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누구나 외롭다 / 복향옥
요즘은 코로나 증세를 말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코로나로 입원했다는 이는 물론 자가 격리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마스크만 하면 거리를 활보하고 모임에 참석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감기 정도로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때는 그야말로 경계가 삼엄했는데 말이다.
코로나 소용돌이에서 간신히 벗어날 즈음 일이다. 요양원에 계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뜸, 보고 싶은데 왜 안 오냐고 성화다.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 같다. 병세가 달라진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내 상황을 먼저 살피고 나서 내가 바쁘지 않은 걸 확인한 후에야 그다음 얘기를 했을 텐데, 그날은 다짜고짜 당신 감정 먼저 쏟아 냈다. 가게가 좀 한가해지면 가겠노라 했더니 한숨이 터졌다. 심심해 죽겠단다.
큰오빠 가까이 오고 싶어 옮긴 그 요양원은 시골이라 그랬는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직원들도 몇 되지 않았다. 전에 계시던 데는 동무할 어르신들이 많았고 요양 보호사나 봉사자들도 수시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누구라도 붙들고 말하면 들어 주곤 했다. 그런 데랑 비교하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방 쓰는 할머니는 말씀 한마디 못 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계셨으니 오죽이나 무료했을까. 며칠 후 애써 시간을 만들어 달려갔지만, 코로나가 우리를 떼어 놓았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면서 핸드폰으로만 안부를 물어야 했다.
그러다가 97세의 엄마는 지팡이를 잘못 짚어 넘어졌고 넓적다리뼈가 부러져 입원했다. 두 달쯤 후에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어떤 수순을 밟는 것 같아 우리 7남매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요양병원은 면회가 더 자유롭지 못했다. 광양에서 충청도까지, 세 시간 가까이 달려가 겨우 5분 만나는 게 다였다. 점점 기억이 흐려지는지 우리 이름도 얼굴도 구분하지 못했다. 부쩍 야위고 목소리에서 기력이 떨어지는 엄마를 느끼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막내의 특성을 버리지 못한 나는 울먹이면서 주말을 엄마랑 보내겠다고 떼썼다. 엄마 식사와 용변 처리를 도맡아야 하는 데다가 당시 내 건강이 누구를 수발할 정도로 성치는 않았기 때문에, 언니 오빠들과 간호사 모두 말렸다.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로 가 닿는 미련을 거두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틀 뒤, 엄마의 숨이 멎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식은 있는데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의지나 희망과는 상관없이 타인들이 내 문제를 결정하고 처리하는 걸, 내가 보고 듣는다면 내 마음은 어떨까.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치부 보이는 게 너무 싫지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라면 그 심정은 어떨까. 그런 상황을 견뎌야 했던 엄마는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을까 싶으니 또다시 먹먹해진다.
혼자여서 외로울 수도 있고 타인과 소통이 안 돼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구든지 아주 짧게나마 그런 순간들을 만나지만 사람과 일에 치여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그 시간이 길어지기도 할 것이다. 고독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지만, 유익이 되기도 한다. 생각이 필요할 때다.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분주한 나는 가끔 망망대해의 섬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