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일본기원과 관서기원 이렇게 두 개의 공식 바둑단체가 있어 입단대회 방식이 다릅니다. 이전 원고에서 각 단체의 입단대회 시기, 방식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간략설명과 입단자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해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5~7월에 있었던 연구생내신 입단대회입니다. 일본기원이 여는 내신 입단대회는 3개월 동안 3번의 리그를 운영해 종합포인트로 연구생 내신 입단자를 가립니다. 그 결과 1위, 1위, 4위를 기록한 모토키 카즈야(本木 克弥)가 그 영예를 안았습니다. 모토키 카즈야 초단은 1995년생으로 후지사와 카즈나리8단 문하입니다. 입단 전 외목을 자주 써서 주목을 받았고 입단 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기원에서 대국하고 있는 원생들.
뒤를 이은 입단대회는 8월부터 12월까지 일본기원에서 열린 일반인 입단대회입니다. 4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상위 두 명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장기 레이스입니다.
1위는 12승3패를 기록한 오오니시 켄야(大西 研也)가 차지했습니다. 오오니시 켄야 초단은 1995년생이며 독학으로 입단한 것으로 밝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2위는 1991년생인 카자마 쥰(風間 隼) 초단으로 송광복9단 문하입니다. 카자마 쥰 초단은 한국에도 장기 유학하여 한국바둑을 익힌 유학파입니다.
9월부터는 일본기원이 주최하는 지방 입단대회가 3개월간 동시에 열립니다. 나고야와 오사카는 같은 시기에 열리기에 전부 응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3년 전부터 타 지역 사람도 지방 입단대회참가가 허용되어 일본기원 본원원생들, 타 지역 거주 일반인들도 원정 출전하는 현상이 늘고 있습니다. 올해 나고야 입단대회에서는 키쿠치 마사토시(菊地 正敏) 초단이 12승2패로 입단을 하였습니다. 기쿠치 초단은 1991년생으로 예전 동경본원 원생 1조 였을 정도로 실력은 뛰어 났습니다.
▲4회 비씨카드배 통합예선에 참가한 고마쓰 히데키(사진 오른쪽)과 최근 입단한 그의 아들 고마쓰 다이키(왼쪽)
같은 시기에 열린 오사카 입단대회에서는 고마츠 다이키 (小松 大樹)초단이 11승3패로 입단 하였습니다. 고마츠 초단은 1990년생으로 아버지가 고마츠 히데키 (小松 英樹) 9단입니다. 어머니도 프로기사이기에 대단한 바둑가족입니다. 실력은 물론 얼굴도 멋있기에 많은 여성 바둑 팬들이 늘어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고야와 오사카의 원생들 수는 매우 적으며 최근에는 동경에서 공부한 연구생과 일반인들에게 공습을 당해 더욱 주춤한 상황입니다. 단지 그것을 두려워해서만은 안 되며 그 지방의 기사들이 후학을 위해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대처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소수정예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노력을 안 하면 당분간은 동경에서의 공습을 막아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여류입단대회는 1년에 한번이며 단 1명만이 입단하는 가혹한 레이스입니다. 올해는 키베 나츠키(木部 夏生)초단이 8승1패의 성적으로 입단하였습니다. 8승1패의 좋은 성적에도 동률이 났는데 서열이 높아 아슬아슬하게 입단했습니다. 일본은 같은 성적일 경우 연구생이 우선이며 같은 연구생일경우에는 연구생서열을 우선하는 룰이 있습니다.
1995년생으로 스승은 후지사와 카즈나리 8단입니다. 키베 초단은 1만 명의 한 명이라는 소아당뇨병이란 지병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같이 자신이 주사를 놓으며 바둑과 병을 이겨 내어 많은 바둑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일본바둑계를 위해 많은 활약을 기대합니다.
관서기원에서도 오랜만에 연구생에서 프로가 3명 탄생했습니다. 관서기원의 룰은 독특해서 별도의 입단대회가 없이 연구생 성적으로 프로가 됩니다. 연구생이지만 급수에 따라 핸디가 있으며 초단 격까지 올라가 일정승수를 올려야지만 입단이 되기에 매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력이 있으면 1년에 몇 명이라도 프로가 되기에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 9월에 입단한 타니구치 토오루(谷口徹)초단은 1995년생이며 스승은 모리야마 나오키 9단입니다. 일본에는 한국의 대한생명배와 같은 소년소녀명인전이 있는데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일본 바둑지망생들의 로망입니다. 타니구치 초단은 2007년 소년소녀명인이 된 후 입단한 바 있습니다, 1월에는 1995년생인 사다 아츠시(佐田 篤史)초단이 입단했습니다. 사다 초단은 스미 신스케 6단 문하입니다.
2월에는 하시모토 칸(橋本 寛)초단이 입단했는데 역시 1995년생이며 스승은 한국과의 교류가 깊은 모리노 세쯔오 9단입니다.
일본의 승단대회 잠깐 쉬어가는 의미에서 일본의 승단제도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일본에서 승단을 하기 위해서는 승수를 많이 쌓아야 합니다. 초단에서 2단이 되기 위해서는 30승이 필요한데 일본기사들의 평균대국수가 적어 시간이 걸립니다. 여성기사들은 여성기전에서의 승수는 포함이 안 되기에 더욱 시간이 걸립니다.
상금랭킹 1,2위, 리그진입 등 성적을 내는 것이 오히려 빠릅니다. 상금랭킹 1,2위는 바로 승단이 되며 기성, 명인, 본인방 등 3대 기전 리그에 들어가면 바로 7단으로 승단이 됩니다. 승단과 동시에 일류기사로 인정도 받으니 많은 기사들에게 리그 입성은 큰 꿈이 되지요.
다시 입단대회로 돌아오겠습니다. 신입단자를 포함해 일본의 프로기사는 일본기원 327명 관서기원 125명이 되었습니다. 그 수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아 변화는 필요합니다.
신 초단의 수는 중국의 20명 한국의 12명에 비하면 일본은 매우 적은 숫자이며 또 입단을 한다 해도 아직은 한국과 중국의 기사들과 실력 차이가 있어 더 노력을 해야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프로가 된 후의 공부환경도 부족합니다. 일본은 문화, 환경 상 바둑도장이 활성화되기는 어렵고, 때문에 프로지망생이 늘어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프로가 된 젊고 어린 기사들을 집중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젊은 선수가 세계대회에 나간다면 몇 달 전부터 장쉬, 야마시타 게이코, 이야마 유타, 타카오 신지9단등 많은 고수들이 힘을 합쳐 집중레슨을 한다면 큰 힘이 될 것 은 물론이며 일본바둑계의 장래를 위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녜웨이핑 9단과 그의 아들 콩링원 7단
다행히 요즘 콩링원(孔 令文)7단이 일중교류를 주도하고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콩 7단은 아버지가 녜웨이핑 9단이며 어머니가 콩샹밍 8단이십니다. 거기에 장인어른이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이어서 일중교류에는 적임자이지요. 매년 3회 이상 프로와 연구생들을 인솔하여 중국으로 바둑연수를 가고 있습니다. 매년 이 원정에서 많은 젊은 기사들이 자극을 받고 있으며 열심히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욱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해야지만 이 험난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본기원이 아닌 변방의 관서기원 출신, 28세 입단이라는 늦깎이 경력. 곧 40을 바라보는 나이. 승부 세계에서 불리하다면 불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걸 뛰어 넘은 한 기사가 일본 7대 기전 중 하나를 점령했다. 그것도 4관왕(기성, 십단, 왕좌, 작은 기성)의 일본 일인자 장쉬를 넘어서면서. 그 이름 ‘사카이 히데유키’다.
8월 27일 도쿄도 치요다구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35기 일본 기성전(碁聖戰) 도전5번기 제5국에서 도전자 사카이 히데유키(37) 7단이 타이틀보유자 장쉬(30) 9단에게 275수 만에 백으로 2집반승을 거두고 종합 3승 2패로 기성에 등극했다.
일본 7대기전 중 마지막 기전인 기성전(碁聖戰). 이 기전은 4연패를 달성하고 있던 장쉬 9단의 영역으로 굳어가는 듯했다. 5연패를 달성하면 명예 기성의 칭호도 얻게 되는 터였다. 도전자는 사카이 히데유키 7단. 도전자결정전에서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을 이기고 도전기 무대에 올라섰다.
장쉬 9단으로서는 이 사실이 내심 고마웠을지 모르겠다. 중량감으로 봤을 때 사카이 9단은 야마시타 9단에 비해 한참 떨어졌고 나이도 많았다. 이번 시리즈가 상당히 쉬워졌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사카이 7단이 프로세계에 늦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의사를 지망했기 때문이다. 효고현 산다시에서 태어난 사카이 7단은 어린 시절 바둑신동으로 불렸다. 사토 스나오 9단의 문하로, 조훈현 9단의 실전 스승이기도 한 후지사와 명예 기성을 사사했다. 각종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고 교토 대학 의학부 재학 시절엔 세계아마바둑선수전에서 우승하기도 했다(2000년). 하지만 대학 졸업 후에 의사 국가고시를 봐 합격했다. 의사 면허를 딴 것이다. 프로기사의 꿈은 접었다. 바둑에 대해선 그냥 아마 강자로서 남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꾼다. 28살이란 늦은 나이에 관서기원의 문을 두드려 시험바둑이란 특이한 코스로 입단했다. 단위도, 특별하게 초단이 아닌 5단을 받았다. 2001년 9월의 일이다.
일본도 정상급 기사로 성장하려면 10대에 입단해야 한다고 많은 이가 믿는다. 이 늦깎이 프로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조금씩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4년에 명인전 본선리그에 들어가면서부터다. 7대 기전 본선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일류기사 대열에 합류한다는 걸 뜻한다. 사카이 7단은 6기 연속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늦깎이 프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기성전 5번기 시리즈에서 그는 크게 폭발했다. 첫판을 졌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2국에서 바로 반격했다. 3국에서 다시 지면서 벼랑끝에 몰렸다. 하지만 다시 4, 5국을 가져가면서 역전했다. 열도의 지배자 장쉬 9단을 꺾은 것이다.
일본 바둑계 전체가 놀랐다. 가장 크게 기뻐한 쪽은 소속기원인 관서기원이었다. 하지모토 쇼지 9단이 1981년 왕좌에 오른 뒤 무려 29년 만에 관서기원 소속 기사가 7대기전 타이틀을 획득한 사건이다. 관서기원으로선 변방의 설움을 단박에 날리는 쾌거였다.
사카이 7단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치열한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첫 도전이었지만 이런 무대에 계속해서 진출하는 것이 목표다”고 밝혔다.
일본 기성(碁聖)전은 전국 지방 12개지로 구성된 신문바둑연맹이 주최하는 기전. 일본IBM이 협찬한다. 일본기원 소속 5단 이상ㆍ관서기원 소속 전기사가 참가한다. ‘전(全)일본제1위기결정전’이 전신이다. 제한시간은 4시간. 5분전부터는 초읽기에 들어간다. 우승 상금은 777만엔.
[PHOTO=日本棋院提供]
예전부터 정리를 해오던 자료인데 최근 제가 일본 관련 글을 쓰게 되면서 필요할 것 같아서 확실하
게 정리를 해봤습니다. 주요 타이틀 획득 현황도 같이 붙였으면 좋았겠으나 방법론이 마땅치 않네
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수많은 바둑 관련 기사들은 대체로 일본 기사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한자
와 본토 발음이 헷갈렸던 적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저와 같은 어려움이 있는 분들을 위
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많아서 한자 공부에도 꽤나 도움이 되었다
는... ^^
참고로 일본기원은 1924년에 창설, 관서기원은 일본기원 하부조직이었으나(현재 일본기원 관서총본부
처럼) 1950년 무렵 갈등이 생겨서(일본기원이 무쟈게 성질 돋굼) 하시모토 우타로가 짐싸들고 독립해
버림. 중부총본부는 일본기원 하부 조직임. 일본 땅떵이가 제법 큰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할 수 있
을 것임.
마지막으로 비어있는 곳과 ?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이 계시면 더욱 행복하겠다는...^^
1. 1950년대 이전 출생기사로서 짱짱한 기사 모음
본토 발음 한자(독음) 태어난 해 입단한 해 국적 소속 기원
이와모토 카오루 岩本 薰(암본 훈) 1902 일본
시노하라 마사미 篠原正美(소원정미) 1904 일본
하시모토 우타로 橋本宇太郞(교본우태랑)1907 1924? 일본 관서기원
마에다 노부야키 前田陳爾(전전진이) 1907 일본
기타니 미노루 木谷 實(목곡 실) 1909 1924(15) 일본 일본기원
세키야마 리이치 關山利一(관산이일) 1909 1926(17) 일본 관서기원
시마무라 도시히로 島村利博(도촌이전) 1912 일본 중부총본부
미야시타 슈오 宮下秀洋(궁하수양) 1913 일본
한다 도겐 半田道玄(반전도현) 1914 일본 관서기원
우칭위안 吳淸源(오청원) 1914 일본(귀화) 일본객원
다카가와 가쿠 高川 格(고천 격) 1915 1927? 일본 일본기원
후지사와 호사이 藤澤朋齋(등택붕재) 1919 1933(14) 일본 일본기원
사카다 에이오 坂田榮男(판전영남) 1920 1935(15) 일본 일본기원
스기우치 마사오 杉內雅男(삼내아남) 1920 1937(17) 일본 일본기원
가지와라 다케오 梶原武雄(미원무웅) 1923 1937(14) 일본 일본기원
마가리 레이키 曲 勵起(곡 여기) 1924 1942(18) 일본 일본기원
후지사와 슈코 藤澤秀行(등택수행) 1925 1940(15) 일본 일본기원
야마베 도시로 山部俊郞(산부준랑) 1926 1941(15) 일본 일본기원
이와타 마사오 岩田達明(암전달명) 1926 1943(17) 일본 중부총본부
오쿠보 이치겐 大窪一玄(대와일현) 1929 1943? 일본 일본기원
오오히라 슈조 大平修三(대평수삼) 1930 1947(17) 일본 중부총본부
가다 가쓰지 加田克司(가전극사) 1931 일본
하시모토 쇼지 橋本昌二(교본창이) 1935 1947(12) 일본 관서기원
구토 노리오 工藤紀夫(구등기부) 1940 1955(15) 일본 일본기원
린하이펑 林海峯(임해봉) 1942 1955(13) 대만 일본기원
오오다케 히데오 大竹英雄(대죽영웅) 1942 1956(14) 일본 일본기원
다카키 쇼이치 高木祥一(고목상일) 1943 1962(19) 일본 일본기원
하네 야스마사 羽根泰正(우근태정) 1944 1958(14) 일본 중부총본부
혼다 구니히사 本田邦久(본전방구) 1945 1961(16) 일본 관서기원
가토 마사오 加藤正夫(가등정부) 1947 1964(17) 일본 일본기원
이시다 요시오 石田芳夫(석전방부) 1948 1963(15) 일본 일본기원
아와지 슈조 淡路修三(담로수삼) 1949 1968(19) 일본 일본기원
미야자와 고로 宮澤吾朗(궁택오랑) 1949 1966(17) 일본 일본기원
* 오청원은 1928년 도일, 29년(15세) 3단 인정, 그가 중국에 있을 때의 실력으로 추론해보면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 아무리 늦게 잡아도 12세에는 입단하였을 것으로 보임.
2. 1950년대 이후 출생 기사들
본토 발음 한자(독음) 태어난 해 입단한 해 국적 소속 기원
다케미야 마사키 武宮正樹(무궁정수) 1951 1964(13) 일본 일본기원
고바야시 고이치 小林光一(소림광일) 1952 1967(15) 일본 일본기원
소노다 유이치 苑田勇一(원전용일) 1952 1968(16) 일본 관서기원
조치훈 趙 治勳(조치훈) 1956 1968(12) 한국 일본기원
왕리청 王 立誠(왕립성) 1958 1972(14) 대만 일본기원
야마시로 히로시 山城 宏(산성 굉) 1958 1972(14) 일본 중부총본부
가타오카 사토시 片岡 聰(편강 총) 1958 1972(14) 일본 일본기원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 覺(소림 각) 1959 1974(15) 일본 일본기원
왕밍완 王 銘宛(왕명완) 1961 1977(16) 대만 일본기원
기요나리 데쓰야 淸成哲也(청성철야) 1961 1976(15) 일본 관서기원
히코사카 나오토 彦坂直人(언판직인) 1962 1976(14) 일본 중부총본부
오가타 마사키 小?眞樹(소현진수) 1964 1980(16) 일본 중부총본부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의전기기) 1966 1980(14) 일본 일본기원
오야 고이치 大矢浩一(대시호일) 1966 1980(14) 일본 일본기원
이마무라 도시야 今村俊也(금촌준야) 1966 1980(14) 일본 관서기원
고마쓰 히데키 小松英樹(소송영수) 1967 1981(14) 일본 일본기원
이마무라 요시아키 今村善彰(금촌선창) 1968 1983(15) 일본 중부총본부
미무라 도모야쓰 三村智保(삼촌지보) 1969 1986(17) 일본 일본기원
나카노 히로나리 中野寬也(중야관야) 1969 1985(16) 일본 중부총본부
조선진 趙 善津(조선진) 1970 1984(14) 한국 일본기원
류시훈 柳 時熏(류시훈) 1971 1988(17) 한국 일본기원
유키 사토시 結城 聰(결성 총) 1972 1984(12) 일본 관서기원
야마다 기미오 山田規三生(산전규삼생)1972 1989(17) 일본 관서총본부
하네 나오키 羽根直樹(우근직수) 1976 1991(15) 일본 중부총본부
다카오 신지 高尾紳路(고미신로) 1976 1991(15) 일본 일본기원
야마시타 게이고 山下敬吾(산하경오) 1978 1993(15) 일본 일본기원
장쉬 張 ?(장 허) 1980 1994(14) 대만 일본기원
고노 린 河野 臨(하야 림) 1981 1996(15) 일본 일본기원
3. 아직 이렇다 할 성적은 없지만 그나마 유망주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
본토 발음 한자(독음) 태어난 해 입단한 해 국적 소속 기원
사카이 히데유키 坂井秀至(판정수지) 1973 2001(28) 일본 관서기원
가토 아쯔시 加藤充志(가등충지) 1974 1990(16) 일본 일본기원
미조카미 도모치카 溝上知親(구상지친) 1977 1993(16) 일본 일본기원
아키야마 지로 秋山次郞(추산차랑) 1977 1992(15) 일본 일본기원
판센치 潘 善琪(반선기) 1977 1996(19) 대만 일본기원
나카노 야스히로 中野泰宏(중야태굉) 1977 1992(15) 일본 관서기원
수야오궈 蘇 耀國(소요국) 1979 1994(15) 중국 일본기원
김수준 金 秀俊(김수준) 1979 1996(17) 한국 일본기원
쯔루야마 아쯔시 鶴山淳志(학산순지) 1981 1999(18) 일본 일본기원
모치즈키 겐이치 望月硏一(망월연일) 1983 2000(17) 일본 일본기원
세토 다이키 賴戶大樹(뢰호대수) 1984 2000(16) 일본 관서기원
이야마 유타 井山裕太(정산유태) 1989 2002(13) 일본 일본기원
부 : 바둑국제화 이후 누구 세계 최강인가 2부 : 현대바둑에 있어 누가 세계 최강인가 3부 : 바둑 역사상 누가 세계 최강인가 4부 : 바둑을 스포츠로 분류한다면 스포츠 사상 누가 세계 최강인가 5부 : 누가 세계 최강인가
I. 바둑국제화 이후 누가 세계 최강인가
먼저 몇 가지 개념정립부터 하겠습니다.
(1) 바둑 국제화 : 여기서 말하는 바둑 국제화라는 것은 좁게 말하자면 1988년 제1회 후지츠배 이후 현재까지 진행중인 모든 국제기전(여류국제기전 제외)을 말하는 것이고, 넓게 말하자면 좁게 말한 범 위에 1984년 이래의 중일 슈퍼대항전, 1983년 이래의 한일 TV정상 대결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더 넓 게 잡자면 한일 교류전, 중일 교류전 등까지 포함시킬 수 있겠으나 앞의 두 가지만 대상으로 잡은 것 은 어느 정도의 상금이 바탕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 몇가지 부연설명 : 사실 농심신라면배 등의 단체전을 마이너기전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단체전으로서의 메이저기전이지 개인으로 환원하자면(전체상금에서 머리 수를 나눈다 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마이너일 수 있고, 어디까지나 지금 주제는 누가 세계 최강인가이므로 더더구 나 마이너일 수 있습니다. 정말 걸리는 것은 90효성대회나 96세계최강전은 상금이 각각 1500만엔, 1 억원이어서 절대로 마이너기전이라 할 수 없지만, 편의상 한중일 삼국이 모두 참가한 상금 1억원 이 상의 토너먼트 국제기전을 메이저기전으로 하였습니다.
(4) 통산성적 TOP 10 : 여기서 말하는 통산성적은 현재까지(2004.9.20) 결승전이 끝난 메이저기전에 서의 총 성적을 말합니다.
(5) 참가당점수 : 이 개념은 과거에 일본에서 국제기전에서의 자국 성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 으로 자국의 최정상급 기사는 참가를 잘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만든 개념입니 다. 즉, 참가하였을 때마다 얼마 만큼의 성적을 내었는가를 개량적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야구로 비 유하자면 타수당 홈런갯수(베리본즈가 이 부분에서 독보적이죠^^)같은 것이겠죠.
(6) 점수 계산 : 우승(120), 준우승(70), 4강(40), 8강(20), 16강(10)으로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 는 정말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일률적으로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세하게 고민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점수를 계산하더라도, 이창호가 넘버원인 것은 분명하고, 2위 아래부터는 본 주제 와 약간은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7) 통산전적(승률), 메이저실제전적(승률), 메이저통산전적(승률) 통산전적(승률)은 모든 메이저, 마이너기전에서 얻은 개인전적(승률)을 말하는 것이고 메이저통산전 적(승률)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고 메이저실제전적(승률)은 제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입니다만 가령 이 런 것입니다. 응씨배 , LG배 등의 결승은 5번기인데 실제로 누가 3대0으로 이겼는지 3대2로 이겼는지 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몇대몇으로 이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겼느냐 졌느냐 가 중요하다는 의미죠. 그래서 3대2든 3대0이든, 2대1이든 2대0이든 다 같은 1승으로 간주하였습니 다.
(참고) 고바야시, 요다, 섭위평은 간발의 차로 나란히 11,12,13위이고 참가당점수는 각각 24.76, 23.81, 25.00 임.
