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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한 너른 바다에 거친 물결이 이니,
물위의 갈매기는 갈대 숲으로 날아들고
북쪽의 기러기 남으로 돌아온다.
출렁이는 물소리는 고깃배 소리가 분명하나,
'굽이친 물줄기에 사람 자취 보이지 않고 산봉우리만 푸르렀다.
부르는 뱃노래에 온갖 근심 담겨 있다.' 함은
나를 두고 한 말이리라.
장사땅을 지나가니 간의태부 가의는 간 곳 이 없고,
멱라수 바라보니 굴원이 물에 빠져 지킨 충성 진실로 대단하다.
황학루를 당도하니,
해 저문 저녁 날에 고향은 어디인가,
강산에 아지랑이 내 마음 시름겹네. 라던
최호의 유적이요,
봉황대를 다다르니
먼 산은 하늘 멀리 아득히 솟아 있고,
강줄기 갈라진 곳 백로주 되어 있다. 하던
이태백의 놀던 곳이다.
심양강 다다르니
백낙천은 어디 가고 비파 소리 끊어졌다.
적벽강을 그저 가랴,
소동파 놀던 풍류 그대로 있지마는
조조 같은 당대 영웅 지금에 어디 있나.
달은 지고 깊은 밤에 고소성에 배를 매니
한산사 종소리 뱃전에 들려온다.
진회수를 건너가니
상녀는 자기 나라 망한 줄도 모르고
달빛어린 강가에서 후정화만 노래한다.
소상강 들어가니
악양루 높은 누각 호수 위에 떠 있고,
동남으로 바라보니
산들은 겹겹이 쌓여 있고 강물은 넓고 넓다.
소상팔경이 눈앞에 벌여 있어 찬찬히 둘러보니 물결이 아득한데,
'주루룩 주루룩' 내리는 비 아황 여영의 눈물이요,
대나무에 어린 반점 점점이 맺혔으니
'소상강 밤비'가 이 아니냐.
칠백 평 호수 맑은 물에 가을달이 돋아오니
하늘의 푸른 빛이 물 위에 어리었다.
어부는 잠을 자고 소쩍새만 날아드니
'동정호 가을 달'이 이 아니며,
오나라 초나라 너른 물에 오고가는
장삿배는 순풍에 돛을 달아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야, 어기야, 어야."소리하니
'먼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가 이 아니냐.
강 언덕 두서 너 집에 밥짓는 연기 나고,
강 건너 절벽 위에 저녁노을 비쳐오니
'무산의 저녁노을'이 이 아니냐.
하늘에 떠다니는 갖가지 구름들은
뭉게뭉게 일어나서 한 떼로 둘렀으니
'창오산 저녁 구름'이 이 아니며,
푸른 물 하얀 모래 이끼 낀 양쪽 언덕에
시름을 못 이기어 날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하나 입에 물고 점점이 날아들며
'끼룩끼룩' 소리하니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가 이 아니냐.
상수로 울고 가니옛 사당이 분명하다.
남쪽 지방 찾아왔던 두 자매의 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소리에 눈물지니 '황룽묘의 두 부인 사당'이 이 아니냐.
새벽 종 큰 소리에 경쇠 소리 뎅뎅 섞여 나니
배타고 온 먼 길손의 깊이 든 잠 놀래 깨우고,
탁자 앞의 늙은 중은 아미타불 염불하니
'한산사 저녁 종'이 이 아닌가.
팔경을 다 본 후에 배를 타고 떠날 적에,
향기로운 바람이 일어나며 노리개 소리 들리더니
수풀 사이에서 어떤 두 부인이 신선갓을 높이 쓰고
안개빛 저고리에 석류빛 치마 입고 신을 끌며 나오더니,
"저기 가는 심소저야, 너는 나를 모르리라,
'창오산이 무너지고 상강의 물 말라야
대나무에 어린 핏자국이 없어지리라,' 하던
천추에 깊은 하소연을 할 곳이 없었다가,
지극한 너의 효성 하례코자 내 왔노라.
요, 순 임금 돌아가신 뒤로 수천 년이 되었으니 지금은 어느 때며,
오현금 <남풍시>를 이제까지 전하더냐?
물길 먼 먼 길에 조심하여 다녀오라."하며
문득 간 데 없기에 심청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는 아황, 여영 두 부인이구나,'
서산에 다다르니 풍랑이 크게 치고 찬 기운이 돌며 검은 구름이 두르더니,
사람이 나오는데 얼굴은 큰 수레바퀴만하고 두 눈 사이가 널찍한데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두 눈을 딱 감고 심청 불러 소리치기를,
"슬프다, 우리 오왕 백비의 참소 듣고
촉루검을 내게 주어 목을 찔러 죽게 하고,
가죽부대로 몸을 싸서 이 물에 던졌으나,
대장부의 원통한 마음에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모양을 분명히 보려고,
내 눈을 빼어 동쪽 대문 위에다 걸어두고 왔더니
과연 그 모양을 보았노라.
그러나 내 몸에 감은 가죽 뉘라서 벗겨 주며 눈 없는 게 한이로다."
