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지고는 못 살아 / 백현
읍내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길 건너에 있는 여중 학교에 입학했다. 오십 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우리 반 중에서 나랑 같은 학교 출신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읍내는 물론 인접한 면 단위의 초등학교를 다닌 여자애들이 다 모였기 때문이다. 여느 새 학년보다 긴장되었고, 한편으로는 중학생이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그때의 나는 번호를 정하고자 키 순서로 쭉 늘어선 복도에서 슬쩍 까치발을 들어도 10번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키가 작았다. 그래도 할 말은 못 참고 꼭 해야 하는 아이였다. 나름대로 의협심도 있었던 것 같다. 누구와 말싸움을 해서 져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덕도 있었으리라.
입학식 다음 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청소 구역을 정해주셨다. 1번부터 6번까지는 교실, 7, 8번은 복도, 이렇게 번호 순서대로 배당하였다. 나와 내 뒷번호는 서편 운동장 청소를 맡았다. 그렇게 쭉 돌리다가 뒤에 몇 명이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구역마다 한두 명씩 더 배치한 결과 우리 반 끝 번호 두 명이 서편 운동장 청소에 추가되었다.
서편 운동장 청소는 본관 서쪽에 길게 있는 화단과 그 앞의 운동장을 관리해야 했다. 청소 구역 담당 선생님이 화단이나 운동장에 있는 떨어져 있는 쓰레기도 줍고, 운동장에 큰 돌멩이 같은 것이 눈에 띄면 주워서 운동장 가 쪽으로 옮겨놓아야 한다고 하셨다. 매일 선생님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고도 했다.
나중에 우리 구역이 된 꺽다리 둘이 청소 구역을 나누자고 했다. 자기들이 운동장을 할 테니 우리에게 화단을 책임지라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사실 그즈음에 운동장이나 화단에는 별로 주울 쓰레기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의 눈도장을 찍어야 하기에 그 주변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그 애들은 어떨 때는 쓱 들렀다가 가기도 했지만, 보통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나오신 선생님은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희 꼬맹이들만 있느냐고 하였다. 넷이 다 있는 적이 없다고, 이러면 담임 선생님에게 말하겠다고도 했다. 나타나지 않은 그 애들 때문에 착실하게 있는 우리가 꾸중을 듣는 것이 억울했다. 너희들 때문에 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고 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교실에 올라갔다. 청소 시간에 다 끝나갈 무렵에야 둘이 어디서 놀고 오는지 나타났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너희들 때문에 선생님에게 야단맞았잖아. 청소 시간에 청소해야지 뭐하고 놀고 다녀? 너희 초등학교에서는 이래도 되었냐?” 마음에 맺힌 말을 풀어내는 중간에 꺽다리 하나가 “뭐야? 이것이” 하면서 내 머리채를 잡았다.
그 당시 여자애들의 싸움이 그랬다.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찢어지게 치뜨고 째려보면서 말싸움했다. 그러다 과격해지면 상대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쥐어뜯기도 했다. 싸움 중간에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한, 떼어놓았을 때 손에 머리카락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이 이긴 것으로 여겼다.
말싸움도 해 본 적이 오래라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머리채를 잡힌 것이다. 감히 내 머리를 잡는다고? 뒤늦게 반격에 나섰지만, 손이 그 애의 머리에 가 닿지도 못했다. 이미 내 머리채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어서 목을 세우지 못하는 나는 그 애의 머리를 조준할 수조차 없었다.
반 아이들이 우리를 금방 떼어놓았다. 곧 선생님이 종례하러 오실 것이기에 아이들의 만류에 따라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머리로 온 피가 몰린 것 같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머리채를 잡힌 것이며, 그 애의 머리에는 손도 닿지 못한 것이 분해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반드시 이 빚을 갚아주마. 네 머리를 한 움큼 뽑아주리라.
그 꺽다리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담당 선생님도 포기했는지 더 뭐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래도 선생님이랑 만난 날에는 그들에게 선생님을 빙자한 시비를 걸었다. 일주일 후쯤 또 격돌했다. 약을 살살 올려서 그 애의 손이 내 머리를 향한 순간에 나도 잡아챘다. 그런데 그 애가 힘을 줘서 내 머리를 흔드는 순간 겨우 잡은 내 손이 그의 머리에서 미끄러졌다. 아깝지만 또 분패였다. 키 차이를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의 싸움에서 지고 나니 그 애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지 하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무엇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선생님이 뭐라지 않으셔도 청소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면 그 애들을 기다렸다가 시비를 걸었다. 청소도 안 하고 맨날 놀러만 다닌다는 둥, 학교에 놀러 왔다는 둥, 청소가 그 모양인데 공부는 잘하느냐는 둥. 어디에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또 그 아이가 팩하고 화를 냈다. 또 기회가 왔다.
청소가 끝나가는 무렵이라 교실을 청소하는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의자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려놓은 의자에 얼른 올라가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제 내가 그보다 머리 하나쯤이 더 높아졌으니, 방심하던 그 애의 손이 내 머리에 닿지 못했다. 나는 잡은 머리채를 맘껏 흔들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잡은 머리인데.
그 순간 담임 선생님이 종례하러 들어오셨다. 엉켜있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셨고, 그 애는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이 둘이 교무실 선생님 자리에 가서 손들고 있으라고 했다. 종례를 마친 선생님이 무릎 꿇고 손들고 있는 우리 앞으로 왔다. 분함을 참지 못한 그 애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고, 기쁨을 숨길 수가 없는 나는 실실 웃었나 보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벌을 받으면서도 웃고 있네? 얼마나 사나우면 쥐 통수만 한 것이 애를 울려?” 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억울한 얘기에 그간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말했을 텐데, 그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첫댓글 재밌네요. 선생님 성격이 고스란히 그려집니다.
글이 재밌습니다.
문학기행 때 뵌 명쾌하신 선생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중(생)이 많은 곳에서 무림 고수로 등극하셨군요. 무협지 한 편을 읽은 듯합니다. 뭐니뭐니 해도 혀에서 나오는 기운은 이길 수 없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루종일 선생님 글만 생각날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으로 빙의한 듯 응원하며 읽었습니다.
그날은 기분이 좋아서 선생님께 미주알고주알 이르지 않았다는 게 압권이네요.
야무지게 한방 날린 선생님이 멋져요.
하하하하, 백현 선생님이 그렇게 뒤끝이 있는 줄 몰랐네요.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
너무 재밌고, 매력적이예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격이예요. 대리만족!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성격 장난 아니네요. 하하.
선생님이? 놀라며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몰입도 최상입니다. 하하.
백 선생님에게 그런면이 있었네요.. 머리채 안 잡히려면 앞으로 조심해야 겠어요.. 재밌습니다.
와, 백현 선생님 당찬 성품 대단합니다.
글을 읽으며 저절로 선생님 응원하게 되네요.
눈에 보이게 잘 써서 마치 제가 그 시절로 돌아간 듯이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