 부채 노예가 생겨났으며, 나라가 멸망하면서 끌려 간 포로들이 노예의 멍에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역모를 꾀한 자의 집안 가솔들도 공천,사천노비로 곳곳에 박히었다. 심지어 몹시 곤궁한 집에서는 제 가족을 노비로 팔기도 하였으며, 일반 양인의 붙이라 할지라도 어쩌다 가족을 잃고 저 혼자 떨어져 궁글어 다니다가, 할 수 없이 누구네 종으로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다. 그 연우 곡절이야 어떤 것이든, 한번 사내 종 노와 계집 종 비가 되어 신분에 낙인이 찍히면 그들은 그날로 저의 주인 상전의 마소나 전답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세습되었다. 백 년, 이백 년이 아니고, 천 년, 이천 년만이 아닌 기나 긴 세월을 두고, 일찍이는 고조선에서 만든 법인 범금팔조에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하며
남의 물건을 도독질하면 그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 원칙인데, 만일 속죄하고자 한다면 매인당 오십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고 밝힌 그때로부터, 노비의 수가 크게 늘어난 고려에 이르러, 원래 양민이었다가 노비로 된 자를 해방시켜 주려는 노비안검법에, 해방되엇던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만드는 노비환천법이 엎치락뒤치락 하던 시절을 지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노비 제도는 깊고도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칠반천역, 팔반사천에 드는 천민으로, 칠천,팔천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이름만 사람일 뿐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들을 다시 공노비인 공천과 사노비인 사천으로 나뉘었다. 장례원에서는 이들의 호적을 철저히 조사하여 노비안을 작성해 두었는데, 공노비는 장례원에서 직접하고, 사노비는 지방의 수령이 삼 년마다 속안을 만들어 변화 정황을 적은 뒤에, 이십 년마다 정안을 기록하여 본조, 의정부,장례)원,사섬시,본사,본도,본읍에 보관하였으니. 이렇게 숨통을 조이는 신분의 족쇄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주먹속에서 뛰는 벼룩과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집안에 묶인 노비로 꼼짝못하는 사천보다는, 밖에 나가 살면서 제 식구와 가계를 꾸려 갈 수 있었던 공천은 처지가 좀 나았다.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 잡화와 노비 들을 맡아 보는 내수사에 속하였다 하여 내노비, 혹은 궁노비라 부르던 공노비를 비롯하여 관아에 소속된 관노비, 역에 박힌 역노비, 그리고 향교에 딸린 교노비, 또 고려의 사찰에 있었던 노비들을 조선 초기에 나라를 세우면
서 모조리 몰수하여 공누비로 만든 사노비들은 공천이었는데, 이 공노비 공촌 중에서도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는 서로 일이 달랐다. '선상'은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사역에 종사시킬 사내 종을 지방 관아에서 뽑아 바치는 일이었다. 일년에 여섯 달씩 교대로 고되게 노역하는 이 경중 공천 선상 노비는, 일년에 일곱 번씩 교대하는 지방 관노보다 훨씬 무거운 일을 하는 셈이어서, 이들에게는 시중드는 봉족 두 명을 붙여 주었다. 이 봉족꾼은 선상 노비를 위해서 해마다 두 필씩 포를 바쳐야만 했다. 입역이 고달픈데다가 선상 노비들을 대부분 지방에 늙은 부모와 그리운 처자식을 떼어 놓고 온 처지라서 몹시 괴로워하던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을 하거나, 포 열두 필에서 열다섯 필이나 되는 막대한 선상 대립가를 치르고 피역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금액이어서 아주 특별한 노비의 경우말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몸으로 신공을 바치던 선상 노비가 아닌 납공 노비는 신역 대신 매년 자신이 노비인 값, 노비공을 사섬시에 현물로 바쳤다. 이 납공 노비가 짊어진 부담은 실로 무