이는 누구인고 하니 오나라 충신 오자서였다.
구름이 걷혀지며 햇빛이 밝게 비치고 물결이 잔잔한데,
어떤 두 사람이 밭둑에서 나오는데,
앞의 한 사람은 왕자의 기상이요
얼굴 의 검은 때는 무한 근심 띠어 있고
의복이 남루하니 초나라 임금임 이 분명하다.
눈물지으며 하는 말이,
"애닮고 분한 게 진나라의 속임되어,
3년 동안 무관에 억류되어 고국을 바라보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혼이 되었구나.
천추에 깊은 한이 소쩍새가 되었더니,
원수갚을 기회인 줄 반겨 듣고 나섰다가
속절없는 동정달에 헛춤만 추었노라."
뒤에 또 한 사람은 얼굴색이 파리하고 모습이 깡마른데,
"나는 초나라 굴원이라,
회왕을 섬기다가 자관의 참소를 받아 더러운 몸 씻으려고 이 물에 빠졌더니,
어여쁠사 우리 임금, 사후에나 섬기려고 이 땅에 와 모셨노라,
나 지은 <이소경>에,
고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백용이라.
초목이 가을 만나 시들어가니, 내 님이 늦으실까 걱정스럽네.
라는 구절을 세상에 선비들이 몇몇이나 외우던고?
그대는 부모 위해 효성으로 죽고 나는 충성을 다하더니,
충효는 일반이라 위로코자 내 왔노라.
바다 만 리 먼먼 길에 평안히 가옵소서."
☆☆☆
심청이 생각하기를,
'죽은 지 수천 년에 혼백이 남아 있어
사람의 눈에 보이니 나도 또한 귀신이라.
나 죽을 징조로구나,' 하며 슬피 탄식하기를,
"물에서 잠을 잔 지 몇 밤이며
배에서 밥을 먹은 지 몇 날이냐?
그간 서너 달을 이 물같이 지나가니,
가을 바람 쌀쌀하게 저녁나절 일어나고,
너른 세상 환하여 밝게 빛난다.
지는 노을 외로운 갈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에 맑은 물은 하늘과 한 빛이네.
왕발의 지은 구절 그대로다.
한없이 지는 낙엽 쓸쓸이 내려앉고,
다함없는 긴 강물 출렁이며 흐른다.
두보가 읊은 시요,
강 언덕에 귤 익으니 조각조각 황금이요,
갈대꽃 바람에 우니 점점이 횐 눈이라.
가랑비에 지는 잎은 곱게도 붉었는데,
외로운 어선들은 등불을돋우 달고
<어부가>로 화답하니 그도 또한 수심이라.
물가에 푸른 산은
봉우리마다 칼날 되어 가르나니 물굽이라.
해 지는 장사땅에 가을 날 저무는데,
어디를 찾아가서 아황 여영 위문할까.
송옥의 <비추시(悲秋詩)>가 이에서 더할소냐?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약 캐러 가는 밴가,
방사 서불 태웠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밴가?
길에서 죽자 해도 뱃사람들이 수직하고,
살아가자 하니 고국이 멀고 멀다."
한 곳을 다다라 돛을 지우고 닻 내리니 여기가 바로 인당수라.
거센 바람 크게 일어 바다가 뒤누우며 어룡이 싸우는 듯,
벽력이 일어 난 듯,
너른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
노도 잃고 닻도 끊어지고 용총도 부러지며 키도 빠지고,
바람불고 물결쳐 안개 비 뒤섞어 잦아진데 갈 길은 천리 만리 남아 있고,
사면은 어둑하고 천지가 적막하여 간신히 떠오는데
뱃전은 탕탕, 돛대도 와지끈, 순식간에 위태하니,
도사공 이하 모두들 겁을 내어 정신이 달아나고,
고사 제물 차릴 적에 섬 쌀로 밥을 짓고
동이 술에 큰 소 잡아 온 소다리 온 소머리 사지 갈라 올려놓고,
큰 돼지 잡아 통째 삶아 큰 칼 꽃아 기는 듯이 받쳐 놓고,
삼색 실과 오색 탕수, 갖은 고기 식혜류와 온갖 과일 방위 차려 고여 놓고,
심청을 목욕시켜 횐 옷으로 갈아 입혀 상머리에 앉힌 뒤에,
도사공이 앞에 나서 북을 둥둥 울리면서 고사한다.
"두리등 두리등, 칩더 잡아 삼십삼천 내립더 잡아 이십팔수.