1. 통산성적 TOP 10이 가지는 의미
통산성적 TOP10은 어디까지나 오늘까지 결승전이 끝난 88년 후지쯔배 이후의 총 48개 메이저기전에 서 모든 세계 바둑 고수들이 올린 성적을 기계적으로 산출한 통계치입니다. 따라서 체감지수가 떨어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체감지수를 반영한 현재랭킹도 같이 올릴까 생각은 해봤지만 본 주제와 크게 관련이 없는 자료인 것 같아서 올리지 않았습니다. 본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위의 13명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설마 요즘 박영훈, 최철한9단 등 몇몇 신예기사가 잘 나간다 해서 위의 13명과 동일선 상에 놓고 비교해야 된다는 분들은 없으시겠죠?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창호9단이 단연 군계일학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승률 35.56%는 정말 대단 한 것입니다. 4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골프황제 타이거우즈 149회 참가하여 40회 우승으로 26.84% (2004. 6월까지), 축구의 대명사 브라질 17회 모두 월드컵 참가하여 5회 우승으로 29.41%, 메이저리 그 절대강자 뉴욕양키스도99회 월드시리즈중 26회 우승하여 26.26% 등 각종 메이저 스포츠에서 30% 의 벽은 마의 장벽입니다. 그것을 이창호 9단은 가뿐히 넘고 있습니다.(골프가 대회 성격상 근본적으 로 더 우승하기 힘든게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4편에서 자세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기서 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바둑과 대회방법이 비슷한 매치플레이만 잠깐 보면 매치플레이에서의 타이 거우즈 성적은 훨씬 더 떨어집니다)
다른 기사들 자료도 잠깐 보자면 세계4강이 한국4강이라는 것이 자료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구요. 특 히 이세돌9단의 성적도 놀랍죠? 각종 부분에서 2위~4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추세가 앞으로도 이 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22세의 나이에 이 정도 성적을 올린 기사는 이창호9단 이래로 처음입니다. 참고로 같은 나이까지 이창호9단은 5번 우승했었습니만 그 당시는 국제대회가 지금의 절 반 정도 밖에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단연 이창호9단의 성적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기사들을 보면 역시 마효춘9단이 성적이 좋았는데요. 중국기사 중 유일하게 우승을 2번 했고, 준우 승 경력은 무려 6번이나 됩니다. 4강진입률도 32.50이면 수준급. 문제는 이창호9단만 만나면 전혀 힘을 쓰 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대회 중요 길목마다 이창호9단을 만나서 패배의 아픔을 곱씹어야 했습니 다. 결승에서만 4번, 4강에서 2번, 8강에서 4번 졌습니다. 당시 마효춘9단이 잘 나갈때를 보면 정말 이창 호9단 말고는 거의 지지 않았었죠. 창하오, 유빈9단은 이창호9단에게도 절대 약자였지만 그다지 이름 없 는 기사들한테도 잘 떨어졌습니다. 섭위평9단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요. 요즘에도 끊임없이 자신이 정 신이 몽롱해지지 않는다면 기술적인 면이나 기재면에서 단연 넘버원이라는 망언을 일삼고 있습니다만, 그 가 지금까지 메이저기전에서 번기만 6번을 두었는데 전적이 2승4패입니다. 조훈현9단에게 2번졌고 조치 훈, 마효춘9단에게 1번씩 졌습니다. 이긴 상대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후지사와9단, 야마시로9단이구요. 물론 제가 그처럼 정신이 몽롱해지지 않아봐서 모르겠지만 한 번 물어보고 싶군요. 중일슈퍼대항전 11연승 을 제외하고는 주요 대국마다 이긴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평소에는 정신이 말짱하다가 주요 대국만 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을 보자면 톱10에 순수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여기에 일본기원과 일본 바둑 팬의 아픔이 녹아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습니다만 여러가지 핑계로 일본 내 1인자는 국제대회에 잘 참석을 하지 않았죠. 특히 일본1인자 자리를 조치훈9단과 양분했던 고바야 시9단은 후지쯔배, 응씨배만 참가하고 다른 국제대회는 거의 참가를 하지 않았었죠. 여기에는 고바야 시9단의 아픈 사연도 담겨 있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 부인(몇 년 전 별세함)이 고바야시9단 의 해외대국을 원치 않았다고 하죠. 이런 이유로 고바야시9단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습니다. 지 금도 물론 어느 정도의 성적은 내고 있지만 전성기때 대회마다 참가를 하였더라면 개인의 기력 발전 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 하고 말이죠.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새었는데 아무튼 그들은 그렇 게 변명을 합니다만 일본1인자였던 조치훈9단은 일본의 그런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열리는 국제대 회마다 참가를 하였고(요즘은 타이틀이 없고, 예선마다 잘 떨어져서 참가를 잘 못함), 참가를 안해 서 성적을 못내었다면 참가를 하면 성적을 내야 그 변명이 설득력이 있는데 위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의 참가당점수 및 4강진입률은 별로 탐탁치 못합니다.
일본기사(정확히 일본기원소속기사) 중 눈에 띄는 기사는 오히려 임해봉9단입니다. 우승은 한 번도 못하였지만 참가당점수 6위, 4강진입률 5위입니다. 1942년생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일본내에서의 국내성적도 마찬가지구요. 우승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준우승 등 본선 참가 횟수 등은 오오다케, 가토 9단과 더불어 1위를 다툽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이창호9단이 예전 에 임해봉9단을 닮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호9단도 나이 60이 넘어서도 임해 봉9단과 같은 꾸준함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다9단 이야기도 잠깐 하자면 국내팬들에게는 이창호킬러, 한국기사킬러 등으로 잘 알려져서 실제 성적에 비해 거품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위 자료에서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전적이 잘 보 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기사에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창호9단과 8승8패, 조훈현9단 5승5패, 유창혁9단 9승6패, 그외 한국기사 13승5패. 3인방 및 한국기사에게 이 정도의 성적을 내는 기사는 보 기가 힘들죠. 그런데 중국기사에게는 메이저기전에서 6승9패로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평소에 요다9단이 이창호킬러라고 하는데 대해서 불만이 많았는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부분적으로만 동의를 할 수밖에 없군요. 외국기사 중 이창호9단에게 국제대회에서 단연 가장 많은 패전을 안겨줬다 는 점과 1998년까지 6승1패의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구요. 양자간 번기대결은 91년 신예대항전 이후에는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번기 대결에서의 1승3패가 총전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과, 메이저 기전에서는 오히려 이창호 9단이 4승2패로 앞선다는 점, 다르게 말하자면 요다9 단이 이긴 8승 중에 6승은 비중이 많이 떨어진다는 점(TV아시아선수권에서의 3승이 포함됨), 99년 이 래로 7승2패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동의를 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자 면 2000년 무렵 요다9단에게 3연승을 기록한 시점 정도부터는 더이상 이창호킬러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고 싶네요.
3. 이창호9단의 승률에 주목한다!!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유들~~~
위 자료를 보시면 통산승률이 60%을 넘긴 기사는 한국 4인방 네 명에 불과합니다. 60%를 넘기기도 얼 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창호9단은 75.78%로 8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위 승률 중 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메이저실제승률은 78.06%, 여기다가 마이너기전이라고 분 류했지만 오히려 메이저기전보다 더 이겨야 되는 승부였던 농심배 등 단체전, 96세계최강결정전(상 금 1억)을 포함하면 80%가 넘습니다. 이창호 9단의 통산국내승률이 78.93%인 것을 감안하면 살인적이 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창호9단은 국제대회에 참가한 이래 국가의 명예가 걸려 있어서 져서는 안될 승부에서 딱 한 번 졌 습니다. 91년에 열렸던 요다9단과의 특별 5번기였는데요. 이창호9단은 당시 국내 1인자였던 반면 요 다9단은 타이틀은 신예기전이 고작이었던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신예기사 정도여서 대회 자체가 미 스매치였었습니다. 한국기원이 욕도 많이 먹었었죠.^^ 아무튼 요다9단에게 결국 1:3으로 지고 그 후 로도 요다9단은 오랫동안 이창호9단의 천적으로 남게 됩니다. 홈피에서 보니 역시나 요다9단과의 그 때 패배가 일생의 패배 중에서 가장 괴로웠다고 하는군요.
예전 이세돌9단과 관련한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이세돌9단이 최고다라고 주장하던 논거 중 하나 가 이창호9단은 국내 바둑 기사층이 두텁지 않았던 시절에 입단해서 상대적으로 덕을 봤다는 것인데 요. 분명히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이창호9단은 불가사의합니다. 아래 자료를 하나 더 보시겠습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창호9단의 성적은 국내성적이나 국제성적이나 비슷합니다. 초반부 성적이나 후 반부 성적이나 비슷하구요. 88년 타이틀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해서 전신 조훈현9단과 무수한 번기를 치루고, 국제 무대의 강호들과 진검승부를 끊임없이 겨루고도 승률 80%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89년 응씨배 이후로 거의 모든 국제기전을 국내 4인방이 휩쓸면서도 늘 한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없다는 것이었는데요. 이 현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실제로 2000년 이전까지는 4인 방 이외의 기사들은 간혹 4강에 오르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국제무대에 나가는 족족 단칼 멤버가 됩니다. 승률이 30%에 못미칠 정도였죠. 이 현상이 2000년 춘란배 1회, 후지쯔배 13회에서 각 각 최명훈, 목진석이 3위를 차지하면서 해소되기 시작해서 이세돌, 송태곤, 박영훈, 원성진, 조한 승, 최철한 등이 성적을 내게 됩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우리나라 바둑이 허리진이 엷다고 아무도 이 야기 못하죠.
앞서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95년 12살에 입단한 이세돌9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선데요. 허리진이 엷었 던 건 2000년 이전까지는 오십보백보 수준인데 이세돌9단은 95년 입단 후 국내타이틀은 물론이거니 와 국제대회에는 97,98년 각각 1회씩 참가하여 모두 1회전 탈락한 기록이 전부입니다. 그들의 논거 가 별로 설득력이 없죠?
최정상급 기사인 마효춘, 창하오, 유빈, 조치훈, 왕리청9단 모두 20%도 안 되는 승률을 보여주고 있 습니다. 한국기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적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이 드는 기사들과의 성적은 대 부분 95년 이전 성적입니다. 그때까지는 이창호9단의 성적이 60% 밖에(?) 안될 때였거든요. 전율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상대 전적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이창호9단의 승부욕은 정말 엄청나리라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말했 듯이 91년 요다9단에게 패한 후 이상하리만큼 요다9단에게는 잘 졌었는데 기회가 될 때마다 요다9단 에 대한 설욕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후에 드디어 큰 시합에서 한번 붙게 되었 습니다. 2000년에 있었던 응씨배 8강전이었는데 그 시합에서 이긴 후 이창호9단은 크게 기뻐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승부 중 하나였다고도 말하구요. 93년 4기 동양증권배에서는 조치훈9단을 3대0 영 봉시킨 후 가진 인터뷰에서 웬만한 정상급 기사들과는 다 둬 봤는데 이제 누구랑 두고싶냐고 하니까 고바야시9단을 이야기합니다. 고바야시9단이 당시 일본1인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91년 후지츠배에서 고바야시9단에게 패했던 빚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이후로도 몇 번 져서 천적으로 불리는 기사들과 다시 시합할 때면 일률적이던 인터뷰에서 벗어나 상당한 설욕 의지를 내비칩니다. 물론 승부사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창호9단의 평소 행동과 성품에 비춰 조금 색다른것 같아서 써본 것입니다. 가령 살아있는기성 오청원9단이 매번 치수 고치기 10번기를 치르면서 이기려 한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둥 승부는 돌이 흘러가는 곳에 맡기겠다는둥 하는 식은 아닌 것 같아서요.
5. 국제대회가 생긴 후 누가 세계 최강인가
어차피 결론이 뻔한 질문이었지만,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1등은 1등인데 얼마만큼 2등 그룹과의 격차 가 떨어져 있는가, 몇몇 호사가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 이창호9단의 라이벌이니 천적이니 하는 기사 들이 과연 그러해서 넘버원의 지위를 어느 정도 깎아내리고 있는가 하는데 중점을 맞춰서 글을 진행 했습니다
서봉수 56회 13회 이창호 19회 49회 서능욱 12회 하찬석 11회 1회 유창혁 8회 9회 김인 7회 1회 장수영 6회 강훈 5회 김희중 5회 장두진 3회 창하오 2회 이성재 2회 김수장 2회 오규철 2회 조남철 1회 노영하 1회 홍종현 1회 유건재 1회 허장회 1회 양재호 1회 문용직 1회 섭위평 1회 윤성현 1회 김성룡 1회 요다 1회 사토루 1회 예내위 1회 1회 목진석 1회 최명훈 1회 최철한 1회 왕레이 1회 다케미야 2회 송태곤 1회
기전별 타이틀 획득현황
응씨배 1회 삼성배 2회 후지쯔배 3회 춘란배 1회 동양증권배 2회 TV아시아 2회
국수전 16회 왕위전 13회 명인전 12회 기성전 2회 바둑왕전 11회
패왕전 20회 KT배 1회 BC카드배 2회 최고위전 15회 국기전 12회 기왕전 12회 대왕전 7회 박카스배 6회 제왕전 8회 백남배 1회 최강자전 4회 TBC왕좌전 2회 왕좌전 1회 배달왕전 1회
부. 60년대 이후 일본 바둑 국내 현황 1. 60년대(무적의 사카다) 2. 70년대(임해봉, 그리고 기타니문하 시대의 서막) 3. 80~85(1차 조치훈 시대) 4. 86~95(고바야시, 조치훈을 앞지르다) 5. 96~99(2차 조치훈 시대) 6. 2000년 이후(짧기만 한 왕리청시대 그리고…)
2부. 일본 바둑 국제 기전 성적
1부. 60년대 이후 일본 바둑 국내 현황
전에 필자는 ‘누가 세계 최강인가’를 연재하면서 오청원에 관해서 자세하게 분석한 바가 있다. 이 글은 어쩌면 ‘누가 세계 최강인가’에서 멈춰버린 시계 바늘을 일본에 국한해서 다시 앞으로 움직이 게 하는 역할을 할 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위의 글에서 현대 바둑을 오청원과 기타니의 신포석 이후로 정의한 바 있으며, 오청원이 현 대 바둑의 태동과 동시에 세계 최강으로 자리하기 시작해서 1958년까지 그 독야청청함을 누렸다고 기 술한 바가 있다. 그래서 본 글은 6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다. 또한 타이틀 기전이 본격화한 시점이 1962년 구 명인전부터 이기도 하다.
먼저 기전 설명부터 하겠다. 지금은 일본 기전이 정착되어서 3대기전, 7대기전이 명확하나, 이는 1977년 기성전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타이틀전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승단대회가 가장 권위 있었고, 이후로 본인방이 가장 영예로운 타이틀이었다. 물론 따로 타이틀이 걸려 있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 로 가장 권위있었던 10번기가 있었다. 62년 명인전이 생기고 난 이후로는 본인방과 명인전이 2대 기 전이라 불릴만했다. 비록 프로십걸전이 명인전의 전신이기는 하나(아사히 신문 주최) 소문으로 전해 들은 권위 및 번기 행태(처음에는 3번기, 70년 이후 5번기)로 볼 때(무릇 3대기전의 반열은 모두 7번 기였음) 구 명인전과 본인방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지금의 7대 기전(나머지 기전은 현대에 와서 모두 속기전, 과거에도 비슷함)은 모두 신문사 주최기전 으로서 대회 명칭은 바뀌었으나 그 흐름은 60년대 이후로 끊기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아래 자 료 참조).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이 기간은 단연 무적의 사카다 시대다. 이 기간 본인방을 8연패한 것을 필두로 무려 28회나 우승하였다. 준우승은 11회. 산술적으로 따져 보면 이 기간 열린 18번 열린 빅매치(2대 타이틀)에 13번 등장해서 9번 우승하고 4번 준우승, 나머지 7대 기전 46번의 결승전에 26번 등장해 서 19번 우승하고 7번 준우승한 것이다.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10년대씩으로만 끊어서 본다면 그 누구도 사카다를 따라올 수 없다(한국에는 조훈현의 80년대와 이창호의 90년대가 이를 뛰어넘고 있기는 하다). 그 다음 기록이 고바야시의 80년대와 조치훈의 90년대 정도인데 각각 20번 남짓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기사는 사카다를 무너뜨린 이중허리 임해봉이다. 사카다가 면도날로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고 해서 이중허리가 된 임해봉(이것이 유래가 되어서 이창호 9단의 별명 중 삼중허리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65년부터 67년까지는 구 명인전에서 68년에는 본인방전에 서 사카다를 3년 연속 패퇴시키고 사카다의 본인방 9연패를 저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50년대 본인방 9연패를 자랑했던 유수부쟁선 다카가와와 화려 후지사와가 눈에 띈다. 두 기사 모두 사카다에게 판판이 밀려(결승 실제전적, 다카가와 1승10패, 후지사와 3승6패) 2인자를 다투던 시절이었지만 가히 화려한 2인자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기간 기타니 문하의 싹을 볼 수가 있다. 기타니 문하의 맏형 오오다케(42년생)가 드디 어 67년 7대 기전 중 하나인 일본기원 제1위 결정전(작은 기성전 전신)에서 우승을 일궈 내고 다음 해 연패를 하였고, 그 다음 사제인 이시다(48년생)와 가토(47년생)는 각각 69년 일본기원선수권전(천 원전 전신)을 우승하고, 같은 해 본인방 임해봉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벌써 이 무렵부터 기타니 문 하의 전성기를 예감할 수 있었다 하겠다.
* 본 대회는 전에도 설명했듯이 97년부터 열린 한중 신예교류전이 2000년 일본이 참가하게 되면서 한 중일 신예교류전이 되었습니다. 상금은 대국료 수준이구요.
올해는 그야말로 메이저 기전 풍년의 해다. 매년 열리는 후지츠배, LG배, 삼성배에 격년제인 춘란배, 도 요타배가 겹쳤고 올림픽이 열리는 해마다 개최되는 응씨배도 맞아떨어진 데다가 새로운 중급 세계 기전인 중환모건배도 곧 열리게 된다. 풍년인 만큼 팬들 입장에서도 볼거리가 풍부해졌다.
지금까지 후지츠배만 우승자를 배출했을 뿐, 응씨배, 춘란배, 도요타배는 결승을 남겨 놓고 있고, 삼성 배와 LG배는 8강 진출자까지 결정하였으며 중환모건배는 다음주부터 16강전을 시작한다. 상금 액수부 터 중국이 빠진 참가자 면모까지 중환모건배는 상당 부분 매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나머 지 6개 기전을 살펴보면 후지츠배와 LG배는 한국의 초강세, 춘란배는 중국의 초강력 태풍을 이창호 9단이 거의 잠재운 상태, 나머지 응씨배, 삼성배, 도요타배에서는 한중이 박빙의 서바이벌 게임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중 간의 결승전을 앞둔 응씨배, 도요타배, 춘란배의 전망을 한번 해보기로 한다. 부 제는 중국, 과연 이번에는 우승할 수 있을까 정도가 될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응씨배에는 최철한 8단과 창하오 9단, 도요타배에는 이세돌 9단과 창하오 9단, 춘 란배에는 이창호 9단과 저우허양 9단이 올라 있다. 먼저 여러 주변 환경 요인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상 대성을 감안한 실력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이창호 9단이 85:15(3번기임을 감안), 이세돌 9단이 6:4, 최철한 9단과 창하오 9단은 팽팽하지만 창하오 9단에게 조금이라도 부가 있다.
그런데 환경 요인을 승부에 결합시키게 되면 위의 예측치들은 상당히 바뀔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먼저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소개하겠다. 세계 기전이 본격화된 1996년 이후 메이저 기전에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해서 우승한 기사는 딱 한 명, 유빈 9단이 유일하다. 나머 지 11번은 모두 실패. 물론 이창호 9단이 6번이나 가로막았기 때문에 자료의 신빙성은 약간 떨어진 다. 그렇다 하더라도 1승 5패라면 무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 할 것이다. 비단 세계 대회가 아니 라도 현대 바둑의 메카였던 일본의 3대 기전을 살펴보면 일본 바둑의 쇠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 년 이전(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바둑의 쇠락 시작 시점과 조치훈 9단이 대삼관을 잃은 시점과 일치한 다)까지는 조치훈 9단과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의 처음 도전 성공이 유이한 기록이었다. 근래에 일본 바둑이 약해지면서 하향평준화가 되고부터는 오히려 처음 도전은 곧 타이틀 획득이라는 공식이 될 정 도로 많은 기사들(조선진, 왕밍완, 야마시타, 하네나오키)이 처음 도전에 성공하고 있지만, 분명 의 미가 있는 통계라 할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도전 무대에 오르는 기사는 저우허양 9단과 최철한 9단. 아무래도 저우 9단은 마음 을 비워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최철한 9단은 그래도 5번기라는 것이 원래 강한 심장을 더욱 담금질 할 수 있어 보인다. 상대 또한 이창호 9단도 이세돌 9단도 아니다.
중국은 이번 3번의 기회(삼성배 8강에 올라와 있는 구리 7단도 또 하나의 기회라는 생각)에서 과연 꿈에도 그리던 우승의 염원을 달성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는 중국 입장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무 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겠다(대부분 독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최소한 응씨배에서는 창하오 9단이 우승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도 어느 정도 우승을 해야 전체 파이가 커진다. 중국 은 자국 기사들이 성적을 내면 언제라도 몇 개의 세계 기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력이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응씨배를 도요타배 앞에 배치하고 춘란배를 도요타배 뒤로 배치하라.
도요타배 결승전은 내년 1월로 고정되어 있다. 응씨배와 춘란배 결승전은 아직 시기와 장소가 미정이 고 두 기전 모두 중국이 주최라고해도 무방한 기전이다. 그들 입맛대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 응씨 배는 5번기라 두 번에 나누어서 개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10월 말쯤 1차전을 하고 12월 말쯤 2차전을 한다고 해도 약간의 비난은 있을 수 있겠지만 우승을 할 수 있다면 그깟 비난 정도야 우습 지 않은가. 이보다 더한 일들도 숱하게 자행했던 과거가 있지 않은가.
앞에서 잠깐 전망했듯이 3개의 결승전 중에서 중국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기전은 응씨배다. 실력으로 도 팽팽한데다가 처음 결승 진출자 징크스도 있다. 얼마 전 도요타배 4강전에서 최철한 9단에게 완승 한 기억도 생생할 것이다. 만약 필자의 생각대로 응씨배 결승전이 열린다면 필자의 전망은 60:40으 로 창하오에게 배팅하겠다. 팽팽한 승부가 어느 정도 기운 승부로 바뀔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 야하지 않을까?
춘란배 결승전은 가장 뒤로 미루어야 한다. 어차피 필자는 춘란배 결승전 시점은 이창호 9단이 가장 컨디션이 안좋을 때라고 예상하였지만, 중국은 딱 그대로 하면 될 것 같다. 만약 춘란배가 가장 앞 에 오고 다음이 도요타배 그 다음이 응씨배라면 중국으로서는 죽음이다. 또 2002년의 악몽이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70% 이상이다. 중국에서는 이세돌 9단에 대한 평가가 별로 높지 않지만(애써 외면하 고 있다는 게 더 맞겠지만) 이세돌 9단은 이창호 9단에게만 약간 뒤질 뿐 그 다음 정상급인 박영훈, 최철한, 송태곤, 구리, 콩지에, 창하오, 후야오위보다는 분명 한 수 위다(필자의 견해임). 컨디션만 정상 이면 이세돌 9단에게 이긴다는 것은 극히 힘들다. 상대 전적이 1승 4패라고 하지만 한 판은 97년 일이 고 2001년 한중 천원전에서의 2패는 큰 승부가 아닌데다가 당시 이창호 9단에게 LG배에서 역전 3연패 를 당한 후 성적이 극히 부진할 때였다. 따라서 그들 간의 실제 전적은 1승1패로 보는 것이 정확하 다.