거워서, 해마다 사내 종이 포 한 필에 저화 스무 장이고, 계집 종이 포 한 필에 저화 열 장씩이었다. 저화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불환 지폐인데, 정화와 바꿀 수 없는 이것을 사람들이 기피하여 나중에는 저화 석 장에 쌀 한 되로까지 그 가치가 떨어졌지만 처음에는 한 장에 오승포 한 필이나 혹은 쌀 두 말에 맞먹는 값이었으니, 저화 스무 장이면 오승포 스무 필이거나 쌀 네 가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제 몸뚱이 가릴 베 조각 하나 변변치 못하고, 제 입에 넣을 좁쌀 한 숟가락 넉넉지 못한 노비들에게는 연자맷돌같이 무거운 납공이었지만, 피할 수 없이 목을 조이고 있는 톱니이기도 하였다. 선상,납공말고도 공노비들은 제가 속한 관아의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공궤를 담당해야 했고, 노비 공물우 부가세로 작지를 납입해야만 했다. 작지는 호조나 광흥창같은 수세창고에서 징세 사무를 보는 데 필요한 종이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세를 받을 때, 공세미 한 말에 종이 다섯 장, 열 말에는 스무 장이 한 권인 종이책 두 권씩을 덧붙여 내게 하였다. 세금으로 내는 공세미에만 부과시키던 작지는 때로 논밭이나 임야, 가옥, 노비들을 사고 팔 때 증명 신청자로부터 수수료로 밭기도 했는데, 나중에 무당한테는 무격세, 산간의 화전민한테는 화전세같은 잡세와 더불어 공사노비공에도 부가 징수 하던 세목이었다. 이런 것을 못 견대어 도망하는 노비들은 추쇄도감을 두어 철저히 잡아서 막았는데 사노비, 즉 사천은 공노비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사액서원에 딸린 원노비와 양반가에 딸린 반노비도 사천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노비는 저의 주인인 상전의 집안에 붙박여 살면서 대를 물려 가내노복으로 잡살뱅이 온갖 일을 다 하였다. 사노비는 자신의 호적단자를 따로 가질 수가 없었다. 입적자는 반드시 호적을 가져야 하는 법령을 따라 삼년에 한 번씩 호구 조사를 할 때, 각 호의 가장은 본인의 거지와 성명, 본관, 나이, 직역, 그리고 부의 직역과, 위로 사대조에, 외조부의 성명과 본관을 적은 다음, 처의 나이와 본관, 처의 부,조부,증조부,고조부,사대조와 외조부를 쓰고, 그 옆에 함께
거느리고 사는 자녀의 나이와 이름을 적은 뒤. 말미 아래 한쪽 귀퉁이에 가내노비의 나이, 이름을 소상히 적은 호적단자를 관아에 보냈다. 관아에서는 이 단자 대장을 정리하여 호조,한성부,본도,본읍에 비장하였는데, 노비의 호적은 장례원의 노비안에 올랐다. 신분이 미천하여 이름 하나 사람답게 얻지 못한 채, 키가 건드렁하니 크다 하여 '키녜', 작달막하고 톰방하게 생겼다고 '돔발이', 얼굴이 넓적한 생김새 그대로 '넙댁이'라 불리던 노비들은 단자에 발음이 비슷한 글자 '기래', '동발', '여덕' 등으로 적히기도 하였다. "어미가 종이면 그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어미의 신분에 따라 종으로 삼는다." 는
종모법을 따라 세습되는 노비의 이름은 어미 아래 낳는 대로 적히었으니, 아들은 노가 되고 딸은 비가 되었다. 매안 이씨 선대의 문서에 적힌 종의 이름은 이 백 년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먹빛이 선명하다.
솔 비 귀매 년 경인생
일소생 노 영득 년 경신생
이소생 비 영근 년 갑인생
삼소생 비 삼매 년 계해생
사소생 노 귀득 년 병진생
오소생 비 계덕 년 계유생
경인생인 계집종 귀매가 낳은 소생은 아들 둘, 딸 셋 다섯으로 이들은 모두 종이 되었다. 그 첫 번째 소생은 사내종 영득으로 경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계집종 영근으로 갑인생, 세 번째 소생은 역시 계집종 삼매로서 계해생이다. 네번째 소생은 사내종 귀득으로 병진생이며, 다섯 번째 소생은 계집종 계덕으로 계유생이다. 그 중에 둘째 배에 낳은 갑인생 계집종 비 영근이 비부를 얻어 다시 자식을 낳으니, 그의 소생은 모두 또 종이 되었다. 그러매 숨 한 칸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서 그 새끼의 이름을 단자 끝에 촘촘이 단필로 적어 나갔다.
비 영근
일소생 비 명금 년 병신생
이소생 노 명길 년 을묘생
삼소생 비 명분 년 갑신생 부 사노 박흥대 계집종 영근이의 첫 번째 소생은 계집종 명금이로 병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사내종 명길이 을묘생이고, 세 번째 소생은 계집종 명분이로 갑신생이다. 명분이는 사내종 박흥대를 비부로 얻었다. 그러니 '귀매'라 하는 계집종 하나의 뱃속에서 다섯 노비가 나왔고, 노비의 자식은 또 노비가 되는 법을 따라, 귀매의 딸 영근이 한테서 낳은 자식 셋까지 모두 종이 되어, 새끼 종만 여덟으로 불어났다. 문서에 적히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여러 자손들이 분가하거나 출가할 때 딸려 보내 노나 주었을 것이다. 어미와 딸이 제 소생들을 데불고, 대를 물려 함께 한 집에서 종을 살고 있는 이 이름들 아래, 또다른 노비의 가족이 비끌어맨
발목을 붙들고 있다.