허궁천지 비비천과 삼황오제 도리천,
십왕 일이 등 마련하실 제, 천상에 옥황상제,
지하 십이제국 차지하신 황제 헌원씨,
공자 맹자 안자 중자 법문 내고, 석가여래 불도 마련,
복희씨 팔괘 마련하여 있고,
신농씨 갖은 식물 맛을 보아 약을 마련하여 있고,
헌원씨 배를 내어 막힌 데를 건네 주심을 후생이 본을 받아,
사농공상 일을 삼아 다 각기 살아가니 막대한 공 이 아니며,
하우씨 구년 홍수 배를 타고 다스렸고,
물길 따라 구획지어 물길을 돌렸으며,
오자서 망명할 제 조각배로 건네주고,
해성에서 패한 항우 오강으로 돌아들 제
배를 매고 기다렸고,
공명의 조화로 동남풍을 빌어 내어
조조의 십만대병 수륙으로 화공(火攻)하니
배 아니면 어찌하며,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오고
장경은 강동으로 돌아갈 제 이도 또한 배를 타고,
임술년 가을 칠월 달에 조각배 띄워놓고 소동파도 놀아 있고,
'지국총 어사와' 하니 배를 저어 떠다님은 어부의 즐거움이요,
닻을 올려 노 저으며 장포로 내려가니 오나라 월나라 아가씨들 연꽃 따고,
재물을 많이 싣고 해마다 왕래함은 장삿배가 이 아닌가?
우리 동무 스물 네 명 장사를
직업 삼아 십여 세에 조수타고 서 호를 떠다니니,
인당수 용왕님은 사람 제물 받잡기로
유리국도 화동에 사는 십오 세 효녀 심청을 제물로 드리오니,
사해 용왕님은 고이고이 받으소서.
동해신 아명 서해신 거승이며,
남해신 축융 북해신 옹강이며,
칠금산 용왕님
자금산 용왕님
개개 섬 용왕 님
영각대감 성황님,
허리간에 화장성황 이물고물 성황님네 다 굽어보옵소서.
물길 천리 먼먼 길에 바람구멍 열어내고,
낮이면 골을 넘어 대야에 물 담은 듯이,
배도 무쇠가 되고 닻도 무쇠가 되고
용총마류 닻줄 모두 다 무쇠로 점지하시고,
빠질 근심 없삽 고 재물 잃을 근심도 없애시어
억십만 금 이문 남겨 대끝에 봉기질러 웃음으로 즐기고
춤으로 기뻐하게 점지하여 주옵소서."하며
북을 '두리등 두리등' 치면서,
"심청은 시각이 급하니 어서 바삐 물에 들라."
심청이 거동 보소.
두 손을 합장하고 일어나서 하느님 전 비는 말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 전에 비나이다.
심청이 죽는 일은 추호라도 섧지 아니하여도,
병든 아버지 깊은 한을 생전에 풀려하고 이 죽음을 당하오니
명천은 감동하사 어두운 아비 눈을 밝게 띄워 주옵소서."
눈물지며 하는 말이,
"여러 선인님네 평안히 가옵시고
억십만 금 이문 남겨 이 물가를 지나거든
나의 혼백 불러내어 물밥이나 주시오."하며
안색을 변치 않고 뱃전에 나서보니
티없이 푸른 물은 '월러렁 콸넝'
뒤둥구리 구비쳐서 물거품 북적찌데한데,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심청이 다시 정신차려 할 수 없어 일어나서
온 몸을 잔뜩 끼고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바다 속에 몸을 던지며,
"애고 애고, 아버지 나는 죽소."
뱃전에 한 발이 지칫하며 거꾸로 풍덩 빠져 놓으니,
꽃 같은 몸이풍랑에 쉽쓸리고 밝은 달이 물 속에 잠기어
너른 바다 속에 곡식낱이 빠진 것 같았다.
새는 날 기운같이 물결은 잔잔하고
광풍은 삭아 지며 안개 자욱하여 가는 구름 머물렀고,
맑은 하늘 푸른 안개 새는 날 동방처럼 날씨 명랑했다.
☆☆☆
도사공 하는 말이,
"고사를 지낸 후에 날씨가 순통하니 심낭자 덕 아니신가?"
좌중이 같은 생각이라 고사를 마치고,
"술 한 잔씩 먹고 담배 한 대씩 먹고 행선함새."
"어, 그리 함새."
'어기야 어기야.'
뱃노래 한 곡조에 삼승 돛을 채어
양쪽에 갈라 달고 남경으로 들어갈 제,
와룡수 여울물에 쏘아놓은 살대같이,
기러기 다리에 전한 편지
북해 상에 기별같이 순식간에 남경으로 다 달았다.
이때 심낭자는 너른 바다에 몸이 들어 죽은 줄로 알았는데,
무지개 영롱하고 향내가 코를 찌르더니,
맑은 피리 소리 은근히 들리기에 몸을 머물러 주저할 제,
옥황상제 하교하사 인당수 용왕과
사해용왕 지부왕에게 일일이 명을 내리셨다.
"내일 출천 효녀 심청이가 그곳에 갈 것이니
몸에 물 한 점 묻지 않게 할 것이며,
만일 모시기를 실수하면 사해용왕은
천벌을 주고 지부왕은 파문을 내릴 것이니,
수정궁으로 모셔들여 3년 받들고 단장하여
세상으로 돌려보내라."
