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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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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422
2026.10.16 21:29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8-12
어제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그 두려움이 가장 커지는 자리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는 자리 ―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곧 목숨이 걸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위로가 참으로 다정합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성령께서 그때에’ 가르쳐 주실 것이다.”
미리 준비한 말솜씨나 논리가 아니라,
바로 ‘그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 이냐시오가 그 산 증인입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였고,
사도들에게서 직접 신앙을 배운 첫 세대에 속합니다.
나이 들어 체포되어, 사슬에 묶인 채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험한 길 위에서 그는 일곱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들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넘칩니다.
그는 자신을 구하려 애쓰지 말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속삭이는 성령의 소리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내 안에 흐르는 생수가 ‘아버지께로 오너라’ 하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를 이끄셨던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순교자들을 두고 노래했듯,
그들의 용기는 사람의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이냐시오는 또 교회의 ‘일치’를 간절히 당부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합창단’에 비겼고,
성체 안에서 하나 되라고 거듭 권했습니다.
그가 편지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교회’라는 말을 썼습니다.
‘보편’, 곧 모두를 향해 열린 교회라는 뜻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마지막 날에, 오늘 복음은 뿌리를 보여 줍니다.
이 한 주간 우리는 친절과 선행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힘으로 쥐어짜는 착함이 아니었습니다.
자격 없는 이를 부르는 잔치의 초대,
원수에게까지 넓은 자비, 속에 담긴 것을 내어 주는 자선,
이웃의 짐에 손을 대는 용기 ―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갈라 5,22)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걱정을 내려놓고,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때에’ 말과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그 성령께서 ‘평화와 인내’를 익히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는가?
나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며 성령을 잊지 않는가?
나의 친절과 용기는 내 힘인가, 성령의 열매인가?
나는 이냐시오처럼 ‘하느님의 밀알’로 나를 내어 줄 수 있는가?
주님,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당신을 증언하게 하소서.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않고 성령께 맡기게 하시고,
제 친절이 당신 영의 열매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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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6. 16:12
하느님은 우리의 집이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지상 집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집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하느님은 우리의 집이십니다.
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집을 향한 그리움은 모든 이의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의심이나 질문 없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거처 말입니다.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역사 학자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는 성경과 다양한 신앙 전통 안에서 "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집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안에서 중심 주제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과 함께할 약속의 땅을 찾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거하심을 선포하며, 무슬림들은 기도의 방향을 "집"으로 향하고, 불교인들은 깨달음 안에서 참된 집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현존을 모시기 위해 성전을 세우고, 성소로 거룩한 장소를 표시하며, 우리의 죽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매장하거나 물에 띄우거나 화장합니다.
성경 전체의 큰 이야기 흐름은 인류가 참된 집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영적인 교류가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지상 집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집이십니다…. 이 이야기는 문학적 풍요로움과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땅과 인간, 집과 하느님이 서로 얽혀 있는 이야기이며, 인류가 참된 거처를 향해 나아가는 갈망을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기록입니….
성경 안에는 인간, 집, 그리고 하느님을 엮어내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이를 드러내는 책은 룻기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유다인과 혼인했으나 과부가 됩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자기 고향에 머무르지 않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서 새로운 집을 찾고자 간청합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 룻기 1,16-17
집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고, 물리적 장소이며, 하느님 당신 자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거처입니다. [1] 이는 단순히 인간적 관계나 장소를 넘어, 성사(聖事)와 공동체 안에서 체험하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합니다. 부부와 가족, 신앙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중심에 모실 때, 그곳은 곧 성전이 되고, 우리의 삶은 성부의 품 안에서 머무는 거룩한 집이 됩니다.
버틀러 배스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더불어 거하시고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유신론적 신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집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뭅니다.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을 "쉐키나(Shekhinah)"라 부르는데, 이는 "하느님 현존의 머무름"을 뜻하며, 새가 둥지를 트는 모습을 묘사할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고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 선포하며, 이스라엘에게 안식과 보호의 약속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백합니다….
"머물다(dwell)"라는 말은 고대 영어에서 "이단" 혹은 "광기"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거룩한 광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광기는 인류가 오래도록 간직해온 희망, 곧 하느님 안에 머물고자 하는 꿈입니다. 이는 단순한 희망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 애쓰는 수고이기도 합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신적인 광기이자 인간적인 광기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물리적 집은 무너질지라도, 참된 집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적 약속입니다….