어쨌든 춘란배, 도요타배를 넘겨준 이후 응씨배를 치른다면 창하오 9단의 부담은 이중삼중으로 늘어 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버린 데다가 자신으로서도 6번 실패하고 7번째 도전. 또 한 이전까지는 결승전 상대가 그나마 지더라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되는 상대였지만 이번은 다르다. 이 래저래 심리적 압박감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변수가 있다. 삼성배와 농심배. 삼성배는 10월에 8강전, 11월에 4강전, 12월 또는 1월에 결승전을 치 르고 농심배는 10월에 1차전, 11월에 2차전, 다음 해 1월에 3차전을 치른다. 중국 입장에서 농심배 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삼성배는 구리 7단에게 기대를 걸어봄직해 보인다. 만약 구리 7단이 계속해 서 낭보를 전한다면 결승전 배치 문제는 다시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일본 바둑은 더 이상 세계 바둑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고 바둑에 있어서는 3류였 던 중국 바둑이 한국 바둑을 위협하게 되면서 호사가들은 과연 누가 더 강한가에 관심을 표명하고는 한다. 그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그것이든. 그런데 그 결론 자체가 일 정하지 못하다. 중국이 한번 잘 하면 비관 내지는 우려 일색이고, 한국이 성적을 낼 때면 찬양 일색 이다.
필자는 이에 주목하여 객관적인 통계를 근거로 과거에는 양국의 성적이 어떠했으며 현재는 어떠한가 를 분석함으로써 과연 양국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실증하고자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 제기는 어떤 전제를 하지 않는 이상 뻔한 주제가 되어 버린다. 익히 알다시 피 이창호9단을 통계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더 이상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이창호9단을 제외 하더라도 우승을 어느 나라가 많이 했는가를 중심으로 한 점수제로 비교한다면 똑 같은 문제가 생기 게 된다(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포함시키면 한국이 더 강한 것임은 불을 보듯이 뻔하므로). 이에 본 글에서는 대부분의 양국 비교를 이창호9단을 대상에서 제외하고(궁금할 분이 많으실 것이므로 자 료는 제공할 것임), 철저하게 상대 전적을 기준으로 양국 비교를 할 예정이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중요한 이야기 한 마디. 한국과 중국은 국제 기전에 기사를 출전시키는 방법이 다르다. 이것이 일반 바둑팬 및 전문가까지도 많은 오해를 부르고 있다. 실제로 오해를 할 만 하다. 그냥 보면 꼭 중국이 층이 넓고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무슨 오해냐구? 그럼 설 명 들어가겠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국내외기전 타이틀 홀더에게 먼저 국가 시드를 배정하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예선 을 치러 빈 자리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참가 기사들의 면면을 보면 중국도 아마 2000년 무 렵까지는 한국과 비슷한 방법으로 대표를 선발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방식 때문에 이 기 간 까지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국제 기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항상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한국은 오랜 기간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이 고정 멤버였고, 중국 또한 마효춘, 유빈/유소광, 창하오가 고정 되어 있었다. 남은 자리는 많아야 서너자리, 삼성배나 되어야 숨통이 트인다. 이 시스템으로는 기존 의 절대강자를 꺾고 국내 기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이상 세계 무대는 그저 꿈의 무대일 뿐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좀처럼 국제 무대에서 경험을 쌓기 힘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던 시스템을 중국이 랭킹제를 도입하면서 과감히 바꾸었다. 여기에는 한국을 이겨보자는 생각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어떻게 바꾸었느냐. 국가 시드를 받으면 이미 다른 경로로 참가가 확정된 기사들은 제외하고 랭킹 20위까지 본선 멤버를 구성한다. 그리고는 이들 20명을 토너먼트 경기를 하 게 하여 대표를 결정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국제 기전에 참가하는 중국 기사들이 다양해 보인 다. 그런데 그 pool이 30명을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는 신예 기사들이 국제 기전에 참가하기가 힘들 지만 중국의 대부분 기사들은 랭킹 20위 안에 들지 않는 이상 국내 예선 자격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어떤 방법이 더 나은지는 필자는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중국의 이런 시스템은 어느 정 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즉, 20명 정도 되는 기사가 pool을 형성해서 국제 기전에 번갈아 참 가함으로써 경험이 쌓임에 따라 조금씩 성적을 내고 있다. 우승도 드디어 목전까지 왔다.
한국은 앞서도 말했지만 국제 기전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높다고 해서 제도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 님. 개인적으로는 중국 시스템보다 더 낫다는 생각). 이제서야 그 두터운 진입 장벽을 조금씩 뚫고 나오는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처음의 낯선 세계 무대는 그 어떤 똘 똘한 신예 기사도 뚫어내기가 힘들다. 경험이 쌓여야 한다. 그러나 가뭄에 콩나듯 국제 기전에 참가 해봐야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최철한 등의 최강 신예 기사들의 예에서, 최근 벌어진 삼성 배의 첫 출전 신예 기사들의 예(이영구, 김광식, 윤혁)에서 우리는 앞의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느껴 왔다.
그러면 위의 글을 유념하면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1. 한중 기사 세대 비교
여기에서의 세대는 1988년 메이저기전이 등장한 때를 기준으로 잡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조훈 현 이후, 중국에서는 섭위평 이후를 말한다.
위의 도표 1~3세대에 포함된 기사들은 과거 국제 기전에서 활약상이 뛰어났거나 지금까지는 별다른 활약 이 없었으나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기사, 또는 국내에서 꾸준히 10위권 이내의 성적을 냈던 기사들이다.
위의 도표는 또한 실질적인 세대 구분보다는 형식적인 나이 구분에 의해 자료가 작성되었으나 이창호만 제 외한다면(이창호는 실질적으로는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도표가 거의 맞아 떨어진다.
그러면 위의 도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자료에서 보다시피 한국 바둑계에는 2세대 기사 가 별로 없다. 이 사실이 오랜 기간 한국에는 허리가 없다는 말로 이어졌다. 유창혁과 마효춘은 논외 로 하고, 중국의 유소광, 유빈, 조대원 등이 과거에서 최근 및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나름대로의 성적 을 거두고 있는데 반해(이들은 국내 기전에서 대부분 상당한 우승 경력이 있고 국제 기전에서도 대부 분 한 방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성적을 떠나서 2세대 기사의 수 자체가 절대적으 로 부족했다(들은 바로는 2세대 기사가 한창 입단할 무렵인 80년대에 연구생 입단을 장려하기 위해 서 일반인 입단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으로 들리겠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연구생 실력은 형편없었고 일반인 출신 아마 강호가 훨씬 기력이 셌다).
3세대로 오면 한국에서는 이창호, 최명훈, 안조영이 눈에 띄고 중국은 바로 6소룡 세대다. 원래 처 음 6소룡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소위강을 맏형으로 여평, 류징, 창하오, 주학양, 왕레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뤄시허가 성적을 내면서 6명을 꼽기가 애매해지자 언젠가부터는 성적이 뛰어난 70년대생 기사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그저 6소룡 세대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3세대도 2세대와 마찬가지로 중국 이 많다. 게다가 중국은 이들이 대부분 지금도 왕성한 활약(9명 모두 중국랭킹 20위 안에 들거나 20 위권을 오락가락 하고 있음)을 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이창호, 최명훈, 안조영, 김승준을 제외하고 는 수는 많으나 대부분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중국 바둑층이 더 넓게 보이는 현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군대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도 6소룡 못지 않은 인재들이 많았다. 이성재, 윤성현, 김성룡, 윤현석 등등. 언젠가 김성룡이 말했다. 군대를 갔다 왔더 니 기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만약 군대 문제만 없었다면 이들이 중국의 6소룡에 비해 못하였 을 것이라고는 감히 누구도 이야기하기가 힘들 것이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4세대를 보자. 4세대는 중국이 먼저 시작을 알렸지만 열매는 한국이 먼저 맛보고 있다. 양에서는 비슷하지만 질에서는 이세돌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이 조금 앞서고 있다 (자세한 비교는 뒤에 이어진다).
후보군은 4세대와 세대는 같고 실력도 충실하지만 성적을 그들만큼은 거두지 못하고 있는 군이다. 이 군에 있어서는 질에서는 아직 비교하기가 힘든 면이 있으나 양에 있어서는 한국이 단연 앞선다. 위의 도표상으로는 5:3이지만 한국은 5명 이외에도 꽤 많은 잠룡들이 있다. 강지성, 이영구, 홍민 표, 박승현, 최원용 등등. 중국에는 기껏해야 뉴요티엔과 왕야오, 작은 왕레이를 더 추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저변이 아마 한국이 향후 10년 정도는 정상을 지키는데 크게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뒷 받침하는데 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래세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필자의 견해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이라는 생각 이다.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는 특별한 근거 없이 우리가 안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 마 천야오예, 리저, 구링이가 가끔씩 기사화되면서 그 기사가 일반의 뇌리에 강렬하게 인식된 측면 이 강한 것 같다. 그러면 강동윤, 김지석은 어떤가(고근태는 객관적으로도 충분히 여기에 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지만 필자의 주관이 개입된 측면도 분명히 있음을 밝힌다). 강동윤은 특별한 설명이 필 요가 없을 듯하고, 김지석은 전에 한 번 설명한 것처럼 일찍이 조훈현이 그 기재를 알아보고 제자로 삼으려 했던 동량이다.
이들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자. 천야오예 2000년 입단, 2004. 4.30판 중국랭킹 63위, 국제 기전 본선 경력 없음. 리저 2000년 입단, 앞선 랭킹 32위, 작년 삼성배 본선 32강. 리캉 1998년 입단, 앞선 랭 킹 29위, 국제 기전 본선 경력 없음. 구링이 2002년 입단, 앞선 랭킹 75위, 본선 경력 없음. 강동윤 2002년 입단, 태초랭킹 46위, 본선 경력 없음. 고근태 2002년 입단, 태초랭킹 26위, 본선 경력 없 음. 김지석 2003년 11월 입단, 현재까지 총 전적 19승12패.
어떤가? 중국이 더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는가? 입단 후 4년이 지난 중국 소년기사와 2년이 지난 우 리측의 성적이 별반 커다란 차이가 없다. 현재 위세를 세계에 널리 떨치고 있는 최철한이 97년, 송태 곤이 98년, 박영훈이 99년에 입단했다. 다시 한 번 평가를 재고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물론, 필 자는 중국에 이들과 다른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즐비한지는 알지 못한다.
* 장주주, 예내위는 99.3(한국기원 활동 시점) 이전은 중국기사로, 이후는 한국기사로 설정함.
* 메이저 기전이란 응씨배, 동양증권배(1,2회 제외), 삼성배, LG배, 후지츠배, 춘란배, 도요타배를 말하고 나머지 국제 기전은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음.
* 2004년은 2004.9.10까지 벌어진 메이저 기전(응씨배 4강전 포함)의 상대 전적을 포함함.
* 승패의 기준은 실제 전적을 기준으로 하였음. 가령 3번기나 5번기에서 2:0으로 이겨도 1승, 3:2로 이겨도 1승, 2:1로 이겨도 1승 3:0으로 이겨도 1승으로 하였음.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필자의 생각임.
* 시대 구분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4018(메이저기전 4강 성적으로 본 한중일 바둑전쟁)에 기초하였 음.
위의 자료에 의하면 응씨배, 후지츠배, 동양증권배 밖에 없었던 세계 기전 초창기 시절(88~95) 분명 히 중국에 밀렸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조훈현(6승3패), 서봉수(2승), 유창혁(2승)을 제외하 고는 우위에 있는 것은 고사하고 한번이라도 이긴 기사는 이창호(2승4패)가 유일하다. 이 기간 4인방 이 있어 우승(7회)을 많이 했을 뿐이지(중국은 2회) 전체적인 층은 중국이 훨씬 두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저 기전이 아니더라도 94년부터 열린 롯데배 한중 대항전을 보면 대회에 참가했던 7명 의 기사 중 4인방을 제외하고는 8승24패라는 참패를 당했었다.
96~99 기간에는 중요한 흐름이 나타난다. 가장 큰 흐름은 이창호가 절대자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이 외에도 최명훈, 김승준, 이성재, 목진석이 등장함으로써 4인방에만 지나치게 편중됐던 쏠림 현상이 어느 정도 극복이 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은 6소룡이 등장한 중국이 여전 히 두터운 층을 자랑하였다. 이창호를 제외한다면 45승54패로 열세였고 중국은 이창호에게 진 것만 빼면 대부분의 주력 기사들이 대 한국전 전적이 우위에 있었다.
소프트웨어가 바뀌었다고 했던 2000년대로 오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국에서는 최명훈, 목 진석 외에 전 시대의 김승준, 이성재를 대신하여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 송태곤, 원성진, 조한승 등의 80년대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중국에서는 전 시대의 6소룡에 더하여 10소호군들이 전면에 등 장하게 된다. 성적 또한 이창호를 제외하더라도 68승56패로 우위에 서게 되면서 진정한 세계 바둑 최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004년 올해는 2000년만큼은 아니지만 세계 바둑사에 있어 또 하나의 격변기다. 그래도 위태위태하나 마 근근이 버티던 일본이 완전히 몰락하고(20~23 시기 한국에 48승76패, 중국에 35승35패 / 2004년 한국에 10승21패, 중국에 5승16패), 이세돌 외에 가능성만 있었던 한중의 신예기사군들이 기존의 강 자들을 꺾고 전면에 등장했다(아래 도표 참조).
2002년만 하더라도 4강 점유율 25%(이세돌의 위치가 애매하나, 포함하더라도 35%)에 불과했던 신예군 은 2003년 50%, 올해는 50%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한번 정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최철한 3번, 송태곤 3번, 박영훈 2번, 콩지에 2번, 펑첸 2 번).
한중 맞대결 성적은 이창호를 제외하면 21승22패. 가히 백중지세다. 물론 이창호를 포함하고 우승 횟 수 등을 포함한 점수로 평가한다면 한국이 단연 앞서지만 한중 기사 간의 상대 전적만 따진다면 그렇 다는 얘기다.
3. 한중 신예군 상대전적
* 7명의 한국 최강신예
총전적 승률 맞대결 총전적 맞대결 실제전적
이세돌(83) 45승25패 64.29 7승3패 5승2패
박영훈(85) 26승10패 72.22 3승1패(1승1패) 1승
최철한(85) 23승11패 67.65 5승6패(1승1패) 2승1패
송태곤(86) 23승17패 57.50 4승6패(1패) 3승2패
목진석(80) 25승28패 47.17 3승5패(1패) 1승3패
조한승(82) 11승9패 55 3승3패(1승1패) 1승1패
원성진(85) 11승8패 57.89 3승3패(1승2패) 2승
* 7명의 중국 최강신예 + 주학양,왕레이,뤄시허
총전적 승률 맞대결 총전적 맞대결 실제전적
구리(83) 18승13패 58.06 11승4패(2승) 1승
콩지에(82) 24승15패 61.54 7승5패(2승1패) 2승4패
후야오위(82) 16승14패 53.33 2승5패(1승1패) 2승2패
펑첸(85) 11승10패 52.38 2승4패(1승2패) 1패
주학양(76) 37승29패 56.06 1승6패 1승5패
왕레이(77) 33승25패 56.9 3승2패 3승2패
뤄시허(77) 15승14패 51.72 1승2패(1승) 1패
* 한국은 7명 모두 신예가 맞으나 중국은 숫자가 부족하여 성적을 내고 있는 주학양 등을 포함시켰
다.
* 총전적은 모든 국제 기전에서 기록한 성적을 모두 합산하였고, 맞대결 총전적은 위 도표의 7명
간의 모든 국제 기전에서의 한중 전적을 나타내며 괄호 안은 뒤에 나오는 삼성배 예선 및 한중일 신
예 대항전 성적을 포함시킨 것이다. 맞대결 실제전적은 메이저 기전에서의 한중 전적을 말하며 번기
는 단판으로 계산하였다.
* 2004.9.10 벌어진 응씨배 4강전까지 대상으로 하였다.
먼저 총전적을 보면 역시 우승 경험이 있는 이세돌, 박영훈이 발군임을 알 수 있고, 최철한 또한 강
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 중국에서는 올해 드디어 알을 깨고 나온 콩지에 성적이 그나마 가장 훌륭
해 보이며 나머지 신예는 아직까지 승과 패가 비슷한 형세다(구리는 돈 되는 메이저기전 성적은 엉망
이고 돈 안되는 한중 번기 대결 4차례에서 전승을 거두었으므로 실제로는 승패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주학양과 왕레이는 역시나 10년 가까이 최고의 안정적인 성적을 거둔 기사답게 승률 또한 수
준급이기는 하나 안정적일 뿐이다.
맞대결 총전적을 보면 한중이 한치의 앞이 내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승부를 벌이고 있음이 확인된
다. 합산하면 28승27패, 삼성배 예선과 한중일 신예대항전 성적까지 합치면 32승34패. 한국에서는 이
세돌, 박영훈이 상대 우위를 보이고 있고, 중국에서는 구리, 콩지에가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맞대결 실제전적을 보면 역시나 한국의 신예기사들이 큰 승부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
다. 합산해서 15승9패. 맞대결 총전적에서 중국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원동력은 구리
가 4차례 번기 대결에서 8승2패를 거둔 성적이다. 주학양은 1승5패로 한국 신예들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10월에 있을 박영훈과의 삼성배 8강전이 부담스러울 듯.
좀 더 구체적으로 이세돌이 누구와는 몇승몇패 또 누구와는 몇승몇패인지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대부분 몇 번 대결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하겠다. 우리는 얼마 전 세계 대회
에서 전에는 이겼는데 이번에는 지고 전에는 졌는데 이번에는 이기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
다. 통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쌓여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다고 조르면 차후에 도표를
제공할 의향은 있다. 웬만하면 조르지 마라.
4. 유망주 포함 한중 비교
최명훈(75) 18승22패 소위강(73) 12승20패
안조영(79) 2승11패 여평(72) 3패
김승준(73) 8승9패 딩웨이(79) 4승9패
윤준상(87) 1승1패 류징(75) 4승9패
김주호(84) 3승3패 왕위후이(76) 5승6패
박정상(84) 2승2패 동옌(77) 3승5패
안달훈(80) 3승3패 류스전(77) 2승
강지성(81) 4승2패 치우쥔(82) 3승9패
박승현(84) 1승2패 시에허(84) 3승3패
안영길(80) 3패 류싱(84) 1승2패
홍민표(84) 2패 왕시(84) 5승5패
이희성(82) 황이중(81) 1승5패
박병규(81) 1패 뉴요티엔(84)
박승철(82) 1승1패 양이(84) 1승2패
이영구(87) 1패 왕야오(83) 1패
허영호(86) 1패 주쥔지에(80) 1승2패
홍성지(87) 장쉐빈(85)
강동윤(89) 왕뢰(86)
고근태(87) 왕양(80)
최원용(84) 천야오예(89)
김지석(89) 리저(89) 1패
조혜연(85) 리캉(87)
박지은(83) 1승2패 구링이(91)
한국은 현재 성적을 내고 있거나 앞으로 유망한 23인을 선정했으며(임의로 한 것이므로 누구누구는
없다고 너무 투덜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중국 또한 현재 성적을 내고 있거나 앞으로 유망
한 23인을 선정했다. 앞의 7명과 합치면 30명. 남은 사람은 한국은 이창호, 유창혁, 조훈현. 중국은
창하오와 유빈. 한국은 최명훈, 안조영과 김승준을 제외하고는 전원 80년대생이고 중국은 불순물이 7
명이나 끼어 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1편에서 설명한 바 있다. 더욱이 한국은 이들 외에도 열
명 정도는 더 포함시킬 여지가 있는 반면 중국은 이들이 전부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노장 기사
들 외에 2000년 이후 중국 랭킹 30위 안에 들었던 기사가 망라되어 있다)
승패기록은 모든 국제 기전에서 거둔 성적을 말한다(한중 대결이 아님). 한국은 44승66패(40%)(안조
영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45승82패(35.43%). 중국이 상대전적이 더
많은 이유는 1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의 세계 대회 참가 시스템상 20위 이내의 기사들이 집중
적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다는 것과 많은 전적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70년대생 기사들이 군대 문제
가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최근에는 성적을 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료에서 빠졌기 때문이
다. 어쨌든 승률에서는 약간 우리가 우세하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면 위의 7명과 합쳐서 30:30 기록을 한번 보기로 하자. 그런데 국제 기전 본선 기록을 비교하면
좋겠지만 최강신예 맞대결과 같은 표본이 있을 수가 없다. 왜? 거의 맞붙을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삼성배 예선 성적을 대상으로 가져 왔다.
2000년 5회 삼성배예선 3패
2001년 6회 삼성배예선 7승5패
2002년 7회 삼성배예선 3승5패
2003년 8회 삼성배예선 5승4패
2004년 9회 삼성배예선 8승7패
종합 23승24패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중일 신예대항전 성적을 보기로 하자. 참고로 한중일
신예대항전은 97년 한중 신예대항전으로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일본이 자기도 참가시켜달라고 땡깡을
부려서 2000년부터는 한중일 신예대항전이 된 것이다. 매년 한국과 중국을 번갈아가면서 개최되며 개
최국은 두 팀을 만든다. 그래서 네팀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린다. 상금은 거의 대국료 수준.
2000년 4회 대항전 11승5패
2001년 5회 대항전 10승6패
2002년 6회 대항전 6승10패
2003년 7회 대항전 11승5패
종합 38승26패
물론 한중간의 대결만 뽑은 것이다. 참가자를 보자.
2000년 한국A 안조영 목진석 이정우 강지성 조한승 안영길 이희성 박지은
한국B 최철한 원성진 윤혁 김주호 박영훈 송태곤 박승철 조혜연
중국 구리 시에허 양이 왕시 뉴요티엔 장동위에 장쉐빈 리캉
2001년 한국 강지성 한종진 박정상 박영훈 최철한 원성진 송태곤 주형욱
중국A 콩지에 구리 후야오위 황이중 치우쥔 류싱 시에허 왕야오
중국B 양이 왕시 왕양 리지에 리? 펑첸 부중 천야오예
2002년 한국A 조한승 박영훈 안영길 최철한 원성진 박정상 송태곤 윤준상
한국B 김주호 이재웅 허영호 백홍석 박진솔 홍성지 이영구 강동윤
중국 콩지에 구리 황이중 펑첸 후야오위 치우쥔 왕양 천야오예
2003년 한국 안조영 조한승 박영훈 원성진 강지성 김주호 박정상 허영호
중국A 구리 콩지에 후야오위 펑첸 치우쥔 시에허 리저 천야오예
중국B 뉴요티엔 리캉 장쉐빈 장동위에 쉬에레이 장립 오개 텅정
5. 결론
정말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해 보았다. 결론은? 이창호를 제외하고 우승 등을 포함한 점수로
환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상대 전적만을 비교한다면 현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은 막상막하의 균형을 이
루고 있다. 다만 큰 승부에서는 한국의 신예들이 더 강하고, 한국의 정상 후보군들이 더 넓게 퍼져
있다. 중국은 축구에서도 그렇듯 20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왔듯이 인구가 무지무지 많
기 때문에 곧 치고 나올 것이다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혹시 20년 후에도 똑 같은 말을
하게 되지는 않을지...