명이 내리니
사해용왕과 지부왕이 모두 다 놀라 두려워하며,
무수한 바다의 장군과 군사들이 모여들 제,
원참군 별주부,
승지 도미, 빈랑 낙지,
감찰왕 잉어며,
수찬 송어와 한림 붕어,
수문장 메기,
청령사령 자가사리,
승지 북어,
삼치 갈치 앙금 방게 수군 백관과
백만 물고기 병사며,
무수한 선녀들은 백옥 가마를 마련하여 그때를 기다리니,
과연 옥같은 심낭자가 물로 뛰어들기에 선녀들이 받들어 가마에 올렸다.
☆☆☆
심낭자 정신을 차려 하는 말이,
"속세의 비천한 인간으로 어찌 용궁의 가마를 타오리까?"하니
여러 선녀들이 여쭙기를,
"옥황상제의 분부가 지엄하시어 만일 타시지 아니하시면
우리 용왕이 죄를 면치 못하실 것이니 사양치 마시고 타옵소서."
심낭자가 그제야 마지못하여 가마 위에 높이 앉으니
팔선녀가 가마를 메고 여섯 용은 곁에서 모시고,
바다의 장군과 군사들이 좌우로 호위하며
청학 탄 두 동자는 앞길을 인도하여 바닷물에 길 만들고 풍악으로 들어갔다.
이때
천상 신선과 선녀들이 심소저를 보려고 늘어섰는데,
태을선녀는 학을 타고,
적송자는 구름 타고,
사자 탄 갈선옹과 청의동자 백의동자,
쌍쌍 시비 취적선과,
월궁항아 서왕모며 마고선녀 낙포선녀와
남악부인의 팔선녀 다 모였는데,
고운 복색 좋은 패물 향기도 이상하며 풍악이 앞서 간다.
왕자진의 봉피리며 곽처사의 죽장구며
성연자의 거문고와 장자방의 옥퉁소며 해강의 해금이며 완적의 휘파람,
적타 고취 옹적하며 <능파사> <보해사>며 <우의곡> <채련곡>을 곁들여 노래하니
풍류소리 수궁에 진동한다.
수정궁으로 들어가니 인간세계와는 다른 별천지였다.
남해 광리 왕이 통천관을 쓰고 백옥홀을 손에 들고 호기 찬란하게 들어가니,
삼천팔백 수궁부 내외의 대신들은 왕을 위하여
영덕전 큰 문 밖에 차례로 늘어서서 환호성을 올렸다.
심낭자 뒤로 백로 탄 여동빈,
고래 탄 이적선과 청학 탄 장녀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집 치레 보자 하면 능란하고 장하구나.
고래 뼈를 걸어서 대들보를 삼으니 신령스런 빛깔이 햇빛에 빛나고,
물고기 비늘을 모아서 기와를 삼으니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어린다.
값진 보물로 치장 한 궁궐은 하늘의 빛과 어울리고,
입고 있는 의복은 인간의 온갖 복과도 비길 수 없었다.
산호주렴 대모병풍 광채도 찬란한데 비단 휘 장을 구름같이 높이 치고,
동으로 바라보니 대붕이 하늘을 날으는 데 쪽빛보다 푸른 물은 가마에 둘러 있고,
서쪽으로 바라보니 푸른 물결 아득한데 한 쌍 꾀꼬리 날아들고,
북으로 바라보니 아득한 푸른 산은 비취색을 띠어 있고,
위쪽을 바라보니 상서로운 구름이 붉은데
위로는 하늘로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에 뻗쳐 있다.
음식을 둘러보니 세상 음식 아니었다.
유리 소반 옥돌 상에 유리 술잔 호박 받침,
자하주 천일주에 기린포로 안주하고,
호로병 거호탕에 감로수도 넣어 있고,
옥돌 소반에다 반도 복숭 담아 있고,
한가운데 삼천벽도 덩그렇게 고였는데 신선 음식 아닌 것이 없었다.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하랴.
사해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단 옷에 화용월태 고운 얼굴 다 각기 잘 보이려고,
예쁜 모습 웃는 시녀,
얌전하게 차린 시녀,
천성으로 고운 시녀,
수려한 시녀들이 주야로 모실 적에 사흘마다 작은 잔치,
닷새마다 큰 잔치를 베풀면서,
상당에서 비단 백 필, 하당 에서 진주 서 되를 바쳤다.
이처럼 받들면서도
오히려 잘못하지나 않을까 조심이 각별했다.
이때 무릉촌 장승상 부인이
심소저의 글을 벽에다 걸어두고 날마다 살펴보아도 빛이 변치 아니 하더니,
하루는 글 족자에 물이 흐르고 빛이 변하여 검어지니,
'심소저가 이제 물에 빠져 죽었는가?'하여 한없이 슬피 탄식하고 있는데,
이윽고 물이 걷히고 빛이 도로 황홀해지니 부인이 이상히 여겨,
'누가 구하여 살았는가?'하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찌 그러하기 쉬우리오.'
그날 밤에 장승상 부인이 제물을 갖추어 강가에 나아가,
심소저를 위하여 혼을 불러 위로하는 제사를 바치려고 시비를 데리고 강가에 다다르니,
밤은 깊어 삼경인데 첩첩이 쌓인 안개 산골짝에 잠겨 있고 첩첩이 이는 안개 강물에 어리었다.
