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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운틴 9월호에 산서(山書)에 관한 기사 보고 책을 구입했는데 좋은글 있어서 올립니다..
언제나 첫 번째 하늘
서부 이탈리아의 수도 토리노에는 국립산악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세계 유수의 등반가들이 그들의 장비를 전시하는 진열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예지 쿠쿠츠카((Jeizy Kukuczka,1948~1989)의 진열장은 라인홀트 메스너의 그것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봉우리 14개를 모두 오른 두 사람의 장비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예지 쿠쿠츠카는 1989년에 죽었다. 그래서 여기에 진열된 장비들은 흔히 그의 유품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진열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생전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일단 쿠쿠츠카가 진열에 동의하자 이탈리아에 있는 세계적인 등반회사 세 곳으로부터 귀가 솔깃해질 만한 제한이 왔다. 자기네 회사의 장비를 쿠쿠츠카의 것으로 진열해주면, 앞으로 그가 원하는 모든 장비들을 무상으로 제공해주겠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뭐요? 속임수요?"
쿠쿠츠카는 즉각 되받아쳤다.
" 그런 장비들을 진열해 놓으면 관람객들은 내가 날 때부터 '스카르파'의 등산화를 신고, '바일로'의 셔츠를 입고, '캠프'의 피켈을 사용햇었다고 속을 것 아니요?"
스폰서를 자처한 장비회사들의 상술과 가난하되 오만한 쿠쿠츠카의 알피니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다. 결국 장비회사들은 쿠쿠츠카의 항변을 받아들엿다. 진열문제와 관련된 제안은 없던일도 하는 대신, 앞으로 장비를 무상으로 공급해주며, 쿠쿠츠카는 그것들을 사용한 결과 내구력과 저항력,그리고 합목적성에 대한 관찰과 의견을 제공해주기로 한 것이다. 결국 박물관에는 쿠쿠츠카가 실제로 사용했었던 장비들이 진열되었다. 그 품목들이 가슴을 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계대전 전으 작업보과 통넓은 프란넬바지, 그리고 그가 손으로 만든 하켄과 해머들.
이탈리아의 원로 등반가 월터 보나티는 (14번째 하늘에서)의 서두에 붙힌 헌사를 그 진열장을 둘러보고 나 감회로 마무리햇다.
"사람들은 유레크(에지 쿠쿠츠카의 애칭)가 14개의 8천미터급 고봉을 오를 때 썼던 장비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물건들이 있었다. 더욱 감동스러웠던 것은 오래 입어서 색이 바래고 해졌으며 유행에 뒤진 윈드쟈켓을 보았을 때였다. 구경하던 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인간이란 언제나 무엇보다도 값진 것' 이라고 말했다."
라인홀트 매스너와 벌인 극적인 히말라얀 레이스
라인홀트 매스터가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14봉을 모조리 오르겠다는 계획을 세상에 공표한 것은 1984년이엇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 이러한 계획을 공표한 필요조차 없었다. 1970년 이후 히말라야는 매스너의 독무대였고, 그 어떤 등반가도 감히 그와 견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가 없는 경쟁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뜻에서는 이러한 공표 자체가 경쟁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세계 등반계를 뒤흔든 매스너의 발표 당시 그와 더불어 '히말라야얀 레이스'를 벌일 수도 있을 극소수의 등반가들 중 한 명이 쿠쿠츠카다. 하지만 이 레이스는 출발점부터가 달랏다. 발표당시 매스너는 이미 9개의 등정을 마친 상태였는데 반해 쿠쿠츠카는 고작 5개를 올랐을 뿐이다. 만약 쿠쿠츠카가 매스너으 발표 즉시 이 레이스에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쿠쿠츠카는 메스너의 발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이태전에 오른 브로드피크로 또 다시 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 무렵 나는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함게 등반중이었고 그의 명려을 듣는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 계획은 주로 보이테크가 밀고가던터라 나로서는 이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엇다. 세계 최고보인 14봉을 목표로 삼고 경쟁한다는 것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스터는 이미 그 자신으 네임 밸류 name value 혹은 크레딧 credit 만으로도 만으로도 마음대로 원정대를 조직할 수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쿠쿠츠카는 여전히 후진국 출신의 무명등반가였을 뿐이다. 이 후로도 메스너는 출곧 단독 선두를 지켰다. 그리고는 1985년 10월, 프랑스의 등반전문지(버티컬)의 주선으로 티롤에 있는 자신의 고성古城에서 '세계 정상인summiter들의' 을 개최했을 때 또 한번의 폭탄 선언으로 등반계를 놀라게 했다.
