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신의 세상과 예수의 초대(3)
마 11:20-3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0-30 / [저주받은 도시; 눅10:13-15] 예수께서는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도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이렇게 꾸짖으셨다. 21) `화가 있으라. 고라신아. 화가 있으라, 벳새다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악한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부끄러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ㄱ)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게 베푼 이적을 소돔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ㄱ. 사14:13-15)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5) [그렇습니다, 아버지;눅10:21-22]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28) [내게로 와서 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ㄴ. 렘6:16)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설 교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마 11:28-30, 막 6:30-32 / 이동원 목사
박 귀영 님이 쓴 온 라인 수필집 “하루에 한번은 하늘을 보며”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마다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음표는 한 박자씩 잘 지키는데 쉼표는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쉼표의 박자를 정확히 지키게 하는 일이란 여간 쉽지가 않다. 흔히 음표는 연주 시에 음가만큼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이기에 쉽게 느낄 수 있지만, 쉼표는 그렇지 않기에 무던히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긴 나도 작곡을 하면서 쉼표는 박자를 기준대로 쉬어주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뚜렷한 개념 정립이 없었고, 그저 노래하다가 편리에 의해 잠시 적어두는 기호 아니면 연주자들이 호흡하기에 적당한 곳에 적어놓는 음표 보다 조금 못한 부수적인 숨표(숨표와 쉼표는 엄연히 다르다) 정도로만 인식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레슨 시간에 “너는 어떤 의미로 여기에다 쉼표를 썼지?”하는 교수님의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나는 궁색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쉼표도 음표와 마찬가지로 음악이야. 음표를 쓰는 의미만큼 쉼표도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은 후 쉼표에 대한 인식전환이 이루어졌다.]
이 글을 쓴 저자가 배워야 했던 ‘쉼표의 레슨’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레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가 6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막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미쳐 숨고르기도 하지 못한 채 헐레벌떡 전도 보고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전도 보고를 중단하시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6:31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쉼을 취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쉼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쉼을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이 영적인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쉼을 상실한 원인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인 해결 없이는 진정한 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된 쉼, 곧 안식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본문인 마태11:28-30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참된 안식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1. “내게 오라”는 것입니다.
마태11:28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주께서 여기에 언급하신 수고의 짐은 죄의 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수고는 죄와 더불어 인류의 삶에 장에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네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했고, 하와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창3:16)고 했습니다. 타락이후 러시아의 기독교 작가 도스토엡스키의 말처럼 “이제 죄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수고로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 만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수고로운 인생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이 수고로운 인생 짐을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은 메시아(구세주)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일찍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사53:4)고. 바로 그분 우리의 죄와 수고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오늘도 수고의 짐을 지고 안식을 모르는 인생들을 초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Come to Me)고.
여기서 우리가 “주께 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종교는 또 다른 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신 이유이시기도 하였습니다. 마태23:4에서 그는 당시의 대표적 종교인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적 신앙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닌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는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닌 자유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8:32,36)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도 기독교를 인류를 억압하는 하나의 종교 시스템으로 오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짐으로서의 신앙을 떠나가 있었던 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그가 얻은 참 마음의 안식에 대하여 그의 책 ‘신앙론’에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나는 55년 나의 인생동안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나이 18세 되던 해 나의 친구가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한 말에 설득되어 나는 어릴 적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떠났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속박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나는 내가 스스로 버린 어머니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의 구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발견한 것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안식, 영혼의 쉼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오셔야 합니다.
2.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마태11:29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Learn from Me). 여기 ‘배우라’는 말이 다시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아니 예수님 앞에 왔으면 되었지 다시 배워야만 합니까? 물론 예수님에게 나아온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인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히4:3에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안식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음으로 주어진 마음의 평화요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유지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안식의 선물이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배움을 노동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즐거운 여가선용이어야 합니다. 영어로 여가를 ‘leisure'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희랍어의 ’schole'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서 또한 영어의 ‘school'이 이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즐겁게 놀이하듯 학습하는 사람들-주님은 그들에게 마음의 쉼을 누리는 평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런 학습이나 훈련을 힘든 또 하나의 수고로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첨부하신 말씀이 마태11:30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새는 날개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예수의 제자들은 그래서 그분에게 배우는 훈련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일은 무거운 짐이 아닌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메게 될 때 유능한 소에게 다른 한 마리의 소가 그 의지를 복종시키고 따르면 그는 미숀을 쉽고 즐겁게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안식은 없습니다. 누가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주일만 땡하고 나왔다가 사라지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성경공부하고 훈련받고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금번에 우리 교회에서는 좀더 효율적인 안식의 누림을 위해 가평에 영성 센타/전원 교회를 건립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지구촌 성도들이 좀 더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서 인생을 쉬어 가며 영성 훈련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안식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이런 글이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가장 위험한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입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납니다. 인생의 쉼표는 인생의 브레이크입니다.” 이 수양관은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추어 가며 동시에 보다 행복한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우리들의 영혼의 치유 센터가 될 것입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밀라노 한 마음 교회의 성도 이 현주님이 쓰신 아름다운 묵상 “잠시 쉼표가 주는 여유”라는 글을 접한 일이 있습니다. 들어 보실까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오래 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 돌아 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하는 쉼은 단순한 활동의 중지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본문 마태11:29에서의 ‘쉼’은 희랍어에서 ‘아나 포신’(anapausin)인데 ‘아나’(ana)는 ‘다시’라는 뜻이고 ‘포신’(pausin)은 영어의 ‘pause'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한 '멈춤'이란 뜻입니다. 쉬고 나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은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읽히는 시중 책 중에 ’행복한 멈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본래의 제목은 ’행복한 멈춤‘이 아닌 ’능력 있는 멈춤‘(Power Pause)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하루에 단 3분이라도 멈추어 서서 행복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경이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제가 미국 워싱톤에서 목회할 때 워싱톤 시내에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ur)라는 독특한 교회가 있어서 가끔 방문하곤 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 숫자는 많지 않은 교회지만 미국 내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는 교회요 사회 봉사의 모델 교회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회입니다. 한 열 개의 공동체로 흩어져 각 모임마다 백 명 전후로 모이는 교회인데(합해도 천명 미만의 교회)이 교회가 감당하는 사역은 이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 크지 않은 교회가 감당하는 대표적인 사역들을 한번 열거해 보겠습니다.
1.The Potter's House/카페와 서점 사역
2.Jubilee Housing/저임금 가족을 위한 주택 보급 사역(350세대가 입주한 아파트 운영)
3.Jubilee Jobs/직업 및 직장 알선 사역(매년 1,000여명 훈련)
4.Columbia Road Health Care Center/저 임금 가족들을 위한 진료 사역
5.Christ House/노숙자 병원 사역
6.Good Shepherd Ministries/방과후 아동 지도 사역
7.The Family Place/학령전 유아 탁아 사역
8.Sarah's Circle/노인 사역
9.Samaritan's Inn/알콜 및 마약 중독 치유 사역
10.Festival Center/교회 섬김 훈련 총괄 행정 사역
그런데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적은 인원으로 이렇게 많은 자원 봉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이 교회 봉사자들은 모두가 이런 봉사 그룹에서 대부분 20년, 30년 이상을 섬기고 있는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섬김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나이 많은 할머니 대답이 “우리는 매일 한 시간의 기도와 한달에 한번씩 방문하는 데이 스프링스(Daysprings)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 스프링스가 무엇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침묵 수양관’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한 달에 한번 그곳에 가서 엎드리면 주님의 손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주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곳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누리는 안식의 영성을 함께 경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가평 수양관이 바로 우리들의 이런 데이 스프링스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영적 쉼을 필요로 하는 인생 순례자들, 피곤하고 지친 나그네들에게 일년 후 오픈 될 '가평 지구촌 필그림(Pilgrim) 하우스'가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의 진정한 영혼의 쉼터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마 11:28-30 / 김철현 목사
<동양의학>에서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이라 하여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체질을 보고 맞는 음식과 맞지 않는 음식을 가려내고 약재를 쓸 때도 이 체질에 따라 각기 다르게 사용합니다. 그런데<서양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기질로 구분합니다. 의학의 창시자라 불리는[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사람의 기질을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로 나눈<인간의 기질 설>이 그것입니다.
먼저, 다혈질의 기질은 어떤 일에 대해 쉽게 반응을 나타내며 표정만으로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정도로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혼자 있기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여 주위에 친구들이 항상 많습니다. 잘못 된 일에는 쉽게 분노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동정적인 성품입니다. 매사가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보니 쉽게 흥분하여 일 전체를 그릇된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침착하지 못하고 꾸준하지 못합니다. 화를 내기도 잘하고 사과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뒤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다혈질인 사람이 많습니다.