응씨배 4강전이 열리고 있다. 최철한, 송태곤, 창하오, 펑첸이 그 주인공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 까? 메이저기전 우승 경험이 한 번도 없다가 정답이다. 필자는 8강전이 열렸을 때 이창호가 반드시 최철한을 이길 것으로 보았다. 혼자서 95:5로 배팅을 했을 정도로. 왜냐구? 다른 모든 관점을 떠나 서 당시 8강 멤버 중에는 이창호만 유일하게 우승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대회 초창기를 제외 하고 40번 넘게 벌어진 메이저 기전에서 4강에 우승 경험이 없는 기사만 포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 었다. 또한 재밌게도 4강에 우승 경험이 있는 기사가 1명이면 그 1명이 사십발 삼십구중 그 한 명이 우승하였다.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97년 LG배에서 마음씨 좋은(?) 유창혁이 유빈에게 우승을 헌납 한 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바둑만 그런 것은 아니다. 바둑과 가장 대회 성격이 비슷한 골프 역시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처 녀 우승한다는 것은 늘상 대서특필될만큼 이변으로 기록된다. 그것도 1년에 4번씩 있는 메이저 대회 라면 이변을 넘어 모든 언론이 방방 뜬다. 우리는 박세리의 예에서 충분히 지켜보았다.
그러면 바둑에 국한해서 우승이 왜 그렇게 힘든지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특히나 왜 중국애들은 우승의 9부 능선 앞에서 번번히 꼬꾸라지는지를 중심으로 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창호 다.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그를 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 그런데 이창호가 아닌 적도 많았다. 조훈 현에게도 졌고 유창혁에게도 졌다. 왕리청에게도 졌고 조치훈에게도 졌다. 최근에는 이세돌, 박영훈 에게도 졌다. 분명히 한중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정상급기사들과 전문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바둑 실력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매년 중국이 한 차례 정도는 우승을 차지할 거라고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도 97년 유빈 우승 이후로는 한 번도 없다.
중국 기전의 상금은 가장 많은 것이 우리 돈으로 삼천만원 정도다. 그런데 응씨배는 스무배 가까이 된다. 응씨배가 아니더라도 가장 적은 상금이 후지츠배로서 일억오천만원이다. 다섯배. 과거에는 더 심했다. 간이 오그라들게 되어 있다. 얼마전 우리는 박영훈이 그 좋던 바둑을 역전패하고 조치훈에 게 왕관을 내주는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 중국은 매번 그런 식이다. 조훈현은 언젠가 중국 바둑이 기세가 부족하다고 하였지만 필자는 그 기세에는 이런 측면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상금은 별반 차이가 없지 않냐고? 맞다.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승 전통이 있다. 과거 해태타이거스가 허구헌날 우승할 당시 해태의 붉은 유니폼이 우승을 만든다고 했던 것처 럼, 뉴욕양키스의 핀스트라이프가 선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하는 것처럼. 이창호, 조훈현, 유창 혁, 이세돌이 매번 우승하는 것을 보았던 신예 기사들은 그들도 할 수 있음을 느낀다. 국내 기전에 서 이들과 몇 합을 나누어 보고 몇 번 그들을 넘어섰던 경험은 이들을 우승 전선으로 이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철한은 천운을 타고났다. 만약 최철한이 4강전에서 창하오가 붙었다면 나는 창하오 에게 다걸기(회장님이 올인 대신 추천한 용어를 감사히 사용하기로 함 ^^)에 가깝게 배팅했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도요타배 4강전 예상시 이세돌과 콩지에 대국만 예상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펑첸. 국 내 기전에서도 신인왕전을 제외하고는 우승 경험이 전무한 기사다. 게다가 나이도 최철한과 동갑. 최 철한도 떨리고 펑첸도 떨린다. 그렇다면 이창호를 넘어봤던 실력의 최철한이 이기게 되어 있다. 펑 첸 역시 기회가 있다. 군대 문제로 최철한이 더 떨릴 수 있다. 메이저기전 4강 이상의 승부는 담력 의 승부다. 누가 더 승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담대할 수 있느냐 하는 싸움. 그런데 1차전에서 펑 첸 역시 그들 선배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았다. 아마 펑첸은 앞으로의 메이저 기전에서 4 강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상은 힘들 것이다.
세옹지마라고 했던가? 창하오는 그 의미를 다시금 새록새록 새기고 있을 것이다. 오랜 부진 끝에 최 고의 기회가 왔다. 그것도 두번 씩이나. 그것도 가장 돈되는 기전으로만 두개다. 이세돌에게는 자신 이 있을 것이고, 송태곤, 최철한에게는 사실 이세돌 보다 더 자신이 있을 것이다. 둘 중의 하나만 차 지하게 된다면 기세를 탈 수 있다. 유빈이 97년 우승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창하오는 실력만큼은 항상 최상이었다. 그가 앞으로 유창혁만큼(6번) 우승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번 두번의 기회를 그 가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달렸을 것이다.
* 바둑 대회는 다른 스포츠 대회와는 달리 연도별로 표시하기가 힘든 점이 있습니다. 가령, LG배는 매년 5~6월에 개최해서 이듬해 3~5월에 끝나고, 응씨배, 동양증권배 등도 해를 넘기는 일이 많기 때 문에 통계화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죠. 여기에서는 결승전이 끝나는 시점이 아니고 시작하는 시점을 중 심으로 연도를 잡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논거는 1996년에 LG배와 삼성배가 동시에 생겼는데 결승전이 해를 넘기느냐 아니냐에 따라 양자를 달리 잡는 것은 곤란한 것이 아닌가 해서 입 니다.
* 2004년은 8.31 현재까지 4강 진출자가 확정된 기전만을 통계에 잡았습니다(후17,응5,도2,춘5).
위의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아래에서 보는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거 해서 간단히 자료를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1. 1988~1991 : 일본 독주 시대, 한중에는 조훈현과 섭위평밖에 없었다.
1988년 후지츠배가 처음 시작되면서 세계 바둑팬들은 엄청난 기대에 부풀었습니다(저에게도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되었을 때와 같은 설레임으로 다가왔다는...). '과연 국내 전관왕 조훈현이 중일 고 수들의 벽을 허물고 조국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아마 그 당시 국내 바둑팬들의 초미 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현대바둑의 총아, 일본의 실력은 결코 허명이 아니였습니다. 비록 응씨배에서 조훈현이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하고 섭위평이 준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대회에서 한국은 조훈현, 중국은 섭위평이 아니면 4강에도 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자료에서 보시듯 이 기간동안 한국은 4번 (이중 조훈현이 3번), 중국은 4번(이중 섭위평이 3번), 일본은 12번 4강을 차지하면서 일본은 그 동 안 중일슈퍼대항전에서 너무나 심하게 구겨진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됩니다.
2. 1992~1995 : 한국의 4인방은 세계의 4인방, 어? 나도 있는데(마효춘 왈)
1992년이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받아왔던 국내바둑의 1인자, 언제 터질지 모 르는 핵탄두 이창호가 드디어 세계바둑계 정벌을 단행합니다. 더불어 유창혁도 나두나두를 외치며 열 강의 반열에 오르고, 야전 사령관 서봉수 역시 응씨배에서 우승하는 기적같은 업적을 기어코 달성하 고 3인방이 아니라 4인방임을 주장합니다. 조훈현은 명품은 오래가야 명품이듯이 꾸준한 성적으로 명 품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대륙에서는 마효춘이 슬슬 기지개를 펴면서 섭위평시대는 가고 나의 시대가 왔음을 알립니다(1995년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거푸 제패). 일본에서는 후지쯔배에서 오오다케가 노익장을 과시한 것을 마지 막으로 4강에는 꾸준히 들지만 우승과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위의 자료들에서 보시듯이 한국은 13번, 중국은 8번, 일본은 15번 4강을 차지하여 여전히 우 승은 못하지만 일본 바둑층이 가장 두텁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는 한국은 4인방 외에는, 중국 은 마,서,유소광 외에는(전우평은 바로 정신병으로 바둑계에서 사라지고, 예내위는 망명) 대안이 없 을 때 일본은 11명이 골고루 4강을 차지한 것을 볼 때 더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이었습니다.
3. 1996~1999 : 이창호 1인천하로 본격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다
1996년은 세계바둑사에 있어 중요한 획을 긋는 한해입니다. 즉, 그동안 응,동,후 이렇게 3개밖에 없 던 메이저기전에 LG와 삼성이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른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창호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 기간 열린 17개 기전에서 자그마치 9개를 휩쓸어버리고 히딩크 가 했던 명대사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를 말 없이 외칩니다. 곧, 요다가 일찍이 이창호를 알아보 고 했던 말인 세계가 이창호를 쫓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강 이창호, 명품 조훈현, 한방 유창혁 외에 서봉수는 퇴조 기미를 보이고, 최명훈을 제외 하고는 신예 발굴에 여전히 미흡하여(양재호,김승준,김영환이 이 기간 4강멤버쉽을 부여받지만 꾸준 한 성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중일 양국으로부터 '니들이 이조유 세명 말고 누가 있느냐'는 비아 냥을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이러한 비아냥을 불식시키고자 생겨난 대회가 롯데배 한중대항전입니다 만 성적이 신통찮아서 그 비아냥이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시켜 주고 4회를 끝으로 막을 내 리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이 기간 왕리청이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세계 열강에 당당히 진입하게 되고, 사토루 역 시 국제용으로 맹활약하게 되면서 고바야시는 고이치만 있는 게 아니라 사토루도 있다는 것을 실력으 로 보여줍니다. 조선진, 야마다와 같은 신예강호들도 언제든 출격할 기회만 주어지면 성적을 냈던 시 기이기도 하구요. 여전히 우승에는 2% 부족하였지만 꾸준한 성적으로 위의 비아냥을 무기삼아 위안, 또 위안한 시기가 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 괄목상대합니다. 앞의 기간까지 중일슈퍼대항전에서의 감격을 송두지째 잃어버리 고 바둑3등국가라는 불명예를 묵묵히 곱씹을 수밖에 없었던 중국은 야심찬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게 됩니다. 이름하여 6소룡!! 덤으로 유빈을 끼워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창하오는 가장 강력 한 신제품이 되어 시장을 교란하기 시작합니다. 매출 1위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2위인 일본을 강 력하게 위협하고 1위에게는 '니들도 그렇게 신제품 개발에 인색하다가는 곧 따라잡힌다'고 하면서 기 염을 토하던 시기입니다.
4. 새천년 그 이후 : 한중일 삼국지는 한중지로 이름을 바꾸는가?
1996년이 바둑에 있어 하드웨어를 바꾼 해였다면, 새천년은 바둑에 있어 소프트웨어를 바꾼 해였습니 다. 국내에서는 기존 강자 외에 서서히 국내 10강을 준비했으며(2003년에 이르러 10강 완성), 중국에 서는 더욱 강력한 신제품 10소호를 출품, 일본에서는 요다 외에 기존 강자들이 세력을 거의 잃어가 고 황금세대 4인방(그 중 한명인 다카오신지는 아직까지 헤매고 있지만...)이 그 자리를 조금씩 차지 하게 됩니다.
애써 헤드폰을 끼고 이조유 이조유만 소리 높여 외칠 뿐, 중일의 비아냥은 외면해왔던 국내 바둑계 는 드디어 신제품을 대량으로 출시합니다. 불량품이 많았던 6소룡, 10소호의 예를 밟지 않으려고 일 부러 그랬다는듯 하나같이 품질과 성능이 뛰어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다가 기존의 명품3인방 역 시 고스란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최근 조국수님이 급격히 쇠퇴해서 안타깝다는...). 결국, 10년을 넘게 그인물 그대로였으나 새천년이 되자마자 4강멤버쉽에 7명이나 등록시키고 이들은 시중에서 반짝하는 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 역시 6소룡으로 일본은 따라잡을 수 있으나 한국은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고 10소호를 조기 출 품하고 품질과 성능이 검증된 3검객을 잇따라 출시, 이것으로도 안될 것에 대비해 소묘? 그룹까지 준 비시켜 놓습니다. 아직은 매출1위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량 6소룡과 3검객은 가끔은 매출1위를 넘볼만큼 대륙을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간 한국과 같은 7명의 4강멤버쉽 등록. 그날이 멀지 않 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제품이 과연 초강력슈퍼울트라왕짱캡숑전투력의 이창호,이세돌을 능가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일본은 기타니도장의 조치훈,고바야시,다케미야,가토,오오다케,이시다,사토루 등의 7,80년대 황금세 대들이 그 빛을 다하면서 일본 바둑의 명운도 다한게 아닌가 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 껏 출품한 황금세대 4인방은 국내에서는 기대에 부흥하면서 세대교체에 나섰지만 정작 국제 무대에서 는 심하게는 호구소리까지 듣는 형편입니다. 이 기간 4강멤버쉽은 단 한 명.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 갈공명이 그랬던가요? 지금은 솔발의 정세인데 이 중 한 쪽이라도 무너지면 급격히 삼국간의 균형은 깨어지게 될 거라구요. 예전에 일본 고위관료가 그랬다고 합니다 "지금 세계화다 뭐다 해서 그동안 지켜온 전통문화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목숨바쳐 지켜야할 전통문화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스모요, 나머지 하나는 바둑이다"라구요. 일본바둑의 부활을 진심으로 기원합니 다.
본 글은 이광구 바둑칼럼니스트께서 월간바둑 2000년 11월호에 지령 400호를 기념해서 기고한 글입니다. 잠이 안와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잡은 책(심심할 때 보고 또 보고 하는 책이 월간바둑 과월호랍니다 ^^)을 보다가 재밌어서 글을 옮깁니다. 상업적 목적이 아니니 저작권을 가지신 월간바둑이나 이광구 님께서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본 글의 배경은 이창호9단이 저우허양9단에게 국제기전 3연패를 당하면서 혹시 이창호9단에게 문제 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됐으며, 자연스럽게 천적이야기와 앞으로 얼마나 세계정상을 지킬 것인가 하는 쪽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올봄 최철한8단에게 국수와 기성을 뺏긴 후 이제 정말 이창호시대는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 이 많이 나왔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불과했다는 것이 거의 증명된 것 같습니 다. 이런 상황은 2001년에 이세돌9단에게 LG배 결승을 2연패 하면서도 있었고, 2002년 이세돌9단이 이창호9단을 이기고 국제기전을 연전연패할 때도 있었죠. 그때마다 이창호9단은 묵묵히 실력으로 대 답했구요. 어떻게 보면 본 글은 약하긴 하지만 이들의 원류라고도 볼 수 있어서 4년이 지난 지금 보 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습니다.
(전략)
올해도 별 이변이야 있겠어? 아냐, 올해는 좀 다를 것 같아. 국내에선 그렇다 치더라도, 올해는, 세계대회 성적은 평년작 이하잖 아. 그러게, 후지츠배 하고 삼성화재배 두개를 이미 놓쳤잖아. 공교롭게도 모두 중국의 저우허양에게 져서 탈락했지? 작년에 이어 저우허양에게는 3연패를 당한 셈 이야. 아, 그런가. 저우허양이 이창호의 새로운 천적으로 부상하는 건가. 예전에는 일본의 요다가 이창호만 만나면 뭔 가 보여 주더니만. 맞아. 일단 전적상으로는 저우허양이 이창호의 새로운 천적으로 떠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저우허양이 그렇게 잘두나? 잘두니까 이기는 거겠지? 현재 중국의 제1인자라며? 창하오가 밀렸나? 밀렸다지. 호오? 어떤 친구야? 기풍은 어때? 별 특징은 없다고 하더군.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는 스타일이라는 것밖에는. 그리고 무지하게 침착 하다고 하더군.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페이스가 일정하고 무지하게 침착하다면 그건 바로 이창호 스타일 아냐? 그렇지. 이창호하고 비슷한 면이 많대. 그래서 이창호에게 성적을 내는 건가. 예전에 요다가 그랬듯이 말이야. 그러나 기량으로는, 아직 이창호보다 위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기사들의 중론이야. 그런데 어떻게 큰 승부에서 세번이나 연달아 이기는 거지. 우연인가? 글쎄, 우연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변수는 이창호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닐까. 심리적으로 말이야. 나도 그렇게 보는데. 작년에 한번 졌다, 별로 의식하지 않은 상대였는데 말이야. 그랬는데 올해 다 시 만났다. 이번에는 빚을 갚아 주겠다. 그렇게 마음먹다보니 조금 힘이 들어가고..., 뭐 그런 거 아 닐까.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분석이군. 하하. 이창호가 누구한테 한두 판 계속 졌다고 그걸 의식하겠어? 그런 차원은 이미 졸업한 거 아냐. 그렇지. 그런 얘기는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끼리 얘기를 위한 얘기로 떠드는 의견 아니겠어.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이창호가 누군데, 어느 특정 상대를 만났다고 새삼 어깨에 힘 이 들어가고 그러겠어.
<저우허양은 새로운 천적인가?>
저우허양에게 올해 두번 지고, 또 얼마 전에는 국내 기전인 LG정유배에서 루이나이웨이한테 졌지. 이걸 두고 이창호도 이제 흔들리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흔들리기는 뭐가 흔들려. 아마추어적 발상이지. 그게 아니라면 바둑 기사 쓸 게 없으니까, 일부러 띄워보는 소리든지. 프로기사들에게 물어봐. 저우허양에게 작년부터 지금까지 3연패를 당하고 루이한 테도 재미를 못 보고 있다, 이창호가 흔들리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열이면 열, 전부들 웃고 말더 군. 논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지. 이창호 본인은 어떻대? 지난번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어. 루이나 저우허양이 정말 세냐고? 그랬더니? 이창호가 언제 길게 얘기하는 거 봤어. 그냥 웃더군. 웃고 말어? 그런데 웃음이 밝더란 말이지. 이창호는 보통 의전적으로 마지못해 웃는 적이 많은데, 그때 웃음은 밝더라구. 아니라는 뜻이지. 조훈현9단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조9단이 스승이라서만 은 아닐 거야, 물어 보면 항상, 강하시다고, 길게 얘기하지 않는 것은 똑같지만, 분명히 말해 주거 든. 루이나 저우허양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에는 웃음으로 부인한다 이거지?
(중략)
<이창호시대는 얼마나 갈까?>
이창호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군림할까? 하하하... 왜 웃지? 10년 전에도 우리 똑같은 얘기 한 거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지? 그랬나, 하하. 조훈현의 시대는 앞으로 얼마나 갈 것인가. 허구헌 날 그게 주제였잖아. 그랬지. 70년대 후반부터 이창호, 유창혁이 등장한 80년대 후반까지니까, 10년 동안이나 똑같은 얘 기를 되풀이했었지. 그땐 참, 조9단의 시대는 영원할 것 같았지. 늙어서 이빨이 죄 빠질 때까지 독야청청할 것 같았지. 그래도 그때는 서봉수가 있었어. 비록 제법 큰 차이로 밀리긴 했지만, 그 불사조 같은 투혼이 바둑 계의 드라마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단 말이야.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았지. 그에 비해 요즘은 좀 심심한 감이 있지. 서봉수9단처럼 악착같이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상대가 없 어. 유창혁은 세계대회 큰 승부 쪽에 치중하느라, 국내 기전에 대해서는 대범한 면을 보이고 있고. 그때는 요즘 같은 세계대회가 없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음, 그렇기도 하겠군. 그나저나 10년이란 게 묘한 세월이야. 글쎄 말이야.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9단의 시대도 결국은 10년 세도로 막을 내렸고, 그 런 걸 생각하면, 지금은, 지금 같아서는 예전의 조9단보다 더 오래오래 장기집권을 할 것 같은 이창 호지만, 이창호도 혹시 우리가 전혀 상상못했던 어떤 새로운 강자에게 무너질지 모른다는 기대 아닌 기대가 가능하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누굴까. 금방 말했잖아. 아마도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곳에서 튀어나올 가능성이 많다구. 이세돌은 아닐까. 모르지. 현재로선,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창호의 대항마를 꼽으라면 이세돌 아니겠어? 이세돌이 얼마나 빨리 뭔가를 보여 주느냐가 문제겠지. 1~2년 안에 이창호와 필적하게 된다면 모르 지만, 10년쯤 더 있다가 이창호를 꺾는다면, 그때는 이미 라이벌의 의미는 사라지고, 아까 말했던 것 처럼 후계자가 되는 거지. 또 앞으로 10년이면, 그동안 이세돌을 능가하는 기재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야. 저우허양이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면? 저우허양? 저우허양은 이창호를 넘어서지 못할 거야. 왜? 조금 아까 그런 얘기들이 있었잖아? 저우허양이 이창호와 비슷한 면이 있다구. 그랬지. 바로 그거야. 이창호와 비슷한 구질이어서 이창호를 몇번 이길 수는 있겠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 에, 이창호와 비슷하다는 그것 때문에 결국은 이창호를 극복하기 힘들 거란 말이지. 이창호보다 늦 게 나타났는데 이창호와 비슷한 구질이라면, 요컨대 좀 심하게 말하면 이창호 아류라는 얘긴데, 아류 로서는 본류를 이길 수가 없는 거지. 아류가 본류를 이기는 거 봤어. 패자 교대는 상극의 원리, 변증 법의 원리지. 어느 분야든 똑같은 류, 똑같은 스타일이 계속 지배하는 거 봤어. 바둑계도 그래. 역사 를 돌이켜봐. 타이틀의 역사가 제일 깊은 일본을 위시해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어느 나라나 똑같은 스타일이 계속 1인자로 군림하는 거 못봤지? 쉽게 말해 한번은 두터움, 다음은 실리, 한번은 전투, 다음은 계산, 한번은 가볍고 빠른 자, 다음은 무겁고 느린 자... 그런 패턴의 연속이었잖아. 동감이야. 조훈현을 이기려면 이창호류여야 했듯이, 이창호를 이기려면 이창호와는 전혀 다른 스타 일이어야 하지. 이창호류로 이창호를 이기기는 어렵지. 이창호는 이미 정점에 가 있거든. 똑같은 무 기로 어떻게 훨씬 앞질러 정점에 서 있는 자를 쓰러뜨릴 수 있겠어. 그럼 이세돌이네. 그 얘기는 좀 전에 했잖아. 이번에도 우리는 세월의 힘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긴가. '10년'이라는 세월의 단위가 갖는 불가 사의한 힘? 시간의 의미도 요새는 많이 변했잖아? 20세기의 10년과 21세기의 10년은 다를 것 아냐. 모든 것이 광속을 향해 치닫고 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어려워서 모르겠군. 어쨌든 그렇다면 올해도 바둑 노벨상은 이창혼가? 하나 변수가 남아 있잖아? 응씨배.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그냥 응창기배라고 하지. 중국발음을 따라 잉창치배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아. 맞아. 중국발음은 그냥 한국식으로 했으면 좋겠어. 네 웨이핑이니 장 쩌민이니 주룽지니 그거 어색 해. 저우허양, 루이나이웨이도 마찬가지고... 이창호하고 창하오가 결승에 올라갔지. 아니, 상호가...,창하오는 상호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창하 오라고 하는 것도 괜찮은데..., 하하. 대신 창하오가 이긴다면 그야말로 노벨상감이지. 한국의 4연패를 저지하면서, 설립자 잉창치, 응창 기 선생의 유지를 빛내는 거니까. 그러나 창하오는 더 어렵겠지. 안 될 거야, 이창호한테는. 이창호가 응씨배를 노리고 있겠지. 노리겠지. 4인방 가운데 자기만 차지해 보지 못했으니까. 아, 이창호가 올해는 응씨배 하나만 하자고 계획을 세워 놓은 것 아닐까. 맞아, 그럴지도 몰라.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야, 이창호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이창호가 언제는 우리 상식 안에 있었나. 하하... 하긴 이창호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장기 계획을 세우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이, 체력 안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이창호가 뭐, 돈이 아쉽겠어, 명예가 아쉽겠어. 요즘은 대국이 없는 날이면 테니스를 어떤 때는 두 시간 이상 친다고 하던데. 그래서 살이 그렇게 빠졌군. 응, 요새는 날씬해. 아쉬운 게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뭔데? 알면서 뭘 묻나.
