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근현대 일본 정신의 뿌리가 요시다 쇼인 이란 인물에서 비롯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서적이 전무한 것을 안 젊은 청년이, 아마 87년 생인듯,
지피지기하여 다시는 어려움을 겪지 말자는 마음으로 생업을 접어두고 일본어 공부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관련 자료들을 공부하고 일본 현지에도 수차례 답사하여 만든 책입니다
일본에 가면 전국 곳곳에 요시다 쇼인 관련 유적지가 있다네요
이런 젊은이들이 있어 우리나라의 앞날이 밝은 거 같습니다
이런 책은 한 권씩이라도 사서 일어주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어제 교보문고 갔더니 반일 종족주의란 해괴한 책을 사는 사람들이 많던데.... 이 책은 별로 안 팔렸네요 ㅠㅠ
아베는 왜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가?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 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탄생한 현대 일본의 원류를 더듬어 보면 왜 아베가 독도 영유권을 고집하는지 섬뜩합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죠수번이다. 아베는 후루카와 가오루의 ‘유혼록(요시다 쇼인 저)의 세계’를 애독하고, 평소 요시다 쇼인과 관련된 서적을 즐겨 읽으며 “쇼인 선생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2013년 총리에 재선된 아베 신조는 야마구치현의 쇼인신사를 참배하고, 쇼인이 묘를 찾아가 “쇼인 선생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나도 앞으로 (쇼인을 본받아) 올바르게 판단하겠다”.고 했다.
아베의 좌우명은 ‘지성(至誠)’이고, 요시다 쇼인의 좌우명도 ‘지성’이다. 아베도 야마구치현(죠슈번) 출신이고 요시다 쇼인도 죠수번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일본 죠슈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작은 아버지의 야마가류 병학사범(일종의 군사 전략, 전술학 사범)을 물려받아 11세에 교범으로 사용하는 ‘무교전서’를 똑 부러지게 강의하여 주변을 놀라게 한다. 이어 15살이 되면 ‘손자병법’의 허실편 등을 강의하며 또다시 번주와 관려들을 감동시킨다. 이에 번주(다이묘)는 그를 키우기 위해 후견인을 지정하고 지원을 아까지 않는다.
요시다 쇼인은 20대 초반 3년 반 동안 일본 1만 3천리를 돌아다니며 견문과 배움을 넓힌다. 당시 일본 유일한 외국(네덜란드) 개방 학구인 나카사키를 방문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다른 유파 병학사범들을 찾아 배우고, 메이지 유신 주역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쿠마 쇼잔을 만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예로부터 천황에게 충성을 바쳐온 번들이 있는 동북지방을 탐방하며 배운다가 미토현에서 미토학을 배운다. 일본의 뿌리를 ‘국체(國體)’로 개념화하고 존왕양이를 국가사상체계로 정리한 미토학의 <신론>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민정서의 원형이 된다. 쇼시다 쇼인 등이 발전적으로 계승한 미토학은 메이지유신 지도자들에게 이어진다. 이 기간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공부하며 일본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1853년 6월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하고 청나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석탄, 식량, 물 등을 보충하기 위한 보급기지로서 일본의 항구가 반드시 필요한 미국 동인도함대의 사령관 페리 제독이 최신예군함 4척을 이끌고 에도(도쿄)만 나타나 함포 사격훈련을 하며 개항을 압박하고, 8월에는 러시아 함대 4척이 나카사키에 입항 통상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사쿠마 쇼잔의 학교에는 쇼인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서양의 위협에 대해 일본을 구할 방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고, 이미 유명한 쇼인에게 젊은 사무라이들이 모여든다.
서양의 막강한 해군력에 대항할 방법이 없던 막부는 1854년 4월 두 항구를 개방하며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다. 세계에 대한 배움에 목말랐던 쇼인은 1살 어린 제자와 함께 페리 제독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고 무작정 나룻배를 타고 페리 제독 함대를 찾아간다.