두 번째로 담즙질은 우리가 흔히"담이 크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능동적이고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고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다혈질이 충동적으로 움직인다면 이 담즙질은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움직입니다. 언제나 실제적이어서"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다소 거칠고 화를 잘 내며 오만의 위험성이 있고 이기적이고 독재자의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혈질의 사람이 쉽게 화를 내고 쉽게 화해하는 것과는 달리 담즙질의 사람은 한 번 화를 내면 계속 품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세 번째 기질은 우울질인데 감수성이 예민하고 분석적이고 희생적이며 재능이 많습니다. 창의적 사고에 상상력이 활발합니다. 매사를 사려 깊게 생각하며 이상주의자이며, 완전주의 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사귀려고 하지는 않지만 한 번 사귄 사람은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우정을 지키는 기질입니다. 앞장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자신을 희생시키고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단점은 항상 심사숙고하다가 때로는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좋은 모습 같지만 지나친 분석력 때문에 속으로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한숨 쉬고, 좌절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점액질의 사람은 태평스러우면서도 유연하여서 어느 환경에서나 감정을 잘 조절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카운셀러 타입>입니다.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찾는 방법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느린 것과 게으름이 이 사람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성취욕이 없어서 삶을 방관하기 쉽고 다른 사람의 멋진 계획에 찬물을 끼얹어 사람들을 곧 잘 실망시켜버립니다.
우리들도 이 네 가지 중에 어떤 하나의 기질에 해당할 것입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기질이 있습니다. 어느 기질이 좋고 어느 기질이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과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점들만 고루 갖출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좋겠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바로 성령 충만한 기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기질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야말로 타고난 기질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기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질들이 참 많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를 본문에서 배우게 됩니다. 바로<온유>가 그것입니다.
교육학에<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하아로우교수]가 실험을 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인데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고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어 우유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동물들도 딱딱하고 거친 것보다는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기 마련입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많고, 이웃이 많은 법입니다.
이렇듯 온유함이라고 하는 깊은 성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에서 나오는 덕성입니다. 한참 전부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지성이냐, 감성이냐 하는 문제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즉 IQ냐 EQ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한 동안 사람의 성공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IQ를 꼽았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꼭 천재라 불렀고, 그의 성공의 비결은 머리가 뛰어난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그의 IQ가 뛰어나면 무조건 성공할 사람, 무엇이든지 잘 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 어떻습니까?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나, 범죄자들 중에도 IQ가 뛰어난 사람이 훨씬 많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충분히 나쁜 일에도 사용할 수 있는 지성이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감성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IQ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 통념을 뒤흔든 것이 바로 EQ(Emotional Quotient)라고 하는<감성지수>입니다. 지능지수가 <머리의 지수>라면 감성지수는 <마음의 지수>입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인[다니엘 골먼]이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인간의 능력은 지능지수로 표시되는 두뇌력 보다는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성격에 의해 더 정확하게 측정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성품 화된 지능>이 필요합니다. 머리로 익히고 습득해서 임시방편적으로 사용하고 마는 지식이 아니라 자제력이 있고 일관성도 있고 지구력도 있고 자기 동기를 부여할 줄 아는 그런 지능을 가진 인간을 만나야겠고 이런 인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성품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온유함입니다. 왜 온유함이 필요한지 그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온유(溫柔)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프라우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원래 이 단어는 사람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공격적으로 사용 되던 개나 사자나 야생마를 훈련을 시켜서 그 엄청난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생마를 그냥 두면 들판에 뛰어다닐 뿐이지만 잘 길들어지면 밭을 갈고 짐을 운반하는 인간과 자기 주인에게 아주 유용한 짐승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을 온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사람에게 사용하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뜻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고로 온유한 성품이란, 내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참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부수고 무너뜨릴 수 있지만 나를 억제하고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옛날에는 제어할 수 없어서 수 없이 되풀이했던 성품이었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 법을 압니다. 훈련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조절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온유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모세]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동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사람을 쳐 죽일 만큼 혈기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한 십계명을 아로새겨 주신 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걸 보고 분노함이 충천하여 그 돌판을 내려쳐서 깨뜨리는 그런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모세가 화를 내며 혈기로 반석을 두 번 내려치는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실수가 있는 사람이요, 혈기에 찬 사람이요, 다혈질의 사람인데 그런 모세를 두고 민수기12:3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온유하지 못했던 모세의 허물까지도 덮어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까? 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많은 훈련을 통하여 자기가 온전히 죽어지는 경험을 했고 그랬을 때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세의 온유는 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얻어진 후천적인 성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비록 선천적으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출생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성령을 의지하면 충분히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나 자신으로는 안 됩니다. 여전히 혈기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한다면 충분히 온유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 때, 성령을 의지할 때, 신앙으로 살 때 분명히 주어지는 기질입니다.
오늘 본분의 예수님의 온유를 배웁니다.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회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받아들인 결정입니다. 폭력 앞에 기가 죽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벗어날 힘이 없어서 자포자기하고 지신 십자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스스로 낮추시고 자의적으로 받아들인 온유의 십자가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잘 아십니다."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난 나대로 생각이 있습니다만 내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나대로 피할 방도가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는 온유의 극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도 지실만큼 온유하셨는데 왜 우리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온유한 삶을 살지 못합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되어야합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제자라면 이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시다면 반드시 온유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온유는 하나님의 사람 된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마 11:28-30 / 김경수 목사
한국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근거를 댈 수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교육열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작금의 교육 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열은 대단합니다. 향후 교육의 양에 대한 자부심도 가져야 하겠지만 이제는 교육의 질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배움은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적 종교로 전락하기 쉽고 배움이 없는 신앙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십중팔구 넘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 가지 면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역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주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장소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산 위에서도 말씀하시고 회당에서도 가르쳤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말씀하시고 적절한 비유의 대상물을 발견하시면 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쉐마교육으로 유명합니다. 쉐마교육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부터 듣고 배우면서 자랍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민족 중에서도 탁월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자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듣고 묵상하고 배움으로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십시오. 배울 수 있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주님의 두 번째 가르침은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이 특별히 요청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눅11: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기도의 표본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공급과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가 없다면 그는 마치 무기를 들지도 않고 전쟁터에 나가는 무모한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르비딤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르치고 싶었던 교훈은 기도였습니다. 기도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곳까지 갈 수 있으며 오를 수 있습니다.
(출17:11)-“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17: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기도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만사를 형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개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가르침은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주님께서 당신에게 와서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29상)-“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 세상은 정보와 기술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만 인간의 행복이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외형적 면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그에 비해 반드시 비례하지만은 않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나 마음에 대해서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소생시키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지 않습니까?
(롬10: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다면 주님의 어떤 마음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죄와 세상, 그리고 악한 영들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시 염려와 근심, 낙심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낙수에 바위가 패이듯이 계속되는 염려와 근심, 낙심과 두려움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가서 끝내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낙심치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28-29)-“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염려와 근심, 낙심과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인데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쉼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약속은 마감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쉼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처음 믿을 때에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었지만 오래되지 않아 다시 옛 습관과 부패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받아야 할 마음이 다시 거칠고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주님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지속적인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롬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받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듯 하지만 뒤돌아서면 변화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분개하는 일들이 얼마나 허다합니까? 분노하는 자신 때문에 자긍심은 낮아지고 자신감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께 나아가서 배우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세에 민족을 해방시켜 보겠다고 칼을 들고 나섰을 때 고작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굽 군사 한 명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탄로가 나고 어쩔 수 없이 광야로 도망을 하면서 또 40년 동안 연단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 40년 동안 그가 배운 것은 온유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번의 분노가 일을 그르치고 관계를 깨뜨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연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가 마음에 가르치고 또 가르친 것은 분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분노를 할 순간에는 일시적인 감정의 만족을 누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감정의 만족을 누리는 대가로 치루어야 할 결과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화를 내지만 뒷끝은 없어.”
이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분노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관계를 깨뜨리며 일을 그르쳐 놓고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해 결국 동생을 죽이게 되지 않습니까?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죄입니다. 온유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출애굽하던 모세도 단 한 번의 분노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얼마나 절통한 일입니까? 그토록 사모하던 하나님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평안을 몰아내는 적입니다. 결코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분노는 일시적 감정의 만족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후회와 절망을 뒤집어 써야 하는 것입니다. 회복되기가 쉽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십자가에 달려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십시오.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인내하시고 참으신 그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 정중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밑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갈 때 우리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고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주님의 마음은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사고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베푸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의 고향 사람들이 불신을 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상당히 당혹스럽게 여기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 많은 무리들이 모였는데 그들이 궁핍한 것을 아시고 빌립에게 어떻게 하여야 이 사람들로 먹을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빌립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많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셨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옆에 있던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물론 매우 보잘것 없는 것이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안드레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의 마음이 긍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축사하시고 나눠 주실 때에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원대로 먹고 남기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의 역사는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긍정적 사고와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비가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긍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간구하면서도 불신에 가득 찬 고백을 합니다.
(막9: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당신의 능력에 대해서 불신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이 없는 것을 질타하셨습니다.
(막9: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불가능한 마음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못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긍정적인 마음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정적이고 패배적입니다. 이 마음은 배움을 통해서 소유한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과 가능성의 사고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가능성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것이죠. 주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창18: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배움을 통해서 소유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주님의 사고는 긍정적이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선교 사역을 하실 때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위기를 만났겠습니까? 실지로 그는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짐승들의 위협, 질병의 위기, 환경의 고난,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환난을 겪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원망을 하고 낙심을 하며 포기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숱한 위기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무엇을 학습했습니까?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과 사고였던 것입니다.