바둑대상 시상식이 열린다. 당연히 관심의 초점은 바둑대상 MVP. 연말 이 바 닥에서 제법 말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최박(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빅4의 대 혼전이라고들 한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까지 바둑상 시상식은 1978년 기도문화상(지금의 바둑대상이라고 보면 되겠다)이라는 것이 생기 게 된 이래로 최우수 기사상은 1990년까지는 조훈현, 이후로는 이창호라는 절대강자의 독주 속에 이 들 양강의 일각을 인상깊게 허문 기사가 존재하면 전체적인 성적과는 다소 무관하게 그에게 최우수 기사상을 수여하였다. 1990년 조훈현 독재의 끝물에 샛별처럼 떠오른 이창호가 그랬고, 이창호 태평 천하에 진로배 9연승의 서봉수가, 첫 후지츠배 우승이라고 유창혁이, 철의 4인방 시절 32연승을 기록 했다고 기특해서 이세돌이, 작년에는 이창호를 5번기에서 두번이나 연속으로 이창호를 쓰러뜨렸다고 최철한이 수상한 것이 그 면면들이다. 꼼꼼히 따져보면 당해 이들이 수상한 해의 절대강자들(조훈현, 이창호)의 성적이 수상자들보다 전체적으로 훨씬 내지는 상당히 앞선 것은 물론이다.
과거의 수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과거의 수상은 꽤나 공정했고 타당했 다고 생각한다. 잘못이 있다면 한국 바둑계의 특이한 흐름, 즉, 절대강자가 십수년간 독주했던 구도 에 그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떨까? 먼저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현재 한국바둑계에 과거와 같은 절대강자가 존 재하는가? 필자의 추측으로는 부정적인 대답이 압도적일 것이라 생각된다. 1991년부터 시작된 이창 호 체제는 과거 조훈현 체제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이창호로 인해 갑작스럽게 허물어진 것과는 달리 2000년 무렵부터 중국의 신예기사들에게 조금씩 상처를 입기 시작해서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등으 로부터 시나브로 그 위치를 잠식당하고 있다. 해서 현재로도 여전히 1위(여기에조차 이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임에는 틀림없으나 과거와 같은 '독보적인' 1인자의 위치는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 다. 즉, 이창호 역시 다른 기사들과 같은 경쟁구도에 들어왔다는 것이고, 과거와 같은 역프리미엄은 지금에 와서는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이제는 MVP의 시상이 정말 그 단어의 원래 의미에 맞는 시상이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MOST IMPRESSIVE PERSON'이 아니라 'MOST VALUABLE PERSON', 다시 말해 가장 인상깊은 성적을 남긴 기사 가 아니라 가장 가치있는 내지는 가장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기사가 MVP를 받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 다. 그러면 과연 2005년에 누가 MVP에 가장 근접한 성적을 거두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이최박'의 2005년 주요 성적을 보기로 한다.
기사명 주요 성적(국제) 주요 성적(국내) 이창호 농심배 5연승,춘란배 2연패 왕위,왕중왕,바둑왕전 우승(왕위 10연패) 삼성배 결승진출 GS칼텍스배,48기 국수전,물가정보배 준우승 십단전 결승진출,49기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진출 이세돌 도요타,후지츠배 우승 49기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진출,맥심배 우승 CSK배 3연승,중환배 준우승 최철한 응씨,후지츠배 준우승 GS칼텍스배, 국수전 우승 2회 중환배 우승,CSK배 3연승 왕중왕,기성전 준우승 일월성배 4연승 박영훈 1회 중환배 우승 바둑리그 9연승,기성/물가정보/영남일보배 우승 신인왕전 우승
바로 이어서 이들의 개략적인 총 상금과 총 전적을 보자.
기사명 상금(백만) 종합 승패 종합 승률 비고 이창호 516 51승 24패 68% 상금 2위 이세돌 545 61승 21패 74.39% 상금 1위, 승률 1위 최철한 443 66승 33패 66.67% 다승, 최다대국 1위 박영훈 250 61승 29패 67.77% 최다대국 3위
** 상금은 필자가 추정한 것으로 실제 상금은 위에 기록된 상금보다 조금씩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기록들을 평면적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박빙 속에 국제기전 타이틀을 3개씩이나 보유하 고 있고, 상금 1위인 이세돌이 근소한 우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MVP와 관련한 각종 분석 기사들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좀더 들어가 보자.
이이최박의 2005년 기전별 성적
대회명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응씨배 2004 2004 준우승 2004 도요타배 2004 우승 2004 2004 LG배 9회 10회 9회 10회 9회 10회 9회 10회 4강 16강 2004 4강 2004 32강 2004 16강 삼성배 결승진출중 8강 4강 32강 춘란배 우승 2004 2004 2004 후지츠배 16강 우승 준우승 16강
CSK배 2승1패 3승 3승 2승1패 농심배 4승 2004 2004 2004 일월성배 불참 불참 4승 1승3패
중환배 1회 2회 1회 2회 1회 2회 1회 2회 4강 16강 2004 준우승 2004 우승 우승 16강 TV아시아 1회전탈락 한중천원 준우승 한중신인왕 준우승
바둑리그 4승4패 3승4패 7승4패 9승 바둑삼국지 1패 불참 4승1패 1승1패
GS칼텍스 준우승 예선탈락 우승 4강 왕위 우승 8강 예선탈락 예선탈락 왕중왕 우승 8강 준우승 예선탈락 국수 48기 49기 48기 49기 48기 49기 48기 49기 준우승 도결중 2004 도결중 우승 타이틀 2004 예선탈락 기성 16기 17기 16기 17기 16기 17기 16기 17기 불참 불참 2004 4강진출중 준우승 16강 우승 타이틀 십단 결승진출 8강 4강 결승진출 바둑왕 우승 1회전탈락 대략 16강 대략 4강 천원 불참 16강 16강 8강
물가정보 준우승 1회전탈락 4강 우승 영남일보 1회전탈락 4강 못참 우승 신인왕 못참 못참 불참 우승 맥심 불참 우승 2004 4강
** 2004라고 표시한 부분은 2004년에 대회가 시작하여 2005년 상반기에 우승자가 결정난 대회에
서 2004년에 이미 탈락하였다는 것을 말함
개최된 대회가 워낙 많아 상당한 내공(?)을 가지지 않고는 보기조차 힘들겠지만 대략 요약한다면 이 세돌은 국제기전에서만 발군의 활약을, 박영훈은 한국바둑리그에서의 놀라운 성적과 물가정보,영남일 보,신인왕전과 같은 마이너 국내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음을 알 수 있고, 최철한은 국제,국내대회 를 넘나들며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지만 중요한 대회의 마지막 순간에서 여러번 분루를 삼킨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창호 9단은 농심배 5연승의 기적과 춘란배 2연패라는 찬란한 업적을 남겼지 만 전반적으로 국제대회에서 부진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국내대회에서는 참가한 모든 대회(이벤트 기 전이라 할 수 있는 영남일보배 제외)에서 결승에 오르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이번에는 이들의 2005년 성적을 다른 각도에서 인수분해해 보기로 하자.
기사명 국제기전 MAJOR TEAM MINOR 종합 이창호 8승5패 6승1패 3패 14승9패 이세돌 12승3패 3승 3승1패 18승4패 최철한 7승6패 7승 5승2패 19승8패 박영훈 1승3패 3승4패 3승3패 7승10패
* MAJOR - 응씨, 도요타, LG, 삼성, 후지츠, 춘란
* TEAM - CSK배, 농심배, 한중일월성배
* MINOR - 중환배, TV아시아선수권, 한중천원, 한중신인왕
기사명 국내기전 실제 종합 기타 MAJOR TEAM MINOR 예선 국내종합 이창호 28승7패 4승5패 5승3패 없음 37승15패 46승20패 남방장성배 4패빅 무승부 이세돌 12승7패 4승4패 6승5패 21승1패 43승17패 34승15패 갑조리그 3승1패 최철한 19승12패 11승5패 8승6패 9승2패 47승25패 45승24패 박영훈 18승6패 10승1패 17승7패 9승5패 54승19패 35승16패 국제신예대항전 3승
** MAJOR - GS칼텍스, 왕위, 왕중왕, 국수, 기성, 십단, 바둑왕, 천원
** TEAM - 한국바둑리그, 바둑삼국지
** MINOR - 물가정보, 신인왕, 영남일보, 맥심, 마스터즈 전신, 마스터즈 제왕
** 기타 - 공식대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의미있는 성적
*** 실제 종합 : 중요한 대국에서의 성적만 임의로 추출하여 종합한 성적으로,
국제기전에서의 성적, 국내기전 MAJOR기전 성적과 국내 단체전중 한국바둑리그
성적을 종합하여 산출한 성적(앞으로 중요한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제 종합해서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이창호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나 이창호의 올해 가장 값진 기록은 농심배 5연승(이전 기록까지 합치면 14연승)으로 한국의 6회 연속 농심배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고, 국내대회에서는 이벤 트기전인 영남일보배를 제외하고는 참여한 모든 개인 기전에서 결승전에 올랐다는 것이다. 또한 예 선 대국이 하나도 없고 기성,천원,일월성배 등 많은 대회에서 불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대국 만을 따로 추출한 실제전적 종합에서 승률, 다승 1위와 최다대국 2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 론 춘란배 2연패, 왕위전 10연패,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성적.
단점으로는 전반적으로 국제기전에서 부진하였다는 것(연초에 유빈, 왕리청에게 연패를 당한 것과
몇몇 중요 국제 대국에서 초반에 탈락하였다는 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임)과 연초 국수전에서 최철 한에게 완패한 것과 연말 국내 1위기전 GS칼텍스배에서 역시 최철한에게 2연승 후 3연패 한 것 역시 그늘이 될 것이며, 한국바둑리그에서의 상대적인 부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 이세돌
이세돌의 성적은 뭐니뭐니해도 국제기전에서의 끔찍한 활약이다. 외국기사 상대 25연승(이전 기록은 이창호의 21연승), 국제대회 17연승(최고 기록은 이창호의 22연승) 정도만 하더라도 그가 올해 국제 기전에서 얼마 만큼의 포스를 발휘했는지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연승을 하는 와중 에 2004년 연말 삼성배를 시작으로 도요타배, 후지츠배를 석권하였다. 부수적인 결과물은 상금, 아 직 정확하게 집계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추정한 바에 의하면 이창호를 제치고 처음으로 상금 랭킹 1 위에 등극할 전망, 승률 1위 역시 이세돌로서는 처음 차지하는 타이틀.
그러나, 이세돌은 빛이 밝은 만큼 그 이면에 그늘도 넓게 드리워있다. 제일 먼저 국제기전에서 흥한 만큼 국제기전에서 크나큰 아픔을 맛보았다. 중국 1인자 구리와의 LG배 4강전, 국제기전에서 1년여 동안 이어가던 연승 행진도 중요했지만 한국기사로는 4강에 홀로 남은 만큼 져서는 안될 대국이었 다. 그러나 구리에게 결국 패함으로서 조이 사제가 십년여동안 이어가던 혼자 남았을 때 더 강인했 던 전통을 잇지 못했다. 이후 각종 국내외 대국에서 부진을 거듭한 것은 그만큼 패배의 충격이 컸음 이리라.
국내대회에서의 부진도 눈에 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기전에서 결승 무대에 도 한번 서지 못했다는 것은 평가를 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흠이다. 그가 우승한 맥심배는 제한 기 전일 뿐만 아니라 주요 참가 기사가 그를 포함하여 박영훈, 유창혁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승률 1위 또한 의미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그 밑바탕이 된 성적은 예선 전적이었다(22승 1패).
3. 최철한
최철한의 2005년은 3전 4기의 홍수환 정신,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정신으로 똘똘 무장한 한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그가 앞으로 상당 기간 국내 최정상급 기사로 활약 할 것이라 생각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 생각된다). 연초 응씨배에서의 좌절과 동갑내기 박영훈에게 기성전을 내어주면서 부진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후지츠배, CSK배, 일월성배로 이어진 국제기전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후지츠배에서 이세 돌, 왕중왕전에서 이창호, 한중천원전에서는 작년의 패배로 벼르고 있던 구리에게 또다시 역전패를 당하면서 우울한 여름을 보냈지만 곧 중환배에서 이세돌을 다시 만나 설욕을 하고 얼마 전에는 이창 호에게 국내 1위기전인 GS칼텍스배에서 2연패 후 3연승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삼 성배 4강전에서 뤄시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한국바둑리그 결승전에서 박영훈에게 내리 패하 면서 2005년을 씁쓸하게 마무리 하였다.
결국 꾸준히 성적은 좋았지만 항상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중환배를 거머쥐었다고는 하나 실리적으 로 GS칼텍스배 우승만도 못한 결과였고, 년초에 창하오, 년중에 구리, 년말에 뤄시허에게 당한 패배 는 아직 그가 한국의 에이스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결과였다. 또한 이창호는 넘어섰지 만 새로이 박영훈이 그를 막아서고 있고 이세돌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 결정적으로 아직도 세계 메이저대회 우승 타이틀이 없다는 것은 그와 힘겨운 승부를 거듭 하고 있는 이창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4. 박영훈
만약 필자에게 2005년 MIP(Most Impressive Person)를 뽑으라면 농심배 5연승 신화의 이창호, 국제기 전 불패의 현상객 이세돌,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창호 킬러 최철한도 아닌 박영훈 을 뽑겠다. 다들 엄청난 사연의 주인공들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박영훈만 은 못했다는 생각이다.
박영훈은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최철한 보다 훨씬 뛰어난 국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이최 와는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는 4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핵심에는 일반적으로 이창호를 한 번도 넘 어서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또한 필자가 추가하고 싶은 이유는 국제대회에서 우승은 몇 번 했지 만 이상하리만큼 요리조리 한중의 강자들을 피하고 한 우승이라는 것과 최정상 반열에 선 기사 중 유 일하게 속기에 약하다는 것이었다(바둑 역사상 속기 약한 정상급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실제 로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의 속기전 성적은 2시간 이상 바둑에 비해 승률이 비슷하거나 더 높은데 비해 박영훈은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속기 성적은 60% 초반대 승률, 2시간 이상 바둑은 70% 초반대 승 률을 보였다. 그것을 올해 대표적 속기전이라 할 수 있는 한국바둑리그에서 초절정 기량의 상대들만 을 만나 9연승 한 것으로 말끔히 극복해내었다. 또한 속기 기전인 물가정보배에서 최강의 속기제왕 이창호를 상대로 2:0으로 영봉시킨 것도 하나의 방증.
박영훈 찬가를 좀더 소리높여 외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이최와의 상대 전적이다.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무려 13승 4패를 거두었다. 이창호에게 3승, 이세돌에게 3승 1패, 최철 한에게 7승 3패. 4명만의 전적으로만 보면 박영훈이 최강이다. 아무튼 표면적인 성적보다는 그가 한 꺼풀 더 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잘 하기는 하지만 최강을 만나면 글쎄라는 평가를 올 한 해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성적으로만 본다면 풍성한 듯 보이지만 알맹이가 별로 없다. 국제기전에서는 연초 중 환배 초대 챔피언이 된 이후로는 나갔다 하면 바로 짐을 싸서 돌아와야 했고, 국내기전에서도 기성전 에서 동갑내기 라이벌 최철한에게 타이틀을 빼앗아 오는 혁혁한 전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실제 중요 한 국내 메이저기전에서는 줄줄이 미끌어지고 빛 좋은 개살구인 물가정보배, 신인왕전, 영남일보배 와 같은 타이틀만 잔뜩 가져왔다(이들 기전에서는 우승해도 세계기전 진출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물 론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한 한국바둑리그 9연승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모두 가져다 준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둑리그 MVP라 해서 바둑대상에서도 MVP를 받기에는 바둑리그 의 비중이 전체 바둑대회의 규모에 비해 너무나 적어 보인다. 아무튼 2006년에 기대되는 한 명을 꼽 으라면 필자는 박영훈 이름 석자를 꼽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이최박의 상대전적과 이들의 올해 속기전 성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부디 올해는 MIP 가 아닌 MVP를 보고 싶다.
어버린 술국을 다시 시키는 것도, 심지어 비어 있는 술잔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이도 항상 그의 몫
이다. 그때마다 잠깐씩 얼굴이 화끈거리기만 할 뿐, 조금도 개선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바둑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애꿏은 술잔과만 친하게 지내던 나의 입이 다른 기
능을 발휘할 무렵이다. 단연 최근에 벌어진 삼성화재배에서 구리와의 대국이 초점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너무 좋은 바둑이라 조금씩 조금씩 양보하다가 반집만 이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질 뻔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 마지막 끝내기에서 구리가 실수하지만 않았더라면 반집
에 분루를 삼켰을 사람은 자신이었단다. 최근에 초중반까지 많이 좋았던 바둑을 마지막에 역전당하
는 일이 많아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란다.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드문드문 이제 갓 서른 먹은
청년의 모습이 아닌, 환갑에 가까운 바둑 나이가 느껴진다. 안타깝다.
각종 기록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혼자 남았을 때(다른 한국기사는 모두 떨어졌을 때)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특히 8월에 강한 이유는, 일본에서의 성적과 중국에서
의 성적이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유가 뭔지 등등 재빨리 먹이를 낚아채듯 나의 질문은 끝
도 없이 이어진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아, 그런가요?",
"글쎄요...", "우연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라 작정하고 제법 다그치기로 한다. 이제
서야 조금씩 그나마 답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얻게 된다. 물론 제법 시간의 간격을 거쳐서 말이다.
"아무래도 부담이 클수록 성적은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괴롭지만..."
"이상하게 일본에 가면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와중에 농담도 한 마디 던지고 예의 쑥스러움을 잔득 머금은 옅은 미소를 내비친다.
"근데, 몰랐는데 아르마다님이 8월에 강하다고 한 후부터는 8월에 성적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허걱~~~~ 무심코 던진 돌맹이 하나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더니 딱 그꼴이다. 사실 몇 달 전부터 고
민하던 부분이었다. 이상하게 이창호 9단의 대국 전에 그 대국과 관련한 과거 통계를 기반으로 글을
쓰면 잘 졌었다. 민망하게도 말이다. 그럴 땐 며칠 어딘가에 잠적하고 싶을 정도로 참담하지만 꼭
나무 뒤에 머리만 가리면 자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꿩이 생각나 이내 생각을 접고는 했다.
갑자기 옆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주인 아주머니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정네
한 분이 싱글거리며 예의바르게 서 있었다. 순간 사인받으러 온 것임을 직감했고 그 예감은 당연히
적중했다. 그와는 어디엘 가나 늘상 있어왔던 일이라 처음 겪었을 때의 흐뭇한 마음은 이제 그 농도
가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았다. 조금 차이가 났다면 그 분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로도 세 번이
나 더 우리 일행의 말허리를 끊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 장 더 해주셨으면 한
다는 것이었고, 또 한 번은 사진도 같이 찍고 싶다는 부탁, 마지막 한 번은 불찰로 사진이 안 나와서
그러니 다시 한 장 부탁한다며 여전히 기분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그럴때마다 이창
호 9단은 싫은 내색 한 번 없다. 그저 묵묵히 투박하지만 정겨운 그만의 사인을 하거나 사진을 찍자
는 팬들 옆에 말 없이 선다.
사실 나는 이창호 9단 팬이 아니었다. 이십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바둑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
무 재밌어서 '바둑'팬이 되었을 뿐이다.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이
감동이었고, 1년에 네 판만 두겠다며 일갈하던 괴물 후지사와의 기행이 낭만으로, 그 후지사와가 어
느날 보고싶다며 술 한병만 달랑 차고 현해탄을 건너게 했다던 바둑황제 조훈현이 자랑스러웠었다.
그 뿐인가? 십번기의 오청원, 앙숙 관계인 지하철 고바야시와 우주류 다케미야, 미학 오오다케와 대
마킬러 가토, 면도날 사카다와 이중허리 임해봉... 그 한명한명의 이야기가 삼국지에 나오는 그 무수
한 인물열전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다. 딱히 누가 제일 좋다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드라마
틱한 장면을 남겼던 조치훈이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소년이 나타나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그 영웅들을 차례차례로 제압하며 천하
를 제패했을 때만 해도 노트에 혼자서 그의 성적을 기록하며 정말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지(이런 기
록을 실제로 계속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얼마나 경이로운지...) 내가 그의 진심어린 팬이 되리
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근저에는 역설적으로 그가 바둑실력 다음으로, 어쩌면 바둑실력 이상
으로 평가받는 그의 인품에 있었다. 직접 보고 느껴보지 않은 이상 일개 바둑팬인 나로서는 그를 접
할 기회가 활자매체가 거의 전부였던 시절, 그 활자매체를 전달하는 화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칭송받
을만한 인품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화자를 통해 활자를 전달받는 나로서는 별다른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현대바둑이 일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영향
은 당연히 우리의 바둑문화에도 깊숙히 침투하여 일본 고유의 '기쿠바리문화'(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진심과는 다르게 말을 하는 문화)도 전해져 우리의 '예'라는 전통과 뒤섞여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대부분 바둑기사의 다소 따분하게 느껴지는 인터뷰에서 비롯되었고, 소년의 경우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었다. 더구나 백발이 성성한 바둑판에 '소년'인 다음에야...
정확히 작년 8월 15일이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난 날이다. 바둑리그가 끝이 나고 늦은 밤 10명 남짓
한 팬들과 호프집으로 향했다. 혼자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조용한 곳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오기까지
자리를 재배치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의자를 옮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의자 옮기는 것을
도우려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였다.
나는 그 때부터 그의 팬이 되었다. 그러고는 매번 만날때마다 형식은 바뀌지만 일개 바둑팬을 위해
의자 옮기는 것을 돕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당연히 처음의 느낌은 만날 때마다 누적이 되어 지금은
일개팬이라고 하기엔 내가 성이 차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 나는 그에게서 그가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으로 보이는 옛 성현들의, 생쌀같이 씹히
지 않던 무수한 구구절절 옳은 말씀들을 조금씩 맛을 느끼며 다시금 배운다.
뱀다리 : 글을 쓰다 보니 야그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네요. -_-;; 깊은 밤이라 그런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 진지 모드로 오바한 느낌인데... 혹 낼 아침에 삭제하고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군대에 있을 때 밤에 연애편지 쓰고 아침에 북북 찢던 기억이...