비 선임 년 경술생
일소생 노 일룡 년 갑신생
이소생 노 후룡 년 병술생
비 양례 년 갑인생
일소생 비 다옥 년 신묘생 부 사노 유승진
노 시능 년 무술생 비 만업 년 갑신생 계집종 선임이는 경술생인데, 그 첫 번째 소생은 사내종 일룡이로 갑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사내종 후룡이로 병술생이다. 또한 계집종 양례는 갑인생으로 그 첫 번째 소생은 계집종 다옥이 신묘생이고 다옥이의 비부는 사노 유승진이다. 또다른 사내종 시능이는 무술생이며 계집종 만업이는 갑신생이다. 그런즉 이 숫자는 모두 여덟이다. 도합하여 열여덟 명 종들의 이름을 이기채는 낱낱이 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을 짐작해 보았다. 그들을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 또렷또렷 생생하게 적혀 있는 이름들이 꼭 살아 있는 눈구녁들 같아서 그는 전율을 느꼈었다.
"그래, 나는 이 한 많은 세상에 종이었다."
이름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은 어찌 종이 되었을까. 난신적자의 자녀 중에 아들은 목을 베고 딸은 관에 잡아들여 먼 변두리 고을 관아의 관비로 만들었으니, 이 관비가 낳은 소생들은 어쩔 수 없이 관노, 관비가 되지만, 그 핏속에는 세월을 잘못 만난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또 양민의 딸이라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체납으로 더 이상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부모가 밀린 세금 대신 울면서 딸을 관비로 바치기도 하였다. 관비는 비자와 기생으로 나뉘었다. 둘 다 관가에 매인 종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쪽은 용모와 재능에 상관없이 허드레 궂은일,잡일에 물일을 하는 계집과 아낙이고, 한쪽은 자색이 분통 같고, 가야금,비파를 타며, 교태 아양과 춤과 노래에 몸이 익은 관기, 기생이다. 그냥 기생이라 하여도 여덟 가지 천민 중에 하나라 그 신분이 미천한데, 그나마 종이면서 기생이니 관기는 비록 그 모습이 해당화 같이 아름다워도 한낱 창기로, 해당 주읍에 객이 올 때마다 객고를 풀라고 내주어 간하게 하였다. 관가에 출입하는 양반 중에는 이 관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투어 끝내는 틈이 벌어지고 마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관기가 낳은 아들은 관노가 되고 딸은 다시 어미를 이어 관기가 되는 것이 법이어서 모두 함께 관아에 매어 있을 때, 모녀,자매의 기생이 한 양반과 더불어 희롱하는 일이 잦아, 풍교를 말하기가 무색한 일이 많았다. 관기 가운데는 침기가 있었다. 보통
때는 기생 노릇을 하고 내아에서 부르면 대답하고 응하여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여염의 안살림을 해 본 일 없는 기생에게 바느질이 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웬만한 것은 게발을 건너뛴다 하더라도, 가는누비 같은 것을 맡기면, 그 누에씨보다도 작은 바늘 땀에 촘촘히 박아가는 선이 한 땀이라도 어긋나면 안되는 누비 바느질, 그 중에도 가는누비를 무슨 재주로 해낼 것인가. 솜씨는 그만두고 속에서 열불이 나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얌전한 기생이, 솜 놓은 저고리 나 바지나 두루마기 감의 온 바닥을 개미가 지나가듯 좁은 걸음으로, 한 줄도 아니요, 두 줄도 아니요, 석 줄, 넉 줄도 아닌, 수수 백, 수수 천 줄을 누벼야 하는 누비 바느질을 하고 앉아 있겠는가. 당치않은 일이었다. 그것을 알며서도 내아에서는 일감을 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 기생은, 행음을 해서 얻은 비녀나 노리개, 팔찌와 반지 같은 것을 주고 바느질 집에 가서 해 왔다. 이래서 원성이 높았다. 이들 관비 중에 양반의 눈에 들어 그에게 속신하게 되면, 양반은 그 관비를 집으로 데려가고, 대신 자기 집에서 부리던 사비를 보내 자리를 채웠
다. 그리고 양반에게 몸이 속한 관비는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그의 천첩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 관기를 데리고 나왔을 경우에는 집에 가두어 가비를 만들었는데, 노래 부르는 계집 종 가비는 사대부의 집에서 붙어 살며, 손님을 접대할 때 가창으로 봉사하였다. 이러한 공비, 사비들은
"날마다 지아비를 바꾸어 개, 도야지와 같으니, 소생은 단지 어미 있음을 알고 아비 있음을 알지 못한즉, 아비를 묻지 말고 어미를 따르는 수모의 법을 펴야 하겠다"
고 세종 13년에 말하여진 것이다.