(빌4:11-12)-“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배웠다는 것입니다. 학습을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위대한 긍정적인 외침을 사자후처럼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빌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계산적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관습적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과 사고를 통해 주님의 기적적인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정적인 마음을 소유하십시오. 긍정적인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그렇게 학습이 되려면 두 가지를 반복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먼저는, 의심치 않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축복을 의심치 않는다고 외침으로 시작을 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좋은 것을 기대한다고 간구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좋은 것을 누리기를 소원하십니다. 풍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심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기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배워야 할 주님의 마음은 격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격려를 하십니다. 격려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죠. 격려는 동력이기 때문에 당신의 사람들에게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실수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부터 그들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연구해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뒤따라가면서도 서로 자리다툼을 합니다. 실수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급기야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확인까지 했음에도 베드로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고향에 가서 고기나 잡으며 여생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해변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요21:6)-“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자신을 책망하고 야단을 쳐도 얼굴을 들 수 없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배려하시고 기적을 통해 풍성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난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면서 베드로를 격려하시면서 세우십니다.
이런 뜻이겠죠. “베드로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어. 나는 너의 과거를 이미 잊었다. 그러나 너도 그 일을 잊으렴. 그리고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겠니? 나는 네가 화이팅을 했으면 좋겠어.”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화이팅을 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까? 과거의 허물입니까? 실수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의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듭니까?
잊으십시오. 주님께서도 모두 잊었습니다. 그리고 파이팅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파이팅을 하십시오. 도와주시겠다는 소망의 말씀으로 파이팅을 하십시오.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까?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입니다. 마지막으로 격려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쉼이 있고 기적이 있으며 높은 곳으로 비상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라
마 11:28-30 / 이중표 목사
사람이 살아가는 생의 전 과정은 끊임없이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심에 있는 어떤 갈증에 대한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욕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라오는 고통도 다릅니다.
스탠포드 대학 연구소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심리유형을 연구했습니다. 생계유지형, 외부지향형, 내부지향형입니다. 생계유지형은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하는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추구합니다. 외부지향형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살까, 남보다 더 출세할까, 성공할까 하면서 외형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내부지향형은 풍성한 삶을 내면에서 찾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면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찰스 핸디라는 사람이 쓴「헝그리 정신」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배고픈 갈증을 가지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 세 부류에 속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건강하게 살까,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갈등, 또 ‘내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성공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갈등 속에서 몸부림치는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헝그리 정신, 욕구의 갈증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먹고 살까’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 칩니다. 또 성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면서 배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배우지만 인격적인 삶은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수고와 짐을 덜고 안식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 쉼을 위해 예수님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다운 쉼과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백성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사람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도록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간들, 기본적인 생존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움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은 “내가 너희를 만족케 하겠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만족해야만 쉼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배우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자신을 성찰해야 됩니다. 내가 무리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입었는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무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배운대로 성격도, 인간성도, 체질도, 기질도 다 형성되었습니다. 부모의 운명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우리 사회에 물려진 습관과 문화가 오늘의 사회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움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잘 배우면 잘 배운대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잘못 배우면 잘못 배운대로 인간은 불행하고 굴절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성격도 배운대로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대로 또 배운대로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배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식에게, 아내에게, 사회 속에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거의 배운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친구를 사귀면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우고, 사회에서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배운대로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배웠든, 친구에게서 배웠든, 사회에서 배웠든 그대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행복도 마음에 있고 불행도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지옥으로,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삼중고의 인간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답운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가슴으로만 느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월리암 제임스는 “우리 세대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꾸므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과, 행복과, 불행과, 삶의 모든 자유가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도 인간의 모든 고통을 마음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해와 생로병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이 다 고통인데 불교의 팔고 가운데 이별예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 헤어지는 고통, 물질을 잃어버리고, 권세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의 잃어버림, 높은 권세의 잃어버림, 만나서는 안될 사람을 만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서 미워하고 사는 고통, 만나서는 안될 사고를 만나는 고통, 구했는데 얻지 못하는 구득불고의 고통,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돈을 못버는 고통,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 떨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마음속에 쌓이는데 여기에서 자유하는 경지를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자기 몸을 고행을 해서 깨뜨려 가는 것이 불교요, 기독교는 내가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깨뜨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온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온순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자연적인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신 성품입니다. 온순은 겉사람의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속사람의 성품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삽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삽니다. 온순하면서도 예수를 안믿을 수 있지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끝까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고, 화평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5-8).
이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온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완전히 별세시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를 멘다는 말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은혜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사함 받으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사건이요, 초보적인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높은 단계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본받고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고 세상을 살려내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이것이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마음속에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왔으니 하나님을 배워야지’ 하나님 배우러 신학교에 갔으니까요. 그런데 교수님들을 보니까 자기들이 배운 신학을 가르치는데 열중하지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근본적인 목적이 없어요. 그래 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마태복음 11장 29절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를 배운다는 것이요, 예수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배움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이 제 생애를 새롭게 만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앉아있어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길을 걸어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잠을 자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배움이 바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인데 예수 배움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대립되는 두 신학이 있는데 복음주의 신학과 진보주의 신학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을 가르쳤고 진보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이 3년동안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르쳤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별세신학은 뭐냐? 내가 죽고 살아서 나를 변화시켜 세상을 살려놓는 신학입니다. 죽은 후의 천국을 얘기하고,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와 현세를 여기서부터 끌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성경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 나의 행복, 나의 전부,
이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새 하늘이요, 땅을 보니 새 땅이라
현세와 내세가 함께 만나니 신비한 세계로다.
예수를 배우되 죽은 예수만 배우지 말고 산 예수만 배우지 말고 죽고 사신 예수를 배워야 됩니다. 죽으라고만 하면 다 싫어합니다. 죽고 살라고 해야 좋아합니다. 신비한 비밀은 죽지 않고는 살지 못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죽으면 많이 산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 옛날 카톨릭의 신부들처럼 몸을 피가 나도록 때리고, 못에다 자기 몸을 찔러서 어떤 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들면 여기 종이 한 장과 성경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종이와 성경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 종이와 성경은 따로 놉니다. 종이와 성경을 함께 두려고 풀을 묻혀서 붙이고 테이프로 붙이면 어느 기간까지는 잘 붙어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찢어져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종이를 끼워 넣으면 종이는 성경이 가는대로 따라갑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 십자가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예수가 죽을 때 나도 죽고 예수가 부활할 때 나도 사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메고 있으니까 나는 그 속에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맞는 고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농촌에서 지게를 져보니까 지게가 안맞으면 아주 큰 고통입니다. 지게가 나에게 딱 맞아야 힘이 덜 들고 짐도 가볍지 너무 크든지 작든지 하면 짐보다 지게가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이와같이 멍에도 딱 맞아야 짐을 나르고 밭 가는데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멍에가 나에게 딱 맞느냐? 예수님의 멍에에다 나를 맞추어버리면 됩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맞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사회에 맞지 않아서 이 사회가 고통입니다. 부부간에 맞지 않아서 사네 안사네 고통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혼률이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이혼사유 1위가 성격차이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직장이 맞지 않으면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맞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고통입니다.
왜 맞지 않습니까? 멍에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같이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제는 예수 십자가 속에 자기가 꼭 끼어버린 것입니다. 예수와 꼭 맞으면 그때부터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맞습니다.
이 세상에서 맞추기가 제일 어려운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요, 우리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분이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요, 우리는 악한 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맞겠습니까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이 어떻게 맞겠습니까 도저히 안맞습니다.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안살려고 믿고 또 천당이 있기는 있는데 안가려고 합니다. 천당 가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천당 얘기하지 가려고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천당 가려고 믿으면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예수님하고 살려고 믿으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 살기가 어렵습니까?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야만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예수와 맞아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다 맞습니다. 어떤 까다로운 남편과도 맞습니다. 예수의 뜻을 어떻게 맞춥니까? 십자가에 죽으므로 맞춥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와 함께 죽으므로 모든 것이 맞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도 다른 사람들은 탄식하는데 혼자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멍에는 쉽다’는 말은 꼭 맞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짐이 가벼워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배운 자의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정신병
마 11:28-30 / 박지온 목사
당신은 세계를 살릴 선교자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직접 나가서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앉아서 기도하는 것도 선교하는 것입니다.
정신병은 치료가 안됩니다. 치유를 받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하지만, 원천적으로 세상 자체가 모두 정신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에 정신병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치유가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히죽거리며 돌아 다니는 것만 정신병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이 정상이 아닌 것도 모두 정신병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대마다 정신병이 생깁니까? 그것은 바로 '불신앙'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웠지만,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을 둘러싼 세상이 불신앙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불신앙의 배경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시대와 이 시간에도 왜 문제가 오느냐?'입니다. 그것도 바로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불신앙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을 내는만큼 신비나 인본주의나 율법으로 빠지게 될 뿐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불신앙에 붙잡히게 된 배경이 바로 '이성'입니다. 신학교에서도 변증학을 배울 때 이성과 믿음에 대해서 논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성으로 살지만, 그 한계 속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해도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 생각의 틀 속에 갇혀서 살아왔습니다. 창조주, 초자연적 전능의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완전히 주관하신다'는 것이 안믿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권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기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백 번 기도해도 하나님이 주권자가 아니고 내가 주권자가 되어 있으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데, 5분 뒤의 일도 알지 못하는 자기 생각의 틀로 모든 것을 결정할 뿐입니다. 내 이성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믿고 맡기는 것 뿐인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반 죽어서야 '내 마음대로 안되는구나'라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그 때에서야 겨우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는구나'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면 조금 달라집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또 다시 돌아갑니다.