암튼 3편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대화모드로 진행할 예정이라네요. ^^
이창호 9단의 주량은 소주 한 병 플러스 한 잔이다. 그러니까 아주 술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남들과는 적당히 어울릴 만큼의 술 실력은 갖춘 것이 된다. 다만 술을 어느 정도 해야되는 자리라고
생각이 들면 1차로 항상 산사춘을 주문한다. 도수가 낮은 술에서 높은 술로 옮겨가야 머리가 덜 아프
기 때문이란다. 전국의 대부분 갑남이와 을녀도 그러하다며 좋은 습관이라 한 마디씩 거든다.
이제 그만의 1차 전용술인 산사춘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술이 제법 얼큰하게 올라온 터라 전날
과음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며 과감하게 소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통보성 의사 타진을 한다.
전부터 궁금했던 요다 이야기를 꺼냈다.
"요다랑은 친하시다면서요?"
"몇 번 따로 술자리를 같이 한 것 같아요. 주로 류시훈 사범님 주선으로 바에서 만났어요"
"요다와의 5번기에서 패했는데요. 이긴 대국을 포함해서 내용이 모두 안 좋았다고 하던데요?"
"요다가 초반이 너무 탄탄해서요. 초반에 손해를 많이 봐서 계속 힘들게 따라가는 바둑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조국수님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패의 전적이었는데 번기에서 그렇게 4국 모두 안 좋았다
는게 이해가 안되는 측면이 있어요"
"... 결과적으로는 많이 이겼지만 당시에는 내용이 안 좋은 바둑이 많았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국에서는 초중반이 불리해도 참으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면 상대가
실수를 해서 따라붙고는 했는데 요다는 실수가 적은 바둑이라..."
"..."
"요다 같은 기풍이 당시 한국 기사 중에는 거의 없었죠? 특히나 센 기사 중에서는요?"
"...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부담도 많이 됐을 것 같은데요?"
"당시에 미스매치라는 이야기도 많아서 부담이 된 건 사실이겠죠. 해외대국이기도 하고..."
"사범님 바둑사를 볼 때 국가적 명예를 건 중요한 시합에서 진 건 유일무이한 것 같은데 다르게 뼈
아픈 대국이 있었나요?"
"... 제가 져도 다른 한국기사 분들이 주로 우승한 것 같으니까... 그걸 뺀다면... ... 특별히 생각
나는 대국은..."
"지고 나서 어땠어요? 너무 곤란한 질문인가요? 하하"
"... ... ... ... 제가 못 둔 것도 있지만 요다가 잘 뒀으니까... 많이 배웠어요.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요다가 조국수님이랑은 안 좋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데요. 가령 조국수님의 흥얼거림에 요다가
귀마개를 한다던가 하는... 사범님과는 어땠나요? 신경전이라고 할 만한 게... 거 왜 장작패기 있
잖아요"
"기세를 중시한다고 들었으니까요. 중요한 대국이기도 하고 해서... 특별히 신경에 거슬린 건 없었
던 것 같아요"
"5번기 당시에는 초면이었는데 그런 걸 몰랐을 거 아니에요"
"아, 처음에는 깜짝 놀랐죠"
"하하하, 이후로도 대국을 많이 했었는데 계속 장작을 패던가요?"
"... 잘 생각이 안나는데... 안 그런 것 같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요다가 일본에서 2차전을 치를 때 삭발을 하고 나왔었는데 기분이 어떻든가요?"
".. 그랬네요. ... 왜 그랬대요?"
"제가 알기로는 사범님과의 2국에서 좋은 바둑을 어이 없이 졌던 것과 최근에 중요한 대국에서 조
치훈 9단에게 역전패한 것 때문이라고..."
"..."
"암튼 5번기에서 지고나서 이후로도 많이 지시다가 응씨배에서 역전승한 이후로 5연승을 거두면서
조금씩 천적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데 전환점이 된 대국이라도 있었나요?"
"연승, 연패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구요. 승부에서는 늘상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처음
에는 요다가 공격적인 기풍인 줄 알았는데 둬 보니까 기초가 잘 닦인 탄탄한 바둑이더라구요. 오히
려 전투 쪽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건 나중에 알았으니까..."
"하하, 외모나 기세 때문에 오해하신 거군요. 암튼 알고 나서는 적응이 점점 되면서 승부도 좋아진
것 같다는 말씀 정도로..."
어느덧 마감을 알린다. 이 곳은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아야 한단다. 이제 만난 지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2차를 기약한다.
"사범님, 2차 괜찮으시죠?"
"오늘은 각오하고 나왔어요"
예의 쑥스러운듯한 미소를 흘린다.
이번 삼성화재배가 벌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필자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올해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양 "李"의 대결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 바둑사의 한 획을 긋는 大승부를 몸소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필자가 생각하는 세계바둑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던 3대 승부
(1988년 국제대회 이후)를 그저 간접경험으로만 접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그 짜릿함을 직접 느낄
수 있다면 삶에 있어 이만한 재미도 없으리라는 소박함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다소 빠른 감은
있지만 이 글은 필자의 소박한 바람에서부터 출발한다.
1988년 4월 후지츠배를 첫 신호탄으로 본격 세계 대회가 열린 이래 첫 환희는 현대 바둑의 메카 일
본의 양웅 고바야시, 조치훈도 아니었고 실제 세계대회를 가능하게 했던 중국의 영웅 섭위평도, 응
씨배를 창설했던 고 잉창치씨가 우승을 바랐던 임해봉도 아니라 당시까지 바둑 3류국에 불과했던
한국의 절대 황제 조훈현이 맛보게 된다. 물론 '바둑한국'의 모든 빛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이후
강렬한 맛은 없었으나(우승은 한 번밖에 없다) 항상 꾸준함으로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른 이가 이중
허리 임해봉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이나 항상 대회가 열리면 마지막 남은 빅4의 자리
중 한 자리는 그가 차지했다.
1991년 가을, 이제 막 열 여섯살을 신고한 홍안의 소년과 곧 지천명을 바라보는 넉넉한 풍모의 아
저씨는 가혹한 승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5번기를 시작한다. 지금이야 십대의 정상급 기사가 전
혀 낯설지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혁명적인 일, 대부분 낮설어하고 어떤 이는 못마땅해하기까지
하였다. 마흔이 돼야 바둑을 안다고 했던가? 그 말이 임해봉과 조치훈의 20대 명인에서 깨지긴 했
지만 여전히 바둑은 경륜이 어느 정도는 쌓여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런데 열여섯이라니...
소년이 이겨버렸다. 그렇게 두번째 세계바둑사는 씌어진다. 다음해 이번에는 조치훈이 검증을 하려
들지만 이상하게, 또 이상하게 지고 또 진다. 승부에 목숨을 건다는 조치훈은 졌지만 이상하다는 말
만 남기고 쓸쓸히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는 마효춘, 계속되는 일본의 난조와 이창호의 부진을 틈타 전해 세계타이틀을 싹쓸이했던
조훈현을 꺾고 마효춘이 세계 1위 자리에 우뚝 서게 된다. 거칠 게 없었다. 뒀다하면 이긴다. 누구
도 마효춘이 강하냐고 하면 별로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아무도 이기지는 못한다. 다시
무대는 동양증권배, 임해봉이 스러지고 조치훈이 피울음을 삼킨 바로 그 무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두면 이기는 마효춘과 2년의 잠복기를 거치고 한층 성숙해진 소년의 대결은
한 판 이기면 한 판 지는 그런 상대. 메이저 우승도 둘다 2번씩. 1,2국 역시 사이좋게 나눠가진 그들
은 운명의 3국에서 대역전 반집승에 마효춘은 울었고 이창호는 웃었다. 이 날이 1996년 하고도
3월 18일. 그때만 해도 이 반집승의 결과가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이
후로 마효춘이 소년을 한 번 이기는 데는 만 2년 8개월을 꼬박 보내고 9번을 더 지고 나서야 가능
했다. 10연패. 반대로 소년은 이후 이천년이 오기까지 16번의 세계메이저대회에서 9번을 우승하는
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게 세계가 소년의 괴력에 넋을 놓고 지켜봐온 세월이 10년, 바둑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라고도
했고, 석불이라고도 불러본다. 소년이 언제쯤 권좌에서 내려올지가 늘 관심사, 이사람 저사람의
말을 빌어 특집기사를 싣기에 여념이 없다. 한 번 지면 지면 화제요, 두 번 연속으로 지면 슬럼프
랜다. 소년이 지는 게 뉴스가 되던 세월만 10년이 흐른 것.
만세무한할 것 같이 보였던 이창호 왕국에 균열 조짐이 보인 건, 누가 얘기한 홀쭉이와 뚱뚱이 이
특이한 현상이 포착된다. 이창호의 경우 10강과의 상대전적에서는 65% 정도의 성적을 올린데 비
해 11위 이하의 기사들에게는 무려 80%가 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창호가 국내기전 성적이
좋은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세돌의 경우 10강에게는 60%가 조금 넘는 승률을 거둔
데 반해 11위 이하의 기사들에게는 60%도 안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어떤 기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런 경우는 없다. 그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비논리적인 일이다. 그런데 과
연 이들 11위 이하의 기사들과 이세돌이 중요한 시합에서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앞의 승률이 고
스란히 반영이 될까?
8. 이세돌의 정상급 외국기사와의 상대전적
창하오 4승 5패
유빈 5승 1패
요다 2승 1패
주학양 2승
하네나오키 7승
펑첸 2승 1패
콩지에 2승 1패
후야오위 2승 1패
왕레이 1승
야마시타 1승
구리 4승 2패
왕시 2승
왕리청 1승 1패
왕밍완 3승
종합 38승 13패(74.51%)
자고로 세계랭킹 1위 정도 되려면 약한 기사가 없어야 한다. 이 자료는 이세돌이 1위가 될 기본 자
격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창하오에게 1승 뒤지고 있기는 하나 올해 도요타배 결승과
중국 갑조리그에서 창하오를 연거푸 이김으로 해서 창하오가 천적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
다. 국내기사와의 상대전적은 위에 자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창호에게만 뒤질 뿐 이세돌을
실질적으로 넘어서고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다.
어떤가? 이창호 VS 이세돌~~ 성사만 되면 지축을 울리는 한 판 승부가 되지 않을까?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 없지 않은가.
현재 한중일과 대만을 통털어 프로기사의 수는 1100명 정도, 중국과 일본이 400명을 훌쩍 넘었고
우리나라도 20년 전 8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올해 5월 서중휘, 최병환의 입단으로 203명이
되었다 하고, 대만의 경우도 최근 바둑열풍에 힘입어 40명 가까이 프로기사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한국기원은 1954년 1월 조남철 명예국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처음 문을 열게 됩니다. 그 해 처음
으로 입단대회를 열어 첫 공식 입단자로 김태현 사범이 배출되구요. 그럼 그 이전까지의 프로 기사
는 없었냐구요? 중국도 1982년 일괄적으로 단 심사를 통해 '인정단위'를 받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이전까지의 노국수들을 평가하여 '인정단위'를 부여, 프로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공식
입단을 거치지 않고 입단한 기사들이 조남철 9단을 포함하여 총 22명. 현재는 조남철 9단을 제외하
고는 전부 퇴직했거나 이세상을 하직하셨구요.
아무튼 1954년 첫 공식 입단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기원에서는 절대적인 기사의 숫자가 부족한 것
을 인식하였지만 이래저래 기원 자체 정비가 시급하여 55년과 56년에는 2명씩 밖에 뽑지 못하고
57년이 되면서 드디어 봄, 가을 2차례 입단 대회를 개최하여 2명씩, 한 해 4명을 뽑게 됩니다. 이 제
도는 1974년까지 거의 변함 없이 이어져 오면서 한국기원도 한국 바둑의 총 본산의 모습을 조금씩
갖춰가게 됩니다.
그러던 1975년 그 동안 곪고 곪았던 여러가지 문제가 터져나와 급기야 한국기원 소속기사의 대부
분이 대한기원으로 딴 살림을 차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1950년대 초 일본에서 관서기원
파동과 거의 비슷한 이유죠?). 그리하야 입단에 목말랐던 그 해 유망 아마기사들은 대박을 맞이하
죠. 한국기원에서도 봄,가을 2명, 대한기원에서도 봄, 가을 2명 해서 총 8명의 기사들이 프로에 입
문하게 됩니다. 더불어 대한 기원 파동 덕분에 그 해 처음으로 여성 프로기사가 탄생하게 되죠. 지
금도 여성 프로 기사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조영숙 초단과 지금은 은퇴한 윤희율 초단. 모두 대한
기원의 작품입니다.
다음 해인 1976년에는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이 모종의 협약이라도 맺었는지 어땠는지 한국기원에
서도 2명, 대한기원에서도 2명씩만 기사를 뽑게 되는데요. 결국 그 해 12월 한국기원과 대한기원은
다시 합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해인 77년에서 85년까지(83년에는 잠깐 4명으로 늘었음)
프로기사의 절대수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는 것과 대한기원 파동 당시 너무 많은 기사가 갑작스럽
게 입단했다는 반성이 합쳐져서 한 해 두 명씩만 입단시키게 됩니다. 그야말로 입단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시절이었죠.
이에 더해 입단의 꿈을 간직한 수많은 아마 강자들에게는(당시 80년대 초반 이후로 조치훈 열풍과
군사정부의 3S 정책이 합쳐져 바둑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였음)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
전해져 오는데요. 그건 일반인 입단 대회 폐지라는 철퇴였습니다. 앞으로 한국 바둑이 경쟁력을 가
지기 위해서는 나이 들어 입단한 기사들로는 힘들다는 판단에서 한국기원 소속 연구생들만 입단
시키기로 한 것인데요(당시에는 일반인 아마들의 실력이 연구생들보다 훨씬 뛰어났음). 개인적으
로 한국기원이 지금껏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기원 결정의 첫번
째 수혜자가 86년 입단한 기사가 바로 이창호 9단, 아마 언젠가는 입단하였겠지만 그 전까지의 제
도였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창호 9단의 입단이 1, 2년 늦었다면...
이러구러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연구생만 입단시키던 제도는 88년까지 잘 유지되는 것 같더니 당시
아마 강자들의 불만이 과연 타당한가를 시험할 목적으로 만든 대회인 '태풍대결'(연구생 출신 프로
기사와 당시 아마 강자와의 16강 총 호선대결)에서 이창호 9단을 비롯한 연구생 출신 프로가 추풍
낙엽으로 탈락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절충안으로 2년간 문을 닫았던 일반인
입단대회는 88년말 다시 재개되고 연구생 입단제도도 그대로 시행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88년에는
4명의 프로기사가 입단하게 됩니다(아무튼 77년에서 87년까지 결과적으로 2명씩만 입단자를 배출
하면서 우리나라에는 6말7초 기사가 현저히 부족하게 되어 과거 허리층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
게되는 원인이 됩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 이 시대를 전후한 유명 기사들이 엄청 많죠?).
1989년에는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인 연구생 내신 1위 자동입단제도를 도입(90년부터 폐지, 98
년 부활), 연구생이 3명 입단하게 되어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하여 입단한 2명과 합쳐 총 5명이 입단
하게 됩니다.
1990년대로 접어 들면서 지금은 별세하신 김수영 7단의 주도로 1975년 이래 명맥이 끊긴 여성 기
사 입단을 추진하게 되는데요. 격렬한 논쟁 끝에 통과되어 남치형 사범과 이영신 사범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 이후로 여성 입단은 잔 가지는 조금씩 바뀌었으나 큰 흐름은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한 해 2명씩 꾸준하게 배출되어 30명이 넘어서게 되었고, 처음 비관론자들의 우려와 달리
(당시에는 여성기사의 기력이 정상 프로와 3점으로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세계 여성 바둑 최강국
의 입지를 완전하게 다진 것은 물론 정상급 여성 기사의 경우 이제는 국내 메이저기전에서도 본선
기사를 넘어 우승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실정임을 보면 미래에의 투자가 무엇인가를 여
실히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프로 입단의 문을 넓혀오다가 1994년이 되면 입단의 문을 8명으로 2명 더 늘이게 됩
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는 시각은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제패와 이창호 9
단의 10대 세계 재패로 1990년대 초 80년대 초 조치훈 9단으로 인한 1차 바둑붐에 이어 2차 바둑붐
이 일게 되면서 바둑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 특히 10대 세계 제패는 수많은 유소년들
의 바둑입문을 장려하게 됩니다. 해서 동기를 자극하자는 측면이 있을 것이구요. 그 전까지 약하기
만 했던 연구생들의 기력이 90년대 초에 들어오면 일반인들 출신 아마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특히 1993년 일반인 입단대회에서는 그 이전까지 일반인들만 입단하던 관례를 깨고 일반
인들이 몰락하고 연구생 출신들로만 입단자를 채우게 되면서 일반인 입단대회를 증가시켜도 일반
인들로만 입단자를 배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많이 작용한 듯합니다.
아무튼 1994년에서 1999년까지는 일반인 입단대회 2차례를 통해서 4명, 연구생 입단대회를 통해
서 2명, 여성 기사 2명으로 총 8명의 기사가 입단하게 됩니다. 한국기원의 전략(필자의 추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져서 이 기간 일반인 입단대회 출신 입단자 24명 중에서 단 3명만이 일반인 출신
으로 입단하게 됩니다. 그만큼 소년 기사들의 기력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얘기도 되겠습니다. 이
기간 작은 변화는 1995년부터 여성 입단대회의 경우 한 대회에 2명을 뽑던 것을 봄, 가을 1명씩 뽑
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것과 1998년부터 연구생 입단의 경우 한 명은 내신 성적 1위자가 자동 입단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정도.
2천년대로 들어오면서 입단자를 1명 더 늘이게 되는데요. 지방화에 맞추어 지방 연구생 출신들 중
에서 한 명 입단시키기로 한 것이죠. 작은 변화 한 가지는 2003년부터 여성 입단자의 경우도 내신
성적 1위자 1명은 자동으로 입단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 현재는 매년 9명의 새로
운 프로가 팬들 앞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잠깐 요약한다면,
연구생 대회에서 두 명, 두 차례 일반인대회에서 각각 2명씩 총 네 명, 여성 입단 대회에서 두 명,
지역 본부생 입단대회에서 한 명. 2+2+2+2+1 -> 9명
여기까지가 입단 제도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요. 과연 현재의 제도가 불합리한 걸까요?
과거 입단 제도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참 많이도 생각해 보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엔 적어도
한국기원이 입단 제도 만큼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조금씩 개혁을 잘 진행시켰다는 느낌인데요.
매년 9명, 적은가요?
한기 이전 22 조남철 등 1954 1 1954.1 한국기원 출범 55~56 2 57~74 4 봄,가을 2명씩 75 8 대한기원 파동, 한국/대한 4명씩, 최초의 여류기사 76 4 한국/대한 2명씩, 12월 1일 다시 결합 77~82 2 봄에만 2명씩 83 4 봄,가을 2명씩 84 2 봄 2명 85 2 겨울 2명 86~87 2 연구생만, 일반인대회 폐지 88 4 연구생 2, 일반인 2 89 5 연구생 3(내신 1위제도), 일반인 2 90~93 6 연구생 2(내신 1위제도 폐지), 일반인 2, 여류 입단 2 94 8 연구생 2, 일반인 4, 여류 2 95~97 8 연구생 2, 일반인 4, 여류 2(봄,가을 1명씩) 98~99 8 연구생 2(내신 1위 1명 자동입단), 일반인 4, 여류 2(봄, 가을 1명씩) 20~2002 9 연구생 2(내신 1위 1명 자동입단), 일반인 4, 지역본부생 1, 여류 2(봄, 가을 1명씩) 23~ 9 연구생 2(내신 1위 1명 자동입단), 일반인 4, 지역본부생 1, 여류 2(내신 1위 1명 자 동입단)
* 세계 아마선수권 우승자 추천 입단(김찬우, 유재성, 이강욱) * 객원기사(예내위,장주주,스베타,샤샤)
1984년 4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이창호 9단은 당시 스승이던 고 전영선 7단의 소개로 조훈현
9단을 만나게 된다. 3점의 지도기, 결과는 소년의 패배. 당시 칼날같던 31살의 국내바둑계의 절대
자 조훈현 9단은 소년의 재주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시 한 번 전영선 7단의 간곡한 부탁, 한 번만
더... 한 달 후 이번에는 장소를 바꿔 조훈현 9단이 전주를 방문한다. 역시 3점 대국. 소년은 스승의
기대에 부응한다. 둔탁하고 느리기만 하지만 뭔가가 있다. 자신의 날렵하기 이를 데 없는 행마에
비할 때 소년의 그것은 범상함 그 자체였지만 뭔가 아직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소년은 조훈현 9단과 인연을 맺는다.
5년 후, 스승과 제자는 타이틀전 무대에 같이 서 있다. 스승의 생각보다 조금 빨리 입단을 하였고,
입단이 빠른 것 보다는 훨씬 빨리 타이틀 무대에서 자신과 만났다. 스승도 어색하고 제자도 어색
하다. 아무래도 제자가 더 수줍었나 보다. 80수 만에 돌을 던진다. 이렇게 사제간의 첫 대결은 싱
겁게 막을 내린다.
이후 17년 동안, 특히 90년대의 한국 바둑사는 사제의 대결로 시작해서 사제의 대결로 끝이 났다.
과거 타이틀전이 연초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 도전자가 이창호 9단이면 방어자는 조훈현 9단, 도
전하는 이가 조훈현 9단이면 방어하는 이는 틀림 없이 이창호 9단이었다. 사제간의 10번기는 우스
운 일이었고, 20번기, 25번기도 종종 등장한다. 이들의 혈투는 양자를 단련시킴은 물론 바둑을 공
부하는 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필수 교과서였다. 마치 80년대까지 오청원, 사카다 전집이, 또
조치훈, 고바야시의 혈전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일 2005년 7월 15일, 이들은 300번째 대국을 맞는다. 300대국이라니!! 사제대결로는 아마도 전무
후무한 일이리라. 사제대결이 아니라도 두 기사 간에 총 300국을 치른 예는 360국 전후로(아직 자
신할 수 있을 정도의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 대국한 조서대결 이외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승부 바둑의 황혼기라 할 지천명을 훌쩍 넘긴 스승과, 이제서야 스승이 제자를 받아들이던 그
나이가 된 제자의 대결은 앞으로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 것으로 생각되는 시점, 앞으로의 한판한판
은 언제 그 승부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역사적인 한판한판이다. 우리는 그 역사를 목도할 행운
의 한 자락을 거머쥐었다. 아름다운 사제대결, 그 300번째 대국~~
만약 양궁 세계최강 한국, 탁구 세계최강 중국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의 해당 종목에서 8강이나 4
강에서 모두 떨어지고 한 명이 남았을 때, 골프, 테니스의 세계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선수가 8
강이나 4강에서 모두 떨어지고 미국 선수 한 명이 남았다고 할 때(골프의 경우 매치업 플레이로 생각
하면 될 듯), 그 남아 있는 한 선수가 우승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한 그 우승을 한 선수가 같은
상황을 7번 더 맞이해서 모두 우승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서 바둑과 같은 승발전 방식
의 국가 단체전이 있어서 앞의 그 선수가 세계 톱클래스의 타 국가 선수들을 10년 동안 한 번도 지지
않고 15번 연속으로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결론적으로 이창호 9단이 15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앞에서 다소 장황하게 예로 든 상황에서의 없는
확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려 40연승 중. 단순 확률로는 2의 40제곱분의 1, 즉
1/1,099,511,627,776, 십조 구백구십오억 천백육십이만 칠천칠백칠십육분의 일, 백분율로는 약
0.00000000009%. 인구 60억에 달하는 지구와 같은 별이 17개 더 있을 때 그 중에서 한 명이 선택받
을 확률이고, 로또 1등 당첨 확률(1/8,145,060)보다 십만배 이상 더 어려운 확률이다.