노비의 신분 세습에 관해서 조선 전기에는, 부모 양쪽 중에 하나만 천인이어도 그 자손은 천인이 된다고 했다가, 한때는 종부법이 시행되어 양인과 비 사이의 소생은 양인을 만들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의 자식 신분이 바뀌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양반층의 반발로, 얼마 안가서 이 종부법은 폐지되었다.
그리고는 어미의 신분을 자식이 따른다는 종모법이 시행되었는데, 말하자면 아무리 사내 종이라 할지라도 만일 양민의 딸과 혼인하면 그들의 소생은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민이 되는 것이었고, 또 계집 종이 아무리 사대부의 자식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미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외 모두 노와 비인 경우에는 할 수 없이 그 소생들도 모두 노비가 되었지만, 그 소생들 가운데 아들인 노는 양민의 딸을 만나면 그 자식들부터 양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노비의 딸은 아무리 양민의 남정네와 혼인한다 해도 하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아들을 낳으면 부디 양민의 새악시를 만나 그 자식 대에서부터는 부디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물론 그 간절한 소망대로 부지런히 일하거나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제 몫의 재산을 지니고, 머리도 깨어, 양녀와 혼인한 공,사노들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못한 경우들이 더 많았다. 그러니 나이가 차서 짝을 맞는다는 것은 종이 종을 만나 다시 더 많은 종을 낳는다는 말이나 한가지였다. 이만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도 높고 살림의 규모도 크
겠지만, 종모법에 따라 저절로 늘어난 노비의 수효가 이 사람의 재산을 늘려 주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논 열마지기를 주어야 살 수 있는 노비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곧 재산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노비들은 오직 저의 주인인 상전의 손발이 되어 일했다. 아무리 노비라 하여도 사람인지라 제각기 타고난 성격이나 재주가 다를 것인데, 어떤 사노는 상전의 농사를 맡아서 경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노는 상전의 이익을 위하여 장사판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농지의 장리를 관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노들은 농사짓는 일에 뼈를 바쳤고, 나무를 해 오거나 물을 긷거나,
집 안팎의 잡일 중에서 계집종이 할 수 없는 온갖 궂은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계집종들은 상전의 가까이에서 몸 심부름을 하는 몸종이 되거나, 혹은 침비가 되어 바느질을 하거나, 혹은 상전의 눈에 들어 천첩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정지 일과 빨래, 쓸고 닦는 소제며 끊임없이 생겨나는 일들에 손바닥이 나무 껍
질같이 터지고 갈라지기 예사였다. 그리고 혹 가다, 상전과 한 집안에서 살지 않고 따로 나가 밖에 살면서, 몸으로 일하여 바치는 신역 대신 노비공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노비공은 사노가 매년 면포 두 필이고 사비는 면포 한 필 반이었다. 그런데 사천의 노비공은 상전들의 월권으로 점점 부과액이 늘어나 드디어는 노비들의 살가죽을 벗겨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엄청나게 가혹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영조 31년, 무거워진 노비공에 깔려 빈사 상태에 이른 사천들의 공납
품을 반절로 줄여, 사내종은 면포 한 필, 계집종은 반 필로 감하는 노비공감의 영을 내린 뒤, 엄격하게 통제하여 절대로 더 받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계집 종의 노비공은 면제를 해 주어 버렸다. 뿐 아니라 영조는 노비의 호적인 노비안과 그에 관한 문서가 비치되어, 노비로 인한 송사를 맡아 보던 장례원을 끝내 폐지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평생 동안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외가의 피에 대한 뼈저린 증오와 저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의 아드님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어머니는 전라도 땅 임피의 천노 최씨의 딸로, 후일데는 임금을 낳은 숙빈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숙종비 인경왕후가 혼일할 때 교전비로 사가에서 따라 들어온 모종이었으니, 만일 노비 종모법을 따른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임금이라 하여도 자신은 종의 자식인즉 사노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 아닌가. 다만 천행으로 임금은 그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묻지 않는 무치여서, 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언제나 거꾸로 흐르는 외가의 피와 맞부딪쳐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하여, 비 정성 왕후를 일생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따님을 꽃 같은 배필로 맞이하여 마주앉은 첫날밤의 첫 마디 때문이었다.
"참으로 손이 곱기도 하오."
신랑은 밀촛불 휘황히 타오르는 신방에 들어, 어루만지기에도 아까운 신부의 흰손을 잡고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찬탄하여 말씀하였다.
"본곁의 어머니가 저를 귀엽게 여기어, 시집보낼 때까지 곱게 기르노라고 일을 한번도 안 시켜서 그런가 보옵니다."
고개를 수그리며 말한 신부의 이 한 마디에 신랑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잡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저것이 내 어머니가 미천한 종인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구나. 저것이 내 어머니 갈라터진 손을, 제 말 하며 비웃는구나.
저것이 나를 모욕하는구나.