집은 거룩한 거처,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어디에 머무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빚어가는지 깊이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집을 찾습니다. 머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를 찾고자 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아프리카계 미국 공동체에서는 죽음을 "home-going", 곧 집으로 가는 길이라 부릅니다. 단순히 "집에 간다"(going home)는 것도 아니고, "귀향"(homecoming)도 아닌, "home-going"이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 Kathy S.
Reference
[1] Diana Butler Bass, Grounded: Finding God in the World; A Spiritual Revolution (HarperOne, 2015), 169, 170.
[2] Butler Bass, Grounded, 190, 191, 19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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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7 04:18
- 응달에서 양달로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어제 독서에서 그리스도론을 에페소 신자들에게 장엄하게 전해준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는 에페소 신자들을 위해 자기가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얘기하고 있는데 이 편지를 읽는 내내 참 따듯하고 흐뭇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것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신자들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는.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알게 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알게 되면 안 좋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죽하면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경우 아예 모르는 것이 좋고,
어떤 사람은 차라리 하느님도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몰랐으면 죄도 마음대로 짓고
죄를 짓고도 그리 괴롭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안 것이 아니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빈 것도,
알게 되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빈 것도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사실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도 ‘마음의 눈’이나
‘지혜와 계시의 영’ 같은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런 눈과 이런 영이 없으면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알 것입니다.
어렸을 때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도 그렇게 볼 겁니다.
흔히 얘기하듯 하느님을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상을 주시기 위해서 벌도 주신다는 것을 모를 것이고,
그분이 주실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 모를 것이며,
그분은 그것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자기 죄만 보고 하느님의 은총을 못 보는 사람은 가련합니다.
반대로 죄 때문에 용서의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의 풍성함을
알게 되고 보게 된 사람은 얼마나 좋고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사실 하느님 은총의 풍성함을 보지 못하면 그런 신앙은 헛신앙입니다.
응달에서 양달로 나가야 합니다.
죄에서 은총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화도 해야겠지만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조명을 받아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가 얘기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는 지녀야 하고,
그래서 서로를 위해 바오로 사도처럼 빌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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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7. 05:31
"깨어 있어라!"~~~ 우리 일생의 화두!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대조되기에,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어 태어나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그 영과 일치되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라서 더더욱 난해하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쩌면 여기서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말을 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성령을 단순히 한 번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완강한 거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이해일 뿐입니다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것'과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것'을 구분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은 곧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를 거부한다는 것은 방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드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이정표를 뒤집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적 논리에서 모순된 전제를 받아들이면 아무 결론도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결론—그것의 반대까지—도출됩니다.
그러니까 모순을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아무 것도 설 수 없게 되며, 진리를 버린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버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모든 것이 "옳다"고 여겨지기에 잘못에 대한 자각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엄밀한 논리로 따져도 오류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슬러 짓는 죄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진리를 버린 상태에서는 회개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용서를 청할 생각조차 결코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이코패스는 결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와 거짓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거짓 탐지기조차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회 전체가 진리와 거짓의 구분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일 때, 이는 영적 병리와도 같습니다. 진리가 여론조사로 결정되고, 각 집단이 자기만의 "진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결국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죄의 그림자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식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 또한 이런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떻게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준비된 연설은 때로는 지나치게 익힌 음식과 같아, 성령의 은총이 깃들 틈이 없습니다. 음식이 너무 오래 익혀지면 맛과 향이 사라지고, 생동감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연설이 지나치게 준비되고 다듬어지면, 살아 있는 감동이나 즉흥적인 진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광장에서 했던 그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을 꿉니다..."는 본래 원고에 없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날 연설 내용 중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파고 들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된 말은 다른 맥락과 다른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 자기중심적 계획의 산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은총은 바로 그 순간에 주어집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우리의 계획을 세울 겨를이 없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놀라운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위급한 순간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지혜롭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때로 단순한 지연에 불과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계획보다 앞서 그 순간에 필요한 말씀과 행동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때그때를 맞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해야 할 준비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때라도 주님께서 당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늘 새롭게 마음에 다지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현존을 순간순간 의식하고자 하는 "깨어 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 이렇게 오늘의 강론을 준비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순간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자기중심적 계획의 산물로 끝나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순간도 어느 때에 맞이하는 순간처럼 깨어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생의 화두로 이 "깨어 있음"을 주신 것입니다. 깨어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며 모든 존재를 당신 선으로 이끄시는 진정한 현실을 보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깨어 있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성령께 열어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대처하기 힘든 어떤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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