나. 무적의 신화를 소개합니다
1. 메이저기전에서 혼자 남았을 때
(1) 8강에서
년도 대회명 8강멤버
1996년 9회 후지츠배 이창호, 고바야시,왕밍완,사토루,후지사와,마효춘,창하오,유소광
98~99 3회 LG배 이창호, 조치훈,야마다,구토,마효춘,유빈,소위강,주준훈
20~21 4회 응씨배 이창호, 요다,오오다케,임해봉,왕밍완,창하오,유빈,마효춘
24~25 5회 춘란배 이창호, 창하오,후야오위,구리,주학양,펑첸,왕레이,장쉬
9회 후지츠배 : 왕밍완, 고바야시, 마효춘을 연이어 격파하고 우승
3회 LG배 : 주준훈, 소위강, 마효춘 꺾고 우승
4회 응씨배 : 요다, 유빈, 창하오 꺾고 우승
5회 춘란배 : 창하오, 후야오위, 주학양 꺾고 우승
자료를 조사해보니 8강에 한 명이 홀로 남았던 경우는 총 34번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6번만 우승을
하였고(17.65%), 1판도 이기지 못하고 8강에 머무른 경우는 20번(58.82%), 우승을 한 경우는 이창호
9단이 4번을 모두 우승으로 연결시켰고, 이런 전례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혈혈단신으로 응씨배
1회대회에 참가했던 조훈현 9단, 그리고 얼마전 LG배 9회 대회에서 메이저기전 처녀 우승을 달성한
일본 1인자 장쉬 9단이 있다. 아래는 관련 자료이다.
대회명 대회횟수 혼자 남은 기사 최종결과
응씨배 1회 조훈현 우승
응씨배 2회 예내위 4강
응씨배 3회 마효춘 8강
응씨배 4회 이창호 우승
응씨배 5회 왕밍완 8강
도요타배 2회 유키사토시 8강
삼성배 1회 유소광 8강
삼성배 5회 주학양 8강
삼성배 5회 야마다 준우승
LG배 9회 장쉬 우승
LG배 1회 사토루 8강
LG배 2회 마효춘 8강
LG배 3회 이창호 우승
LG배 3회 주준훈 8강
LG배 4회 왕리청 8강
LG배 5회 왕리청 4강
LG배 6회 야마시타 8강
LG배 7회 주학양 8강
동양증권배 9회 유빈 4강
춘란배 2회 조훈현 8강
춘란배 5회 이창호 우승
춘란배 5회 장쉬 8강
후지츠배 3회 섭위평 준우승
후지츠배 4회 서봉수 8강
후지츠배 5회 조훈현 8강
후지츠배 6회 소위강 8강
후지츠배 8회 유창혁 4강
후지츠배 9회 이창호 우승
후지츠배 14회 유빈 8강
후지츠배 14회 주준훈 4강
후지츠배 15회 주준훈 8강
후지츠배 15회 콩지에 8강
후지츠배 17회 주준훈 8강
후지츠배 18회 왕밍완 8강
(2) 4강에서
대회명 날짜 우승 준우승 4강
후지츠배 9회 ~96.8.3 이창호 마효춘 고바야시, 유소광
삼성배 3회 ~99.2.8 이창호 마효춘 조치훈, 류시훈
LG배 3회 ~99.5.10 이창호 마효춘 소위강, 유빈
삼성배 4회 ~99.12.7 이창호 조선진 야마다, 히코사카
응씨배 4회 ~21.2.16 이창호 창하오 유빈, 왕밍완
도요타배 1회 ~23.1.29 이창호 창하오 유빈, 왕레이
춘란배 4회 ~23.3.18 이창호 하네나오키 뤄시허, 창하오
춘란배 5회 ~25.3.18 이창호 주학양 펑첸, 후야오위
모두 8번 있었는데(8강에서 혼자남았을 때 4번 포함) 한 번도 예외 없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8강에서
의 경우를 포함하면 20연승(실제전적 기준, 즉, 번기에서 최종적으로 이겼으면 1승으로 취급).
이창호 9단을 포함하여 나머지 기사들의 경우는 모두 63번 이런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우승을 한 경우
는 20번(31.75%, 자세한 자료는 아래 참조)
한국 우승 준우승 3위이하
이창호 8
조훈현 2 2
유창혁 2 1
이세돌 1
서봉수 1
박영훈 1
종합 14 1 3
중국 우승 준우승 3위이하
섭위평 2 3
마효춘 1 3 2
유빈 1 1 1
창하오 2 1
전우평 1
주학양 1
왕레이 1
예내위 1
종합 2 9 10
일본 우승 준우승 3위이하
조치훈 1 1 1
요다 1 2 1
왕리청 1 1 1
사토루 2 1
장쉬 1
왕밍완 2
하네나오키 1
야마다 1
류시훈 1
히코사카 1
고바야시 1
야마시로 1
임해봉 1
종합 4 8 11
대만 : 주준훈 1번 있었는데 4위 차지함
최종결과 횟수 확률
우승 20 31.75
준우승 18 28.57
3위이하 25 39.68
이와 관련하여 재밌는 것은 위에서 먼저 살펴보았던 8강에서 혼자 살아 남았을 때는 한 판도 못이기
고 8강에 머무른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58.82%), 4강의 경우는 4강전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한 경우
가 훨씬 많았다는 것(60.32%)이 하나요, 8강이든 4강이든 혼자 남은 기사가 우승한 확률이 산술적인
확률(8강은 12.5%, 4강은 25%)보다 더 높다는 것(8강은 17.65%, 4강은 31.75%)이 둘이다. 물론 확률
과 통계를 거부하는 이창호 9단의 활약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창호 9단의 경우 혼자 살아남지 않고 다른 한국 기사와 더불어 4강에 올랐을 때의 성적
은 어떨까? 이 또한 묘한 여운을 남긴다. 아래 자료를 보자.
혼자 남았을 때 : 8번 모두 우승
두명 남았을 때 : 9번의 경우 중 7번 우승하고 2번 4강진출에 그침
세명 남았을 때 : 8번의 경우 중 1번 우승하고, 1번은 준우승, 나머지 6번은 3위 이하에 그침
네명 모두 진출 : 3번의 경우 중 1번 우승, 1번 준우승, 1번 4강 진출에 그침
재밌지 않은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98%의 무엇이 분명 있는 것 같다.
(3) 결승에서
이 부분은 워낙 많이 알려져서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아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외국기사(정
확하게는 외국기원소속의 기사)에게는 한 번도 결승에서 패한 적이 없다. 13전 전승(실제전적 기
준). 해서 앞에서의 8강, 4강에서의 연승과 합산하면 25연승!!!
대회명 날짜 우승 준우승
동양배 3회 ~92.1.27 이창호 임해봉
동양배 4회 ~93.6.8 이창호 조치훈
동양배 7회 ~96.3.20 이창호 마효춘
후지츠배 9회 ~96.8.3 이창호 마효춘
삼성배 2회 ~97.10.28 이창호 사토루
후지츠배 11회 ~98.8.1 이창호 창하오
삼성배 3회 ~99.2.8 이창호 마효춘
LG배 3회 ~99.5.10 이창호 마효춘
삼성배 4회 ~99.12.7 이창호 조선진
응씨배 4회 ~21.2.16 이창호 창하오
도요타배 1회 ~23.1.29 이창호 창하오
춘란배 4회 ~23.3.18 이창호 하네나오키
춘란배 5회 ~25.3.18 이창호 주학양
참고로, 조훈현 9단도 6번의 외국기사와의 결승전에서 모두 승리한 바가 있고, 이세돌 9단은 2번 모
두 승리, 유창혁 9단은 7번 중 4번 승리, 3번 패배로 가히 휴머니스트라 할 만하다. ^^
2. 국제 단체전의 경우
농심배 14연승!! 이제는 웬만한 바둑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기록, 해서 여기서는 별로 더이상
할 얘기는 없다. 다만 약간 더 세부적인 자료를 추가하고 사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부연 설명만 잠
깐 덧붙이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황이란 당연하게도 모든 한국기사들이 다 지고나서 홀로 남은 상황을 말한다. 즉
주장으로서 마지막 순번으로 출전했을 때의 기록이 되겠다.
1994년 진로배 4회 최종국 다케미야
2000년 농심배 1회 13국,최종국 조선진, 마효춘
2001년 농심배 2회 최종국 가토
2002년 농심배 3회 13국,최종국 창하오, 주학양
2003년 농심배 4회 13국,최종국 후야오위, 뤄시허
2004년 농심배 5회 13국,최종국 가토, 임해봉
2005년 농심배 6회 10국~최종국 뤄시허,장쉬,왕레이,왕밍완,왕시
이렇게 15연승을 기록중이다. 앞의 메이저기전 25연승과 합치면 정확히 40연승, 게다가 이 기록은 과
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진행형.
3. 기타 남은 얘기들
앞에서 중요한 이야기들은 모두 끝이 났다. 현재 국제기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메이저기전과 메이
저 국제단체전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대회가 열리고는 있으나 중요도에서 현저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
다. 대표적으로 중환배, TV바둑아시아선수권, 각종 국제교류전(한중 천원전, 중일 아함동산배 등
등), 각종 이벤트대회(타이다배, 신사배 등등)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영광스럽게도 그 분(?)과의 우연한 술자리에서 여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침
중국의 을조리그가 개막하기 직전이라 같이 어울렸던 모 프로기사가 중국 직통의 스카웃제의를 받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바,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프로는 돈에 아주 민감하다. 그
런데 국내 우승 상금보다도 훨씬 떨어지지만 부담은 훨씬 많은 TV바둑아시아선수권(원래는 이벤트 개
념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횟수가 쌓이면서 무슨 권위가 대단히 있는 것처럼 일반 바둑팬들에게 인식되
어 버렸다), 무슨무슨 국제 이벤트기전... 이제 우리 팬들도 실상을 바로 알고 이벤트는 이벤트답
게 가벼운 마음으로 관전하는 것은 어떨지...
다. 글을 마치며
최근에 이창호 슬럼프설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오청원과의 비교론도 왕년의 각설
이마냥 잊지도 않고 또 오는 것 같다. 말로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려울만큼 위대한 이 영웅을 왜 그리
도 보내려고만 하는지, 왜 그리도 자긍심이 없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자의 초기작인 누가 세계최
강인가는 오청원을 겨냥한 글이다. 열심히 써서 그런 얘기가 나올 때면 들이밀고, 또 나오면 또 들이
밀고 할 요량으로 한 달 가까이 나름대로 능력도 안되지만 낑낑대며 쓴 글이다. 아직 써다만 이창
호, 세계기록 10선은 그 누구도 조명하지 못한 위대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작업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워낙 각자의 역량이 출중한지라 영웅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필자는 나쁜 점
도 있지만 그런 민족성이 가진 장점을 더 크게 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이창호 9
단 정도 되면 우리 시대의 영웅 정도는 충분하지 않을까?
세계 메이저기전(이하 메이저기전)이라는 개념은 과거 어느 글에서(아마도 월간바둑일듯한데 아직 찾
지를 못했음) 처음 도입한 적이 있으나 이후 바둑 3국이 따로국밥식으로 각개 약진하면서 애써 개념
정립을 소홀히 해 왔다. 오히려 최근 필자를 비롯한 몇몇 재야 논객들이 독자들의 호기심 충족을 위
해 활발히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얼마 전 놀랍게도 중국 유력 인터넷사에서 필자
와 똑 같은 방식으로 메이저 기전을 정리한 적이 있어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정확하게 따져 보면 별로 신기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아래 서술하는 바와 같
은 개념으로 정리하면 비교적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기원과 필자의 견해 차이는 두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동양증권배 1, 2회를 메이저기
전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작년에 신설된 중환배를 인정하느냐의 문제이다. 필자는 동양
증권배 1, 2회는 국내기전으로, 중환배를 마이너 세계기전으로 분류하는데 반해 한국기원에서는 동양
증권배와 중환배를 국제기전으로 분류하여 메이저기전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물론
한국기원에서는 공식적으로 세계 메이저기전에 대한 체계적인 기준이 없다).
그러면 메이저기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를 검토하면서 몇몇 한계선상에 있는 개별
기전들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나. 세계 메이저기전의 성립요건
1. 상당한 정도의 총규모와 우승 상금
프로 대회이니만큼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상금일 것이다. 따라서 메이저기전이라고 하려면 각국의
국내 기전과는 확실히 차별화될 만큼의 상당한 규모와 상당한 우승 상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데 여기에는 문제점이 하나가 있다. 한중의 경우는 국내기전의 우승 상금이 얼마 되지 않아 별 문제
가 없지만 일본의 경우는 일본 3대기전의 규모와 우승상금(특히 기성전)이 응씨배를 제외한 모든 국
제기전의 우승 상금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저기전의 탄생 배경을 보면 일본에서는 전혀 생각이 없다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대회를
만들고,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메이저기전이 출범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현대바
둑의 메카로서 모든 권능을 행사해왔다. 그러던 것이 한 수 아래라 여기던 중국에게 된서리를 맞으면
서 자존심이 상했는데, 마침 잉창치라는 대만 사람이 사재를 털어 어마어마한 규모로 세계대회를 만
들겠다고 공언하게 된다(물론 이 대회가 응씨배이다). 여기에 놀란 일본은 메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
게 위해 후지츠배를 급조하여 먼저 선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 우승상금(당시)은 3대기전인 기성(26백만엔), 명인(22백만엔), 본인방(18백만엔)보다는 낮
게 책정한다(15백만엔). 그것은 당시로서는 분명 국제기전이라는 것이 이벤트적인 성격이 훨씬 강했
다는 데도 이유가 있겠으나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깔려있었음을 부인하기는 힘
들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에 와서도 도요타배의 우승상금(3천만엔)보다 본인방전
의 우승상금(32백만엔)을 더 높게 책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벤트전의 성격이 강했다 하더라도 이후로 국제기전이 점차 안정적으로 확대되
고 보편화되면서 최소한 1996년쯤에는 그들도 메이저기전의 우승상금이 그들의 3대기전보다 적다고
하여 평가절하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로 우승은 못하더라도 평균적으로는 가장 좋은 성적을 내던 것이 이 시점에 와서는 한국에 평균
적으로도 뒤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의 대삼관인 조치훈이 1996년 2차 대삼관을 차지하면서 더 이상 기쁘지 않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에 처음 차지하였을 때에는 정말 기뻤지만 지금은 일본 1위가 세계 1위가 아니기 때문이
라고 솔직하게 고백한 바가 있다. 또한 각종 메이저기전에 1998년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참가하였던
조치훈의 성적이 그리 좋지는 못하였다.
세째로 1997년 고바야시가 후지츠배에서 처음으로 메이저기전을 제패하고는 그 어떤 기전에서 우승하
였을 때보다 기뻐하였다는데 있다. 그 동안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한번도 차지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드디어 면피는 한 것 같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은 웅변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네째로 정확히 언제인지,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아마도 요다였던 것 같다) 세계대회에 왜 자
주 출전하지 않느냐는 말에 성적 내기도 힘들고 망신만 당하는데 왜 참가하느냐, 나중에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되면 그 때 출전하겠다는 취지로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아무튼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그들이 정략적으로 상금의 다소로 애써 메이저기전의 의미를 축소한다
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 메이저기전의 본래 의미가 축소될 수는 없는 것이다.
2. 세계 최정상급 기사의 과반수 이상 참가
이 기준에 대해서는 세계 랭킹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객관화하기가 상당 부분 곤란한 점이 없지
않으나 각국마다 국내 기전이 있으므로 그 국내기전의 우승자들(물론 한중일에 국한되나 바둑의 세계
화를 위해서 조금씩 넓혀갈 필요는 있겠다)을 세계 최정상급 기사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
다.
3. 최소한 16명 이상의 본선 참가자 내지는 최소한 4명 이상의 참가자에게 승리하여야 우승할 수 있
는 대회방식일 것
어느 정도의 참가 기사는 확보되어야 함을 감안한 기준이다. 후단은 향후 메이저 기전의 방식이 지금
의 토너먼트에서 벗어나 리그전 등 다양화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만든 문구이다. 가령 각국의 예선
을 통과한 정예 10명이 AB조로 리그전을 치러 우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일 경우에는 전단만 있을 경우
메이저기전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불합리한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4명 이상의 조건
은 최소한 메이저 기전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험난함은 극복해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
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
4. 1개 국가 소속 기원의 시드 배정이 전체 참가국 소속 기원의 시드 배정과 비교하여 과반수를 넘
지 않을 것
가령, 과거 동양증권배 1,2회 또는 IBM배 속기 대항전의 경우, 타국 소속 기원 참가자 대비 한국, 일
본의 참가자가 과반수를 훨씬 넘기 때문에 국제기전이라고 하기에, 더구나 메이저기전이라고 하기에
는 문제가 있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조건이다. 전체 32명 참가에 한국이 28명이고 중국, 일본이 합
쳐 4명이라거나 전체 64명 참가에 일본이 60명이고 한국, 중국이 합쳐 4명 뿐이라면 다른 메이저기전
과의 형평상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5. 기타 위 조건은 만족시키지 않으나 세계프로바둑연맹에서 세계메이저기전으로 인정하는 기전(향
후 연맹 설립을 가정하여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
1. 단체전
실제로 과거의 진로배, 롯데배, 중일슈퍼대항전, 현재의 농심신라면배, CSK배, 한중일월성배 등은 상
금 규모면이나 참가하는 기사의 수준, 대회 흥행성 등을 감안할 때 메이저기전이라고 하기에 전혀 손
색이 없으나(두 국가간의 대항전은 약간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본질적으로 개인의 승부라기 보
다는 국가 대항전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메이저기전으로 포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이는
대회 방식 등이 바둑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테니스나 골프, 탁구 등에서 단체전을 별도로 통
계 산정하는 것을 본보기로 삼아도 별로 문제가 없을 것 같다.
2. 중환배
실제로 가장 한계 선상에 놓여 있는 기전이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조건을 대부분 만족시켰으나 상당
한 총 규모와 우승상금이라는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이 참여하지 않아 판단을 더욱 어렵
게 하고 있다.
중환배의 우승 상금은 한화로 대략 72백만원 정도인데 한국 1위 기전 LG칼텍스배(과거 LG정유배)의
우승 상금 5천만원과 비교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가장 상금이 적은 메이저 기전인 후지츠배의
우승상금이 약 1억 5천만원이라는 것도 같이 생각해 보면 어렵기는 하지만 세계 메이저기전이라고 하
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자주 이야기하는 반대 논거인 2회 응씨배, 이때도 중국은 대만과의 정치적인 관계로 인하여 대
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번 중환배와 비슷한 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1992년 2회 응씨배가 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일본이 최강이었고 중국은 한국과 2,3위
를 다투는 수준(전체적인 톱랭킹 기사의 층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 더군다나 중국은 이전
까지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한 적도 없었을 정도로 참가 여부에 따라 대회가 좌지우지될 성격은 아니었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중환배 당시의 중국은 한국과 빡빡하게 누가누가 더 잘 하느냐를 가지
고 몇 년째 바둑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고, 일본은 한참 떨어진 3등 국가에 불과하지 않았다. 중
국이 불참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한국이 우승한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과적으로 중환배에
서의 중국 불참은 대회의 수준을 크게 떨어뜨린 것만큼은 사실이라 하겠다.
필자가 알기로는 올해도 중환배가 열린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중국도 참여한다고 한다. 전체 규모와
우승 상금이 얼마로 책정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후지츠배 정도는 되어서 확실히 세계메이저기전으
로 자리매김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3. 동양증권배
1회 동양증권배
- 날짜 : 88.12.10 ~ 89.10.20
- 총규모, 우승상금 : 9천만원 / 15백만원
- 참가자 : 총 32명(한국 28명, 일본 2명, 대만 2명), 조훈현 9단 불참
- 대회일정 : 당시 한국의 여타 기전과 다를 바 없이 연중으로 한 판씩 치러짐
(현재의 모든 국제기전은 연중 단기집중형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것과 비교)
2회 동양증권배
- 날짜 : 89.12.1 ~ 90.10.31
- 총규모, 우승상금 : 15천만원 / 17백만원
- 참가자 : 총 32명(한국 24명, 일본 3명, 중국 3명, 대만 2명), 조훈현 9단 참가,
중일은 자국의 정상급 기사들은 참가시키지 않음
- 대회일정 : 다른 메이저기전과 같은 방식으로 전환함
3회 동양증권배
- 날짜 : 90.12.1 ~ 92.1.27
- 총규모, 우승상금 : 25천만원 / 5천만원
- 참가자 : 총 24명(한국 9명, 일본 6명, 중국 6명, 대만 2명, 미국 1명)
당시 한중일의 최정상급 기사 전원 참가함
위 자료에서 보다시피 1, 2회를 세계메이저기전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또한 만약 동양증권배 1, 2회를 메이저기전으로 인정할 경우 당시 일본에서 주최한 국제 IBM속기전
역시 메이저기전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문제도 크다 할 것이다. 3회까지 치러진 IBM배는 64명 참가
자중 60명을 자국의 기사로 채우고 나머지 4명을 한중에 초대하였지만 규모나 우승상금 면에서는 1,2
회 동양증권배보다 많았다(3백만엔~5백만엔). 이런 사정일진대 국내의 시각으로만 동양증권배는 인정
하고 IBM배는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일에서 볼 때는 우습지 않을까?
동양증권배의 경우 3회 대회 역시 대회 규모와 우승 상금이 문제가 될 수 있는데(4회 대회부터는 우
승 상금을 1억원으로 하여 더 이상 논란의 여지를 없앴다) 당시 국내 1위기전의 우승 상금이 기성전
으로 27백만원(2위 기전인 16백만원의 왕위전과 비교하여 독보적이었다)이었다는 것과 당시 후지츠
배 우승상금인 15백만엔은 당시 환율로 9천만원 정도였다는 것, 3회 대회 참가기사의 면면이 단 한
명의 정상급 기사도 빠짐 없이 전원 참가하였다는 것 등을 고려해 볼 때 메이저기전으로 인정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다.