“책을 통해 미국의 문물을 알게 되었고 직접 가고 싶었지만, 일본의 법률이 엄격해 해외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배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편지가 노출되면 우리는 사형당할 수 있기 때문에 비밀을 지켜주시길 바라며, 어두운 밤에 조각배를 타고 함대에 접근하겠습니다.”
페리 제독은 두 젊은이에게 크게 감동했지만 일본과 불필요한 마찰을 원치 않아 요청을 거절하고, 요시다 쇼인은 타고온 조각배를 잃어버려 막부에 발각될까봐 자수하여 감옥에 갇힌다.
페리 제독의 말이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일본인은 학물을 좋아하고 탐구심도 강하다.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려있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
감옥의 쇼인은 틈날 때마다 주변의 죄수와 간수에게도 서양 세력의 침략을 설명하며 목숨을 걸고 서양을 공부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다.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감옥에서 어쩔수 없던 쇼인은 고뇌를 달래기 위해 닥치는대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1년 채 안되는 동안 읽은 책이 약 550여권이라고 전해진다.
쇼인은 감옥의 죄수들 교육에 열심을 내어 삐뚤어진 사람까지도 쇼인에게 감화 받드며 변해갔고, 이로 인해 어둡고 칙칙한 감옥의 분위기가 점점 활기차게 바뀐다. 감옥 죄수 대부분이 쇼인에게 ‘맹자’를 배우고, 간수들은 쇼인에게 붓.먹.등불 등을 챙겨주고 면회 온 사람들도 강의를 듣게 해주는 등 감옥은 마치 쇼인의 학교처럼 변해간다. 심지어 쇼인의 강의를 듣기 위해 감옥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쇼인은 감옥에 있는 동안 미국으로 떠나려 했던 목적과 그 배경 등을 담은 ‘유수록(幽囚錄’을 쓴다(1855년, 26세). 이 ‘유수록’에 일명 정한론의 근본 주장이 담겨있고, 쇼인의 주장은 훗날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하여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에도 일본 극우 세력은 쇼인의 주장을 그대로 신봉한다.
“군함과 포대를 서둘러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조선을 정벌해 원래 일본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 북쪽으로는 만주를 얻고 남쪽으로는 대만과 필리핀제도를 확보해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무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게 입은 손해는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
막부로부터 고향으로 유배하여 집에 근신하도록 판결 받은 쇼인은 고향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개인 학교 ‘쇼카손주쿠’에서 친척과 찾아오는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게 된다. 쇼인은 원문을 읽고 단순히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과 일본이 처한 현실을 함께 엮어내며, 듣는 이들을 강의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쇼인은 맹자의 가르침 중 ‘지성(至誠)이면 감천’을 특히 자주 인용한다.
이 쇼카손주쿠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며 일본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이들 중에는 신분이 너무 천해 관직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천한 사무라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일본헌법제정, 청일/러일전쟁 지휘, 조선초대통감(1898년 이토 히로부미는 본인의 정당이 없는 한계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극복하고자 정당 창당을 추진하여 일본정우회를 설립하고 이는 현재의 자민당으로 계승된다). - 문관을 대표
이토 히로부미는 1868년 도쿄에 ‘죠슈신사’를 세우고, 요시다 쇼인고 쇼카손주쿠 동문들의 희생을 기린다. 죠슈신사는 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을 바궈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야마카타 아리토모: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육군 원수, 청일전쟁, 러일전쟁 지휘,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일본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징병제 도입. 군국주의의 기초 군인칙요 선포(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조한 규범. 태평양전쟁에서 카미카재로 나타남).
교육칙어 발표(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교육의 근본이라고 강조.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조선의 교육이 시행되고, 지금도 공공연히 사용된다. 1889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군비 확자을 추진하며 “주권선(국경) 뿐만 아니라 이익선(한반도)을 확보하기 위해 국방예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 그는 불과 몇 개월 쇼인에게 배웠지만 83세 죽을 때까지도 “요시다 쇼인 선생님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 할 만큼 그를 존경했다. - 무관을 대표
요시다 쇼인은 1858년 2월에 <다케시마 개척 의견서>를 써서 제자인 기도 다카요시(훗날 메이지유신의 3대 영웅)에게 보낸다. “다케시마(울릉도)를 개척하면 해외(러시아 등)의 사변에 대응하거나 조선과 만주에 진출할 때에도 일본의 거점으로 쓸 수 있어 크게 이익이된다.”