화원 동산 쪽으로 산보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화원 동산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강쪽으로는 전부 절벽입니다. 그 길을 올라갈 때마다 폴짝 뛰면 그대로 직행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정말 죽고 사는 것은 간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데도 안뛰어내립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의 평생을 부모가 데리고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깜깜하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자라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1.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1) 원인
1)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온 것이 바로 죄에 빠진 것입니다. 죄에 빠지면서 세상에 빠지고, 저주 속에 빠졌습니다.
3) 이렇게 하는 배경이 바로 사단입니다.
불신앙이 오는 동시에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사단의 손에 빠졌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나자 사단의 손에 잡힌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는 순간부터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사단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이것을 인간이 망하는 '원인'이라고 합니다.
(2) 결과
1) 영적 문제가 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아무리 신앙 생활 잘하는 것 같아도 영적 문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에 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문제만 생기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지고 사단에게 붙잡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습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여기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사단은 미제, 일제, 국산이 따로 없습니다. 사단은 정해진 모습도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2) 정신 문제가 옵니다. 영적 문제에 바졌기 때문에 정신 문제가 옵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 병자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내가 정말로 정신병 중증이다.'라고 고백합니다.
3) 육신 문제가 따라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육신적인 문제는 대를 이어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육신 문제는 영적 문제와 정신 문제의 배경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앓고 있는 육신 문제가 대개는 기본 문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4) 이러한 배경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의 후손도 소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운동'은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부르짖고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자'라는 것이 우리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다가 이상하게 여겨져서 이단으로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밖에 없다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시고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하나님 만나게 하는 '선지직', 죄를 해결한 '제사장직', 사단을 깨뜨린 '왕직' 이 세가지 직분을 한꺼번에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의인입니다. 인간을 기본 문제에 빠지게 한 정체가 바로 사단인데, 그 사단을 깨뜨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든지, 사단에게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해있습니다.
'그리스도 운동'은 세상에 빠진 문제를 해결하신 선지자,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제사장, 사단의 문제를 해결하신 왕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가을호 간증문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영접하는 순간에 얼굴 빛이 달라지고 평안이 임했다는 공통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다른 소리 하지말고, 그저 평범한 것 같지만 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할 때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때에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언약을 잡고 기도한다면, 부담없이 생긴대로 생활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안겨주십니다. 각자의 성질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내가 억지로 한다고 해서 전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이 운동 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2. 정신병의 종류
불신앙의 배경에서 모든 사람이 영적 문제, 정신 문제, 육신 문제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배경 때문에 주로 나타나는 정신병이나 생각이나 마음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상처는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상처를 건드리면 안됩니다. 100가지 잘해주어도 상처를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터져버리면 정상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건드릴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합니다.
(2)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습니다.
(3) 환경이 있습니다. 가난하게 자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부자로 자라면 더 큰 정신 문제가 있습니다. 질병을 앓으며 자라도 정신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4) 이렇게 되면 상식 이하로 되고, 기준 이하로 되고, 윤리 이하로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교통 질서를 안지킵니다. 우리 나라가 교통 질서만 지켜도 정신병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정말로 상식 이하요, 기준 이하요, 윤리 이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본 문제의 배경 때문입니다.
(5) 이렇게 될 때에 돌출 행위가 나옵니다. 마음에 안정과 평안이 없으니까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속에 있는 것이 폭발하여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가 금방 웃습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6) 지나친 긍정이나 부정이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부정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비판이 나옵니다. 원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불신하게 됩니다. 또는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무엇이든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당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결국은 다 망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서 이러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활동이 나옵니다. 과대망상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황당한 계획이 안되는 만큼 피해 의식에 싸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때에 보는 사람마다 귀하게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쳐야 됩니다. 그것은 정신병 1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되면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뭐든지 감사하게 됩니다. 가정이 이렇게 되면 전부 이해가 됩니다. 안그러면 전부 피해를 주는 자로 여겨집니다.
정신병은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만 열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정신병자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때부터 주변의 모든 환경이 치유되고, 하나님게서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나오게 됩니다.
정신 치유는 시대적 과제
마 11:28-30 / 박지온 목사
미국에도 복음 메시지가 들어가서 증거되는 과정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이 합리주의 속에 빠져있는 한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안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름대로 자기 이성에 빠져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거꾸로 생각하면 기도가 되면 다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신치유는 시대적 과제’라는 말은, ‘정신문제는 시대적 문제’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1. 불신앙
시대적으로 일어나는 정신문제는 바로 ‘불신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니까, 장로니까, 집사니까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디들이 변화된 면도 많이 있지만 이들에게서 나오는 문제는 ‘따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바로 불신앙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불신앙을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역사하십니다.
아침에 산보를 하면서 교인들이 교회에 가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습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들도 절대로 안 믿을 사람들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더 안 믿을 사람인데...’라는 생각에 멈칫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불신앙을 깨기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모릅니다.
어제 현기증이 나서 혈압을 재어보니 240-130으로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위험한 상황까지 갔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도 살아있으니 얼마나 기적입니까? 그래서, 제 딸이 ‘아빠 핏줄은 정말 질기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혈압이 매우 높아지는데도 위기에 부닥치지 않는 순간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습니다. 정말로 저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얻은 중요한 것이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교인들이 아침에 교회에 오는 것을 보며 할 일이 많은 벅참을 느낍니다. 오늘 아침에도 혈압이 어제와 똑같이 매우 높았는데도 현기증은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일은 해야 되고 믿지는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어서라도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이러냐?’라는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어코 나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다’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불신앙은 모든 시대에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신앙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성과 합리성입니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될수록 이성과 합리성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과 합리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일평생 고생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하늘에 닿도록 높은 대를 쌓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술은 놀라운 것입니다. 정말로 문명과 기술이 발달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저주스러운 징계를 내렸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던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될수록 인간은 더욱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자동차가 발달되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자동차로 인해 죽는 사람의 수가 어떠한 전염병으로 인해 죽는 수보다도 훨씬 많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의 현장에서 헤어짐이라는 큰 고통을 주셨습니다. 말을 나누어 전세계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결국 언어가 다르니까 서로 통하지 않게 되고, 서로 통하지 않으니까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과 싸운다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고, 정신병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러낸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선민을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택하여 함께하는 자들이 얼마나 축복받는 민족인가를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이성과 합리성에 매여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함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를 잇기위해서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한 배경이 바로 합리성입니다. ‘내가 아들을 못 낳을 것이니까 조카 롯을 양자로 삼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씨에 대해서도 언약을 주셨는데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한 뒤 기근이 오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도 바로 아브라함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을 고치는 과정이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이 아니고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못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혈압은 250에서 260을 넘어섭니다. 다만 너무 염려하실까 싶어서 20정도 낮추어서 240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만 생기면 이성과 합리성에 빠집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데리고 가다가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양치는 일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도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롯을 아브라함 곁에서 떠나게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끝까지 붙잡으려고 했던 롯을 떠나보내는 과정에 다툼이라는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정에 싸움이 나온다면 불신앙의 배경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롯이 떠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녀가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16절에서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들도 없고 조카 롯마저 떠나보냈는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하시자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라고 다시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라고 화를 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안 주면서 무엇을 준다고 하느냐고 화를 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고 하면서 정작 어려움이 계속 있으니 화를 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더욱 덤벼들며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15:3)’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너무 믿지 않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창15:6)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시고 축복하셨습니다.(창15:6-7)
그런데, 또 다시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15:8)’라며 믿지 못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서 다른 것은 모두 배를 갈라 둘로 나누어 놓았지만, 비둘기는 배를 가르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이 예배를 잘못 드린 배경은 언약이 이해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도 언약이 확인되지 않으면 가정 예배가 잘 되어지지 않습니다. 가정 예배는 비둘기처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예배 뿐만 아니라 가정 예배나 개인 예배도 모두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21)’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진짜로 신경질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로 인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언약 속에서 예배가 안되면 모든 것이 안되고 정신병이 옵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아내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자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창16:1-16) 분명히 언약을 주셨는데도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부부가 합작을 해서 불신앙을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주시면 인간은 믿어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방법이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빗나갈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 정신병이 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드디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먼저 선포하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아들은 주지 않고 열 받는 소리만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약속은 철떡같이 말하면서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6-8)’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아내의 이름을 ‘사래’에서 열국의 어미라는 뜻으로 ‘사라’라고 바꾸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썩같이 계속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계속 말해도,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합리성에 빠져서 믿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심중에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빠져 불신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정신병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도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라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라.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만 되면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못 믿으니까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은 기어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 자신이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이 믿든 믿지 않든, 기어코 이성과 합리성에서 빠져나와 믿을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후에도 물론 아브라함은 많은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이루십니다. 즉, 나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내가 네게 약속한 일을 내가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다, 안 믿는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전도가 되어지도록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에 빠져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치유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합리성은 모든 세대에 흐르는 정신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주여, 믿습니다.’라고 믿는 모습을 조금만 보여도 하나님은 사정없이 축복을 주십니다.
영육간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자, 창조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성과 합리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오직 은혜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시고 축복을 쏟아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모든 계획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고백을 조금만 해도 축복을 쏟아부으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축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2. 불신앙의 종류
(1) 범죄, 마약, 돌출, 지나친 부정적 생각, 지나친 긍정적 생각, 지나친 열심, 고정 관념 등이 모두 불신앙입니다.
(2) 악몽, 환상, 환청, 눌림, 점 등이 모두 불신앙입니다.