조각배 홀리 저어 중류에 띄워 놓고 배 안에 제사상을 차린 다음
부인이 손수 잔을 부어 흐느끼며 소저를 불러 위로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심소저야.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즐겨함은 인정에 당연커늘,
일편단심에 양육하신 아버지의 은덕을 죽음으로 갚으려고 잔명을 스스로 끊어,
고운 꽃이 흐려지고 나는 나비 불에 드니 어찌 아니 슬플쏘냐?
한 잔 술로 위로하니 마땅히 소저의 혼이 아니면 없어지지 아니하리니
속히 와서 흠향함을 바라노라."
눈물뿌려 통곡하니 천지 미물인들 어찌 아니 감동하리.
뚜렷이 밝은 달도 구름 속에 숨어 있고 사납게 불던 바람도 고요하고
용왕이 도왔던지 강물도 고요하고 백사장에 놀던 갈매기도 목을 길게 빼어 '꾸루룩' 소리하며,
고기잡는 어선들은 가던 돛대 머무른다.
뜻밖에 강 가운데서 한 줄기 맑은 기운이
뱃머리에 어렸다가 잠시 뒤에 사라지며 날씨가 화창하니,
부인이 반겨하며 일어서서 바라보니
가득 부었던 잔이 반이나 줄어들었기로 소저의 영혼을 못내 슬퍼했다.
☆☆☆
하루는 광한전 옥진부인이 오신다 하니
수궁이 뒤눕는 듯, 용왕 이 겁을 내어 사방이 분주하였다.
원래 이 부인은 심봉사의 처 곽씨 부인이 죽어 광한전 옥진부인이 되어 있었는데,
그 딸 심소저가 수중에 왔단 말을 듣고 상제께 말미를 얻어 모녀상면하려 하고 오는 길이었다.
심소저는 뉘신 줄을 모르고 멀리 서서 바라볼 따름인데,
무지개 어린 오색 가마를 옥기린에 높이 싣고,
벽도화 단계화를 좌우에 벌여 꽂고,
각궁 시녀들은 곁에서 모시고 청학백학들은 앞길을 인도하고
봉황은 춤을 추고 앵무는 벌여 섰는데, 보던 바 처음이었다.
이윽고 가마에 내려 섬뜰에 올라서며,
"내 딸 심청아!" 부르는 소리에 어머니인 줄 알고 왈칵 뛰어 나서며,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고 초칠일 안에 죽었으니
지금까지 15년을 얼굴도 모르오니
천지간 한없이 깊은 한이 개일 날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곳에 와서 어머니와 다시 만날 줄을 알아서 오는 날
아버지 앞에서 이 말씀을 여쭈었더라면,
날 보내고 설운 마음 저윽이 위로했을 것을....
우리 모녀는 서로 만나보니 좋지마는
외로우신 아버님은 뉘를 보고 반기시겠습니까?
아버지 생각이 새롭군요."
☆☆☆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
"나는 죽어 귀히 되어 인간 생각 아득하다.
너의 아버지 너를 키워 서로 의지하였다가 너조차 이별하니
너 오던 날 그 모습이 오죽하랴.
내가 너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야 너의 아버지 너를 잃은 설움에다 비길소냐?
너의 아버지 가난에 절어 그 모습이 어떠하며 아마도 많이 늙었겠구나.
그간 수십 년에 재혼이나 하였으며, 뒷마을 귀덕어미 네게 극진하지 않더냐."
얼굴도 대어 보고 손발도 만져 보며,
"귀와 목이 희니 너의 아버지 같기도 하다.
손과 발이 고운 것은 어찌 아니 내 딸이랴.
내 끼던 옥지환도 네가 지금 가졌으며,
수복강녕 태평안락 양편에 새긴 돈 붉은 주머니 청홍당사 벌매듭도, 애고, 네가 찼구나.
아버지 이별하고 어미를 다시 보니 두 가지 다 온전하기 어려운 건 인간 고락이라.
그러나 오늘 나를 다시 이별하고 너의 아버지를 다시 만날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광한전 맡은 일이 너무도 분주해서
오래 비워두기 어렵기로 다시금 이별하니 애통하고 딱하다만,
내 맘대로 못 하니 한탄한들 어이 할소냐?
후에라도 다시 만나 즐길 날이 있으리라."하고 떨치고 일어서니
소저 만류하지 못하고 따를 길이 없어 울며 하직하고 수정궁에 머물었다.
☆☆☆
이때 심봉사는
딸을 잃고 모진 목숨 죽지 못하여 근근히 살아갈 제,
도화동 사람들이 심소저가 지극한 효성으로 물에 빠져 죽은 일을 불쌍히 여겨
타루비(墮淚碑)를 세우고 글을 지었다.
앞 못 보는 아버지 위해
제 몸 바쳐 효도하러 용궁에 갔네.
안개 어린 바다에 마음만 떠 있으니
봄 풀에 해마다 한이 서린다.