저것이 내 피를 조롱하는구나.
깊은 수모를 느낀 영조는 다시는 돌이켜지지 않는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공방으로 그 심정을 갚았던 것이다. 결국은 장례원을 폐하여 종의 명부를 다 치워 버렸지만, 수천년을 두고 내려오던 누습은 결코 없어지지 않아, 임금의 성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비 제도는 깊이깊이 뿌리를 박은 채 성 하였다.
노비와 상전의 관계는 마치 서리를 튼 나무 뿌리와 견고한 지반처럼 서로 엉키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나무의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져 뿌리를 벋을 때 버슬버슬한 모래흙이라면 빨아들일 수분도 넉넉지 않거니와 지반이 실하지 못하여 작은 바람에도 뿌리가 뒤집히며 지나가는 빗줄기에도 사태가 날 것이다. 또 너무나 박토여서 온통 메마른 흙투성이 큰 돌 작은 돌이 옹이같이 박혀 있는 땅 속에서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요, 만일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 남으려면, 제 앞을 가로막은 이돌멩이 저 바위덩어리를 비틀어지게 외틀어지게 감으며, 그것에 눌리며,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벋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썩은 웅덩이를 품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도 따라 썩기 쉽고, 우물 같은 암벽에 갇힌 뿌리는 벋어도 소용없이 저희끼리 뒤얽히고 꼬이다 말 것이다. 그뿐인가, 독충이 살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가 벋어 나가기는커녕 중독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지하의 어둠은 무궁하고, 토질은 비옥하여 풍요로운 물을 머금은 땅에 뿌리의 발이 닿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반촌이라면 반궁, 즉 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주변 동네를 말하는데, 이를 반중이라고도 하였다. 반촌은 큰 길을 경계로 동,서 반촌으로 나뉘었다.
동반촌 언덕 위에는 유생들의 선비다운 기상 배양을 위하여 숙종조에서부터 의논되어 영조 원년에 이루어진 숭절사가 있었다. 이곳은 불의에 저항하여 높은 기상과 절개를 보여 준 중국의 모범 태학생인 서진의 동양과 당의 하번, 송의 진동, 그리고 구양철을 숭모하여 제사하던 곳이었다. 또 동반촌의 큰 길가에는
병자호란 당시 오성 십철의 위판을 받들고, 남한 산성의 행재소(거둥때에 임금이 머무는 곳)로 들어간 성균관 수복 정신국, 박찬미 등을 표창한 정문이 영조 3년에 세워졌다. 수복이란 조선의 단, 묘, 능, 사, 원, 전, 서원 등에서 분뇨오 물을 청소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반촌에 살고 있는 반인들은 주로 성균관에 소속된 하예들로 흔히 '관 사람' 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대개 본시 개성에서 옮겨 온 고려 국학 소속 노비의 후손들이다.
고려 중기의 명신이요, 큰 학자였던 찬성사 안향은 일찍이 섬학전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을 낙성하여 학교를 크게 부흥시키고자 사재와 사노비 백명을 국학에 모두 들인 일이 있는데, 조선 성균관의 하예들이 바로 그 노비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 반인들의 인구가 날이 갈수록 점차 불어나 성균관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쇠고기 전매권을 주었다. 그래서 생긴 푸줏간을 현방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또 곡예와 가무, 음곡을 일로 삼던 재인 백정이기도 하여, 궁중의 잡희나 탈춤 광대놀이 같은 산디놀음에 우인으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반인들은 어음과 곡성이 송경(고려의 서울인 개성) 사람과 같아서, 여자가 슬프게 흐느껴 곡할 때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남자들은 의복이 매우 사치스럽고 혈기가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왕이 싸움을 벌일 때는 곧잘 가슴이나 다리를 찌르는 버릇이 있으매, 서울 본토막이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이들 중에 관비 소생은 성균관의 재직이 되고, 타비 소생은 서리가 되었으며, 재직이 장성하면
수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반촌 북쪽에 단을 모시어 두고, 해마다 안향의 기일이 오면, 가기 돈과 포목을 내어 제수를 융숭하게 차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으며, 안향의 후예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이가 있으면
"보라, 이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고들 했다고 한다.
