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날들
육정숙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돌아
서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심천 맑은 물 속으로
구름 한 조각 한가로이 노닐다가 점점이 흩어지더니 이내 사
라져버렸다.
그러면 나는 쓸쓸해진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 무심히 지
키고 있는 빈 항아리처럼, 바람소리 속에서 웅웅거리고만 서있을
뿐이다.
무심천 뚝길에서 잘 익은 버찌 한 알 또옥 따 입에 넣고 세월을
삼켜본다.
밤새 검정 고무신 꿈을 꾸며 뒤척이던 종성이·병재·정순이 밤
을 낮 같이 보냈어도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 학교에서 집까지
십리 길을 오가는 아이들이다. 학교가 끝나고 한걸음에 집으로
내달린다.
배미실제 에선 한낮에 뻐꾸기가 울었다.
허리춤에 매고 있던 책 보따리 끌러 벌 한 마리 붕붕거리는 마루
위로 훌렁 던지고, “미그더억”빗장 질러놓은 나무문을 열어 젖힌
뒤,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들어선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보리밥에 물 말아놓고 풋고추 고추장에 꾹 찍
어 밥한 그릇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고나서 팔뚝으로 입한번
쓰윽 닦았다. 개혓바닥처럼 너덜거리는 검정고무신 탈탈 끌면서
주전자 달랑달랑 들고 삽짝문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오후 한나절! 어른들은 밭에 김을매러 가시고 검둥이는 팔자 좋
게 낮잠을 자고있는 마을 고샅에 종성이가 달리고, 병재가 그뒤
를 따라 뛰었다.
정순 이도 악발이같이 뛰어 쫓아간다. 말구리 벚나무를 향해 달
려간다.
배미실재 에 걸터앉아 구름 그림자 길게 늘이고 졸던 뭉게 구름
도, 가는허리 하늘하늘 교태부리며 나비 꼬여내던 장다리꽃도 깜
짝 놀라 이리저리 고갯짓으로 술렁대었다.
유월의 바람 속에는 달콤한 내음이 담겨 있다. 버찌 향내가 난다.
아이들은 싱그러운 바람결에 푸른 나무가 된다. 대롱대롱 매달려
버찌가 된다.
입가에, 손에, 옷에 버찌 물이 까맣게 들어도 좋다. 주전자에도
까만 버찌들이 송알송알 가득 모여 꿈을 꾸고있다.
한 알의 버찌 속에는 아이들의 바램이 들어있다. 버찌는 어머니
의 채소 다발 그릇에 담겨 육거리 시장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며
도시아이들 입맛을 돋워낸다.
어머니는 버찌를 팔아 검정고무신으로, 런닝 셔츠로, 작은 손에
용돈으로 아들 손, 딸 손에 한아름 기쁨을 안겨주셨다. 버찌를 따
는 아이들은 그렇게 자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입안 가
특히 침이 고이듯, 아이들 가슴에 기쁨과 사랑 행복으로 그득 차
오른다.
유월의 숲에서 삐꾸기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익은 버찌 향
이 하늘 그득 날아간다.
한줄기 바람과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장다리 꽃대궁처럼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말구리 벚나무도 세월 쫓아 아이들처럼 굵직하게 자라주었다.
어떠한 으로도 변질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자연이다.
우리는 늘 변함 없이 사랑의 빛에 가득채워져 있다.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변하면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 빛은 언제나,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늘 함께였고, 강물이 흘러내리듯 우리들
곁에 익숙한 모습으로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쌩 떽쥐 베리
의 어린 왕자에서 “사랑은 익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익숙하다는 것은 곧 낯설지 않음이요, 가장 편안하며 아늑한 품
인 것이다.
우리에겐 고향처럼 익숙한 곳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 눈을 감아
도 이 고샅 저 고샅 훤히 알 수 있고, 어릴 적 소꿉 놀던 흙 담벼
락 밑으로 접시꽃이 어머니처럼 활짝 웃으며 나를 기다려주던 것
까지 죄다 알 수 있는 곳, 거기엔 어머니가 계셨고 버찌 따던 아
이들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을 담은 시절이 유년 시
절이다. 자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던 유년의 강가! 그곳엔 어
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 물안개 피듯 피어올랐고, 반짝 반짝 별빛
처럼 빛나던 소중한 추억들이 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
게 한다. 이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에 노을빛이 번지면 말구리 오
솔길을 소방울 소리 딸랑 딸랑 멀어져 갔다. 들꽃 핀 유년의 강
언덕으로 고요히 달빛이 내리면 어둡고 괴롭던 속내 풀어 마냥
헹구어 내고 싶다.
중년의 가슴으로 그리움이 날아들어 둥지를 틀었다. “정순아 버
찌 따러 가자 배미실재 삐꾸기도 여전히 울고 있겠지”바람처럼
-흐른 세월 저편에서 어서오라고 고사리손들이 손짓한다. 나는 지
금 한걸음에 달려가고 있다. 유년의 강가로
말구리, 배미실재 : 청주시 월오동에 소재
2002년 12집
첫댓글 자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던 유년의 강가! 그곳엔 어
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 물안개 피듯 피어올랐고, 반짝 반짝 별빛
처럼 빛나던 소중한 추억들이 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
게 한다. 이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에 노을빛이 번지면 말구리 오
솔길을 소방울 소리 딸랑 딸랑 멀어져 갔다. 들꽃 핀 유년의 강
언덕으로 고요히 달빛이 내리면 어둡고 괴롭던 속내 풀어 마냥
헹구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