강가를 오가는 행인이 비문을 보고 아니 우는 이 없고,
심봉사는 딸이 생각나면 그 비를 안고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심맹인의 돈과 곡식을 늘려서 집안 형편이 해마다 늘어갔다.
이때 그 마을에 서방질 일쑤 잘하여
밤낮없이 흘레하는 개같이 눈이 벌게서 다니는 뺑덕어미가
심봉사의 돈과 곡식이 많이 있는 줄을 알고
자원(自願)하여 첩(妾)이 되어 살았는데,
이년의 입버르장이가 또한 보지 버릇과 같아서
한시 반때도 놀지 아니하려고 하는 년이었다.
양식 주고 떡 사먹기,
베를 주어 돈을 받아 술 사먹기,
정자밑에 낮잠자기,
이웃집에 밥 부치기,
마을 사람더러 욕설하기,
일꾼들과 싸우기,
술 취하여 한밤중에 와 달석 울음 울기,
빈 담뱃대 손에 들고 보는 대로 담배 청하기,
총각 유인하기,
온갖 악증을 다 겸하였으되,
심봉사는 여러 해 주린 판이라,
그 중에 동침하는 즐거움은 있어 아무런 줄 모르고 집안살림이 점점 줄어드니,
심봉사가 생각다 못해서 물었다.
"여보소, 뺑덕이네.
우리 형편 착실하다고 남이 다 수군수군했는데,
근래에 어찌해서 형편이 못 되어 다시금 빌어먹게 되어 가니,
이 늙은 것이 다시 빌어먹자 한들 동네 사람도 부끄럽고
내 신세도 말이 아니니 어디로 낯을 들어 다니겠는가?"
☆☆☆
뺑덕어미가 대답한다.
"봉사님, 여태 잡수신 게 무엇이오?
식전마다 해장하신다고 죽 값이 여든두 냥이요,
저렇게 갑갑하다니까,
낳아서 키우지도 못한 것 밴다고 살구는 어찌 그리 먹고 싶던지,
살구 값이 일흔석 냥이요,
저렇게 갑갑하다니까."
심봉사가 속은 타지만 헛웃음 웃으며,
"야, 살구는 너무 많이 먹었다.
그렇지마는 '계집 먹은 것은 쥐 먹은 것'이라 하니 따져 봐야 쓸 데 없다.
우리 세간 기물을 다 팔아 가지고 타향으로 가세."
"그러고 싶으면 그리합시다."
약간 남은 살림살이 다 팔아서 이고지고 타향으로 떠돌이 생활에 나섰다.
☆☆☆
하루는 옥황상제께서 사해용왕에게 말씀을 전하시기를,
"심소저 혼약할 기한이 가까우니,
인당수로 돌려보내어 좋은 때를 잃지 말게 하라." 분부가 지엄하시니
사해용왕이 명을 듣고 심소저를 보내실 제,
큰 꽃송이에 넣고 두 시녀를 곁에서 모시게 하여
아침 저녁 먹을 것과 비단 보배를 많이 넣고
옥 화분에 고이 담아 인당수로 보내었다.
이때 사해용왕이 친히 나와 전송하고
각궁 시녀와 여덟 선녀가 여쭙기를,
"소저는 인간 세상에 나아가서 부귀와 영광으로 만만세를 즐기소서."
소저 대답하기를,
"여러 왕의 덕을 입어 죽을 몸이 다시 살아 세상에 나가오니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시녀들과도 정이 깊어 떠나기 섭섭하오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다르기에 이별하고 가기는 하지마는
수궁의 귀하신 몸 내내 평안하옵소서." 하직하고 돌아서니,
순식간에 꿈같이 인당수에 번듯 떠서 뚜렷이 수면을 영롱케 하니
천신의 조화요 용왕의 신령이었다.
바람이 분들 끄떡하며 비가 온들 떠내려갈소냐.
오색 무지개가 꽃봉이 속에 어리어 둥덩실 떠 있을 적에,
남경 갔던 뱃사람들이 억십만 금 이문을 내어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인당수에 다달아 배를 매고 제물을 깨끗이 차려 용왕에게 제를 지내면서 비는 말이,
"우리 일행 수십 명 몸에 재액을 막아 주시고
소망을 뜻한 대로 이루어 주셔서 용왕님의 넓으신 덕택을 한 잔 술로 정성을 드리오니,
어여삐 보셔서 이 제물을 받아 주시옵소서."하고
제를 올린 뒤에
제물을 다시 차려 심소저의 혼을 불러 슬픈 말로 위로한다.
"출천효녀 심소저는 늙으신 아버지 눈뜨기를 위하여 젊은 나이에 죽기를 마다 않고
바다 속 외로운 혼이 되었으니 어찌 아니 가련코 불쌍하리오.
우리 뱃사람들은 소저로 말미암아 장사에 이문을 내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마는
소저의 영혼이야 어느 날에 다시 돌아올까?
가다가 도화동에 들어가서 소저의 아버지 살았는가 여부을 알아보고 가오리다.
한잔 술로 위로하니 만일 알으심이 있거든 영혼은 이를 받으소서."