실로 무엇이, 조금도 쉬지 않는 충정으로, 조금도 줄지 않는 수량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두고도 변함없이 그 상전을 그리워하게 하랴. 그리고 그 길고 오랜 강물을 혈온으로 따뜻하게 할 수가 있으랴. 연재 송병선은 구한말 사람으로, 소선 숙종조의 거유이며 노론의 머리인 우암 송시열의 팔세손이다. 그는 고종 임금을 가르친 왕사였는데, 아우 심석 송병손
과 나란히 그 인품과 학문을 널리 나라안에 떨치었다. 그러다가 광무9년,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나라의 자주권을 잃은 비분과 원통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연히 독약을 마시어 자결하였다. 의관을 정제하고 임금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 사배 무릎을 꿇은 채, 갈아입은 흰 옷 위로 선혈을 쏟으며 숨이 지는 연재 송병선의 발치에는, 맨 처음 이 자결을 준비할 때부터 소리없이 시중을 들던 사노 복남이가 애절하게 엎드려 있었다. 생시에야 어디 감히 차마 상전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었을까만, 이제 비장하고 의롭게 목숨을 끊은 주인 마님의 발을 어루만지며 오로지 눈물로 그 발등을 적시던 복남 이는, 드디어 터지는 설움으로 상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산발한 머리를 그 몸에 묻었다. 검붉은 원형이 송병선의 가슴을 물들이고, 복남이의 앞자락을 물들게 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상전의 몸을 제 두 팔로 감싸서 가슴으로 보듬어 안은 복남이는, 어질고 따뜻한 어버이를 잃은 애통으로 사뭇 서럽게 울면서 마지막 가는 원혼을 배웅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복남이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
송병선의 머리를 내려놓고, 피에 물든 옷자락을 여미어 드린 뒤, 그는 상전이 미처 다 못마신 약사발의 독약을 기울여 마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통곡으로 상전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릇에 묻은 약을 다 혀로 핥고 핥아 그는 상전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송병선의 시신 발치에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 복남이는, 죽어서도, 생전에 그리하였듯, 상전의 묘서 발부리 아래 이만큼에,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고개를 숙인 시늉으로 봉분도 나지막이 묻히게 되었다. 밤이나 낮이나 멀리 가지 않고, 꼭 부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상전의 존체를 우러르는 복남이 무덤 위로는, 그 상전의 손길같은 어질고 속 깊은 바람결이 언제나 흐르고 고이고 하였다.
시공을 넘어 함께 있는 이 종을 위하여 송병선의 후손들은 연재의 묘서에 벌처를 할 때면 꼭 잊지않고 복남이 무덤도 돌보았다. 그리고 연재 송병선의 기일이 돌아오면, 제사가 한날 한시인 복남이의 제상도 조촐하게 보아 개다리 소반에 나물 몇 가지를 차려서 송병선의 제상 아래 들여놓았다.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마치 어미의 태안에 든 태아처럼, 상전의 제상 다리 아래 감싸이듯 놓여 복남이는 제몫의 조그만 개다리 소반을 받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주종의 혼백을 하자리에 모신 은진 송씨 송병선의 후손들은 엄숙한 감회로 제사를 올리었으니.
그들이 제상 앞에 기라성처럼 서서 의롭게 빛나는 조상 송병선에게 엎드리어 재배를 할 때, 살아서나 똑같이 죽어서도 그 옆에서 상전을 무덤을 지키고, 이렇게 제사에 혼백까지 따라 와 모시는 만고 충복 복남이가, 한자리에서 같이 그 귀한 절을 받는 것이었다.
3부에 계속원병 제도는 장차 징병 문제를 경정하려는 시험으로 해 보는 것이라고 허드구만요."
이기채는 가슴이 까닭 없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리고 순간 전신에 찬 기운이 끼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을 털어냈다. 이기채의 가슴 복판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함은 쉽게 진정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재작년에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육군성, 척무성 및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입안, 검토된 그 안은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되고, 동년 4월 3일자로 시행되었었다. 전문 5조 및 부칙으로써 구성된 지원병령 제1조에는
"연령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육군 병역에 복할 자는 육군 대신의 정한 바에 의하여 전형한 다음, 이를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할 수 있다."
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민사령의 적용을 받는 한국인 청장년들을,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제도에 대하여 남차랑 총독은
"반도 동포의 충성이 강하게 인천을 움직인 결과이며, 조선 통치상 명확한 일선을 긋는 획기적인 일이다."
고 말했으며, 조선군 사령관 소기국소는
"일시동인의 성려에 바탕을 둔 것이요, 내선 일체적 성업을 향하여 가장 강력한 일보를 내어 디디는 것."
이라고 기꺼워하였다. 거기다가 윤덕영 같은 적극 친일 추종자는 이 육군특별 지원병령에 쌍수를 들어 환영 지지하면서
"이로써 반도 민중들도 전적으로 일본 국민이 되는 것이니, 한층 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고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나 이기채는 그때 아까처럼 가슴이 내려앉고, 소름이 찬 손으로 온몸을 훑으며 지나갔었다. 강모가 만 십육 세였던 것이다.
...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만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 만 십칠 세 이상의... 남자.
그러나 그것은 말하기가 좋아 지원병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지원병 지원을 권유하였으며, 그 응모를 보다 효과적으로 권유하기 위하여 설전부대를 조직하고, 지원병 후원회 및 행정력, 경찰력을 동원하여 계몽선전을 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지원병에 응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영문 모를 전장에서 탄알받이로 죽어갔다.
