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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 은혜받고 시작하는 믿음 (엡2:1-10)
‘세상에서 제일 긴 얘기’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어느 날 황새 한 마리가 늪에 앉았다가 두 다리가 뻘에 푹 빠졌는데 오른쪽을 빼면 왼쪽이 박히고 왼쪽을 빼면 오른쪽이 박히고 하는지라 고민 끝에 부리를 땅에 대고는 힘을 줘서 두 다리를 뽑아냈습니다. 그랬더니 다리는 빼냈는데 이번엔 부리가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부리를 들어 올렸더니 부리는 빠졌는데 다리가 다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뽑으면 부리가 빠지고 부리를 뽑으면 두 다리가 빠지고 하기를 지금까지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얘기와는 달리 우화는 얘기 속에 뭔가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늪에 빠진 황새 우화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세상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인생의 늪에 빠진 인간의 형편이 그렇다는 겁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힘도 방법도 없기에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되곤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더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잘살아보겠다고 앞뒤 안 보고 살아왔더니 어느 순간 건강을 잃어버리게 된다거나, 병을 고치려고 약을 먹었더니 간이나 위장이 나빠지더라. 이런 게 우리네 사는 모습입니다.
우화에서 황샌들 늪에 빠지고 싶어 빠지진 않았을 겁니다. 사람인들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도 늪에 빠진 꼴이 되고 싶은 인생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태초 이래로 인간은 죄의 늪에 빠졌고 사단의 늪에 빠진 한 마리 황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탄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던 겁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단 이유로 ‘이대로 살다 죽을래’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뭔가 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지요.
이렇듯 죄악의 늪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8절을 보세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세상의 이런저런 늪과 수렁에서 건져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이렇게만 설명하고 말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와닿게 느끼지를 못합니다. 마치 특별한 날에 한 번 부르고 마는 어버이 은혜나 스승의 은혜 노래 정도로만 여기고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시작에서부터 분명하게 선을 긋고 시작합니다.
1절을 보세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2절입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어떤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까?
“그 때에 너희는.”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직전까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때 우리는’ 어땠다는 겁니까?
사탄 즉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노의 자녀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은혜’가 댓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서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때에 우리는’ 사탄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께 이끌려 사는 인생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대상이 되게 된다는 겁니다.
단 이때도 ‘진노의 자녀’라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신다거나 재앙을 내리신다는 걸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끌려 사는 사람을 진노의 자녀로 분류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도우려 해도 도울 수 없고 살리려 해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형편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형편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죽겠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때가 바로 내가 진노의 자리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죽어있으니 죽겠을 수밖에요.
또한 인사말로 ‘요즘 어떠십니까?’라고 물을라치면 어떤 분은 ‘죽겠습니다.’ 내지는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하는 분도 계시는데, 이 역시나 진노의 자리에 있기에 ‘죽겠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뭘까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입니다.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이고 계획이십니다.
어떤 죽을 지경에서도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다 술래에게 들키면 술래의 손에 잡혀 줄줄이 늘어서게 되는데 이때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술래가 잡고 있는 손을 탁 치게 되면 그 순간 잡혀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도망치며 다시 살아남게 됩니다. 다만 이때도 출발선까지 도망치지 못하고 중간에 술래에게 잡히면 다시 술래의 손에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때의 놀이처럼 ‘그 때에 우리는’ 사탄의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있었지마는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곤 우리를 잡고 있던 사탄의 권세를 탁 쳐 내시므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자윱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한 지유를 채 누리기도 전에 사탄이 쫓아와 다시 우리를 잡습니다. 그럼 어찌 될까요?
인생이 다시 진노의 자리에 끌려가 죽겠네 말겠네 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으로만 끝내지 않으시고 우리를 다시 잡으려는 사탄을 막아서시며 우리 대신 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게 된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그런데 식당에 가면 따로국밥이란 게 있듯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은혜 따로 현실 따로의 삶을 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은혜가 현실이 되지 못하게 살더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믿으면 은혜를 받는다는데 나는 왜 이제까지 믿어오면서도 은혜를 받은 것 같지가 않은 걸까요?