제물을 풀고 눈물을 쏟고 나서, 한 곳을 바라보니
한 송이 꽃봉이 너른 바다 가운데 둥덩실 떠 있으니 뱃사람들이 고히여겨 저희들끼리 의논하기를,
"아마도 심소저의 영혼이 꽃이 되어 떴나 보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심소저가 빠졌던 곳이어서 마음이 감동하여 꽃을 건져내어 놓고 보니,
크기가 수레바퀴처럼 생겼고 두세 사람이 넉넉히 앉을 만했다.
"이 꽃은 세상에 없는 꽃이니 이상하고 고이하다."하고 정하게 싣고 올 제,
배 빠르기가 화살 날듯하였다.
네다섯 달이나 걸리던 길을 며칠 만에 다다르니,
이도 또한 이상하다 할 것이었다.
돌아와서 억십만 금이 넘는 재물을 다 각기 나누어 가질 적에,
도선주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재물은 마다하고 꽃봉이만 차지하여
자기 집 깨끗한 곳에 단을 쌓고 두었더니
향취가 온 집안에 가 득하고 주위에 무지개가 둘러 있었다.
이때 송 천자는 황후가 별세하신 후 간택을 아니하시고,
화초를 구하여 상림원에다 채우고 황극전 뜰 앞에도 여기저기 심어두고
기화요초 벗을 삼아 지내실 제, 화초도 많도 많다.
팔월 부용군자며,
연못 그득 맑은 물에 홍련화며,
그윽한 향내 피어내며 달뜨는 저녁 나절에 소식 전하던 매화며,
여기저기 심어 있은 붉은 복사꽃이며,
게자핀 월중단은 황무시에 계화며,
아름다운 여인의 손톱에 물들이려고 밤에 화분에 넣고 찧는 봉선화며,
구월 구일에 활짝 피는 국화며,
귀한 사람 즐겨 찾는 부귀할 손 모란화며,
'배꽃은 땅에 가득 떨어지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던 장신궁중의 배꽃이며,
칠십 제자 강론하던 살구나무의 살구꽃이며,
천태산 들어가면 산기슭에 피어있는 작약이요,
촉나라 망한 한을 못 이기어 피 토하던 두견화며,
촉국 배국 시월국이며, 교화 난화 산당화며,
장미화에 해바라기며,
주작화에 금선화와 능수화에 견우화며,
영산홍 지산홍에 왜철죽 진달래 백일홍이며,
난초 파초에 강진향이요,
그 가운데 전나무 호도목이며,
석류목에 승백목이며,
치자목 송백목이며,
율목 시목에 행자목이며,
자도 능금 도리목이며,
오미자 탱자 유자목이며,
포도 다래 으름넝쿨 너울너을 각색으로 층층이 심어두고,
때를 따라 구경하실 제,
향내가 건듯 불면 우질우질 넘놀며 울긋불긋 떨어지며,
벌 나비 새 짐승이 춤추며 노래하니 천자께서 흥을 붙여 날마다 구경하시었다.
☆☆☆
이때 남경 뱃사람이 대귈 안 소식을 듣고 문득 생각하기를,
'옛 사람이 벼슬을 등에 지고 천자를 생각하니,
나도 이 꽃을 가져다가 천자께 드린 후에 정성을 논하리라,'하고
인당수에서 얻은 꽃을 옥분에 옮겨 심어 대궐 문 밖에 다달아 이 뜻을 아뢰니,
천자께서 반기시어 그 꽃을 들여다가 황극전에 놓고 보니
빛이 찬란하여 해와 달이 빛을 내는 것 같고,
크기가 짝이 업고 향기가 특출하니 세상 꽃이 아니었다.
"달빛에 그림자가 분명하니 계수나무 꽃도 아니요,
요지연의 횐 복숭아 동방삭이 따온 후에 3천 년이 못 되니 벽도화도 아니요,
서역국에 연화씨가 떨어져 그것이 꽃 되어 바다에 떠 왔는가?"하시며
그 꽃 이름을 '강선화(降仙花)'라 하시고,
자세히 살펴보니 붉은 안개 둘러 있고 상서로운 기운이 어리었으니,
황제 크게 기뻐 하사 화단에 옮겨 놓으니
모란화 부용화가 다 아래 자리로 돌아가니,
매화 국화 봉선화는 모두 다 신하라 이를 지경이었다.
천자께서 아시던 다른 꽃은 다 버리고 이 꽃뿐이었다.
☆☆☆
하루는 천자께서 당나라의 옛 일을 본받아 궁녀에게 명하시어
화청지에 목욕가시고 친히 달을 따라 화단을 배회하시는데,
밝은 달 은 뜰에 가득하고 산들바람 부는 중에
문득 강선화 봉오리가 흔들리며 가만히 벌어지고 무슨 소리 나는 듯했다.
천자께서 몸을 숨겨 가만히 살펴보니
예쁜 용녀가 얼굴을 반만 들어 꽃봉이 밖으로 반만 내다보더니,
사람 자취 있음을 보고 도로 헤치고 들어갔다.