"일본 놈들이 볼 때, 조선 사람이 어디 사람같이 뵈겠습니까? 마소보다 더 노동력이 월등 유효헌 짐승이올시다. 거기다가 조선 땅이 그저 병참기지 정도가 아니에요. 조선 사람 모두가 전력원이 되는 겁니다. 조선의 자식 놈들은 모두 다 끌려 나가서 남의 나라 전쟁에 개죽음, 탄알받이로 죽게 될 것이란 말씀이올시다. 강모가 지금 열일곱 살 아닙니까? 물론 만으로는 아직 안됐지만."
그때 기표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기채를 향하여 들이대듯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도 같은 말을 한다. 다만 강모가 열아홉인 것이 다른 뿐. 이기채는 아무 말도 아지 않고, 논쇠 재떨이를 장죽으로 끌어당긴다. 일꾼들과 하인, 머슴, 집안의 노복들과 거멍굴 사람들에게, 이기채의 모습이 저만치서 얼핏 비치면
"고추바람 분다."
는 암호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매사에 각단지고, 매차고, 여지없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초췌해 보인다. 그의 작은 체수를 탈수된 사람처럼 더욱 깡말라,
과민한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이기채는 마음이 천근이나 무겁다.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한숨을 좀 돌리려고 숨을 들이쉬니, 갑자기 마당으로부터 불어오는 뙤약볕에 익은 더위가 헉, 가슴에 얹힌다. 그러더니, 금방 속이 어지러워진다. 미슥미슥 하면서 토하고 싶은 것이 서체인가도 싶다. 그는, 들었던 담뱃대를 재떨이 위에 얹어서 밀어 버리고 죽침을 찾는다.
"왜, 속이 거북하십니까?"
이기채의 얼굴은 어느새 샛노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젓는 다.
"이리 좀 누우시지요."
"괜찮어."
이기채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래진 얼굴을 날카롭게 찡그리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막 누우려고 하는데, 마당에서 안서방의 목소리가 터진다.
"서방님 오시능교?"
잔뜩 반가워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목소리다. 이기채는 보료 위에 누우려다말고 몸을 일으키며, 마당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잘 있었어?"
안서방에게 대답하는 것은 한결 의젓해진 강모의 목소리였다. 이기채는 안석에 등을 기대면서 한쪽 팔을 의침에 올려놓아 몸의 중심을 가눈다. 그 몸짓이 몹시 힘들어 보인다.
"강모가 오는 모양입니다."
기표의 말에 이기채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하절기 방학을 맞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몇 마디 주고받던 강모가 마루로 올라와 서는 것 같더니, 목외로 들어선다. 목외란, 사랑의 가운데를 장지로 막아 아래 위 칸으로 나눈 위 칸을 이른다. 보통 주인은 아래 칸 아랫목에 앉아 있고 손님은 위 칸으로 들어와, 문턱을 사이에 둔 채 거기서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눈다. 물론, 주인과 무관한 사이거나 문중의 어른들, 그리고 집안의 권속들은 목외를 통하여 들어온다 하여도 바로 주인이
앉은 자리 옆으로 오지만, 아랫사람이거나 하인, 또는 주인의 허락이 없는 손님들은 대개 목외에 머물다가 간다.
"강모 오느냐?"
기표가 먼저 아는 채를 한다. 강모는 한참 성장할 나이라서 그런지 지난봄에 보다 훨씬 몸집도 충실해진 것 같고, 거뭇거뭇 수염자리가 잡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여름 햇볕에 그을리기도 했을 텐데 얼굴은 희다. 글쎄, 희다기보다는 창백해 보인다고 할까,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자라서 언뜻 보기에는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싶은데, 얼굴빛이 마치 여름 창호지같이 바래있어서 웬일인지 불안해 보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검은 가방을 내려놓고 이기채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숙부 기표에게 절을 한 자리 더 한다.
"그래 그간 별고는 없었느냐?"
이기채가 의침에 몸을 의지한 채 강모에게 묻는다. 아직도 그는 노랗게 질린 안색이 풀리지 않아, 괴로운 듯 미간을 좁힌다. 이기채는 잠시 괴로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침묵하였다가 강모에게 시선을 건넨다.
"몸도 충실허고?"
"예."
"강태는 같이 안 왔드냐?"
"예."
이기채는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강모가 일어서며 위 칸으로가 검은 가방을 들고 아래 칸으로 내려온다. 가죽 가방인 모양인데 몹시 딱딱해 보이고,
여느 것처럼 네모진 것이 아니라 제법 부피가 있는 그것은, 대가리 쪽이 더 둥글게 퍼져 있고 꽁지는 둥글기는 하되 훨씬 좁다. 그리고 허리께가 잘록한 것이었다. 강모는 그 가방을 이기채 앞에 공손히 놓으며 자신은 완초 방석 위에 앉는다.