(3) 정신분열, 귀신의 실제적 역사, 통제 불가능, 기이한 질병, 가문의 질병 등이 모두 불신앙입니다.
3. 어떻게 해야 치유됩니까?
(1) 구원받아야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을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새창조의 능력이 임합니다. 그 때에 육신 치유, 환경 치유도 나옵니다.
(2) 영적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았으면, 그리스도가 바로 깨달아져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영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됩니다.
(3) 이 때부터 영적 치유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에서 기도밖에 할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창조주, 전능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남이 잘했다, 못했다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면 됩니다. 기도하면 평안이 임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려고 하면 스스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4) 이렇게 되면, 환경은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기도만 하면 됩니다. 환경과 여건도 하나님이 다 이루십니다.
(5) 육신 치유는 따라서 옵니다.
마약을 먹는 이유는 힘이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안과 감사와 안식이 있으면 육신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약이 필요없어집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면 건강이 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건강한 상태에서는 이성과 합리성에 빠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살살 건드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말씀을 듣고, 상대방을 살리는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서 그리스도만 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구원받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도 치유받게 됩니다.
위대한 초청
마 11:28-30 / 임덕순 목사
10여년 전 페루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가르시아 가르시아라는 페루 부통령의 점심초대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좋은 선교사를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어서 고맙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한 나라의 부통령의 초대라서 기억에 특별하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상적인 초청을 받아보신 적 있습니까? 오늘은 새생명 축제를 앞 둔 주일이어서 출애굽기 강해를 쉬고, ‘위대한 초청’에 대하여 상고하려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부를 때 밥 먹자, 놀러가자, 돈 있으면 투자해라. 함께 당을 만들자는 내용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은 초청입니다. 요즈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벨이 울립니다. 어디에 좋은 부동산 나왔으니 사라, 무슨 이벤트를 하는데 응모해라. 이런 초청은 달갑지 않은 초청입니다. 누구네 아이가 돌이다. 누구네 자제나 결혼식을 한다. 누가 칠순잔치를 한다는 초청도 특별히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초청은 결국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가장 큰 초청장입니다. 종이가 큰 것이 아니라 내용이 너무 큰 초청장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본문 말씀이 어째서 그렇게 위대한 초청입니까?
1. 위대하신 분이 부르는 초청이기에 위대한 초청입니다.
본문에서 사람을 부르시는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이 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운영하시는 만물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작은 강 몇 개를 막아서 땜을 만들어 놓고는 위대한 일을 했다고 자랑합니다.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해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물들을 관리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바다에 13억 입방 킬로미터의 바닷물과, 땅 속에 13억 입방 킬로의 지하수를 저장하셨고, 강에는 5만 입방 킬로의 강물을 관리하시고, 호수에는 6천 입방 킬로의 물을, 북극에는 25만 입방 킬로의 눈과 얼음을 놓아두셨고, 하늘에는 12,500 입방 킬로의 물을 구름으로 싸서 보관하고 운반중이십니다. 이 엄청난 양의 물을 차질 없이 관리하고 운행하심으로 이 지구촌의 전체 생명체를 살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큰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심은 조석으로 변하고, 강산도 10년이면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며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면서 세월이 가도, 전혀 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만물을 주관시는 분입니다.
삼성동 코엑스몰의 수족관을 가보면,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노니는 바다 속 풍경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모양과 살아가는 방법이 실로 신비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은 새와 물고기 땅위의 곤충과 짐승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몸을 주시고 그들의 한살이를 정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곤충들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살이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알에서 깨어나서 유충으로 살다가 성충이 되어 알을 낳고 고치를 짓고 들어감으로 한살이를 끝냅니다. 어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누가 오늘 나의 모습을 만들어 주셨습니까?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입니까? 누가 나를 만들어 오늘 여기에 세워 주셨는가를 아십니까? 사람은 아무도 그 비밀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답을 말씀해 줍니다.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존귀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사 43:7에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21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시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었다고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능력 있게 지으셨는지 아십니까? 사람은 산을 깎고 하늘을 날고 우주를 개척하고, 심지어는 자기들의 취미에 맞는 신을 만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은 가내공업 제품에 불과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신과, 인간을 만드신 참 신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4:13-17에는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라고 질문하십니다.
여러분은 우리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1) 성경은 인간이 매우 존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 물질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면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서 오직 인간만 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른 하등동물들과 구별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영 구분되는 지식과 언어와 무엇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졌고, 그 점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2) 사람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물론 죄에 찌든 인생이기 때문에 숭배하여야 할 대상자를 잘못 찾기도 하고, 숭배의 동기가 잘못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숭배의 대상을 찾는 그 종교성은 짐승에게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인간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종교성은 감히 부인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흔히,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면 종교는 소멸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입니다. 물질이 풍성할수록 영양이 넘치는 좋은 음식을 요구하는 것처럼, 인간은 발달할수록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종교를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종교성이 인간의 본질이요,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3) 성경은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며 생물을 다스리는 일체의 권한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 땅의 모든 동물과 식물과 자연과 우주까지 다스리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리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드리는 청지기 위치에 있습니다.
4)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식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안에 오직 사람만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배’ 라고 하는데, 세상의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며 만물을 다스리는 본래의 존귀한 위치에서 타락하여 형편없이 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타락은 추락과도 같은 의미인데, 높은 데서 추락한 물건은 쓸 수 없도록 망가지는 것처럼, 타락한 인간은 영혼과 도덕성이 망가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온갖 염려와 질병과 절망의 짐을 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인생을 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부르고 계십니다. 내게로 오면 내가 쉬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초청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초청은 위대한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잃어버린 평안과 존귀함과 영생을 다시 돌려주려고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이런 위대한 초청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초청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분이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2. 위대한 약속이 걸린 초청이기에
“무거운 짐을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왜 지치고 고달파 합니까? 제각기 짊어진 짐 때문입니다. 근심 걱정의 짐, 생활고의 짐, 그리고 질병과 죄 라는 짐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염려되고 답답합니다. 사람은 자기 운명도 자기가 마음대로 못하고, 내일 내가 어떤 문제를 만날지 알지도 못하고, 당장의 발등에 떨어진 문제도 풀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특히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죄라는 짐입니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어느 한시대도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산 때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평화시기가 지속되어도, 그 사회는 어김없이 퇴폐와 타락으로 이어져서 썩어갔습니다. 한 30년만 평안하고 풍요한 시대가 지속되어도 그 사회는 어김없이 퇴폐로 썩어갔습니다. 우리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물과 공기와 음식을 먹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남의 나라에만 가더라도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기회를 얻어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와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도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였고 섬기지도 않았고, 올바른 청지기 노릇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제각기 자기 쾌락과 유익을 위해서 남과 자연을 해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죄요 인생살이가 힘든 근본 원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셨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사람 중에서도 단 한사람도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악으로 점철되었고, 그래서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라고 성경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죄는 두 가지의 결과를 낳는데, 하나는 죄책감이라는 형벌이요, 또 하나는 오염이라는 것으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점점 오염시켜 전보다 더욱 악한 삶 속으로 빠져가게 만드는 죄의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책과 오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 내가 지은 죄는 어떤 대가로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망과 영원형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지어온 죄를 해결해 줄 구주가 필요하고 오늘 당하는 불안하고 답답한 문제들을 도와주고 인도해줄 인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너희가 무거운 짐을 졌다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리라" 고 약속하며 부르십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해 주겠다. 너희 인생의 짐을 덜어주겠다고 찾아와서 부르십니다. 얼마나 위대한 약속입니까?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초청은 위대한 초청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를 불러서, “내 비서실장을 시켜 줄 테니 오라.” 한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최고의 초청일겁니다. 그러나 그래 봐도 잠시 동안 어깨에 힘을 주는 것뿐이고, 대통령의 고민을 함께 져야하는 무거운 짐을 지자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짐을 벗겨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인생의 짐을 벗겨주기로 약속하면서, 내가 네 인생을 책임져 줄 테니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죄뿐만 아니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한 약속입니까? 변함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이 위대한 초청인 것은, 위대한 약속이 걸려있는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3. 위대한 결과를 낳는 초청이기에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그분을 따르면, 삶에 위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용서를 받아서 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속을 더럽게 한 오염은 성령의 역사로 제거되어 새 사람, 성결한 사람으로 거듭나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서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세상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 어디로 이사를 가더라도 사단이 방해 못하고, 무슨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 완전하게 준비된 천국을 열어 영접해 주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짐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라 짐이 쉽고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쓰고 몸부림치고 연구해도, 그렇게 애써도 안 되었는데 이제는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신바람이 납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해 주실까, 기대가 되어서 노래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열심히 기쁘게 하루를 산 다음에는 하나님의 인도해주신 흔적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도 누린 상상 못한 결과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체험한 하나님이 도우신 이야기를 누구한테 해 줄까,’ 하는 기쁜 마음으로 전도할 대상자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새로워진 삶, 가벼워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짐을 다 짊어진 채로 주님께로 와서 다 맡겨버리고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근심걱정 대신에 평안이 넘치고, 감사가 샘솟고, 입에는 찬송이 그칠 줄을 모르며,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모르고, 밤이 되면 단잠을 실컷 잘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리궁리 저리궁리 하면서 밤새 잠못자며 고민하던 때에는, 잠은 잠대로 못자고 일은 일대로 꼬여만 갔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는데, 일어나고 보면 일이 풀려 가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 결과입니다. 내게로 오면 편히 쉬게 해 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런 결과를 어디 가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길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서 따라가는 사람의 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위대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초청이 위대한 이유는 결과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진지하게 초청하십니다. 차별 없이 부르시는 은혜의 초청입니다. 이 초청에 진지하게 대답만 하면 하나님의 품에서, 그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습니다. 성경에 약속해주신 수많은 약속이 다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대답하는 방법은, 그분의 외아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문제를 맡겨 버리고, 자기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우리 마음과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삶에 나도 모르는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초청에 순종해서 예수를 믿고 죄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동행하시며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능력으로 판단력으로 돕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날마다 순간마다 함께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좋은 초청장을 우리만 감추어 두고, 우리만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살면 되겠습니까?