아베 신조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야마구치현(죠슈번) 출신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적 인물이다. 2013.8.13. 총리 재선에 성공한 그는 쇼이의 묘지를 방문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한다.
1859년(30세)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지사들을 마구 잡아들이는 막부 고위 관료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지속하자 막부에서 요시다 쇼인을 과격분자로 처형한다. 그는 끝까지 지성을 다하기로 하고 에도(도쿄)에 가서 야마토 타마시(大和魂)을 외치며 처형된다. 처형되어 버려진 그의 시신을 이토 히로부미 등 제자들이 수습하여 장사지낸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
1. 존왕(尊王): 천황을 받들자.
일본은 신이 만들고, 신이 다스리는 나라다. 에도막부를 대신해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에 신성을 부여하고 이를 국체(國體)라 규정하고, 천황을 중심으로하는 일본의 국체를 지키자. 즉 세양세력의 침략과 에도막부의 무능함에 맞서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국체(國體)를 바로 세우자.
2. 양이(攘夷): 서구세력을 배척하자.
병학자의 관점에서 서양을 배워 서양을 이기자고 주장. 서구 세력에게 맞서는 것보다 일단 한걸음 물러나되, 조선과 만주 등에서 서양세력에게 빼앗긴 이익을 채우며 힘을 길러야 한다.
3. 주변국가 정복/정한론
신이 나라인 일본은 우월한 나라이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끌어 왔다. 백성이 있고 임금이 있다는 중국과 달리 일본은 천황이 있고 백성이 있다. 즉 일본은 신의 나라이며 독자적이고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인 천황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앞선다.
“호주는 여러 국가가 앞 다퉈 얻으려고 한다. 만약 일본이 이곳을 손에 넣으면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조선의 일본과 대치하고 있는 형세이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올 것이고,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니 장래에 예측할 수 없는 근심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합병해야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각자였다.”
4. 다케시마 개척론
조선, 만주에 진출할 때 다케시마(울릉도)는 첫 번째 발판이다. 영국이 다케시마를 이미 점거했다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언제 일본에 쳐들어올지 모른다. 죠슈번은 다케시마와 조선을 급선무로 점령해다 한다. 만약 서양세력이 다케시마를 점령하면 죠슈번으로서는 대단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5. 초망굴기(草莽崛起): 먼저 깨달은 민중(초망)이 일어나라.
나 같은 초망(민중)이 일어나야지,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겠는가.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일어나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죽는다면 이를 보고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6. 비이장목(飛耳長目): 하늘 높이 솟아올라 소리를 듣고, 눈을 크게 떠라.
정보를 쥐면 주도권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하려 애쓰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다. 훗날 일본군 첩보부대에서도 요원들에게 쇼인의 글을 필독서로 정하고 ‘비이장목’을 가려쳤다.
7.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세상은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천황 아래의 만민은 평등하다고 가르쳐, 이토 히로부미 등 신분이 천해 교육과 출세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학생들도 쇼카손주쿠를 발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8. 독립불기(獨立不羈):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라.
쇼인은 탁상공론을 매우 싫어했고, 행동하지 않는 지식을 경멸했다. 무엇에도 구속받지 말고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하라고 수없이 강조했다.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자 양성의 요람인 쇼카손주쿠는 죠슈번 출신 아베 신조가 총리로 당선된 2009년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여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을 정식 등재됐다.
일본은 왜 다케시마를 놓지 못하는 걸까? 그들이 다케시마라고 하면 우리는 독도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그들이 다케시마라고 언급할 때 속마음은 울릉도를 생각하며 조선과 만주, 필리핀제도와 호주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