"경쟁은 그만둡시다. 새로운 루트, 기록과 정상 높이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습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무대로 여긴다는 매스너 특유의 '존재등반론'이 제창된 것으로 볼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무서운 속도로 추적해오는 쿠쿠츠카의 존재에 대하여 부담스러워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쿠쿠츠가는 당시 이 모임의 초청자을 받지 못했다. 참가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누군가 쿠쿠츠카에 대해서 묻자 메스너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세계 정상인들의 만남 당시 메스너는 12개봉을 올랐고 쿠쿠츠카는 9개봉을 올랐다. 하지만 불붙기 시작한 가속도를 염두에 둔다면 쿠쿠츠카의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엇다고 볼 수 있다. 쿠쿠츠카는 1985년 한해에만도 다올라기리,초오유,낭가파르밧 등 3개의 8천미터봉을 올랐던 것이다. 덕분에 메스너의 경쟁포기선언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레이스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결국 메스너였다. 1986년 1016일,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 잇던 로체의 정상에 오름으로써 세계 등반사에 지울수 없는 대기록을 남긴다.
쿠쿠츠카는 그보다 약 1년 뒤인 1987년 9월18일, 시샤팡마의 정상에 섬으로써 8천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른 두 번째 등반가가 된다. 경쟁이 일단락되면 승자는 너그러워지기 마련이다. 메스너는 쿠쿠츠카에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보냈다.
"당신은 제2인자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
쿠쿠츠카는 그러나 이렇게 반문한다.
" 여러분 가운데 에베레스트를 두 번째로 오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 있습니까?"
말문이 막힌다. 나는 에베레스트 재등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자료를 뒤적여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관심의 밖으로 밀려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지 쿠쿠츠카라는 이름은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왜일까? 우리는 그를 8천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른 두 번째 등반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는 독보적인 인간이요 절대적인 등반가였다. 그런 예지 쿠쿠츠카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저서가 (14번째 하늘에서)다.
독보적인 등반가와 나눈 비판적 인터뷰
(14 번째 하늘에서)는 폴란드에서 출간된 예지 쿠쿠츠카의 유일한 저서다. 하지만 사망 직후에 편집된 유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보니 체계적인 서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가 남긴 등반일기 및 보고서가 부분적으로 인용되는 가운데 폴란드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토마츠 말라노브스키와의 인터뷰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글이 아닌 말로 이루어진 책인 까닭에 쿠쿠츠카의 생생한 육성을 여과없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 이전까지 쿠쿠츠카는 온갖 악성루머에 시달려 왔다. 가령 그가 메스너와의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무모한 등반으 일삼아왔다거나, 이기적이고 독단저인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동행한 자일 파티들에게 고통과 불해을 안겨주었다는 식이다. (14번째 하늘에서)를 읽고 나면 이 모든 억측들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들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가 처해 잇엇던 악조건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나가면서 가슴이 짠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예지 쿠쿠츠카는 동유럽의 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의 한 공업도시인 카토비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환경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몇 개의 자격증을 획득한 그가 죽을 때까지 가졌던 직업은 슐레지엔 광산의 전기 기술자였다. 평생토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산에 가는 이유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카토비츠의 매연과 득실거리는 사람들의 무리. 그리고 거리의 소음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도 나는 원칙적으로 그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는데, 다만 더
멀리 더 높이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등반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들어가던 청춘시절을 들여다 보면 후진국의 가난한 등반가가 겪어야만 했던 웃지 못할 해프닝을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안전한 외제 카라비너를 얻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꿈이었기에 그는 소방대에서 쓰던 무겁고 불편한 무쇠고리에 목숨을 내맡겨야 했다. 아이젠마져 동네의 주물공장에 부탁해서 얼렁뚱당 만들어 썼는데, 그 주재료가 폐기물질이었던 까닭에 등반을 시작하기도 전에 몽땅 내버려만 했다. 어쩌다가 피켈이라도 잃어버리면 공산당의 조사위원회로 끌려가 '심문' 을 받고 '범행'을 자백해야 한다. 피켈 자체가 희귀품목이라 클럽의 정식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까닭이다.
돌로미테는 그들에게 천국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진짜 장비를 볼 수 있는 꿈의 나라'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돌로미테에 가서 서구의 부유한 클라이머들이 버리고 간 하켄과 카라비너를 '회수' 해올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노라고 회상한다. 해외고산원정에 나서고부터는 카트만두가 '꿈의 나라'로 떠올랐다. 서방 원정대가 버리고 간 중고장비들을 반값에 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폴란드 원정대는 '거지떼'나 다름 없었다. 이런 조건 하에서 메스너와 경재을 벌인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나의 기회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그 가능성은 100분의 1이라는 것이 명백한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메스너 편이고, 지금까지 그가 도달하엿던 목표와 그의 경험 그리고
스타일 스폰서와 경제적 수단 등 모두을 지지하고 있다."
쿠쿠츠카는 그래서 메스너와는 다른 방식의 알피니즘을 추구했다.
" 만일 히말라야 8천미터급 고봉 완등의 초등자가 못된다면,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루트로 사람의 발자국이 나지 않은 기로 정복해서 초등자가 되고 싶었다."