성경말씀 어디를 보아도 너희만 복을 누리라고 너희를 불렀다고 하지 않으셨고, 너희로 이방인의 빛을 삼아 만민을 구원하려고 너희를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도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집쟁이 유대주의자 바울, 무식하던 갈릴리어부 베드로,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는 세리였던 마태, 성질 급해서 언제나 사고만 치던 요한, 미국의 무식한 구둣방 수선공 무디, 이들이 주님을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전하기위해서 헌신한 뒤에는 세계사에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그들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도 우리 이웃들에게 이 위대한 초청, 위대한 복음을 전해서 이웃들에게도 소망과 위로와 구원을 주고, 우리도 위대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으십시다. 주님이 그 사람의 삶을 보장하시고 후손만대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위대한 초청을 전하는 위대한 사람들이 됩시다.
예수를 믿으면
마 11:28-30 / 임덕순 목사
오늘 교회에 처음 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왜 잘 오셨는가 하면, 교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뭐가 그리 좋으냐구요? 사람이 한번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믿음의 맛을 알면 평생을 믿게 되고, 자신만 예수 믿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도 평생을 예수 믿고 살기를 바라는 소원을 갖고 삽니다. 예수에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는 말이고, 그만큼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만 아니라 저 멀리 한번도 안 가본 외국사람들도 예수 믿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많은 돈을 헌금해서 선교사를 보내어 예수 믿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가 그리 좋을까요? 제가 지금부터 예수 믿으면 좋은 점을 아주 간단하고 쉽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1. 첫째는 죄를 용서 받습니다.
여러분도 요즈음 스트레스가 많으시지요? 그 스트레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Walter B. Cannon 이라는 학자는 “마음의 안정상태를 위협하는 사건이 스트레스이며, 그 결과 질병이 발생한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부딪치는 사건, 경제적 어려움, 직장생활, 인간관계, 자녀문제, 질병 등 아주 많으며, 성별에 따라, 연령 대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연령별로는 20대에서는 직장생활, 30대와 40대에서는 직장생활과 경제적 어려움, 50대에서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관계, 60대와 70대에서는 경제적 어려움, 자녀문제, 질병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답니다. 청소년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학업문제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진로문제, 친구문제, 이성문제, 건강문제의 순이었습니다.
스트레스는 사람의 신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심각한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무슨 병을 일으키는지 대충 몇 가지만 열거해 볼까요?
스트레스는 심장 박동수를 증가시키고 혈관경직을 일으켜 심하면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데, 심근경색은 발작 1시간 내 사망률이 30∼40%나 되는 위험한 병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뇌의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에 장시간 노출되고 만성적인 자극이 가해지는 상황에서는 체내의 혈당량이 높아지게 되어 당뇨병이 발생할 수 있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분비된 코티졸이라는 호르몬이 임파구의 수를 감소시킴으로써 면역기능을 약화시키면 여러 가지 감염성 질환을 유발하고, 암에 걸릴 가능성을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또 불안, 스트레스는 위산분비를 높여서 위궤양을 일으킵니다.
설사와 변비가 교대로 나타나고, 아랫배가 자주 아픈데도 검사를 해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를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 하는데, 이 증후군은 불안해지고 초조해질 때 대장의 운동이 너무 왕성해져서 설사를 일으키는 것이랍니다. 또한 스트레스는 교감신경계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혈압을 상승시켜서 고혈압을 유발합니다.
우리가 걱정거리가 있으면, 두통거리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두통은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육의 만성적 긴장 때문에 생기는 두통을 긴장성 두통이라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의 결과입니다.
이상의 신체적 질병 뿐 아니라 우울증, 공황장애,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 적응장애, 전환 장애 같은 심각한 정신장애가 스트레스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의학적 소견이며, 심하면 정신분열증이 생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생활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수치로 환산해본 연구결과가 있는데, 배우자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가 100, 이혼했을 때 73, 자신이 사고를 당했을 때 53, 결혼할 때 50, 실직하면 47, 임신하면 40, 가까운 친구의 죽음 37, 다른 부서로 배치되는 것 36, 많은 액수의 부채는 31, 자녀의 가출은 30, 직장 상사와의 갈등은 23 등으로 마음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에는 죄가 스트레스의 주범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잠 28:1에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누가 쫓아오지 않아도 늘 누가 쫓아오는 것 같고, 도망칠 길을 찾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옵니다. 그것 처럼 큰 스트레스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이 콩알만 해졌어요.” 이런 말들이 무슨 표현이지요? 무엇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누가 제일 가슴이 뛸까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지으면 가슴이 뜁니다. 얼굴이 빨개집니다. 심장에 부담이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스트레스는 내가 지은 죄 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줄 착각하고 있거나, 알면서도 다른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표현할 뿐입니다.
창 4:7에 보면,『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면 두 가지의 현상이 생기는데, 첫째는, 죄에 해당하는 형벌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고, 둘째는 한번 죄를 짓고 나면 그 죄가 나의 마음과 영혼을 오염시켜서 또 다른 죄를 짓게 한다는 점입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가는 길마다 따라다니면서 나를 죄악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죄를 벗어날 길이 없어 계속 죄를 짓습니다.
죄는 벌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벌을 받기도 전에 내 마음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한 스트레스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죄는 날마다 자기 몸 안에 질병을 만드는 공장노릇을 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자기 몸 안에 병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내 몸 안에서 심장병과 고혈압을 일으키고, 각종 암을 일으키고 무서운 정신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가 평생동안 나를 괴롭히다가 결국은 죽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만듭니다.
그래서, 땅위에서 사는 사람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죄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놔두면 두고두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속에서 병이 생기며, 죽어서라도 심판받아야 하는 죄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과제입니다. 이것은 빚을 갚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죄를 어디 가서 털어놓으며, 누구에게서 해결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털어놓으면 흉만 잡히고 소문만 납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 털어놓는다 해도, 죄는 전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세상에는 남의 죄를 해결해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고민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죄의 유혹에 이끌려서 또 다시 죄를 짓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라, 죄의 고리를 끊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나라에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일 1:9)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우리의 죄를 지우개로 지우듯이 완전하게 없애 주십니다. 동이 서에서 멀 듯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죄 값을 치르고 나와도 전과 기록이 남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것의 첫 단계는, 평생 동안 지은 죄를 한꺼번에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내가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그리고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그 어떤 죄라도 하나님은 깨끗하게 용서하고 도말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 용서의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으면 스트레스를 지워버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스트레스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저처럼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건 특권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특혜가 따릅니다. 어떤 특혜들이 있는지 살펴 볼까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다 알고 있어.” 라고 누구에게 협박을 받으면 가슴이 덜컥 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입만 열면 너는 끝장이야.” 라는 협박을 받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겁을 먹습니다. 완전하게 깨끗한 사람은 이 땅에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협박해서 먹고 사는 공갈범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들의 세계에서도 그렇게 사람을 협박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협박하는 존재입니다. “네가 조상신을 섬기지 앉으면 네 자손이 망한다. 큰 굿을 해서 막지 않으면 큰 액운을 겪게 된다.” 라고 사람들을 협박해서 사람들은 그 협박에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사한번을 가려고 해도 날짜를 잡아야 하고,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개업 하려고 해도 돼지대가리 삶아놓고 고사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귀신을 섬기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섬기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사를 갈 때 손 없는 날 받아 가겠습니까? 손 없는 날이란 귀신이 멀리 놀러가서 없는 날을 말하는데, 귀신 없는 날에 몰래 도망가자는 생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귀신의 해가 두려워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해칠 자가 없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사람을 누가 감히 해치겠습니까? 신자를 방해하고 가로막을 귀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도, 내가 가고 싶은 날 가도 됩니다. 결혼을 해도 날을 잡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어려울 때 돈 들여가며 창피하게 굿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입니다. 시간이나 행동에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를 해치려고 하면 그가 해를 받고, 누가 신자를 축복하면 그에게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누리는 특혜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불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자는 종교입니다. 욕심도 버리고 죄된 마음도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다스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아주 인연을 끊겠다고 손가락을 태우면서 각오를 해도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정말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삐뚤어진 마음을 고칠 수가 있으십니다. 겔 36:26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면 우리가 새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원망이 용서로 변하고, 미움이 동정으로 변합니다.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이 나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안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마음만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변화시켜 주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병든 몸이 치료가 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한 사람만 응답의 신비와 재미를 압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본 사람은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런 응답을 받았기에 우리교회는 27년 동안 40일 씩 기도하는 특별 기도를 이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새 목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돈 좀 많이 벌어서 누구한테 앙갚음 하고 사나, 하는 원한 맺힌 생각을 버리게 하시고, 이제는 이웃을 도와주며 살고 싶은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새로운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면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지고, 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악을 행하던 죄인인 내가, 선을 행하는 새 사람이 되게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때는 돕는 자가 없었습니다.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이 안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래서 점을 치고 운세를 보면서 불안하게 기웃거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잘못 갈 일이 없고 후회할 일이 없어집니다. 이만하면 멋진 삶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손만대에게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3. 영생을 얻습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어떤 종교도 말하지 못한 부활과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부활이 무엇일까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날이 온다고, 성경은 아주 확실하게, 아주 자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부활을 약속하셨을까요? 사람이 부활한 몸으로 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천국이라고 일컫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 대신 못 박혀 죽으신 것이고, 거기는 나 혼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데리러 오시는 일이 재림이며, 거기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려고 몸을 부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너무나 신비해서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일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가득 차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곤충의 평생은 알, 벌레, 나비로 몸을 바꿔가며 살아갑니다. 한 생명인데도 알일 때는 나뭇가지에 붙어있기 좋도록 작은 알 덩어리로 만드시고, 벌레일 때는 식물의 잎에서 살아가도록 작은 다리를 많이 붙여주셨고, 나비일 때는 하늘을 날도록 아주 예쁜 날개를 주셔서 공중을 날며 삽니다. 그들의 몸은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맞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몸입니다. 똑같이 그 생명인데도, 몸은 그가 사는 환경에 따라서 여러 개로 변화합니다.