4. TV바둑아시아선수권
여기에 대해서는 누차 역설한 바가 있으므로 간단하게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우승 상금이 2만불에 불과
참가자 7명에 전기 우승자의 경우 2번만 이기면 우승할 수 있는 대회방식
이를 종합해서 볼 때, 현 시점에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세계 메이저기전에 포함되는 기전은,
응씨배(1~5회)
도요타배(1~2회)
LG배 세계기왕전(1~10회)
삼성화재배(1~9회)
후지츠배(1~18회)
춘란배(1~5회)
동양증권배(3~9회)
조치훈 9단 십단 탈환 기념으로 계속 달립니다 ^^
< 68회 우승 목록 > 2위는 사카다의 64회 우승
- 국제 기전 -
삼성배 : 1회 우승
후지츠배 : 1회 우승
종합 : 2회 우승
- 3대 기전 -
기성전 : 8회 우승 -> 고바야시의 8회와 공동 1위
명인전 : 9회 우승 -> 최다, 2위는 고바야시의 8회
본인방 : 12회 우승 -> 최다, 2위는 다카가와의 9회
종합 : 29회 우승 -> 최다, 2위는 고바야시의 16회, 3위는 임해봉의 13회(구명인전 포함)
대삼관 4회 -> 조치훈 9단만 네 번 기록함, 대삼관이 아니라 3대 기전을 생애에
걸쳐 한번씩이라도 제패한 기사도 조치훈 9단이 유일함
- 7대 기전 -
십단전 : 4회 우승 -> 최다는 가토의 7회 우승
천원전 : 2회 우승 -> 최다는 고바야시,임해봉의 5회 우승, 전신인 일본기원선수권전 포함할 경우
사카다의 12회 우승이 최다임
왕좌전 : 3회 우승 -> 최다는 가토의 11회 우승
고세이전 : 2회 우승 -> 최다는 고바야시의 9회 우승, 전신인 기전들을 포함할 경우
오오다케의 14회 우승이 최다임
프로십걸전 : 1회 우승
-> 프로십걸전은 현 명인전의 전신으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당시로는 7대기전 정도의 무게는 지녔음
종합 : 12회 우승
- 속기전 -
NEC배 4회
아함동산배 1회
NHK배 3회
학성전 2회
조기선수권 7회
용성전 2회
JAL배 조기선수권 1회
종합 : 20회 우승
- 제한 기전 -
JT배 1회
8강쟁패전 1회
신예토너먼트전 3회
종합 : 5회 우승
총 종합 : 68회 우승
* 일본 국내의 일부 제한 기전을 제외하고 활동하는 시기에 벌어진 모든 본격 기전을
모두 한번씩 제패하였음.
1996년 LG와 삼성이 세계 기전을 창설한 이래 올해 현재까지 평균적으로 한해 4.25개의 세계 메이저
기전이 열리고 있다. 그 전까지 8년간 15개 대회가 열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1996년이 세계 기전
이 본격화된 시점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해서 1996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10여명의 기사가 메이
저기전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데 그들의 성적은 어떨까?
올해 역시 얼마전 후지츠배에서 나카오노다와 로페즈가 메이저무대 첫선을 보였고, 이번 LG배에서는
중국의 류스전, 천야오예, 박문요, 한국의 박병규, 김기용이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앞선 후지츠배에
서는 두명의 데뷔 기사가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LG배에서는 류스전, 박병규, 김기용이
첫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박문요와 천야오예는 각각 왕리청과 양후이런을 꺾고 데뷔
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총 2승 5패, 승률 28.57%.
작년에는 세계대회의 홍수가 이어져 류싱 등 무려 14명의 기사가 데뷔전을 가졌으나 수야오궈와 사카
이 히데유키만이 1회전을 통과하였고(이긴 기사가 벽안의 프랑크와 샤샤였다는 것을 감안하시기 바
람), 나머지 12명의 기사는 쓴잔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러면 종합적으로 아래 자료를 보기로 하자.
메이저기전 데뷔 대회(96년 이후 오늘까지(2005.5.17) 41개 대회 대상)
데뷔전 최종 결과
39승83패 3위 1회
31.97% 4강 2회
8강 10회
16강 26회
1회전탈락 81회
16강?? 2회(이번에 16강에 진출한 박문요와 천야오예)
오늘 현재까지 총 122명이 도전하여 대략 10명 중 3명 정도만이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고, 16강에 진입한 기사 역시 3명 중 1명 정도만이 8강에 진출, 8강에 진출한 기사는 5명에 1명꼴
로 4강에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두번째, 세번째 대회 성적은 어떨까? 아
래 자료를 확인하면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고 있다.
데뷔대회 두번째 대회 세번째대회
데뷔전 결과 첫째판 결과 첫째판 결과
39승83패 3위 1회 33승29패 준우승 2회 21승 20패 준우승 3회
31.97% 4강 2회 53.23% 4강 1회 51.22% 4강 3회
8강 10회 8강 9회 8강 5회
16강 26회 16강 21회 16강 12회
1회전 81회 1회전 29회 1회전 18회
데뷔전을 경험한 후 두번째 대회에서부터는 승률 50%를 모두 넘기고 있음과 결승 무대에 곧잘 진출한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대회와 세번째 대회에서의 차이는 16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더 이상 첫째판에서의 부담이 사라진 결과 승률을 50% 넘기기는 하였으나 그 다음판
(16강전)에서는 36%의 승률, 그 다음 판(8강전)에서는 33%의 승률을 보이고 있으나 세번째 대회에서
는 16강전 승률 48%, 8강전 승률 55%로 두번째 대회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아래 마지막 자료를 보기로 하자.
역대우승자 우승하기까지 참가한 대회 개수
이창호 3
조훈현 2
유창혁 7
마효춘 11
조치훈 6
창하오 34
이세돌 9
유빈 19
왕리청 13
요다 10
임해봉 4
서봉수 7
고바야시 15
박영훈 8
오오다케 3
장쉬 7
다케미야 1
평균 9.35
이세돌, 박영훈 등이 몇 번 참가하지 않고 금방 우승한 것 같지만 이들도 평균에 근접하는 대회를 참
가하고서야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 자료는 초창기 대회를 모두 포함하였으므로 자료의 신빙성
이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메이저 첫 대회였던 후지츠배 1회는 누가 우승하든지 처음 참
가, 처음 우승이 되기 때문이다. 해서 1996년 이후로 범위를 좁혔다.
96이후 우승자 우승까지 참가대회
이세돌 9
유빈 19
왕리청 13
요다 10
고바야시 15
박영훈 8
창하오 34
장쉬 7
평균 14.38
34개 대회만에 우승한 창하오를 빼면 11.57개가 평균이 된다. 결과적으로 한 번 우승을 하기까지는
평균적으로 10개 대회 이상을 참가하여야만 우승을 하였다는 통계 자료가 추출된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자료를 이번 대회에 적용시켜 보기로 하자.
16강 진출자 참가횟수 캐리어
천야오예 1 데뷔 대회
박문요 1 데뷔 대회
수야오궈 2 16강 경력
박정상 3 8강 경력
김성룡 5 8강 경력
왕위후이 6 4강 경력
치우쥔 7 8강 경력
야마시타 9 8강 경력
뤄시허 9 4강 경력
구리 10 4강 경력
장쉬 10 우승 경력
박영훈 11 우승 경력
이세돌 23 우승 경력
고바야시 24 우승 경력
주학양 26 준우승 경력
이창호 53 우승 경력
데뷔 무대인 천야오예와 박문요는 각각 8강에 진입할 가능성이 33%이므로 둘 모두 떨어질 확률과
둘 중 한 명은 올라갈 확률이 4/9로 똑 같으나 둘 모두 올라갈 가능성은 10%를 가까스로 넘긴다.
두번째 참가하고 있는 수야오궈는 8강에 올라갈 확률이 36%,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박문요와 16강전에
서 만난다. 세번째 참가하고 있는 박정상의 경우는 확률 48%.
마지막으로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기사는 우승 경력이 있는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장쉬, 고바야
시라고 할 수 있으나 고바야시가 우승한지는 어언 8년이 되었고 그의 나이 이제 오십 삼세다. 해서
후보 탈락, 그 다음 후보군은 준우승 경력이 있는 주학양이라 할 수 있겠고, 실력상으로는 우승 후보
이나 여태 통계상 결승전 경험이 없는 기사가 우승할 확률은 10%에도 훨씬 못 미쳤다는 것을 감안하
면 다크호스 정도로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기사들은 이전의 성적보다는 한 단계 업그레이
드 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 그 다음을 엿보는 정도.
명예 기성 : 후지사와,고바야시 -> 조치훈 4연패 후 왕리청에게 좌절
명예 명인 : 조치훈, 고바야시 -> 요다 4연패 후 작년 장쉬에게 좌절
명예본인방 : 다카가와, 사카다, 이시다, 조치훈 -> 다케미야 4연패 후 조치훈에게 좌절
명예 십단 : 없음 -> 가토, 왕리청 4연패 후 각각 오오다케, 조치훈에게 좌절
명예 천원 : 임해봉 -> 가토 4연패 후 가타오카에게 좌절
명예 왕좌 : 가토
명예 고세이 : 오오다케, 고바야시
명예 일본기원선수권 : 사카다 -> 오오히라 4연패 후 이시다에게 좌절
-> 참고로 일본기원선수권전은 현재 천원전의 전신인 기전입니다.
후지쓰배 가. 역대 4강 멤버
횟수 연도 우승 준우승 3위 4위
1회 1988 다케미야 임해봉 섭위평 고바야시
2회 1989 다케미야 임해봉 조훈현 서봉수
3회 1990 임해봉 섭위평 고바야시 조훈현
4회 1991 조치훈 전우평 왕리청 고바야시
5회 1992 오오다케 왕리청 유소광 마효춘
6회 1993 유창혁 조훈현 가토 아와지
7회 1994 조훈현 유창혁 임해봉 조치훈
8회 1995 마효춘 고바야시 유창혁 조치훈
9회 1996 이창호 마효춘 고바야시 유소광
10회 1997 고바야시 왕리청 마효춘 주학양
11회 1998 이창호 창하오 유창혁 히코사카
12회 1999 유창혁 마효춘 사토루 조치훈
13회 2000 조훈현 창하오 목진석 사토루
14회 2001 조훈현 최명훈 임해봉 주준훈
15회 2002 이세돌 유창혁 왕밍완 이창호
16회 2003 이세돌 송태곤 이창호 요다
17회 2004 박영훈 요다 송태곤 유창혁
나. 최다 우승 순위
1 조훈현 3회
2 이세돌 2회
2 유창혁 2회
2 이창호 2회
2 다케미야 2회
6 박영훈 1회
6 고바야시 1회
6 마효춘 1회
6 오오다케 1회
6 조치훈 1회
6 임해봉 1회
다. 국가별 우승 및 4강 진출 횟수
ㄱ. 국가별 우승 횟수
한국 10회
일본 6회
중국 1회
ㄴ. 국가별 4강 진출 횟수
한국 25회
일본 29회
중국 13회
대만 1회
라. 기사별 성적
ㄱ. 기초 자료
기사명 통산전적 통산 승률 주요 전전(괄호안은 대회횟수) 참가횟수
박영훈 7승2패 77.78 우승(17) 3회
이세돌 9승2패 81.82 우승(15,16) 4회
조훈현 28승15패 65.12 우승(7,13,14), 준우승(6), 3위(2), 4위(3) 17회
유창혁 26승14패 65.00 우승(6,12),준우승(7,15),3위(8,11),4위(17) 15회
이창호 21승14패 60.00 우승(9,11),3위(16),4위(15) 15회
고바야시 22승14패 61.11 우승(10),준우승(8),3위(3,9),4위(1,4) 13회
마효춘 21승14패 60.00 우승(8),준우승(9,12),3위(10),4위(5) 14회
오오다케 7승4패 63.64 우승(5) 5회
조치훈 16승17패 48.48 우승(4),4위(7,8,12) 15회
임해봉 20승10패 66.67 우승(3),준우승(1,2),3위(7,14) 10회
다케미야 9승6패 60.00 우승(1,2) 8회
섭위평 8승8패 50.00 준우승(3),3위(1) 8회
전우평 5승2패 71.43 준우승(4) 2회
왕리청 13승9패 54.17 준우승(5,10), 3위(4) 9회
창하오 9승8패 52.94 준우승(11,13) 8회
최명훈 5승6패 45.45 준우승(14) 6회
송태곤 7승2패 77.78 준우승(16),3위(17) 2회
요다 6승6패 50.00 준우승(17),4위(16) 5회
왕밍완 9승7패 56.25 3위(15) 7회
목진석 5승4패 55.56 3위(13) 4회
사토루 13승7패 65.00 3위(12),4위(13) 6회
가토 8승8패 50.00 3위(6) 8회
유소광 13승10패 56.52 3위(5),4위(9) 9회
서봉수 9승13패 40.91 4위(2) 12회
아와지 4승3패 57.14 4위(6) 2회
주학양 5승7패 41.67 4위(10) 6회
히코사카 3승3패 50.00 4위(11) 2회
주준훈 8승10패 44.44 4위(14) 9회
유빈 9승11패 45.00 11회
ㄴ. 최다승 순위(10승 이상)
1. 조훈현 28승15패
2. 유창혁 26승14패
3. 고바야시 22승14패
4. 이창호 21승14패
4. 마효춘 21승14패
6. 임해봉 20승10패
7. 조치훈 16승17패
8. 사토루 13승 7패
9. 왕리청 13승 9패
10.유소광 13승10패
ㄷ. 최다 참가횟수 순위(위 기초자료 기사 중 5회 이상)
조훈현 17회(유일무이한 전 대회 출전자였으나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여 기록 끝)
유창혁 15회
이창호 15회
조치훈 15회
마효춘 14회
고바야시 13회
서봉수 12회
유빈 11회
임해봉 10회
왕리청 9회
유소광 9회
주준훈 9회
다케미야 8회
섭위평 8회
창하오 8회
가토 8회
왕밍완 7회
최명훈 6회
사토루 6회
주학양 6회
오오다케 5회
요다 5회
ㄹ. 통산 승률 순위(10국 이상)
기사명 통산 승률
1. 이세돌 81.82
2. 임해봉 66.67
3. 조훈현 65.12
4. 유창혁 65.00
5. 사토루 65.00
6. 오오다케 63.64
7. 고바야시 61.11
8. 이창호 60.00
8. 마효춘 60.00
10.다케미야 60.00
11.유소광 56.52
12.왕밍완 56.25
13.왕리청 54.17
14.창하오 52.94
15.섭위평 50.00
15.가토 50.00
17.요다 50.00
18.조치훈 48.48
19.최명훈 45.45
20.유빈 45.00
21.주준훈 44.44
22.주학양 41.67
23.서봉수 40.91
** 박영훈 77.78(7승2패)
송태곤 77.78(7승2패)
전우평 71.43(5승2패)
*** 다른 대부분의 메이저 기전에서, 창호님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독보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후지츠배와는 유달리 인연이 없었습니다(참 특이하죠?). 이번 18회 대회에서는
꼭 우승을 하셔서 올해 8월초 다시 한 번 공항에서 환영할 기회를 주시옵기를...
. 이창호
- 총 상대기사 76명 중 11명(14.47%)
후야오위 2승3패
주학양 2승3패
고바야시 1승2패
콩지에 1승2패
고마쓰 1승2패
미무라 1패
시에허 1패
최철한 1패
송태곤 1패
차저무 1패
이시이 1패
2. 조훈현
- 총 상대기사 64명 중 13명(20.31%)
이창호 5승7패
유창혁 3승4패
다케미야 2승6패
왕리청 2승6패
요다 5승6패
유소광 2패
유키사토시 2패
콩지에 1승2패
히코사카 1패
하네나오키 1패
후야오위 1패
구리 1패
조한승 1패
3. 유창혁
- 총 상대기사 72명 중 15명(20.83%)
이창호 5승9패
조치훈 5승6패
창하오 3승7패
요다 6승9패
펑첸 1승2패
송태곤 1패
뤄시허 1패
장쉬 1패
야마시타 1패
후야오위 1패
다카오신지 1패
왕시 1패
류징 1패
박영훈 1패
이마무라 1패
4. 이세돌
- 총 상대기사 41명 중 8명(19.51%)
이창호 6승7패
창하오 3승5패
소위강 2패
류싱 2패
왕리청 1패
딩웨이 1패
시에허 1패
요코다 1패
5. 최철한
- 총 상대기사 34명 중 11명(32.35%)
창하오 2승4패
구리 1승4패
콩지에 1승2패
왕위후이 1패
사토루 1패
시에허 1패
유창혁 1패
조치훈 1패
조선진 1패
유키사토시 1패
산전석자 1패
6. 박영훈
- 총 상대기사 34명 중 8명(23.53%)
조치훈 1승3패
사토루 1패
이세돌 1패
콩지에 1패
주학양 1패
김수준 1패
장쉐빈 1패
장문동 1패
7. 창하오
- 총 상대기사 63명 중 14명(22.22%)
이창호 5승20패
조훈현 6승7패
고바야시 4승6패
요다 1승4패
서봉수 1승3패
조치훈 1승2패
원성진 2패
조선진 2패
왕위후이 1패
야마시타 1패
박영훈 1패
뤄시허 1패
왕시 1패
김승준 1패
일단 여기까지만 분석을 하면(다음에 제 자료실(아르마다 분석실)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이창호9단은 천적이 없습니다(물론 국내에서는 최철한9단, 루이9단이 있습니다만). 조훈현9단은
다케미야, 왕리청, 유소광 9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 왔고, 유창혁 9단은 창하오, 요다 9단에게
성적이 좋지 못하죠. 이세돌 9단은 아직까지 특별히 약점을 보인 기사는 없습니다. 창하오, 소위강
류싱에게 몇 번 더 졌지만 대부분 비중이 많이 떨어지는 대국이었으므로 커다란 의미가 없어 보입
니다. 결정적으로 창하오 9단에게는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겼으므로 약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되네요. 최철한 9단은 중국 정상급 기사들에게 전반적으로 약한 것으로 보이며 박영훈 9단은
조치훈 9단을 제외하고는 상대전적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창하오 9단은 이창
호 9단에게 절대 약세를, 고바야시, 요다, 서봉수 9단에게도 약점을 보여 왔고, 원성진, 조선진 9단
에게도 몇 번 되지는 않지만 쓴맛을 보았네요.
글 (아르마다)
린즈한
스포츠어코드] 린즈한 "대만에서 바둑 할 만해"
린즈한 "대만에서 바둑 할 만해"
한국기원
기사입력 2012-12-23 12:01
한중일 바둑삼국의 대결에 보너스 마냥 붙어있는 대만. 우리는 대만바둑의 실체를 완전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들이 강한 실력을 보일 때 당황해하거나 신기해 하곤 한다. 중국 베이징서 12월에 열린 2012 스포츠어코드에서 대만바둑은 일본바둑보다 확실히 존재감이 있었다. 남자 개인전 노메달에 그친 중국과 일본이었지만 대만은 동메달을 땄다. 그것도 중국 1인자 천야오예를 이기고 딴 것이다! 또 중국의 타이틀보유자 퉈자시를 완전히 탈락시킨 것도 대만의 무명 륀쥔옌이라, 대만바둑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보게되는 계기가 됐다.
12월 15일 오전 제2회 스포츠어코드 남자개인 패자조 준결승전이 끝났다. 타이완의 린즈한이 중국의 천야오예를 이겨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대국이 끝난 후 린즈한을 인터뷰했다.
기자 : 천야오예를 이긴 오늘의 대국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린즈한: '제 생각에 포석은 괜찮았어요. 하지만 상변 전투에선 잘 안되더라구요. 그떄까지만해도 흑이 좋았는데 천야오예가 중앙에서 백 모양을 파괴하려구 둔 게 너무 과했던거 같아요. 그래서 승리한 것 같아요.'
기: 이번 대회에서 현재까지 젤 어려웠던 대국은? 린: '바로 오늘 천야오예와의 대국이요'
기: 이전에 패했던 일본기사 후지타와의 대국은 어땠어요? 린: '후지타(富士田明彦)도 실력이 있는 기사죠, 그 판은 후반에서 제가 잘못 뒀어요'
기: 언제부터 바둑을 배웠어요? 본인의 바둑 이력에 대해 얘기해주실래요? 린: '1980년에 출생했고 6살때쯤 유치원 대(大)반 (유치원은 대중소3개단계로 나뉨)때부터 바둑과 만날 기회를 가졌어요. 삼촌이 바둑을 둘 줄 알았고, 그때 당시 엄마도 바둑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더러 배우게 했죠. 그때는 타이완에 전문적으로 바둑을 가르치는 학원이 없었어요. 스스로 바둑선생을 찾아 배워야만 했어요. 아마도 9살인가 10살때 저는 정식으로 린성샨 7단의 제자가 되었죠. 진정으로 절을 올려서 제자가 됐다구요. 그때는 바둑 두는 애들이 많지 않았어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장쉬가 있었는데만 나중에 일본으로 떠났고 저우쥔쉰은 우리보다 늦게 배웠어요.'
기: 처음으로 참가했던 아마대회에 대한 인상은? 린: 너무 오래돼서 기억에 별다른 인상이 없어요
기: 타이완에서 20번넘게 우승을 따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국은? 린: 처음으로 우승한 대국이요. 현재는 왕좌전이라 불러요
기: 프로기사로써 대만에서 먹고 살만한가요? 대회상금 말고 바둑교육에 종사하나요? 린: 타이완의 일부 기사들은 상금만으로도 먹고 살수있어요. 일부분은 바둑을 가르치고 저는 양쪽 모두 하고 있구요. 사실 한가지에만 종사해도 괜찮은 생활을 할수 있어요'
기: 타이완에서 바둑은 환영 받나요? 린: '네, 엄청 환영받아요. 현재는 환경도 발달해 초보들도 입문하기 쉬워요. (화타이베이팀 리더 보충: 현재 타이완에 매 주말마다 기력측정 시합이 있다. 그 규모가 백명내지 천명까지 된다. 많은 어린이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
기자 : 대학 전공이 국제무역이라고 들었는데요. 현재 바둑이나 아니면 일상 생활속에서 사용하나요? 린: '주로 바둑을 두니까 전공은 적게 사용하네요. 현재는 개인자산운용과 개인투자에서 대학교에서 쌓은 지식을 조금이나마 사용할수 있는 거 같아요. 바둑에는 사용 못해요.'
차수권․주형욱, 구체에 올라
차수권 6단과 주형욱 6단이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어 완성에 이른다’는 구체(具體 7단의 별칭)에 올랐다.
7월 15일 열린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국내예선 1회전에서 차수권 7단은 3,000점(60국) 평균 50점으로, 주형욱 7단은 1,770점(25국) 평균 70점으로 승단에 성공했다.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차7단은 1985년 입단 후 제왕전, 왕위전, 천원전 등의 본선에서 활약했었다. 이하진 3단, 박지연 3단 등의 프로기사를 배출시켰으며 대한 중․고바둑연맹 회장을 역임하며 바둑보급에도 큰 힘을 보탰다.
2000년 입단한 주7단은 2011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우승팀인 포스코LED에서 활약한 바 있으며 지난 7월 제1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전에서 첫 세계대회 본선에 오르며 최고의 한해를 보내고 있다.
한편 김세동 4단이 ‘전투․기교를 떠나 지혜를 쓸 줄 안다’는 용지(用智․5단의 별칭)에 올랐고, 하호정 3단이 소교(小巧․4단의 별칭), 박민규․조인선 2단이 투력(鬪力․3단의 별칭), 한승주 초단은 약우(若愚․2단의 별칭)로 각각 한단씩 승단했다.
2011년 개정된 승단대회 규정에 의해, 승단대회는 기전 서열에 관계없이 모든 기사가 참가하는 기전의 예선 첫판 결과를 점수로 계산하는 것으로 변경된 바 있다. 기존에는 1년에 상위 10개 기전 중 10국을 대국해 승패에 따라 승단 점수를 부여했었다. 따라서 승단 점수에 반영된 기전이 10개가 되면 11번째 기전부터는 앞선 기전보다 규모가 더 크더라도 승단적용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