"이것이 무어냐?"
이기채가 의아하다는 듯 강모를 본다. 기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 빛이 심상치 않다.
"바이올린입니다."
"바이... 뭐라고?"
"서양 악기예요. 바이올린... 이라고... ."
"형님, 이것이 바이룽이라는, 그, 왜, 깡깽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뭐 서양 앵금 같은 거지요."
기표가 책상다리를 한 발바닥을 쓸면서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상체를 좌우로 미동하듯 흔든다.
"그래서?"
이기채는 검은 가방 쪽으로는 힐끗 한 번 눈을 주다가 말고 강모에게 다그치듯 묻는다. 말끝이 툭 떨어지며 잘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의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마의 주름과 좁혀진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날이 서 있었다. 강모는 그런 이기채에게 얼른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강모의 바랜 듯 한 낯빛이 더욱 바래는 것 같더니
"저... ."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기채는 채근하는 대신 강모를 쏘아본다. 그 눈길에 얼핏 붉은 핏발이 돋는다. 번뜩 화광이 비치는 것 같다. 그는 금방 터지려는 무엇인가를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 하는 양을 좀 보자, 하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좀 뵈드리려고요."
강모는 이기채 앞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가방의 고리를 벗긴다. 젊은 사람의 손등답지 않게 가방을 여는 강모의 손등은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손이 떨리는 품으로 보아, 강모는 이기채의 시선과 침묵에 잔뜩 짓눌려 주눅이 든데다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의 크고 둥근 눈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기채가 그렇게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기표도 따라서 얼굴빛이 무겁다. 이윽고 가방 고리가 벗겨지면서 뚜껑이 젖혀지자, 그 속에 누워 있는 바이올린이 날렵하고 작은 몸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부드럽고 윤택이 나는 다갈색 몸통의 잘록한 허리에는 단단한 단풍나무로 된 줄 받침이 야무지게 버티고 서서, 팽팽한 네 가닥의 줄을 받치고 있다. 그 팽팽함은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아도 저절로 팅, 소리가 날 것 같다. 그것은 이기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경가닥과 힘줄들은 당길 대로 당겨진 활시위처럼 푸르르 떨린다.
"강모가 동경에 있는 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허는데... ."
이기채는 청암부인이 한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연전에, 며느리가 신행 올 무렵, 대실로 떠난 강모를 두고 청암부인이 이기채에게 그런 의논의 말을 꺼냈었다.
"동경에 보내 주지 않으면 저도 대실에 안 간다고 정색을 허길래, 내, 애비와 의논헌다고 그랬다. 동경행이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나, 내 마음에 인륜의 일이 급하여 그쯤 대답해두었으니 네가 잘 타이르거라. 제 딴에는 혹시 동경 가 있는 강호를 생각하고, 거기 같이 있어 볼까 하는지도 모르지. 강호하고 강모는 처지가 다르니 네가 알아듣게 잘 타일러 보아."
"타이르기는 무얼 타이릅니까? 도대체 그놈은 제 분수도 모르고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놈이올시다. 물렁하기가 묵나물 한가지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이 집안을 이끌어가고, 장차는 종손의 도리를 다할 것인지, 지금부터도 앞길이 캄캄합니다. 솔직한 말씀이 제가 강모란 놈 때문에 요즈음 통 잠을 못 이룹니다."
잠을 못 이룬 것이 어찌 그때뿐이랴.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깊은 불면의 늪으로 잠겨 들어가, 발길은 끝도 없는 허방을 헤매고, 머리 위로는 짓눌려 오는 진흙덩이의 무게, 그리고 문득 자다 깨면 덮쳐 오던 그 암담한 어둠. 그때마다 이기채는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어둠이 바닷물처럼 집안을 침몰시키고 있는 한밤중, 큰사랑에서 울리는 마른기침 소리와 재떨이 두드리는 새된 놋쇠 소리는, 마치 어둠을 깨뜨리고 쫓아내려는 경쇠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누렁이가 펀 듯 귀를 세우며 짖기 시작하면 위아랫집, 건넛집의 개들이 꼬리를 이어 짖어댄다.
그러다가 온 마을의 개들이 짖는다.
"율촌양반 오늘 밤에도 또 못 주무시는가 부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돌아누우며 그렇게 잠결에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러나 개 짖는 것도 잠깐이다. 누렁이가 싱겁게 크엉, 하면서 소리를 멈추면, 이윽고 멀리서 따라 짖던 것들까지도 잠잠해지고, 마을과 집 안은 더 깊은 정적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린다. 무너질 듯 시커먼 산자락들이 검은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