신기하지요?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일이고 우리는 보기만 해도 신기합니다.
물 속에서는 허파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에게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날개 없이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들에게는 가볍고 강인한 날개를 가진 몸을 주셨습니다. 다리가 튼튼하지 않고는 거친 들을 누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에게는 강인한 다리를 가진 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참 지혜로우시고 신비하지 않습니까?
호주에 가면 오리너구리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그놈은 주둥이는 오리부리를 가졌는데 몸은 너구리입니다. 털이 북덕북덕하게 난 짐승인데, 물속에서 살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합니다. 이놈이 대체 새입니까? 짐승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신비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그 환경에 맞는 너무나 멋진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물인 곤충과 짐승들에게도 신비한 몸을 주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이요 당신의 형상인 사람들에게, 그것도 예수님 믿어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병들고 죄짓다가 죽는 이 몸 한개만 주셨겠습니까?
우리가 곤충이나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마시고 사는 물을 보십시오. 언제는 딱딱한 돌덩이 같은 얼음이 되고, 언제는 출렁출렁한 물이 되고, 언제는 보일락말락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않던가요? 분자가 바뀐 것은 아닌데, 환경 따라 물은 완전하게 모양이 변화합니다. 물을 그릇에 담아 가스렌지에 올려놓고 불을 켜면, 조금 뒤에는 물이 끓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면 서서히 물은 수증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리 고집센 물도, 나는 끝까지 물로서 살거야 하면서 버티지 못합니다. 물과 불을 만드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이, 물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 밑에 불만 다가와도 물이 변하여 증기가 되는데, 창조하신 하나님이 시체들을 일으키러 오시는데 그 앞에서 부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신비한 그것을 날마다 사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신비하고, 세상에는 그런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의심할 능력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일회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살리시되, 또 다시 죄짓고 스트레스 받고 병드는 이 몸으로가 아니라, 죄 없는 천국에서 살 완전한 새 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몸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완전한 몸입니다. 그것이 부활한 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과 날마다 인도를 받는 생활과 마지막의 부활과 영생을 얻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이 축복을 알려드리고 나누어 드리려고 여러분을 교회로 초청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오신 여러분들 모두가 예수를 구주로 믿어서 이 놀라운 구원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어떻게 받을까요? 어린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싶어서 가게 앞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갖고 싶어도 아이는 그것을 살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영 못 갖습니까?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시면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든지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전체의 구원을 선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모든 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서 구원의 선물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삶을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 부활과 영생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성숙의 요건
마 11:29 / 박봉수 목사
성장과 성숙은 다릅니다. 성장(growth)은 사람의 양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몸이 커가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은 우리말로 “자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maturation)은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사고의 깊이가 쌓여가고, 마음의 폭이 넓어가고, 인격이 고상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은 우리말로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아이로서 나이를 먹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키도 다 크고 배울 것도 다 배워 알아도 성숙하지 못하면 여전히 아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얼굴에 깊이 주름이 패인 아이, 수염을 기른 아이, 지팡이를 짚은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숙해야 합니다. 벼가 다 자라도 알곡이 누렇게 무르익어서 고개를 숙여야 추수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성장할 뿐 아니라 성숙해야 사람구실을 합니다. 어른다운 어른,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성장과 신앙성숙은 다릅니다. 신앙성장이란 신앙의 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에 관해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교회생활에 이력이 붙습니다. 점점 직분도 높아집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성숙이란 신앙의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인격이 원숙해 집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됩니다.
신앙이 성장했다고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성장했지만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 오래해서 직분은 남보다 높고, 맡은 일은 많은데 그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성장과 또 다른 신앙성숙에 대한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성숙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성숙의 열매를 맺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앙성숙의 요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성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묻는 사람에게 첫째가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묻자 둘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성숙의 우선적인 덕목 즉 요건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겸손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 밑에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굽신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보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굴함은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학대도 아닙니다. 이상 심리자들 중에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새디즘, 또는 매저키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들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 가장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천함으로 자기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묘한 위선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가장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전북 김제군 금산리에 가면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우선 교회 건물이 ‘기억자(ㄱ) 형’ 교회로 유명합니다.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예배당을 기억자로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이 교회는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씨와 그 집에서 마부로 머슴 생활하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양반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할 때 재미있는 것은 머슴인 이자익은 피택이 됐는데, 양반이던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질투심이 생길까요?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훌륭하다고 높이며 잘 도와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다음해 이 조덕삼은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후에 조덕삼은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시킵니다. 목사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후에 이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 나아가 우리 교단의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번도 힘든 총회장을 13회, 33회, 34회 세 번이나 역임하게 됩니다. 한국교회 유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가문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조덕삼씨 손주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자신을 바로 깨닫고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려면?
우리가 겸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겸손은 시작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단독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독자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참다운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 18:27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기도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면서 자신을 티끌과 같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겸손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고 난 뒤에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도 바로 깨닫게 될 때 참된 겸손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신앙이 성숙하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더욱 깊이 느껴갔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질적 차이를 기초로 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날로 성숙되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전 15:9을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사도인데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깨닫고 나니 사도 중에 정말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엡 3:8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사도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 반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딤전 1:15을 보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성도의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의 반열로 더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죄인들 중에서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도 점점 바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정말 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눈으로 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다 낫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다운 겸손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단계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코리텐 붐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나치의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간증으로 세계적인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한 번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저들이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간증이 끝날 때 청중들이 기립하여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때 이 코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기자가 물었습니다. “코리 여사님 기쁘지 않으십니까?” 이 때 코리 여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칠 때 주님이 타셨던 나귀가 자기보고 환호하는 줄 안다면 착각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단지 주님께서 타신 나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고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첫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존재 뿌리가 바로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성품을 대표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런 교만이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주어진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이 교만 역시 내 안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뿌리로부터 교만의 양분이 올라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채워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이 겸손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우리의 모델 삼아서 본 받고 배워가되 특히 주님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겸손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낮은 곳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주님의 모습은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왕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습니다. 저 높은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저 낮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지도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그들 곁을 버리시고 병자들,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철저하게 낮은 곳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높은 곳에 마음을 둡니다. 그 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낮은 곳에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여기서 교만이 싹트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웃의 한 주민이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수녀님 잘 사는 사람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 때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겸손은 주님처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살 때 실천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낮은 곳을 따뜻한 마음으로 살피고 그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2) 멍에를 매라는 것입니다.
빌 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죽으라 하셨을 때 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정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짐승들을 길들이고자 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기 위해 씌운 것입니다. 주인이 끄는 데로 가도록 하기 위해 어깨에 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도 멍에를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쓰신 주님 바로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주님께서 쓰신 그 멍에를 우리에게도 함께 쓰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를 메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3)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병자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찾아가셔서 기꺼이 친히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요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요 13:4을 보면 구체적인 주님의 섬김의 행동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셨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종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요 13:14-5을 보면 주님께서 이런 일련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씼겼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섬기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가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선생이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일산의 한 교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 700명 모이는 일산서는 제법 큰 교회입니다. 제직회에서 관리집사를 두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관리는 누가할 것인가?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 특히 은퇴 장로님들이 팀을 짜서 교회 관리에 필요한 여러 업무들을 맡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앞장서서 화장실 청소하고, 권사님들이 예배 전후에 교회 본당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며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직분도 많이 맡고...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품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의 겸손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멍에를 메고 살며,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멍에 나쁜 멍에
마 11:29-30 / 김원효 목사
설교: 성경에 보면 ‘멍에’라는 단어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제가 찾아보니 대략 50번 정도가 나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멍에’라는 말을 잘 모를 겁니다. 그리고 나이가 제법 있으신 분들도 시골에서 농사를 해보지 않은 분들은 ‘멍에’라는 말을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멍에’라는 말을 잘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 예수님도 ‘멍에’라는 단어를 사용하시고, 멍에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나 교훈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멍에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멍에의 뜻을 살펴봅시다. 멍에란 소나 나귀의 목에 얹어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둥그렇게 생긴 막대입니다.