쿠쿠츠카가 메스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끔찍한 악조건은 그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미답의 길을 걷게 했다. 이제 8천미터급 등반은 완등한 봉우리 수로 평가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어떤 루트를 선택해 올랐느냐다. 쿠쿠츠카는 메스너가 선택한 루트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매스너가 16년에 걸쳐서 기록을 단 8년 만에 해치우면서도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해낸 것이다. 그 처절한 등반 과정 하나 하나가 이 책 (14번째 하늘에서)에 실려 있다. 알피니즘에 다소 무지한 듯한 인터뷰어 토마츠 말라노브스키가 던지는 비판적 질문은 오히려 좋은 자극제다. 예지 쿠쿠츠카가 항변하듯 토해내는 사자후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한국원정대와는 유난히 깊었던 인연
예지 쿠쿠츠카의 존재를 세계 등반계에 알린 것은 1981년의 마칼루 등정이다. 이때 그는 홀로 마칼루 라에서 베리에이션 루트를 개척해 서북릉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 단독등정은 등정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4번째 하늘에서)에 따르면 파렴치한 정부연락장교의 행패 때문이다. 서방원정대와는 달리 어떠한 "떡고물'도 줄 여력이 없었던 쿠쿠츠카의 원정대에게 불만을 품은 정부연락장교가 등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뻗댄 것이다.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등정시비를 깨끗이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한국산악회 마칼루원정대의 허영호다. 허영호는 정확히 8개월 후 그곳 정상에 올라 쿠쿠츠카가 놓고 왔다고 주장한 마스코트 장난감을 가지고 내려왔다. 카트만드에서 구입한 그 마스코트 장남감은 무당벌레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쿠쿠츠카나 허영호 모두 무당벌레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몰라 속을 썩였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허영호가 보낸 사신(私信)이 실려 있는데 그는 여기서 이 무당벌레를 '거북이 장난감(빨강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986년의 K2 등정 때도 그는 한국원정대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정상 등정에 성공한 다음 하산 과정에서 거의 조난지경에 이르렀다가 6800미터 지점에서 한국원정대에 의하여 구출된 것이다. 당시 원정대장이었던 김병준이 쓴 (K2-죽음을 부르는 산)(평화출판사,1987)에는 이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실려 있다.
쿠쿠츠카의 등반스타일은 흔히 '알파인 스타일의 히말라야니즘' 이라고 불린다. 일단 고소적응에 성공하면 최종공격은 알파인 스타일로 해치우는 것이다. 단독 등반이 아니라 자일 파티를 짜는 경우에도 자일 한 동이면 족하고 텐트는 휴대한지 않는다. 게다가 앞서 지적했듯 등반시기나 등반루트도 전혀 새로운 것으로 선택한다. 한 마디로 말해 히말랴야의 8천미터급 봉우리에서 알프스에서나 통할듯한 머메리즘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14번째 하늘에서)를 통해 그가 오른 8천미터급 14봉을 확인해 보노라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첫 번째 도전이었던 로체를 노멀루트로 등정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다 새로운 시도였다. 쿠쿠츠카는 에베레스트, 가셔브룸1, 가셔브룸2, 브로드피크, 낭가파르밧, K2, 마나슬루, 시샤팡마를 새로운 루트로 개척 등반했다. 마칼루는 단독 등반이었다. 게다가 그는 메스너가 한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없는 동계 등반으로 다울라기리, 초오유, 캉첸준가, 안나푸르나를 올랐다. 이 중 초오유와 캉첸준가는 동계초등이다.
마지막으로 오른 시샤팡마에서 본 하늘을 그는 '14번째 하늘' 이라고 부렀다. 그리고는 이태 후 로체 남벽에서 세상을 떠나며 이 책 (14번째 하늘에서)를 우리에게 남겼다. 하지만 하늘에 등수를 매기고 순번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가 메스너의 뒤를 잇는 2인자가 아닐라 그 자체로서 독보적인 등반가였듯, 그가 전인미답의 등반을 통해 올려다본 하늘은 ' 언제나 첫 번째 하늘' 이었을 뿐이다.
예지 쿠쿠츠카는 이 땅에서 41년 7개월을 살다 갔다. 그것은 과연 짧은 세월이었을까? (14번째 하늘에서)를 읽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평생토록 매달린 등반활동을 이렇게 한마디로 압축했다.
"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 높은 곳에서는 한 달
사이에 체험한다.""
첫댓글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참 좋은 책입니다...강추!~..... 예지 쿠쿠츠카의 글을 보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생각납니다.고산등정시 느끼는 인간의 본능,내면,아무 생각없는 마음--무념,오르는 몸짓....14번째 하늘 말고...15번째 하늘은 다른 곳입니다..
읽는 동안 짜릿한 마음을 억누를수가 없을듯.... 산이 아닌 우리 인생의 삶속에서도 이러한 도전을 할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좋은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자주 올려주세요.^^
예~~ 고맙습니다.^^*