여기서부터 믿음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룰이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사탄에게서 자유함을 얻었다면 이제 다신 안 잡히겠다고 사탄을 피해 이리저리로 도망가려고만 할 게 아니라 우리를 사탄에게서 끊어내신 예수님 곁에서 그 예수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구원과 은혜는 보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현실로 받고 현실적으로 누리고자 하면 우린 매 순간과 매사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93장 1절 가사를 보면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 살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라고 찬양합니다. 때문에 예수 안 믿는 것만이 불신앙이 아니고 예수님을 잊고 사는 그 순간순간이 우리에게는 불신앙이란 사실을 꼭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는 반드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라도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문제는 믿음과 응답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부턴 단지 ‘믿으면 응답받는다.’는 것을 아는 차원에서만 끝내지 말고 좀 더 공격적으로 ‘응답받을 때까지 믿겠다.’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여러분의 믿음에 의심이나 포기가 없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여러분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응답받을 때까지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믿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고, 이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예수님 믿기 전과 후로 구분이 됩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믿습니다.’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확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했는데 마지막 순서로 행운권 추첨을 했습니다. 마침 권사님 한 분이 제 옆에 계셨는데 사회자가 번호를 뽑을 때마다 주여주여 하며 기도하더니만 안 될 때마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뭐.’ 그러더니 또 ‘내 주제에 무슨 복으로.’ 이럽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권사님 주여주여가 진심입니까? 내 주제에 무슨이 진심입니까?’ 냐고.
오늘 여러분에게 있는 ‘믿습니다’의 진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내가 원하는 것의 있고 없고나, 내가 하려는 일의 되고 안 되고에 있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7: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결과를 보고 응답을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을 보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 우린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순종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순종하려는 믿음이 있음을 보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흔히 ‘회개는 착한 사람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하는데 정작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죄가 회개하려는 걸 방해한다는 겁니다.
같은 이치로 기도는 고난 없는 사람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데 정작 고난 때문에, 즉 고난으로 인한 실망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때 믿음의 사람이라면 가진 믿음으로 실망을 밀어내야 하는데 오히려 실망이 믿음을 밀어내기에 기도할 맘도 밀려나게 됩니다.
물론, 살면서 실망이 아주 없다면야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 인생의 성패는 내 마음을 믿음으로 채우느냐 실망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가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아 망쳐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해보자면 우리 인생은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태평양 어느 작은 섬에 가면 ‘볼기 맞는 신’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사냥을 나갈 때나,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면 신전에 들러 기도하기를 ‘지금 바다에 나가는데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세요.’라거나 ‘지금 사냥하러 가는데 사냥감이 많이 걸려들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간답니다. 그러고는 물고기를 많이 잡았거나 사냥을 많이 잡게 되면 다시 신전에 와서 감사의 제물을 드렸는데 어쩌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산에서 맹수라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는 날이면 그때도 다시 신전에 가는데 그땐 신전의 신을 땅바닥에 엎어놓고는 ‘이 못된 신아 내가 바다에 나갔는데 풍랑을 일으켜?’ ‘내가 사냥하러 갔는데 맹수를 보내?’ ‘한 번만 더 그랬단 봐라.’ 그러면서 신의 궁둥이가 찢어지도록 볼기를 두들겨 팬답니다.
신을 믿되 자기중심적인 믿음이 이런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내 기분, 내 느낌, 내 감정, 내 욕망에 맞춰서 믿었다 못 믿었다 하는 사람들에게서의 하나님은 볼기 맞는 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신다고 할 때면 여러분이 믿는 믿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믿음은 내가 잘 믿어야지 한다고 잘 믿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믿을 수 있는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도 받을 것이라고 믿을 때 믿음이 잘 믿어지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오늘부터 여러분은 ‘나도 은혜받아야지’가 아니라 ‘나는 은혜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여러분의 믿음을 시작하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때부터 은혜 주시기를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기 전부터 우리를 위한 은혜를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나도 은혜를 받을까 못 받을까’로 초조해하며 믿으려 하지 마세요. 왜 믿는다고 하면서 불안해하십니까?
지난번 설교에서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곧 믿음이 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민수기 14장에서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혜받고 응답받기 위해서라면 우린 하나님이 내게서 어떤 말, 무슨 말을 들으시게 해야겠습니까?
‘나는 은혜 받았다.’가 평소 여러분의 믿음이 되게 하세요.
‘나는 은혜 받았다.’가 여러분의 기도 확신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음대로,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들으신 대로 우리는 은혜받고 믿음을 시작해서 은혜받는 믿음을 계속 이어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은혜의 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 위에 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비 받은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론 당장엔 그 은혜가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작을 수도, 또는 적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위한 은혜의 선물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 은혜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믿음으로 받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에게서도 은혜로 인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라고 할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우리 각자가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은 참 축복의 맛을 느끼며, 누리며 살게 될 것이기에 그런 축복의 날들이 여러분에게 하루라도 속히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