이 멍에는 나쁜 의미도 있고 좋은 의미도 있습니다. 나쁜 의미의 멍에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죄의 멍에, 가난의 멍에, 질병의 멍에, 사탄의 멍에, 무거운 세금의 멍에, 강제 노동의 멍에, 술의 멍에, 마약의 멍에, 도박의 멍에... 등등입니다.
반면 좋은 의미의 멍에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의 멍에란 하나님의 뜻이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는 십자가나, 고난, 희생, 헌신, 노력, 책임감, 사명... 등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믿는 자의 멍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안 믿는 불신자보다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불신자보다 바르게 살아야 하는 부담감이 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개인적인 자유가 속박당하는 겁니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싶어도 성경이 가로막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그리고 주일 날 예배 안 드리고 놀러가고 싶은데 마음이 영- 찝찝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멍에가 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멍에는 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여성의 경우 늦게 결혼을 해도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경우는 결혼 전에 뭔가를 이루기 위해 결혼을 늦추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잖아요?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결혼을 하면 그건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총각한테 처녀들이 시집을 오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일찍 결혼을 하면 처녀로서 혹은 총각으로서의 자유가 속박되기 때문에 결혼을 늦게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혹 어떤 분은 그런 이유로 인해 아예 결혼을 안 하겠다는 비혼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결혼을 해보니까 남편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분명히 멍에가 있습니다. 즉 제약이 있습니다. 혼자 살 때는 방청소를 깨끗이 안 해도 뭐-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괜찮습니다. 그저 내가 편한 대로 하면 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내가 먹고 싶으면 먹고,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으면 됩니다. 어디를 가는 것도 얽매이지 않고 참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되고, 아내나 남편이 되면 멍에가 씌워집니다. 가족들과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어도 일을 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합니다. 여성의 경우 매일 식탁을 차립니다. 청소나 빨래 등 여러 가지 집안 살림을 합니다. 어린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 돌보느라고 자기를 가꿀 틈도 없습니다. 역시 아내라는 멍에가 씌워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보고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7-28 말씀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한국 속담에도 이런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제가 이 말씀대로 청년 시절에 하나님이 저에게 멍에를 씌워주셨습니다. 청년회 전도부장, 전도실장, 구역장, 조장, 그리고 교회학교 중등부 교사의 멍에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자유가 속박 당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거나 혹은 일찍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좀 세상적으로 지냈었는데, 이제는 이런 직분을 맡다보니 주일에 어디를 갈 수가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중 늦게까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어떤 분은 자기는 나중에 죽을 때가 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왜요? 아- 왜긴요. 일찍부터 하나님 믿으면 믿는 자의 멍에가 씌워져서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 때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뭐 그때는 날라리 신자였으니까, 믿어도 내 맘대로 믿은 겁니다. 교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적당히 술도 마셨습니다. 가끔 친구들이 조롱적으로 말합니다. “야 원효야! 너 교회 다닌다면서 술 마시냐?” “아- 이 자식이 또 왜 그래? 술맛 떨어지게.”
근데 25살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즉시 술과 담배를 끊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예배 등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하다 보니 세상 친구들 만날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술 마실 자리도 없어지고, 술친구들도 자연히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대신 주님이 주신 멍에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일꾼으로서 맡겨주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청년회에서 전도실장과 조장을 맡으면서 청년들을 돌보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늘 그들과 함께 지냈고, 그들을 돌보며,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그들을 위해 모든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청년 때부터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전도사가 되어 성인 교구를 맡았습니다. 처음 맡은 교구가 도봉구 미아리와 삼양동입니다.
그곳 교구 식구들이 웃으면서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전도사님, 여기는 동네가 좀 센 동네에요. 목회하시기 좀 어려우실 거예요. 호호호 깔깔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제가 좀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한 일 년 정도 지나다 보니까 세상에 목회하기가 이건 너무 쉬운 겁니다.
왜 그런가 보니 이미 젊었을 때에 청년회 조장과 전도실장이라는 멍에를 메고 믿음이 거의 없는 청년들을 돌보는 일을 4년 정도 했기에, 이미 믿음이 있고 모든 것이 갖춰진 성인들을 상대로 목회하는 것이 너무 쉬웠습니다. 뭐- 쉬울 정도가 아니라 참 즐거웠습니다. 물론 부흥도 제법 됐습니다.
보세요. 젊었을 때에 미리 훈련을 받아두면 나이가 먹어서 그런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좋은 멍에를 일찍부터 씌워주시기를 원합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멍에입니다. 이때 사람마다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처음 주의 종으로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주의 종으로 나갈까, 세상으로 나가서 돈을 벌까? 그때 저의 결단은 이겁니다. “내가 세상으로 나가서 돈을 벌며, 세상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또 적당히 죄를 짓고 사는 것보다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좀 근심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아- 나는 지금까지 세상적으로 노느라고 찬송도 잘 하지 못하고, 성경도 잘 모르고, 교회 생활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데...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영산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는데 음악 테스트가 있었습니다.
그 테스트를 하시는 분이 조용기 목사님 아내였던 김성혜 사모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이대 피아노과를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피아노 앞에서 저에게 피아노를 한번 쳐보라고 합니다. “오- 마이 갓!” 아니- 내가 피아노를 쳐봤어야지요? 한 번도 쳐보지 않는 피아노를 어떻게 칩니까? 그러자 김성혜 사모님이 좀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음악 테스트를 마치고 나오는데 제 속으로 이런 탄식이 나왔습니다. “아이고, 떨어졌구나!” 그런데 나중에 최종 면접이 있었는데 면접관 교수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아- 영어 점수가 상당히 잘 나오셨군요.” 아- 그건 당연하잖아요. 제가 그래도 영문과 출신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서도 번역장교와 통역장교도 했잖아요.
그래서 결국 입학시험에 어떻게 되었나요? 예- 떨어졌습니다. 아니 왜요? 면접관이 말씀합니다. “아직까지 만 27세가 안되셨는데 여기 신학원 자격 조건은 만 27세부터입니다. 그러니 내년에 다시 오시지요?” 그래서 결국 일 년을 재수해서 그 다음 해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암튼 주의 종이 되다 보니까 이런 저런 멍에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목회한지 올해 38년째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저는 그래도 내가 세상 멍에를 메지 않고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즉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 믿지 않고 세상적으로 사는 것보다 인생이 좋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사도 바울도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겠느냐?”(고후 6:14)
농부가 밭이나 논을 갈기 위해 소에게 멍에를 메울 때 종종 두 마리를 엮어서 같이 멍에를 메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리가 혼자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보다 몇 배의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와 소가 아닌 소와 나귀를 묶어서 멍에를 메우면 소와 나귀가 힘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에 도리어 힘이 들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와 믿는 자가 같이 엮여서 일을 하다 보면 서로가 힘들 수 있습니다. 결혼 배우자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와 믿는 자가 결혼을 하다 보면 결국 신앙적인 면에서 의견 충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자칫 믿는 자가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적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고로 이런 면에서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참 기특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잘 못합니다. 어떤 때는 간단한 찬송가 한 곡을 배우는데도 백 번을 불러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 참! 힘듭니다. 제게는 아주 큰 멍에입니다. 그런데 성가대와 찬양팀 여러분들은 매주 새로운 곡을 부릅니다.
아- 이건 뭡니까? 더구나 성가대 지휘자님은 이 일을 거의 20년 이상을 하시고 있는데 이거는 뭡니까? 힘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도 멍에라면 멍에겠지요. 그런데 어때요? 주님이 주신 멍에니까 쉽습니까? 도리어 기쁩니까? 암튼 멍에라는 것은 속박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속박을 당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속박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주님의 멍에를 메는 자에게 마음의 쉼과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단의 무거운 멍에, 죄의 무거운 멍에, 저주의 나쁜 멍에를 벗겨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8:4 말씀입니다.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애급의 멍에를 꺾으리라.”(겔 30:18)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사 14:25)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멍에를 벗겨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각자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벼운 멍에를 지고 살면서 천국에 갈래? 아니면 주님을 떠나서 사단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다가 지옥에 끌려갈래? 여러분, 오늘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무슨 멍에가 더 쉽고 가벼운 멍엔지 잘 감이 오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목사님, 인생을 좀 더 살면서 나중에 결정하면 안 될까요?” 하고 말하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젊었을 때에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팽개치고 사단의 멍에를 지고 살다가 어느덧 뒤돌아보면 그만 인생이 허무하게 많이 지나간 것을 느끼며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그때 울면서 이런 찬송을 부를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새찬송가 272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새찬송가 280장) 다행히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도 주님께 나와서 주님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들의 인생은 쉽고 가볍습니다. 주님이 그때마다 안식과 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28:47-48 말씀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어서 복 받고 배부르고 등 따뜻할 때에 그만 신앙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믿어도 마지못해서 믿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주신 축복이 사라지고 다시 저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침략을 당하고 그들이 너에게 무거운 철 멍에, 노예의 멍에를 씌운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들의 평생 숙제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멍에를 즐겁게 지고 가는 겁니다. 끝까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단의 나쁜 멍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벗겨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좋은 멍에,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고 기쁘고 즐겁게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