천자께서 보시고 문득 몸과 마음이 황홀하시어
의아한 생각이 들어 아무리 서 있어도 다시는 기척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꽃봉이를 가만히 벌리고 보시니
한 처녀와 두 미인이 있기에 천자 반기며 물으시기를,
"너희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미인이 즉시 내려와 땅에 엎드려 여쭙기를,
"소녀는 남해 용궁 시녀이온데
소저를 모시고 세상으로 나왔다가 황제의 모습을 뵈오니 극히 황공하옵니다."하니
천자 마음속으로 생각하시기를,
'상제께옵서 좋은 인연을 보내신 것이로구나.
하늘이 내리신 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하시고,
'배필을 정하리라.'결심하시어 혼인을 하기로 작정하시고
태사관으로 하여금 날을 잡으라 하니 5월 5일 갑자일이었다.
소저를 황후로 봉하여 승상의 집으로 모신 뒤에 혼인날이 당하매 명하시기를,
"이러한 일은 천만고에 없는 일이니 예의범절을 특별히 마련하도록 하라."하시니
위엄이 이 세상에서 처음이요 천고에 더욱 없는 일이었다.
황제께서 잔치 자리에 나와 서시니
꽃봉오리 속에서 두 시녀가 소저를 부축하여 모셔 나오니
북두칠성에 좌우보필이 갈라서 있는 듯,
궁중이 휘황하여 바로 보기 어려웠다.
나라의 경사라, 온 나라에 사면령을내리고,
남경 갔던 도선주를 특별히 무장태수로 임명하시고,
온 조정 여러 신하들은 축하를 보내고 온 백성들은 기뻐 환호하였다.
심황후의 덕과 은혜가 지중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 세월을 다시 보니 태평성대가 되었다.
심황후는
부귀 극진하나 늘상 마음속에 숨은 근심이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
하루는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시종을 데리고 옥난간에 기대 서 있었더니,
가을 달은 밝아 산호 발에 비쳐 들고 귀뚜라미 슬피 울어
방안에 흘러들어 무한한 심사를 점점이 불러낼 제,
높은 하늘 외로 운 기러기 울면서 내려오니
황후께서 반가운 마음에 바라보며,
"오느냐, 너 기러기.
거기 잠간 머물러서 나의 한 말 들어 봐라.
소중랑이 북해상에서 편지 전하던 기러기냐,
푸른 물 횐 모래밭에 그리움을 못 이기어 내려오는 기러기냐,
도화동에 우리 아버지 편지를 매고 네 오느냐,
이별 3년에 소식을 못 들으니 내가 이제 편지를 써서 네게 전할 테니 부디부디 잘 전하여라." 하고
방안에 들어가 상자를 얼른 열고 두루마리 종이 끌러 내어놓고 붓을 들고 편지를 쓰려 할 제,
눈물이 먼저 떨어지니 글자는 먹칠이 되고 말마디는 뒤바뀐다.
"슬하를 떠나 온 지 해가 세 번 바뀌오니
아버님 그리워 쌓인 한이 바다같이 깊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그간에 아버지 몸 편히 지내시온지,
그리는 마음 이루 다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불 효녀 심청은 뱃사람을 따라갈 제,
하루 열두 시에 열두 번씩이나 죽고 싶었으나
틈을 얻지 못하여 대여섯 달을 물위에서 자고,
마지막에는 인당수에 가서 제물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도우시고 용왕이 구하셔서
세상에 다시 나와 이 나라 천자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부귀영화는 다함이 없사오나,
간장에 맺힌 한 때문에 부귀에도 뜻이 없고 살기도 바라지 아니하고,
다만 바라기는 아버님 슬하에 다시 뵈온 후에 그날 죽사와도 한이 없겠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보내고 겨우 지내시면서 문에 비겨 생각하시는 줄은 분명히 알지마는,
죽었을 제는 혼이 막혀 있고 살았을 제는 액운이 막히어서 천륜이 끊겼습니다.
그간 3년 동안에 눈을 떴사오며 마을에 맡긴 돈과 곡식은 그저 있어 목숨을 보존하시온지오.
아버님 귀하신 몸 잘 보중하셨다가 쉬이 만나 뵈옵기를 천만 바라고 천만 바라옵니다."
날짜를 얼른 써서 가지고 나와보니
기러기는 간 데 없고 아득한 구름밖에 은하수만 기울어졌다.
별과 달만 밝아 있고 가을 바람 소슬하다.
하릴없어 편지를 집어 상자에 넣고 소리없이 울고 있는데,
이때 황제께서 내전에 들어오셔서 황후를 바라보시니,
두 눈 사이 에 근심스러운 빛을 띄었으니 푸른 산이 석양에 잠긴 듯하고,
얼굴에 눈물 자욱이 있으니 국화가 햇빛 아래 시드는 듯하여 황제께서 물으셨다.
"무슨 근심이 계시길래 눈물 흔적이 있는지요? 귀하기는 황후가 되어 있으니 천하에 제일 귀하고,
부하기는 사해를 차지하였으니 인간에 제일 부자인데 무슨 일이 있어 저렇게 슬퍼하시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